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59
59화 대마왕성에서의 저녁 식사 (1)
아르칸은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씻었다.
처음이었다면 민망하고 어색했지만, 블랙마켓에서 서비스를 받아 본 덕분에 하인들은 딱히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그 후, 마왕이 되기 전에 쓰고 있던 아르칸의 방 중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는 서재로 들어왔다.
‘서재라고는 해도 책이 하나도 없는데?’
서재 안을 둘러본 아르칸은 황당했다.
책 이전에 방 안에 있는 거라고는 테이블과 소파 하나가 전부였다.
‘여기서 대체 뭘 한 거지?’
아르칸이 기억을 더듬어 보는데 평소와 달리 잘 떠오르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만 어른거렸다.
“오웬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오웬도 씻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피곤할 텐데 좀 쉬고 있지. 무슨 일로 찾아왔어?”
“이곳에 계신다고 들어서 걱정되어서 와 봤습니다.”
“걱정?”
“네. 아무래도 안 좋은 기억이 있으실 테니까요. 기억 안 나십니까?”
“왠지 모르게 기억이 잘 안 나네…….”
그 말에 오웬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아르칸이 충격이 커서 그 일을 기억에서 지운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근데 여기에는 왜 아무것도 없어?”
오웬은 주변을 둘러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바리스탄 님과 아네스 님이 가져다 놓은 책도 많고. 이런저런 장식도 많이 되어 있었지요.”
“그래? 그런데? 솔직히 말해 줘.”
“……아르칸 님이 책을 멀리하시고 장난친다고 어지럽히다 보니, 바리스탄 님이 화가 나셔서 다 치워 버리셨습니다.”
“끙.”
그 말을 듣자 그때의 광경이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노한 바리스탄의 기세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아르칸은 그 앞에서 엎드려 벌벌 떨었다.
근데 그 와중에 아르칸이 악을 쓰듯 외친 소리가 퍼뜩 떠올랐다.
-차라리 그냥 날 죽여! 이런 무능력하고 창피한 아들은 필요 없잖아!
그 말에 바리스탄은 움찔하더니 차가운 눈으로 아르칸을 노려보고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날 이후, 이 안에 있는 걸 모조리 치워 버린 거였다.
‘……내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었네.’
그 상태로 몇 개월을 보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바리스탄이 마지막 기회라며 마정석을 줬다.
그때 아르칸은 드물게 의욕을 보였었다.
마왕이 되어 권능을 얻으면, 그 힘으로 마왕성 랭킹에 올라 아버지가 무시 못 할 마왕이 되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막상 마왕이 되어서도 별다른 변화가 없자 권능은 없다고 착각해 좌절해 버린다.
거기다가 무서운 아버지도 없다 보니 막 나가기 시작한 거였다.
“뭐, 이제 옛날이니 마음에 둘 필요는 없겠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아르칸의 말에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시종이 찾아왔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된 거였다.
* * *
아르칸은 오웬과 헤어져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제일 상석에는 아네스가, 그 바로 좌측 자리에는 두 청년이 앉아 있었다.
‘저 둘이 브리카와 길렉이겠네.’
아네스에게 살랑거리며 이야기하고 있던 브리카, 길렉 형제는 아르칸이 온 걸 보고는 인상을 쓰며 나무랐다.
“늦었구나. 빨리 좀 다니거라.”
“그래, 왜 이리 굼떠?”
그러자 아네스가 아르칸을 감쌌다.
“아르칸은 이제 도착해서 씻고 왔잖니. 아직 음식도 다 안 나왔고. 괜찮으니까 아르칸은 어서 앉거라.”
아르칸은 그 말에 형제의 맞은편으로 가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머.”
“흐, 흥. 인제 와서 예의 바른 척하는 거냐.”
“웃. 어이가 없네.”
아네스부터 브리카, 길렉 모두 아르칸이 이런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깜짝 놀란 듯했다.
그러나 아르칸은 여기까지 와서 형제와 다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당장 자신을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전의 아르칸을 기억해서 하는 행동.
무엇보다 비록 빙의된 몸이라고는 해도 처음으로 가족이 생긴 것인 만큼, 될 수 있으면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물론, 선을 넘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때 집사가 와서 알렸다.
“주인님은 예정보다 조금 늦으신다며,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이런 좋은 날에는 좀 쉬지. 하는 수 없지. 먼저 먹자꾸나.”
