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78
78화 아르칸의 정체 (1)
아르칸은 화들짝 놀란 엘리시아를 보고는 낭패한 얼굴이 됐다.
“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비밀이었는데.”
“미, 미안하다. 정체를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순간적으로 사과했던 용사는 금방 버럭 화냈다.
“아니지. 처음부터 거짓으로 정체를 숨긴 네 잘못이잖아.”
“무슨 소리야. 정체를 안 숨기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 그보다 조금만 빨리 오지.”
아르칸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랬다면 굳이 엘리시아를 신하로 삼지 않았다.
신하를 늘리는 건 여러모로 이득이 많지만, 성녀 후보생을 신하로 삼으면 여신이 화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여신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아르칸은 자신의 세계에서 읽던 소설의 작가에 의해 마왕의 몸에 빙의했다.
이런 불가해한 일은 역시 신의 개입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그 때문에 아르칸은 작가가 사실 이 세계의 신이 아닐까 추정한 적이 있었다.
용사를 소환한 이 세계의 신은 여신 셀레니아.
용사에게 강력한 힘과 전시안을 주며 마신을 퇴치하면 바라는 대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한다.
즉, 그렇다는 건 아르칸의 빙의에도 관여했는지도 몰랐다.
다만 물어보려고 해도 빙의한 뒤로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
소설에서도 여신은 용사를 소환할 때만 모습을 드러내 대화했다.
용사가 지상에 내려온 후로는 성녀를 통해 신탁이라는 형태로 의사를 표현할 뿐, 용사에게 접촉한 적이 없었다.
‘필요하면 어떻게든 연락해 오겠지. 다만 이 일로 화만 안 냈으면 좋겠네.’
아르칸이 걱정하는 건 소설에서 읽은 게 있어서였다.
여신은 필멸자가 어떻게 되든 크게 개의치 않지만, 성녀는 지극히 아꼈다.
성녀 후보생도 마찬가지.
용사가 구한 뒤에 망가진 후보생을 보고, 결사단에 최대한 고통스럽게 처형하라는 신탁을 내릴 정도였다.
‘젠장, 기왕 저질러 놓은 거 어쩌겠어. 아무리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해치진 않겠지.’
아르칸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때, 넋이 나갔었던 엘리시아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아르칸 님, 아르칸 님은 정말 마왕이신가요?”
“……그래, 끝까지 속일 생각이었는데 들켜서 미안해.”
“나 참, 말하는 것 좀 봐.”
아르칸의 말에 용사가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아르칸은 진심이었다.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 나서 상처 입는 이가 있을 바에는 철저히 숨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엘리시아는 여전히 안 믿기는 듯했다.
“하지만 분명 아르칸 님이 제게 넣어 주신 건…….”
“뭐?? 아르칸이 뭘 넣었다고?”
“야! 마력 말하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 마력을 주입하면 신성력으로 바뀌더라고.”
“오, 그런 게 가능해?”
용사가 관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혼자 싸우는 만큼, 강해지는 방법에는 관심이 많았다.
“가능해. 아무나 되는 건 아니지만.”
용사는 아르칸이 현대인이 빙의된 거라는 걸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성녀 후보생을 신하로 삼았다고 말하기에는 난감했다.
“그래? 아쉽군. 상성이라도 맞아야 하나.”
“저랑 아르칸 님 상성이 맞아서 그런 건가요?”
“어, 음. 비슷해…….”
아르칸은 진땀을 빼며 말을 얼버무렸다.
말하기 곤란한데 계속 물으니까 힘들었다.
다행히 저 뒤에서 낯선 목소리들이 들렸다.
“성녀님! 무사하십니까!”
“용사님!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저희 기사단도 도착했습니다.”
소설에서처럼 성기사들과 기사들이 한 박자 늦게 도착한 거였다.
아르칸과 용사는 엘리시아를 바라봤다.
이대로 엘리시아가 아르칸을 마왕이라고 폭로라도 하게 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아르칸이야 할루시네이션을 쓰고 탈출해 버리면 되지만, 용사는 곤란해진다.
끌려가서 마왕과 결탁했다고 처형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용사가 호구라도 가만히 앉아서 죽진 않겠지만.’
엘리시아는 생각이 많은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둘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일은 함구하겠습니다.”
“휴, 그래 주면 정말 좋겠군.”
“덕분에 살았어.”
용사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아르칸은 빙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에 엘리시아는 가슴이 두근거려 괜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래도 마왕인데. 이런 마음을 품어도 되는 거야?’
엘리시아는 혼란스러웠다.
