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61
61화 고룡의 둥지 (1)
아르칸은 금방 이 상황을 납득하고는 진정했다.
의식이 아예 없었다면 아르칸이 원할 때마다 기억을 편하게 떠올릴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
문제는 자신의 몸을 뺏긴 아르칸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거였다.
‘화내려나?’
정작 영혼석에서 나온 말은 아르칸의 걱정과 정반대였다.
-……뭐, 잘했어.
“잘했다니?”
-부모님이 감탄하고 그 재수 없는 형들 얼굴 구기게 만든 거 말이야. 나였다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거야.
‘사실이긴 하지.’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빙의 전 아르칸이 앞에 있다면 쥐어박고 싶었을 때도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건지 기억해?”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다가 눈을 뜨니까 내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더군. 안 그래도 다 귀찮아졌던 참이라 가만있었지.
‘다 귀찮아졌다고?’
또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꾹 참고 물었다.
“네 몸을 뺏긴 셈인데, 화 안 났어?”
-글쎄, 어차피 곧 죽을 운명이었다며? 그 용사란 녀석한테.
“그것도 알고 있어?”
-그래, 나도 네 기억을 볼 수 있더라고. 우리 세계의 이야기가 다른 차원에서 소설로 읽히다니 신기하더군.
‘남의 일처럼 이야기하다니…….’
영혼석 속 아르칸은 초탈한 듯 보였다.
심지어.
-네 개입 때문에 운명이 바뀌고, 그 덕택에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 거라면 지금 수명은 네가 얻은 거나 마찬가지 아니야? 나 신경 쓰지 말고 마음대로 살아.
“그래도 괜찮아?”
-어어, 괜찮아. 괜찮아.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한 영혼석 속 아르칸은 무심하게 덧붙였다.
-엄마, 아빠도 그편이 나을 테고.
“너는 섭섭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너희 부모님은 너를 사랑하셔.”
-알고 있어, 그 정도쯤은.
내뱉듯이 말한 영혼석 속 아르칸은 나직이 투덜거렸다.
-나 참, 그렇게 엄한 아버지가 나를 위해 복수하려고 나서다니. 너무해. 이러면 원망도 못 하잖아.
“괜히 부모님을 원망 안 해도 되니 좋지 않아?”
-그만해. 내 생각이 못났다는 거 잘 아니까. 널 보니 내가 진짜 못나게 살았다는 걸 알겠더라. 맞다, 그건 좀 웃겼다.
“뭐가?”
-지금부터 마왕 아르칸으로 살아 보는 거야! 이렇게 다짐한 거 말이야.
“으악!”
아르칸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손으로 감쌌다.
처음 빙의됐을 때 했던 다짐을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로 들으니 너무 창피했다.
‘아르칸의 의식이 남아 있는 줄 알면 안 그랬지.’
-어쨌든 난 아무 미련 없어. 내 몸을 되찾는다고 해도 다시 망쳐 버릴 테니까. 오히려 몸이 없다면 아무것도 망칠 일은 없지 않겠어?
모든 걸 내려놓았는지 완전히 자포한 듯했다.
그러더니 문득 슬픈 어투로 말했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구하고 마신이 되려면 네가 낫겠지.
나름대로 지금 처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였다.
그 마음을 느낀 아르칸은 자신 또한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실망할 일은 없을 거야.”
-그동안 나는 여기에 편하게 지내지 뭐. 그 어디냐, 버네르가의 아공간 주머니 안이 좋아 보이던데.
“그러지.”
딱히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그때였다.
쩌저적.
뭔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길래 확인했더니 영혼석에 금이 가 있었다.
심지어 계속해서 그 금은 거미줄처럼 빠르게 늘어났다.
“이거 왜 이러지?”
아르칸은 얼른 게티아로 확인했다가 깜짝 놀랐다.
“영혼석이 붕괴 중이라고?”
순간적으로 영혼석으로 끌려갔던 의식이 다시 아르칸의 몸으로 끌려오기 때문이란다.
