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115)
살얼음(4)
– ‘하연아. 너도 슬슬 나이가 찼고, 정선 인가를 이끌 재목 중 하나가 되어야만 하니 삶과 현실에 대해 알아야만 하겠지.’
주작궁의 복도를 걸어 나가는 인 귀비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비단결처럼 붉은 머리칼이 그 속도에 맞춰 흔들거리고 있었고, 그녀를 뒤따르는 시녀들도 고개를 숙인 채 재빨리 따라붙고 있었다.
인 귀비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어서, 척 봐도 인선록과의 환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시녀들은 다 눈치챌 수 있었다.
– ‘하연이 네 눈에는, 일국의 상서관으로 앉아 있는 내가 어찌 보이느냐?’
– ‘백성을 위해 헌신하고, 황상을 위해 언제나 힘을 쓰는 숭고한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 * *
– ‘그리 기억해 주니 고맙구나. 하지만, 하연이 너도 청도궁의 정치판이라는 것이 언제나 숭고하고 아름다울 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지. 귀비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온갖 진흙탕을 지켜보았을 것이니.’
상서관 인선록.
귀비 인하연의 아버지는 이 청도국의 상서관 자리에 앉아 있으며, 오랜 시간 나라를 위해 헌신한 명재상으로 유명했다.
인하연도 어느덧 어엿한 한 명의 여인이 되었다.
숙부 인창석의 손에 들려서 마냥 즐거운 듯 웃던 시절은 유년기의 이야기일 뿐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푸근하게 웃어주며 귀여워해 주던 시절은 애먼 옛날에 끝났다는 이야기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정선 인가의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 할 줄 알아야 한다.
검을 휘두르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휘두를 줄 알게 되어야 한다.
드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때, 비로소 몰려오는 질투와 시샘을 버텨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손에 때를 묻힐 줄 알아야 한다.
어느 순간부터 인 귀비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마냥 경륜 있고 원숙해 보이기만 하던 제 아비 인선록은… 그저 깨끗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
살다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에는 서책에 적힌 이야기와는 달라서, 보란 듯이 나쁘고 못된 인간이나 척 봐도 착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이분되어 있지 않다.
인 귀비가 주작궁의 주인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본 청도궁의 인물들은… 대개 이도 저도 아닌 잿빛의 인간이었다.
공이 있으면 과가 있었고, 선한 면이 있으면 악한 면도 있었다.
제 가족들에겐 매몰차지만 관료로서는 훌륭한 인물이 있었던가 하면, 관료로서는 끔찍하고 부패한 인간이 제 가족들에겐 그토록 선량하고 착할 수가 없는 인물 또한 있었다.
– ‘정치는 원래, 박쥐처럼 하는 것이다.’
– ‘필요하다면 손에 때를 묻힐 수 있어야 하고, 굳이 술수가 필요하지 않다면 때로는 국익과 백성을 위할 줄도 알아야 한다.’
– ‘자기 보신과 국가의 이익 사이에서 줄을 탈 줄 모르면, 현실 정치에서는 도태되게 마련이란다. 하연아.’
진흙탕과도 같은 청도궁의 정치판에서 이토록 오랜 시간을 버티고 있다는 것부터가, 완전히 선량한 사람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마음의 준비 정도는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 ‘가만히 놔뒀으면 화용설가는 정선 인가를 찍어누르고 청도궁 최고의 권세가가 되었겠지. 하나, 검술과 전공(戰功)만으로 어찌 백성의 고초를 살필 식견을 지닐 수 있겠느냐. 그렇기에, 그 세를 한번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 ‘….’
– ‘가주였던 설이문이 품었던 가장 큰 역린이 바로 내연 관계에 있던 보부상 성혈화였다. 안평 상회를 통해 관련된 정보를 사서, 그 여상에게 둔독을 먹였지.’
– ‘예…?’
– ‘하나, 그 여상은 그야말로 여장부와도 같은 인물이었던지라, 설이문의 짐이 될 바에 스스로 자결하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딸을 끔찍이 아끼는 상서관 인선록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했다.
인 귀비가 어렴풋이 자신의 음험한 뒷내를 눈치채고 있으리란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걸 대놓고 드러내 보이고 싶진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인자한 아비로 남을 순 없었다.
오로지 백성을 위해서, 고리대금으로 폭리를 취하는 대부업자들에게 철퇴를 놓고, 방납을 이용해 고혈을 빠는 상인들을 잡아들이고, 농법 기술을 전파하며, 산간벽지의 마을까지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실상을 눈에 담으려 하고, 황상을 욕하는 자들을 용서치 않는 자.