그사이 아르칸은 피용과 용아병들을 다시 아공간 주머니에 쓸어 담듯 넣었고, 할루시네이션으로 아예 모습을 감췄다.
그 직후 성기사들과 여러 기사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용사와 엘리시아를 보며 감탄했다.
“성녀 후보생을 벌써 구하셨군요.”
“역시 용사님! 대단하십니다.”
“그, 그게 아니라…….”
용사는 오해를 풀려고 했지만, 아르칸도 모습을 감춘 마당에 딱히 증거를 보여 줄 수도 없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성기사들은 먼저 엘리시아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저희는 엘리시아 님을 모시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그편이 낫지. 치료와 휴식은 신전에서 하는 게 최고니까.’
용사의 대답에 아르칸도 동의했다.
“엘리시아 님, 저희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잠시 기도를 올리던 엘리시아는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인 후 성기사들의 뒤를 따랐다.
마왕인 아르칸에게 빠졌다는 죄책감에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이 상황이 여사제님과 성녀 후보생들끼리 돌려 보던 그 어떤 연애소설보다 비극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마왕과 상성이 맞다니…… 이건 운명이야.’
당장 아르칸이라는 이름과 마왕이라는 신분밖에 몰랐다. 연락할 도리도 없이 헤어지지만, 아쉽거나 걱정되지 않았다.
정말 이 애틋한 마음이 운명이라면 필연적으로 다시 만날 테니까.
잠시 여신님께 기도 올렸을 때도 별말씀이 없는 거로 봐서는 문제없는 게 분명했다.
한편 아르칸은 엘리시아가 간 걸 보고 용사에게 조용히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이, 바빠?”
“앞으로 바쁠 예정이지. 한동안 수도에 묶여 있잖아. 마왕을 못 벴더니 손이 근질근질하네.”
용사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꺾으며 우두둑 소리를 냈다.
“내 앞에서 그렇게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말아 줄래.”
“흥, 괜히 약한 척은. 그보다 무슨 용무냐? 또 누구 담가 줘?”
“담그다니……. 아, 그런 녀석이 하나 있긴 한데. 그보다 아, 소개해 줄 드워프가 있어서 그래.”
“드워프를 소개해?”
의외라는 듯 반문하는 용사에게 아르칸은 드워프 도린에 대해 설명했다.
도린은 선대 용사의 동료였던 드워프의 손자이며, 현 드워프 왕국의 왕자.
여기까지 들은 용사가 대뜸 물었다.
“그런 드워프를 네가 어떻게 알아?”
“아, 납치당한 걸 구해 줬거든.”
“납치??”
“전에 엘프가 납치됐던 토돌 백작의 성 알지? 거기에 납치되어 있었어.”
“음, 그래?”
용사는 더 묻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예전에 엘프 리트가 납치되었을 때도 못 구했는데.
또 다른 이종족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영주가 바뀌었다든가 할 말은 많지만, 당장 중요한 게 아니기에 아르칸은 다시 설명을 이어 갔다.
도린은 드워프 왕국의 부흥을 위해 왕국 밖으로 나와 오리할콘을 구해 용사의 무기를 만들어 주고, 그 동료가 되려고 한다고 말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진지한 이야기에 경청하던 용사가 입을 열었다.
“사정은 알겠지만, 뭐라고 해도 동료를 맞을 생각은 없는데?”
아르칸의 예상대로 용사는 곧바로 거절했다.
“나도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그 마음을 봐서 한번 이야기라도 해 봐.”
“음, 그렇게 하지. 잠시만 기다려.”
순순히 대답한 용사는 기사들 곁으로 가서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종이와 펜을 들고 뭔가를 써 두고는 돌아왔다.
“가자. 이번에 사고에 휘말린 마석열차에 탄 승객들은 조사와 치료한다고 모두 억류 중이라니, 거기로 가면 되겠다.”
“어, 그래.”
도린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했는데 마침 잘됐다.
***
도린은 수도 셀레스티아 외곽 신전에 있었는데, 예상대로 극진히 치료받고 있었다.
다만, 함께 탄 아르칸이 실종된 탓에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받고 있었다.
그래도 용사를 앞세우자 별다른 제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여어, 괜찮아?”
큰 상처는 없었음에도 안정과 조사 때문에 병실에 누워 있어야 했던 도린은 익숙한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짐작대로 할루시네이션을 풀고 모습을 드러낸 아르칸이 반가워하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 뻔뻔한 자식이 어떻게 이곳을…….”
“여기 용사 데려왔어.”
