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in Romance Fantasy RAW novel - Chapter (90)
일귀 토벌 (3)
내리치는 번개가 밤하늘을 갈랐다.
본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일귀의 모습. 황상의 허락 없이 본궁 앞의 거대한 돌바닥 뜰을 가로지른 자는 청도궁 역사상 오로지 한 명 뿐이었다.
검존 설이문.
사서에 남은 그 대역도를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없다.
물론 그 거대한 뜰을 가로지르고 있는 자는 사람의 형상을 취하고 있지 않다.
입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진물이 진득하게 흘러 바닥에 몇 방울 떨어진다.
온몸을 씻고 내려가는 빗물들도 끔찍한 악취를 지우지는 못한다.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역등귀를 가둔 원인을 제거하라.
검존 설태평, 천도공녀 아현, 시녀 설란을 죽이고 역등귀로 하여금 다음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라.
그 괴물이 눈에 품은 목적은 그것 하나 뿐이다.
그렇기에, 목적하는 자를 죽이기 위해서 사람이 가장 많은 곳으로 나아가고 나아간다.
“괴물이다! 적궁을 부순 끔찍한 괴물이 나타났다!”
“호위병을 불러! 호위병을 부르라고! 젠장! 뒷문으로 도망쳐라!”
혼란에 빠진 고관들이 일제히 뛰쳐나갔고, 그나마 남아있는 몇몇 호위병들조차도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들은 마지막까지 이 청도궁의 안위를 지키도록 철저히 교육받은 자들이다.
무관으로서의 충심이 그들로 하여금 검을 들고 뛰쳐나가게 만들었지만, 생존욕구까지 찍어누르지는 못했다. 그 손이 한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나마 일귀의 앞을 가로막은 용기는 박수받을만 하나, 그 용기가 작금의 절망적인 상황을 뒤집어 엎어줄 수는 없었다.
“으, 으아악! 이 괴물아!”
– 휘익.
악을 지르면서 뛰쳐나간 병사의 형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귀의 검격 한 번에 휩쓸려나간 그들은 베인 것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휩쓸려 사라졌을 뿐이다.
부무사장 한천선 역시 검을 들고 본궁 앞으로 뛰쳐나왔으나,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고 있었다.
죽는다.
여기서 나서면 죽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청도궁의 무관들은 절대로 쉽게 뒤돌아 도망치지 않는다.
‘내 목숨은 여기까지구나…!’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도 식은땀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느낌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도망칠 수는 없었다.
한천선이 검을 뽑아들고 죽음을 받아들였을 때다.
– 푸욱
비바람 속에 서있던 일귀의 가슴팍을 뚫고 검날 하나가 솟아올랐다.
“커억, 허어억.”
혈귀의 검붉은 피 사이에서 튀어나온 검날에 구름의 형상이 가득히 피어있다.
대장군의 검술을 보고 황궁의 대장장이가 직접 두드려준 운무도다.
그 뒤에서 튀어나온 대장군이 그대로 일귀를 걷어차며 검을 뽑아내었다.
– 푸슉!
– 콰당탕!
한 팔을 잃은 노장은 숨을 몰아쉬며 빗줄기 사이에 서있다.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검을 턴다.
잘려나간 팔의 단면은 불로 지진 흔적이 가득하다. 주둔지의 처마 아래에 있던 횃불을 꺼내어 들고 제 팔을 지져버린 것이다.
“네 상대는 나다!”
서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다.
안 그래도 전성기에 비하면 보잘 것 없고 초췌해진 몸이기에, 팔 한쪽이 날아간 것만으로도 몸이 반토막 난 느낌이다.
그럼에도 남은 팔 한 쪽으로 검을 세워들고 있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위용이 흐른다.
청도궁의 무사는 절대로 등을 보이지 않는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도신이 긴 검을 늘어뜨리고는 귀기에 서린 눈으로 일귀를 쳐다본다.
청도궁 무사의 정점에 선 자에게서 느껴지는 위용은, 전성기가 지나고 나이가 지긋해져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대장군 성사욱이 고함을 지르자, 그 파동이 빗줄기 사이로 퍼져나갔다.
– 카앙! 화악! 화악!
– 카앙!
이 거대한 청도국의 모든 권위가 한 데 모인 본궁. 그 중앙 뜰.
널따랗게 펼쳐진 돌바닥 위에서 일귀의 칼을 흘려내는 성사욱의 몸짓이 가히 곡예에 가깝다.
완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 속도도 상대가 한 수 위다. 검의 위력도 꿀리지 않는다.
이런 괴물을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러나, 대장군 성사욱에게는 그 괴물에게는 없는 노련함이 있다.
휘둘러지는 검격 사이사이에 보이는 빈틈을 따라 몸을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면 마치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인 듯 하다.
그러나, 성사욱은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은 일귀를 벨 수 없다.