신체는 여전히 살아 있어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면 다시 몸 안으로 들어오는 건가?”
-그건 아닐 거 같은데. 뭔가 내 정신이 갈가리 찢기는 느낌이야.
게티아로 확인해 보니 정말이었다.
영혼석의 갈라진 틈으로 의식이 빠져나오면서 찢기고 있었다.
그 결과 기억의 파편은 남을지는 모르지만, 아르칸으로서의 자아는 완전히 사라지는 거였다.
“이대로라면 네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
-그런가.
놀란 아르칸과 달리, 영혼석 속 아르칸은 의외로 담담했다.
영혼석의 표면은 어느새 금이 빼곡했다.
언제 박살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이제 정말 끝인가 보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한다.
“뭔데?”
-부모님께 좋은 아들이 되어 줘, 지금처럼.
“알았어.”
-고맙다.
아르칸은 영혼석 속 아르칸이 왠지 웃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알았다는 한마디였지만, 대답에 만족한 것 같았다.
그러나 영혼석 속 아르칸이 문득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맞다, 형들을 너무 미워하지 마. 형들이 그러는 건 나 때문이니까.
“알고 있다. 그래도 네 피를 나눈 형제니까.”
-그런가. 역시 넌 괜찮은 녀석…….
영혼석 속 아르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영혼석이 기어코 산산조각이 나 버린 거였다.
동시에 의식도 완전히 사라졌다.
아르칸은 바닥에 널브러진 영혼석의 파편을 바라봤다.
“평안히 잠들길.”
아르칸은 이 몸의 원래 의식의 안식을 바랐다.
못된 짓, 망나니짓으로 남에게 피해를 많이 주긴 했지만, 그래도 최후에는 부모와 형제의 안녕을 바란 거였다.
그날 아르칸은 사라진 아르칸의 원래 의식을 생각하느라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 * *
다음 날 아침.
아르칸이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는데, 오웬이 찾아왔다.
오웬은 아르칸을 보자마자 대번에 눈치채고는 물었다.
“혹시 밤새우셨습니까?”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음, 바리스탄 님께서 부르셔서 모시러 왔습니다만. 아무래도 오늘은 수면 부족이라 체력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알려야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 있어? 나는 멀쩡한데.”
마력이 3성급으로 오른 후로 체력에는 자신 있었다.
실제로 여기까지 오는 동안 험한 길을 지날 때도 거뜬했다.
“듣기로는 바리스탄 님께서 자식들을 시험하기 위한 임무를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르칸 님께서 최선의 상태가 아니시니, 하루만 더 미루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어제 막 도착했으니 충분히 이해해 주실 겁니다.”
“아니야. 괜찮아. 오히려 잘됐어.”
머리가 복잡할 때는 차라리 움직이는 게 나았다.
아르칸은 괜한 말을 할까 봐 오웬더러 따로 볼일이나 보라고 하고 혼자 움직였다.
아버지가 나오라고 한 곳은 저택 뒤편의 훈련장.
아버지와 두 형은 이미 나와 있었다.
“아버지를 기다리게 하다니. 빨리빨리 좀 다녀라.”
“맞아. 왜 이리 늦었어?”
“그만들 해라. 딱히 늦은 것도 아니니까.”
브리카와 길렉이 나무라자 바리스탄이 먼저 나서서 막았다.
아르칸은 토를 다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 말썽꾸러기가 순순히 사과하는 모습에 두 형은 할 말을 잃었다. 그걸 본 바리스탄은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평소의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아네스의 생일잔치까지 며칠 남았으니 너희에게 과제를 주려고 한다. 최근 전략적 요충지에 새로운 마왕성을 개척하려다가 드래곤의 둥지를 찾았다.”
“드래곤의 둥지요?”
“헉, 대단해!”
브리카와 길렉이 감탄했다.
뭔가 임무를 맡길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드래곤의 둥지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듯했다.
