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Banjiha Demon Castle RAW novel - Chapter 79
79화 아르칸의 정체 (2)
“저,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내보내 주세요.”
아르칸과 용사가 나가려고 하자, 도린이 불렀다.
“좀 더 쉬지 않고?”
“괜찮다. 딱히 아픈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괜히 여기 있다가 조사받는 것도 싫다.”
“아, 알겠습니다. 같이 가죠.”
도린이 왜 저러는지 깨달은 용사가 앞장섰다.
용사는 도린이 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과 동시에, 왕성에 연락을 보내 드워프 왕국으로 갔다가 마계로 갈 거라는 계획을 전했다.
그걸 보고 있던 아르칸은 혀를 찼다.
‘둘 다 참 피곤하게 산단 말이야.’
도린은 여기서도 드워프 왕국의 왕자라는 걸 안 밝힌 듯했고.
용사는 세계를 구원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귀족들에게 쩔쩔맸다.
아르칸은 둘을 잠시 기다리는 사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엄지 크기의 검은 유리 파편이었다.
악신 말고라스가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 뒤 떨어트렸는데, 아르칸이 엘리시아를 부축하면서 몰래 챙겨 둔 거였다.
검은 유리 파편의 표면은 매끈했지만, 그 속에는 신비로운 기운이 물결처럼 끊임없이 움직였다.
아르칸은 처음 보는 물건이었지만, 어떤 건지 잘 알았다.
‘차원의 조각! 이게 여기서 나오다니.’
소설에서는 용사가 모험 중에 마주친 대규모 이교도 무리를 토벌하다가 얻는다.
성녀는 거기에 담긴 힘에 놀라며 면밀히 조사한 끝에 수백 년 전 기록을 뒤져 이게 차원의 조각이라는 걸 찾아냈다.
무엇보다 이 차원의 조각에는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넘나들 힘이 담겨 있는데.
마신에게 이걸 쓰면 그만큼 힘이 약해진다고 했다.
효과는 차원의 조각마다 다르다고 했지만, 당시 성녀가 측정한 차원의 조각 효과는 마신의 힘을 10%나 억누를 수 있다고 했다.
‘이건 몇 %짜리일까?’
얼마가 됐든 마신의 힘은 4대마왕이 모두 힘을 합쳐도 상대하기 어렵다고 하니,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아르칸이 유심히 차원의 조각을 살펴보는데, 용사가 말했다.
“이제 끝났다.”
“근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납치된 성녀 후보생도 돌아왔고, 너랑 있으면 신원보증도 충분할 텐데?”
“날 도와주신 분한테 왜 그러나. 그냥 저 기사들이 미적거린 것뿐이다.”
도린이 용사의 편을 들었다.
그 말에 슬쩍 뒤를 보니 이쪽을 쳐다보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아르칸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뭐야? 감시라도 당하고 있나 보네.”
“별거 아니다. 그보다 가자.”
용사는 씁쓸한 얼굴로 대꾸하면서 앞장섰다.
아르칸과 도린은 말없이 용사의 뒤를 따랐다.
***
도린이 있던 곳은 수도 외곽의 신전. 길리암의 연구소도 외곽에 있는지 용사는 빙 둘러 걸어갔다.
이내 보이는 풍경은 처참했다.
부서진 채 방치된 도로와 낡은 건물들로 빼곡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행색도 초라했다.
“수도에 이런 곳이 있다니, 놀랍군요.”
“이런 곳에 연구소가 있다고?”
도린에 이어 아르칸도 놀라서 물었다.
“원래 연구소는 수도 내에 길드 거리에 있었거든. 근데 연구하느라 돈을 마구 써 버려서 이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더라.”
“그래? 어지간히 돈이 안 되는 연구를 하는가 보네.”
“어, 마법을 익히는 것보다 마력을 다루는 데 관심이 많나 봐. 마석열차 같은 것처럼 말이야.”
“호오. 그런 거라면 이야기가 좀 통할 만한 상대일지도 모르겠네요.”
마석열차 덕후인 도린이 기대했다가 이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이상하네. 마석열차 같은 걸 연구한다면 돈이 안 될 리가 없는데…….”
“예전에는 투자도 많이 받았는데, 눈에 띌 만한 성과가 없어서 지원이 끊겼다고 들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아무래도 지원이 끊긴 후 새롭게 투자를 받기 위해 시험 삼아 블랙마켓에다가 물건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그걸 생각하니 아르칸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 확률이 점점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아, 여기다.”