하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누군가를 음해하고, 때로는 술수를 부리고, 때로는 죄 없는 자를 잡아들이고, 때로는 경쟁 가문을 걷어차는 자다.
– ‘아버님…?’
– ‘난 백성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었다. 하나, 그러려거든 힘이 필요하고, 힘을 가지려면 손에 때를 묻혀야 한다. 어중간한 힘으로는 안 된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가장 큰 권위를 홀로 손에 쥐어야만 한다.’
결국, 자기 딸인 귀비 인하연을 끝까지 안고 가려면… 그녀에게도 모든 것을 일러주어야만 했다.
– ‘아버님. 하나, 방법이 옳지 않으면 아무리 결과가 좋은들 의미가 퇴색되고 말아요….’
– ‘그렇다고 해서 점잔 빼며 현실을 관조하고 있을 것이냐? 진흙탕 속에서 사람을 건져내려면 자신의 몸에도 진흙을 묻힐 각오를 해야 한다. 깨끗하고 고고하게 청산에 살면서 더러운 시궁창 속을 논하려 드느냐…. 그것은 현실을 모르는 자들의 독선이다.’
곰방대를 내려놓은 상서관이 한층 진지해진 눈으로 사랑하는 제 딸을 내려다보았다.
– ‘나는,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
– ‘한데 어찌하여… 화용설가의 가주는 황상께 반기를 든 것이지요? 칼을 휘두르고자 하면, 아버님께 휘두르려 해야 했던 것 아닙니까.’
– ‘….’
– ‘설마… 황상의 뜻이었습니까? 황상께서 어째서…?’
– ‘환멸하였느냐?’
상서관의 그 말에, 인 귀비는 순간적으로 숨을 헛 삼키고 말았다.
– ‘환멸하였다 하면 어쩔 수 없다. 나는 이것보다도 더 음험하고 악한 짓을 수없이 자행하며 자리를 지켜내 왔다.’
– ‘….’
– ‘일국의 상서관이라는 자리는 그렇게 해야만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언젠가 그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
인 귀비는 반평생을 화용설가를 원망하며 살았다.
자신의 유년 시절, 큰 버팀목과도 같았던 숙부 인창석을 죽인 반역도 가문.
그들을 원망하고, 그들을 증오하며, 그 가문의 후손이었던 설태평에게도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둘렀다.
지금에서야 설태평이라는 인물이 그런 음험한 기질을 가진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하나, 가주 설이문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 제 아비라는 사실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정선 인가가… 한 짓이라고…?’
설태평과 설란은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 남매는 지나고 보니 나름 괜찮았다고 했다. 둘이서 손을 꼭 맞잡고 천애고아 신분으로 황도를 유랑하던 그때의 그 힘들었던 기억을 한때의 추억으로 회상하고 있지만… 그거야 지났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모든 불행의 시발점은 바로 정선 인가에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그들을 반역 가문의 사생아이자 고아로 만든 것이 바로 정선 인가다.
제 이름 앞에 주박처럼 붙어 있는 인 씨 성의 존재는, 사실 설태평에게 있어선 원수와도 같은 것이다.
화용설가의 후손에게 숙부 인창석의 복수를 하겠답시고 칼을 휘두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실 복수는, 설태평이 정선 인가에 하는 게 하늘의 이치에 맞는 것이었다.
– 털썩.
“인 귀비님! 괜찮으십니까!”
성큼성큼 걸어 나가던 인 귀비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서 다들 달려 나왔다.
용맹함과 원숙함의 상징과도 같은 귀비 인하연이 이토록 허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녀가 주작궁의 주인 자리에 앉은 뒤로 처음이었다.
시녀장 현당이 얼른 달려가서 부축하려다가, 인 귀비의 표정을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마치 무언가 두려움에 떠는 것처럼, 어깨 끝을 떨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겁먹은 아이 같았다.
대관절 상서관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토록 큰 충격을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일단은 침실로 옮기는 것이 급선무일 듯하였다.
마룻바닥을 짚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인 귀비의 시선이 방황하고 있었다.
“인 귀비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현당아. 현당아….”
“예, 인 귀비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 귀비님.”
자신은 정선 인가의 규수로서, 평생을 정선 인가의 지원을 받으며 살았다.