그때 브리카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어머니, 저희는 좀 더 기다려도 됩니다.”
“아니야, 먼저 먹자. 음식 다 식겠다.”
아네스는 아예 포크로 작은 과일을 하나 입에 넣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브리카도 따라 포크를 들면서도 아쉬워했다.
“치, 아버지 앞에서 아르칸의 잘못들을 밝히려고 했는데…….”
“형, 어쩌지?”
“상관없어. 어차피 아버지는 아르칸을 탐탁지 않게 여기시니까. ”
“흐흐, 엄마한테만 찍히게 만들면 되겠구나.”
브리카와 길렉이 서로 속삭이며 자기네들끼리 낄낄댔다.
한편 아네스는 아르칸 쪽으로 몸을 바짝 내민 채 연신 말을 걸었다.
“네 마왕성이 여러 차례 공격을 당했다고 들었다. 괜찮은 거니? 걱정이 많이 되는구나. 네 아비는 분명 외딴곳이라 공격이 드물 거라고 했는데…….”
그 말에 브리칸이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어떤 것들이 감히 아르칸 마왕성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복수다! 당장 가서 때려 부수자!”
길렉까지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자 아르칸이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이미 다 막아 냈으니 괜찮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응징해야 다시는 우습게 보지 않는다. 근데 어떤 녀석이 쳐들어온 거냐? 처음부터 말해 보아라.”
“처음에는 고블린이 쳐들어왔죠.”
“풋.”
아르칸의 대답에 길렉이 비웃었다.
브리카도 알고서 물어봤던 것.
그러나 모르는 척 되물었다.
“정말이냐? 고블린이 온 걸 침공이라고 할 수 있느냐.”
사실 아르칸 마왕성이 취약한 상황이라 위기였지, 보통의 마왕성에서는 별거 아닌 건 맞았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난 또 뭐라고. 그래, 또 어디서 쳐들어왔나?”
“제니칼 파벌의 수인족들이 쳐들어왔었습니다.”
“수인족이라면 위험한 족속들 아니냐. 그래서 어떻게 막았느냐?”
“마왕성 안에서 헤매게 만들어 지쳐 나가떨어지게 했습니다.”
“아아, 그냥 틀어박혀 있었나 보네.”
그렇게 운을 띄운 브리카는 오크들의 장례를 도와주는 이상한 사업을 한다고 비꼬았다.
그 이후에도 마왕 차르메인과 마왕 자렐토가 침공해 온 것도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폄하했다.
틀린 말은 아닌 게, 그래도 마왕성 랭킹에 말석이나마 들어간 브리카와 길렉으로서는 별거 아니긴 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잘 알다니, 어지간히도 관심이 많은가 보네.’
아르칸이 뜻밖의 지점에 놀라는 와중에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정말 고생이 많았구나. 그렇게 여러 곳에서 공격해 왔다니…….”
“칫.”
브리카는 혀를 찼다.
괜히 아르칸이 어머니의 동정심만 얻게 해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그보다 여기까지 오면서 아주 소란을 피웠더라.”
“소란이라니, 무슨 소란 말이냐?”
“어머니, 아르칸이 제 마왕성의 마족을 폭행했다지 뭡니까. 뭐가 거슬렸는지는 모르지만, 내 체면도 있는데 너무한 일 아닙니까?”
“맞아. 너무해.”
길렉까지 거들자 아네스가 놀란 눈으로 아르칸을 쳐다봤다.
“그게 사실이냐? 브리카 마왕성의 마족에게 해코지한 거야?”
“그게…….”
아르칸이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하려고 할 때 시종이 말했다.
“주인님이 들어오십니다.”
“하필이면 지금…….”
길렉이 아쉬워했다.
한창 아르칸의 잘못을 어머니께 일러바치는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리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동생을 달랬다.
“아니야, 마침 잘됐어. 아버지도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 분명 아르칸에게 한 소리 하실 테니까.”
“다들 식사는 맛있게 하고 있나?”
어느새 나타난 바리스탄의 말에 브리카와 길렉이 움찔했다.
바리스탄은 화염이 치솟듯 멋대로 뻗친 붉은 머리에, 체구도 커 여러 겹의 옷 위로도 건장한 육체가 드러나 보였다.
무엇보다 이글거리는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들을 쳐다보면 겁이 나고 오금이 저렸다.
그때 아네스가 핀잔을 줬다.
“아니, 늦게 와 놓고는 왜 큰소리예요. 어서 앉으세요.”