화를 내던 도린은 그 말에 멈칫했다. 그 뒤에 있던 용사가 멋쩍어하면서 앞으로 나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용사입니다.”
“앗!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드워프 왕국에서 온, 도린이라고 합니다.”
“…….”
“…….”
용사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고, 도린도 난데없이 나타난 용사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서야 하나.’
아르칸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도린, 왜 말이 없어. 오리할콘으로 무슨 무기 만들어 주면 좋을지 물어보고, 동료로 삼아 달라고 할 거라면서.”
“아, 응. 그럴 거야.”
“용사는 오기 전에 이미 나한테 이야기 들었잖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끙.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어.”
“저기 용사님……”
“어, 그러니까…….”
“…….”
“…….”
투덜거리던 도린과 용사는 이번에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다시 말문이 막혔다.
아르칸은 가슴을 쳤다.
“이런 답답할 때가. 도린, 용사는 혼자서 싸운다고 거절할 거거든. 그러니까 무슨 무기를 만들어 주면 좋을지나 물어봐.”
“아, 응.”
“용사, 너는 오리할콘 무기까지 거절하지는 말고. 최소한의 자존심은 세워 줘야 할 거 아니야.”
“……알았어.”
용사의 대답에 도린의 눈이 번뜩였다.
“어, 정말입니까?”
“제가 도린 님의 무장을 들고 싸워야 드워프 왕국에 도움이 된다면서요. 저도 더 강해지는데, 사양할 필요 없죠.”
“네,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용사의 말에 도린이 힘차게 대답했다.
아르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때? 내 도움에 이야기가 빨리 마무리됐지?”
용사와 도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아르칸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피식 웃으며 한마디씩 했다.
“그래. 네 덕분에 이 어색한 자리가 빨리 마무리됐네.”
“나도 원하는 대로 됐으니 만족하네.”
아르칸도 마주 웃으며 곧바로 다음 계획을 추진했다.
“그럼 이제 다 같이 드워프 왕국에 가자고.”
“어, 드워프 왕국에?”
도린이 놀라서 물었다.
“오리할콘으로 무기 만들려면 아무래도 거기서 만드는 게 좋을 거 아니야?”
“여기서도 만들 수 있네. 만든다고 하면 여기 시설을 쓸 수 있게 도와줄 거야.”
그 말대로 당연히 수도인 만큼 도와줄 드워프도 있고, 시설도 좋을 게 분명했다.
아르칸은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그걸 몰라서 드워프 왕국에 가자는 거야? 상징성을 내세운다며? 그러려면 왕국에 가서 만드는 게 나을 거야.”
“아.”
도린은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 너도 여기서 뜨고 싶잖아? 무기 만든다는 핑계 대고 나오면 되지.”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발토르 공작과 매그누스 공작이 어떻게 나올지도 확인해야 한다. 내가 멋대로 빠지면 전쟁을 벌일 생각이 가득하니까.”
용사는 쓴웃음을 짓더니 아르칸의 속셈을 들여다보려는 듯 전시안을 발동하며 말했다.
“그보다 아르칸 너도 드워프 왕국에 볼일이 있나 보군.”
“당연히 있으니까 가자고 하는 거지.”
“쯧, 정말 못 당한다니까. 너를 감시하기 위해서라도 함께 가야겠는걸?”
“네, 제가 최대한 편하게 지내실 수 있게 모시겠습니다.”
용사의 말에 도린이 신나서 말했다.
“아, 그런데 출발하기 전에 들를 데가 있습니다.”
“어디?”
아르칸의 물음에 용사가 허리에 차고 있는 성검을 가리켰다.
“길리암이라는 마법사님이 이 성검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해서 맡겼거든. 급하게 들고 와서 다시 맡겨야 해.”
“길리암?”
아르칸은 깜짝 놀랐다.
그 반응에 용사가 미심쩍은 눈을 했다.
“왜? 아는 사람이야?”
“아, 직접 본 건 아니고, 대단한 연구를 하는 분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
“아, 그렇군. 확실히 괴팍한 분이긴 하지.”
용사는 길리암의 모습을 떠올리며 금방 납득했다.
“관심 있으면 같이 가도 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렇게 대꾸한 아르칸은 미소를 지었다.
길리암은 아르칸이 최근 즐겨 쓰는, 체내의 마력을 그대로 발사하는 마탄 장갑의 개발자였다.
‘블랙마켓에다가 물건을 공급하는 마법사라, 이거 어쩌면 장비를 쉽게 얻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저 녀석은 마왕 아니랄까 봐 왜 또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어?”
한편 용사는 그런 아르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