입고 있는 궁복, 입에 넣은 음식, 마냥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던 으리으리한 저택에 이르기까지….
이제 와서 정선 인가라는 곳을 환멸해 등을 돌리고 살기에는 이미 받은 것이 많았고, 그리한다고 해서 무언가가 바뀌는 것도 업었다.
그 명문가의 규수가 아니었으면 주작궁의 주인 자리에 앉을 수나 있었을까?
제아무리 용모가 빼어나고 품성이 훌륭하며 무예에 능하다 한들, 그것만으로 이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결국 자신은 정선 인가의 사람이다. 그 사실은 죽는 그 날까지 제 몸에 들러붙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설태평의 부모를 죽인 자들 또한, 정선 인가의 사람이다.
제 아버지, 상서관 인선록이 마치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처럼 보이기 시작하였다.
제 손으로 죽인 자의 후손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대는 청도국에 크게 기여할 무관이라 칭찬하고. 지원하고. 흡족하게 웃어 보이고.
과거의 치부 따위는 먼 역사 저편에 묻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터벅터벅 걸어 나가며 가면을 갈아 끼우고 산다. 그가 걷던 동선을 뒤따라 걷다 보면 쓰다 버린 가면들 수백 수천 개가 바닥을 구르고 있다.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것이다.
권모와 술수, 협잡이 난무하는 이 황궁에서 살아남기란.
상서관이라는 꼭대기의 자리에 앉아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다는 것의 의미란.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당아….”
그의 밑에서 권세가의 힘을 받아먹고 자란 자신이…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아니면 설태평의 편을 들 수 있을까?
그것이, 그에게는 달갑게 받아들여지기나 할까?
요귀가 들끓던 탄신제의 밤.
백삭산 한 켠의 토굴 안에서 조용히 현당을 치료하던 사내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삶에 대한 원망도 없이, 세상에 대한 증오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살아가는 모습.
그 모습을 귀감처럼 여겨 가슴에 품어 놓았던 경의가 수치심으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감정이 혼란한 인 귀비의 마음을 어지럽혀 놓는다. 갈 데 없는 그 죄책감은 정신을 어지럽혀 놓아, 이윽고 몸의 균형을 잡는 것조차도 힘들게 만들었다.
그때, 시간이 멈춘 듯 주변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불안에 빠진 인 귀비의 모습을 살피듯, 주작궁 뜰 한 켠에 궁복 깃을 휘날리며 안착한 형체가 보였다.
시녀들이 일제히 화들짝 놀랐다.
천도공녀의 복식을 한 그 인영(人影)은,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저기 살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요귀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가기도 전에, 요귀에게서 뿜어져 나온 천룡의 기운이 그들을 급습했다.
재빠르게 안림 시녀장에게 상황을 알리고, 현무궁을 빠져나왔다.
지금 후궁에 있는 것은 자살 행위다. 이성을 잃은 태자비들은 어딘가 불안정해 보여서, 가만히 놔뒀다간 무슨 대형사고로 이어질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태평아! 내 가만히 있으라고 명했잖아! 시험해 볼 것이 너무 많아!”
다실 너머에서 들려오는 포 현비의 외침을 뒤로한 채, 이를 악물고 현무궁의 뜰 밖으로 뛰쳐나오자… 그 앞에 다른 인물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현무궁에 갈 것이란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하나 날 기다리고 있던 주작궁의 시녀장, 현당이 팔을 맞잡고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현 시녀장. 여기까지는 어찌하여…?”
“설 무인께서 곤란에 빠져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을 어디에서 들었기에?”
“…인 귀비께서 도움을 좀 주고자 하시니, 주작궁으로 드시겠습니까?”
내 질문에 대답을 안 한다.
이미 의심의 끝을 달리고 있는 나는 벌써부터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주작궁의 시녀장 현당은 경우를 잘 구분하고 눈치가 빨라, 무슨 말을 하든 적절하게 대답해 주던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어색하게 내 질문을 회피하고 있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그렇군…. 알겠다.”
그렇게 말한 뒤,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서 후궁의 중문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 타다다닥!
이유는 모르겠으나.
지금 주작궁에 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 직감이 번개처럼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나도 이 짓을 수년째 하다 보니 슬슬 육감이 발달하는 느낌이다.
도망쳐라.
이곳이 세상이 끝인 듯, 저 너른 초원이 마치 끝없이 펼쳐진 듯.
저 붉은 석양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는 거다. 설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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