“아, 미안.”
아네스에게만은 약한 바리스탄은 멋쩍어하면서 아네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르칸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버지, 오랜만에 뵙는데도 무탈하신 거 같아 참으로 기쁩니다.”
예상 밖의 모습에 바리스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마음을 고쳐먹어 언행이 많이 달라졌다더니 오웬의 말이 사실이었군.”
동시에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걸 본 아르칸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무작정 아르칸을 싫어하는 건 아니네.’
빙의 전 아르칸은 아버지, 바리스탄에게 너무 겁먹은 나머지 싫어하는 기억만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아르칸이 못나게 군 결과일 뿐.
용사에게 살해당한 후 바리스탄이 어떻게 했는지 알면 마냥 싫어할 수만은 없었다.
바리스탄은 아르칸이 용사에게 살해당한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복수하겠다고 나섰다.
결과적으로 패배해 사망했지만, 밀리는 와중에도 원수를 두고 등을 돌릴 수 없다며 필사적으로 싸웠다.
따지고 보면 아르칸 때문에 바리스탄뿐만이 아니라 오웬부터, 센시아까지.
아르칸을 아끼던 사람들이 많이도 죽어 나간 셈이었다.
자리에 앉은 바리스탄은 문득 사랑하는 아내의 표정이 어두운 걸 보고 의아했다.
오랜만에 아르칸의 얼굴을 봤으니 기뻐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었기 때문이다.
“표정이 안 좋군. 무슨 일 있나?”
“그게…….”
아네스가 차마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있을 때, 브리카가 냉큼 나섰다.
“아르칸이 사고 친 걸 들으시고는 언짢으셔서 그런가 봅니다.”
“사고를 쳤다고?”
“네. 마족 할포 기억하시죠? 예전에 아버지를 수행했던 제 부하입니다. 그런데 아르칸이 이곳으로 오는 길에 할포를 폭행했답니다.”
“폭행?”
바리스탄이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주변이 서늘해졌다. 이 일대의 모든 열기가 바리스탄에게 모인 탓이었다.
냉랭한 분위기에 브리카와 길렉은 겁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르칸이 곤경에 처할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꼴 보기 싫다고 내쫓으실지도 모르지.”
“그랬으면 좋겠네.”
아버지가 어떻게 아르칸을 나무랄까 두근거리며 기대하는 와중에 드디어 바리스탄이 입을 열었다.
“실망이구나.”
‘후훗, 역시 아르칸에게 실망하셨나.’
그러나 바리스탄의 매서운 눈은 아르칸이 아니라, 브리카에게 향했다.
“어?”
“브리카, 이 아비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다르게 알고 있다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네 영역에서 네 부하가 도적 떼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는구나. 아르칸이 그 도적 떼에게 공격당하는 주민을 구해 줬더니 도리어 네 부하가 도적 떼와 손을 잡고 공격했다고 한다.”
“제, 제 부하가 도적 떼와 손을 잡고…….”
충격적인 사실에 브리카의 전신이 떨렸다.
“다행히 아르칸이 도적 떼를 물리치고 네 부하는 잡아서 마왕성에 넘겼다고 한다. 네 부하니까 네가 알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니까 말이야.”
브리카의 부하들의 브리카가 화내는 게 두려워 두루뭉술하게 보고한 것 때문에 오해한 거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리스탄은 길렉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네 영역에서 거대 거미가 나왔다는 보고를 받았느냐?”
“어, 받긴 했습니다만. 나중에 돌아가서 퇴치하려고요.”
“그럴 필요 없다. 아르칸이 거대 거미의 습격을 받은 마을을 지켜 내고, 수백 마리가 넘게 모인 거대 거미의 둥지를 박살 냈다고 하는구나.”
“아르칸이요? 그럴 리가…….”
“금방 보고가 들어와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동생을 탓하기 전에 너희 둘 다 영역 관리에 실패한 걸 부끄러워하도록.”
“…….”
“…….”
브리카와 길렉은 고개 숙인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바리스탄은 이제 둘에게 볼일 없다는 듯 아르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르칸, 그동안 많이 방황했다 들었는데, 이제 마왕이라고 칭해도 창피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구나.”
그렇게 말한 바리스탄은 왠지 모르게 살짝 뜸을 들이더니 한마디 더 했다.
“장하다.”
‘장하다니…….’
아르칸은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평생 아버지한테 들을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던 소리였다.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