걸음을 멈춘 용사가 가리킨 곳은 연구소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곳이었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 끼어 있는 데다 관리도 안 됐는지 지저분하고, 잡동사니가 늘어져 있는 게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건물 자체도 언제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들어갑니다.”
용사는 노크도 하지 않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안에도 마찬가지로 온갖 잡동사니가 나뒹굴고, 벽은 낙서로 지저분했다. 아기가 한 것 같은 낙서였지만, 그 내용이 복잡한 수식과 상징들로 이뤄진 마법진인 것만은 달랐다.
“길리암 님, 저 왔어요.”
“어어, 잠깐만.”
안에 들어와서 용사가 다시 부르고서야, 저 쓰레기 너머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 또 아무런 기척이 없었지만.
“…….”
잠시 후 다시 용사가 불렀다.
“길리암 님.”
그제야 안쪽에서 뭔가가 들썩거리더니 이내 이쪽으로 걸어왔다.
길리암은 안경을 쓴 여인이었는데, 두꺼운 회색 로브를 두르고 있어서 사람보다는 애벌레같이 느껴졌다.
게다가 얼핏 보면 지적인 미녀 같았지만, 눈이 퀭한 게 아무래도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용사는 그런 꼴이 익숙한지 고개를 저었다.
“또 밤새우셨습니까?”
“또라니, 원래 연구자는 당연히 매일 밤새우는 거야.”
“어쨌든 임무를 끝내고 왔으니 다시 성검을 조정해 주세요.”
“어, 언제 가져갔었지?”
“아까 가져간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문단속 좀 제대로 하셔야죠.”
“잔소리 좀 그만하고 어서 줘. 다시 상태를 봐야 하니까.”
길리암은 성검을 받아서 잡동사니가 잔뜩 있는 테이블 위에 얹어 둔 뒤, 여려 겹의 렌즈가 겹쳐진 돋보기 같은 거로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옆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거추장스러우니까. 저기 가서 좀 앉아 있어.”
길리암이 가리킨 곳은 금방까지 자고 있었던 듯 어지럽혀진 침대였다.
“아니, 괜찮습니다. 나가서 기다리죠.”
“흠흠, 그게 좋겠네.”
용사와 도린이 나가는데도 아르칸은 나가지 않았다.
그걸 느낀 길리암이 쏘아붙였다.
“거추장스러우니 나가라니까.”
“나도 한 가지 봐 줬으면 하는 게 있어서 말이지.”
그 말에 길리암이 몸을 돌려 아르칸을 쳐다봤다.
“건방진 게 마음에 안 들지만, 용사랑 같이 왔으니 안 봐 줄 수는 없겠군. 뭘 봐 달라고 하는 건지 어디 한번 내놓기나 해.”
아르칸은 자신의 손에 낀 장갑을 내밀면서 말했다.
“이거 투입되는 마력 대비 출력이 너무 낮더라고.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이, 이건……. 대체 어디서 난 거냐?”
길리암이 장갑을 보며 떨면서 물었다.
저건 분명 자신이 만든 마력 방출 장갑 시제품.
블랙마켓을 오가는 상인에게 연구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면서 대금 대신 준 거였다.
인간족과 내통한 마인족을 엄하게 벌하는 만큼, 그 반대도 마찬가지.
자신이 만든 마도구가 마계에서 거래됐다면 자칫 잘못하면 처벌받을 수도 있었다.
길리암은 피곤한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저걸 저 녀석이 왜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신고하지 않고 자신에게 보여 줬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길리암으로서는 그 이유로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나를 협박할 생각이냐?”
그 말을 내뱉고 나니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슬픔과 절망이 깃든 웃음이었다.
그동안 마법사로서 쌓은 명예와 부는 모두 마력을 연구하느라 모두 잃어버렸다.
남은 건 아직 끝맺지 못한 연구와 이 초라한 연구실이 전부였다.
“협박해도 가져갈 만한 건 없을 거야.”
그런 길리암에게 아르칸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협박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음? 그럼 왜 블랙마켓에 넘긴 마력 방출 장갑을 내게 보여 준 거냐? 마계와 협력했다고 협박하려는 게 아니었나?”
“협박은 무슨, 아까 분명 말했잖아. 이거 투입되는 출력이 낮으니까 높일 방법이 있는지 물어본 건데.”
“뭐?”
“나한테 꼭 필요한 장비라. 지금도 너무 잘 쓰고 있거든.”
그제야 오해가 풀린 길리암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 순수한 고객이었다니. 그것도 시제품에 불과한 걸 아주 잘 쓰고 있단다.