아르칸도 놀라는 한편으로 문득 저번에 마룡 크세트카흐의 둥지를 살펴보라는 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짐작대로 바리스탄은 마룡 크세트카흐의 둥지를 언급했다.
“내부에는 몇 가지 보물과 몬스터 외에는 쓸 만한 게 없었다. 그러나 예전에 아르칸이 마룡의 둥지에서 찾은 것처럼 숨겨진 장소가 있을 거라 짐작된다.”
“숨겨진 장소라, 마룡의 보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보물 창고?? 기대돼!”
쓸 만한 게 없었다는 소리에 실망했던 브리카와 길렉은 이내 흥분했다.
“말했다시피 그곳은 전략적 요충지라 둥지를 없애고 마왕성으로 바꿀 예정이다. 그전에 너희가 가서 숨겨진 장소를 찾아보거라.”
“알겠습니다.”
“반드시 찾을게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차례대로 대답하는 자식들을 보며 바리스탄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숨겨진 장소를 찾으면 내가 너희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상이라는 말에 브리카가 대뜸 물었다.
“혹시 저희가 힘을 합쳐서 찾아야 합니까? 아니면 경쟁해서 먼저 찾는 쪽이 상을 받는 겁니까?”
“흠,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
바리스탄은 실망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형제들이 힘을 합치리라 기대했는데, 저런 질문을 한다는 것부터가 따로 움직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어서였다.
“들었지? 이번에야말로 우리 힘을 보여 주자.”
“물론이지, 형.”
바리스탄의 표정을 읽은 아르칸은 의욕 넘치는 형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뭐, 적어도 저 둘은 협력하니까 다행인가.’
“그럼 이동문을 열겠다.”
바리스탄은 바로 옆에 보이는 원형의 석재 구조물 앞에 섰다.
‘저게 이동문이로군.’
소설에서 종종 언급될 때마다 궁금했었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아르칸의 기억 속에도 없었다.
‘왜 없지?’
그사이 바리스탄은 이동문에 손을 대고 마력을 발산했다.
이동문 안에서 신비로운 빛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내부에 새겨진 전이 마법이 발동한 것.
그 소용돌이를 통과하면 다른 이동문 너머로 순간 이동 하게 된다.
“어서 가거라. 네 어미가 알면 난리 날 테니.”
바리스탄의 말에 브리카와 길렉이 웃음을 참으며 이동문으로 들어갔다.
아르칸도 들어가려는데, 바리스탄이 한마디 했다.
“비슷한 곳을 한 번 탐험한 적이 있을 테니, 그 경험을 살리면 도움이 될 거다.”
아무래도 아르칸더러 마룡 크세트카흐의 둥지를 살펴보라고 한 것도, 이 일을 염두에 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자란 자식이 활약할 수 있도록 경험을 쌓게 해 준 거였다.
‘그 기대에 부응해 줘야 할 텐데.’
문제는 마룡 크세트카흐의 둥지는 소설에서 나와서 아르칸이 잘 알았지만, 지금 가는 드래곤의 둥지는 어떤 드래곤의 둥지인지조차 모른다는 거였다.
‘그래도 힘닿는 데까지 해 보는 수밖에.’
“무리할 필요는 없다. 무사히만 다녀오도록.”
아르칸의 망설임을 느꼈는지 바리스탄이 말했다.
다정한 배웅에 아르칸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이동문을 통과했다.
약간의 저항감이 끝난 뒤, 눈앞에 색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바로 모래투성이의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었다.
다행히 이 넓은 사막을 헤맬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의 부하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토피아스라고 합니다. 여러분을 드래곤의 둥지로 안내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막의 유목민처럼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전신을 덮는 얇은 로브를 입은 토피아스는 이곳의 책임자인 듯 대표로 나서서 친절한 미소로 맞아 줬다.
그래도 이마에 가늘지만 기다랗게 난 뿔은 그가 제법 강한 마력의 소유자라는 걸 알려 줬다.