이미 노쇠해버린 몸을 원망할 마음은 없다. 주어진 상황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벨 수 없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기라도 해야한다.
– 화악!
그 때였다.
중앙 뜰을 중심으로 거대한 연막이 피어올랐다.
번레 이렇게 비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연막은 큰 의미를 가지기 힘들지만, 피어오른 연막은 신묘하게도 비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가 본궁 안을 뒤덮어 간다.
일귀를 따라 진격하던 하등귀 무리들도 연막 속에 묻혀서 방향을 잃는다. 제 아무리 망자들의 무리라 할지라도, 방향을 파악할 수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경지에 이른 도선술이다.
정말로 연막을 피워올린 것이 아니라, 선술을 부려 시야를 가린 것이다.
– 타악!
연막 사이를 헤치고 나오며 뜰 아래 착지한 자는 백도사 안천이다.
전국의 선산을 방랑하며 도선술을 수련하는 그 젊은 도사는, 설란의 오래된 조력자이자 난세에 나타나는 영웅이었다.
어둑어둑한 밤의 어둠 사이에서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그 백발의 머리칼이 마치 빛이 나는 것 같다.
딱 벌어진 어깨와 듬직한 체구에 든든함이 느껴지지만, 표정은 심각해져 있었다.
언제나 여유 넘쳐보이던 그지만, 일귀 평량 앞에서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킬 수밖에 없다.
“여기 입니다! 설 시녀가 있는 곳으로 갑시다!”
그 와중에 펼쳐진 연막 너머에서 왕한이 악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시녀 너덧명을 이끌고 말을 탄 채 뜰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달리고 있는 시녀들은 설란의 휘하에 있는 황태자궁 소속 시녀들이었다.
그곳으로 일귀의 시선이 향한다.
일귀의 목적은… 역등귀를 방해하는 자들을 죽이는 것이다.
설란이야말로 가장 선두에 있는 자들 중 하나였다.
시녀들을 이끌고 비바람 사이를 뛰쳐나가는 왕한의 모습이, 마치 낙오된 설란의 부하들을 거둬들여서 데려가는 듯 하다.
– 타악!
한껏 도약한 일귀가 왕한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방향은 청도궁 바깥쪽이다. 왕한은 이를 악물고 비 사이를 헤치며 시녀들과 함께 말을 몰았다.
설란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일귀 평량을 끌고 오라고 말했지만, 왕한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어쨌든 자신이 일귀 평량을 끌고 청도궁에서 최대한 멀어지기만 한다면, 설태평이 본궁에 도달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 설란의 목숨을 담보 잡을 필요는 없다.
설란은 그 특유의 정의감 때문에 자신이 직접 목숨을 걸고 나서서 일귀 평량을 끌어낼 것처럼 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굳이 설란을 나서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상대의 목표가 설란이라면, 오히려 그 목포료부터 멀찍이 떨어트려 놓는 것이 더 현명한 전략 아니던가.
그 과정에서 왕한 자신의 목숨을 담보 잡아야만 한다는 사실이 뼈아프지만, 그 정도 도박은 한다.
판돈 없이 돈을 딸 생각을 하는 건 도둑놈이다.
투전 놀음판을 몇 년 넘게 돌아다녔던 왕한이기에 잘 안다.
큰 것을 얻고 싶다면 큰 판돈을 걸어야한다. 아쉽게도 자기가 걸 수 있는 가장 큰 판돈은 자기 목숨 뿐이다.
– 타닥 타닥
“뒤처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챙겨서 데려갈 여유가 없습니다!”
왕한을 따라 말을 타고 따라오는 시녀들의 얼굴에 공포감이 가득하다.
왕한보다 너덧 살 어린 시녀들이 저리 능숙하게 말을 탈 줄 아는 것만으로도 장한데, 등 뒤에는 죽일 듯이 괴물이 쫓아오는 상황이다.
‘설 시녀님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시녀 너덧과 서기관 한 명의 목숨을 걸면 되는 문제에 황태자궁 별선시녀의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다…!’
비를 헤치며 달려나가는 왕한의 얼굴에 비장함이 깃들었다.
그는 머리 회전이 빠르다.
이대로 어디로 달려나가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활성방 방향이다.
*
“허억… 허억…”
만신창이가 된 성사욱은 검에 기대어 몸을 지탱하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몸을 때리는 빗방울 하나 하나가 격통을 불러올 정도로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놈을… 막아야 한다…”
지금 청도궁에서 일귀 평량을 제대로 막을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장군급 관료들을 전부 동원한다면 진로 방해정도는 될지도 모르겠으나, 그리하면 요귀들이 날뛰는 청도궁에 사상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각 궁에 여기저기에 퍼져 요귀들을 막아내고 있을 장수들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단신으로 평량을 막아설 수 있는 자는 아마도 성사욱이 유일하다.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지만, 얼른 기력을 회복하여 다시 일귀를 쫓아야만 했다.