그때, 저 밖에서 용사가 불렀다.
“아르칸, 안 나오고 거기서 뭐 해? 우리 밥 먹으러 갈 건데?”
“아, 나도 물건 좀 봐 달라고 하던 중이었어.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으니까. 먼저들 먹어.”
“그래? 알았다.”
아르칸과 용사가 대화하는 사이에, 길리암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래, 창피해할 게 아니라, 이걸 봐 줘야 해.’
길리암은 아르칸이 내민 마력 방출 장갑을 살폈다.
마치 손에 안 낀 것처럼 부드러운 착용감을 자랑하는 이 장갑은 튼튼한 오거 가죽을 아주 얇게 펴서 두 겹으로 겹친 거였다.
그 사이에 가느다랗게 뽑은 황금으로 복잡한 마력 변환 마법진을 만들어 넣었다.
아직 이 이상의 효율은 넘는 마법진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강화를 시도해 볼 만한 건 마법진을 구성하는 이 황금실 정도인데.
문제는 이 이상의 효율을 내는 물질은 못 발견했다는 거였다.
기껏해야 지금 앞에 있는 성검 정도?
길리암이 성검을 연구한 바로는 오리할콘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효율이 나온다.
문제는 이 전설적인 금속을 따로 구할 도리가 없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이 성검에서 오리할콘을 뗄 수도 없고. 그랬다가는 반역죄로 정말 처형당할지도 몰라.’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아르칸이 속도 모르는 채 말했다.
“혹시 더 성능 좋게 만들 수만 있다면, 내가 투자할 수도 있는데.”
“투자??”
길리암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근방에는 이 연구에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자산가가 이제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어, 얼마나 투자하시려고요…….”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물었다.
비굴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순 고객이 아니라 투자자 앞에서 공손한 건 연구자로서는 당연한 거였으니까.
“1백만 골드면 어때?”
“네??”
귀를 의심할 정도로 큰 금액.
지금까지 투입된 연구 자금을 모두 합친 것보다 몇 배나 많았다.
하지만 아르칸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마력 전환 효율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늘어나도 실제 위력은 배가될 테니까.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신하를 늘리고 마력이 늘어날 걸 생각하면 충분히 그 정도는 투자할 만했다.
한편 길리암은 짧은 시간이지만, 머리가 터질 듯 고민했다.
이 이상은 쉽게 개선이 안 된다고 솔직히 말하고 투자를 거절할 것이냐.
아니면, 되든 말든 일단 1백만 골드를 투자받아 챙길 것이냐 하는 거였다.
1백만 골드면 아예 새로운 연구를 몇 개나 더 풍족하게 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고뇌가 안 될 수 없었다.
“대답이 없어? 거절인가?”
아르칸의 재촉에 결론을 내린 길리암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거절해야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연구가 한계에 달해 투자를 받아도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안 나올 겁니다.”
“그래? 아쉽네. 혹시 돈이 모자라서 그러나? 부족하면 1백만 골드 더 투자할 수도 있는데?”
“커억! 2백만 골드를…….”
길리암은 순간 기함했다.
2백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거절해야 한다니.
그런데도 솔직히 말했다.
“그래도 안 됩니다. 효율을 높이려면 오리할콘이 필요한데, 그건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구하기 힘든 전설 속의 금속이라서요.”
그 말에 아르칸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오리할콘? 그거라면 여기 있는데?”
길리암은 오리할콘을 보자마자 숨이 멎는 듯했다.
잠시 후.
도린과 함께 연구실로 돌아온 용사는 당황했다.
난잡하게 온갖 물건들이 나뒹굴어 쓰레기통을 방불케 했던 연구소 안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물건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길리암은 아주 느긋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저런 모습은 처음 보네……’
길리암은 용사가 온 걸 보더니 성검을 건네며 말했다.
“여기에 이 부분에 마법진을 덧그려 뒀거든. 오러가 강하게 나올 거야. 단 마법진이 찢어지면 효력이 사라지니까. 이 위에 가능한 한 튼튼한 가죽으로 감아.”
“알겠습니다. 길리암 님,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로.”
길리암이 배시시 웃었다. 그것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늘 우울하고 시체 같던 길리암 님이 저렇게 웃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러다 아르칸이 눈에 들어왔다.
아르칸은 깨끗이 정리된 테이블에 앉아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걸 본 용사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저 차는 뭐지? 나는 물 한 잔 얻어 마신 적이 없는데!’
반지하 마왕성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