“음, 토피아스인가. 잘 부탁한다. 그럼 어서 안내해 다오.”
“그래, 여기 너무 더워.”
“네, 곧바로 모시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브리카와 길렉의 말에 토피아스가 앞장섰다.
아르칸도 두 형제와 같이 그의 뒤를 따랐다.
‘사막이라면 그곳일 가능성이 있겠는데.’
잠깐 소설 속 내용을 떠올리는 사이, 지하로 내려가는 동굴에 들어왔다.
그 안은 놀랍게도 사막답지 않게 습하고 희미한 빛을 발하는 이끼로 덥혀 있었다.
“여긴 좀 살 만하군. 이곳이 드래곤의 둥지인가.”
“네. 몇 개의 탐험대가 이곳을 한참 뒤졌지만, 특별한 걸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아르칸이 나서서 친절하게 조언했다.
“제가 예전에 마룡의 둥지에서 숨겨진 장소를 찾았을 때는 비밀 장치를 건드렸더니 입구가 열렸습니다. 그냥 뒤질 게 아니라 비밀 장치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브리카가 피식 웃었다.
“운 좋게 비밀 장치를 찾은 거 가지고 잘난 척하는 거냐? 당연히 입구를 여는 비밀 장치가 어딘가 있겠지. 여긴 어디에 있는지 알아?”
“그건 잘…….”
아르칸이 말끝을 흐리자 브리카는 무시하고는 다시 토피아스에게 물었다.
“그보다 혹시 탐험하면서 그려 둔 지도는 있나?”
“물론 있습니다.”
토피아스와 대화하던 브리카는 지도를 건네받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걸 얻는 것만으로 아르칸보다 많이 앞섰다고 생각한 거였다.
“이야, 이 지도 있으면 금방 찾겠다.”
멍하니 있던 길렉도 지도를 보며 기뻐했다.
“그렇지. 이 지도의 외곽에서부터 수상한 게 없나 훑어보면 될 것 같다.”
지도를 펼쳐 보던 브리카는 가만히 있는 아르칸에게 말했다.
“아르칸, 여긴 우리끼리 찾아볼 테니까. 너는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아르칸이 대답하고 형제에게서 멀어지자 토피아스가 다가왔다.
“아르칸 님, 제가 내부를 안내해 드릴까요? 지도도 더 있습니다만.”
“아니, 괜찮아. 주변을 좀 살펴보고 올게.”
아르칸은 대답하고는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에서 아버지의 부하들이 만일을 대비해 따라오고 있었다.
“뭐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니까.”
아르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용아병을 꺼냈다.
“여긴 특이한 곳이군요.”
“혹시 어딘지 알겠어?”
“모르겠습니다. 아르칸 님이 새로운 주인이 되시기 전까지는 저택 밖으로 나온 게 처음이라서요.”
“그렇군.”
“그런데 왠지 그리운 기분이 느껴집니다. 앗!”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용아병은 깜짝 놀란 얼굴이 됐다.
“왜 그래?”
“저, 저기에…… 하지만…… 어째서…….”
아르칸이 물었지만, 용아병은 고장 난 기계처럼 벽을 보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저 벽에 뭔가 있어?”
아르칸이 벽을 만져 보려고 하자마자 벽이 모래처럼 흩어져 내렸다.
놀랍게도 그 벽 너머에는 용아병과 똑같은 모습의 용아병 여럿이 서 있었다.
그 용아병은 아르칸 용아병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놀란 거 없다, 동지여.”
“동지?”
“고룡 버네르가 님의 이빨에서 태어나 한마음 한뜻으로 그분을 모시니 동지라고 해도 충분하겠지.”
“너도 고룡 버네르가 님의 이빨에서 태어났다고?”
“그렇다. 우리는 버네르가 님의 종으로서 누구도 침입할 수 없도록 그분의 보금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그럼 여기는?”
“버네르가 님의 둥지다.”
옆에서 용아병들의 대화를 들은 아르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고룡 버네르가의 둥지였어.’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