갑자기 나타난 청년이 잠시간 일귀의 시선을 끌어주었기에, 성사욱은 숨을 가다듬을 틈을 만들 수는 있었다.
어쨌든 체력을 회복하면 다시금 일귀 평량을 베러 가야만 한다.
성사욱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키자, 백도사 안천이 그 앞에 착지했다,
“성 장군께서는 일단 몸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출혈이 너무 심하셨습니다.”
“출혈은 멈췄다. 아까 그 청년은 그 괴물을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
걸걸한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 투기만큼은 남아있었다.
*
– 쿠에에에엑!
– 카아아아악!
황궁 여기저기에서 몸을 일으킨 하등귀들 때문에 혼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
특히, 넓디넓은 어원의 외곽에 자리한 황태자궁은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러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른 장소들이야, 상주인원들끼리 힘을 합쳐 농성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황태자궁은 완전히 이야기가 달랐다.
그 넓은 어원에서 몸을 일으킨 하등귀가 향할만한 곳은 모두 황태자궁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다른 곳보다도 더 아득한 수의 하등귀가 모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젠장! 안으로 들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자 전하를 지켜라!”
– 푸슉! 푸욱!
황태자궁을 지키고 있던 무관들은 모두 이를 악물고 요귀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가는 요귀의 피 탓에 다들 한계에 달한 상태다.
천만 다행으로 비가 내리치고 있어서 요귀의 피를 씻어내기에는 편하다.
그러나, 조금씩 누적되어가는 피해는 당장 피를 씻어낸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곳들에 비해서 들이닥친 하등귀의 수가 상당하다.
외떨어진 곳에 있는 황태자궁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대로 가면 뚫린다…!”
그렇게 무관들이 이를 악물고 요귀들을 베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 타닥. 타닥!
몰아치는 하등귀들을 베어내고 있던 무관들은 저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의 형상에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지금 당장 청도궁 안에 있는 모든 건물에서 농성을 취하고 있는데, 밖을 나돌아다니는 건 미친 짓이다.
그럼에도, 말을 타고 하등귀 사이를 노니며 비를 헤치고 뛰어오는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제 아무리 하등귀가 굼뜨다 할지라도 그 사이를 말을 타고 뚫는 건 미친 짓이다.
자칫 잘못하다 발끝이라도 잡혀 낙마하게 되면 그대로 개죽음이다.
그러나, 말고삐를 잡고 비를 헤치며 달려드는 소녀의 모습에 망설임이란 전혀 없다.
치맛단은 승마에 방해가 되는지 제 손으로 찢어버렸고, 저고리의 소맷단도 위로 올려서 묶어버렸다.
별선시녀로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있을 때는 알지 못했겠지만, 소녀는 당차고 기가 센 인물이다.
두눈을 부릅뜨고 하등귀 사이를 유영하듯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말을 타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관절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누누이 말했듯, 로판 여주라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담장을 뛰어넘고, 궁내의 규칙을 뒤로 한 채 후궁을 뛰쳐나오기도 하던 그녀다. 애초에 통제 가능한 인물이 아니다.
그렇게 태자궁의 앞까지 멋들어지게 도착한 설란은, 말고삐를 휙 내려놓고 착지했다.
그 모습이 거의 사내대장부라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었다.
– 타악!
– 휘익!
“꺄아아악!”
– 콰당탕!
그러나, 착지하는 순간 발끝이 진흙에 미끄러져 한차례 구르고 만다.
“…”
비바람을 헤치고 등장한 순간만큼은 멋있었으나, 그 마무리가 어설프다.
설란이 핑 도는 눈물을 삼키며 다시금 몸을 일으키고선 황태자궁의 호위대장에게 말했다.
“별선시녀 설란입니다! 태자 전하는 무사하신가요!”
“벼, 별선 시녀…! 아, 안월정에서 여기까지 말 한 필을 가지고 온 게냐?! 이, 이런 상황에?”
“제가 원래 위기에 좀 강합니다!”
그게 말이라고 하는 소리냐.
비바람 속에서 당차게 말하는 소녀의 모습에 호위대장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안월정에 쳐박혀 있어도 모자를 상황에 이 무슨 위험천만한 짓이냐고 호통을 치려다가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자 전하는 지금 태자궁 지하의 술 창고에 계시다! 누추한 장소지만 거기가 가장 깊숙하고 안전한 곳이다!”
“알겠습니다! 제가 태자 전하를 모시고 태자궁 내부를 살피고 있겠습니다!”
바닥을 구른 소녀의 손에 생채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소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태자궁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태자궁 안은 공포에 찬 시녀들이 모여 앉아서 벌벌 떨고 있었다.
만약 바깥에서 요귀를 틀어막고 있는 무관들이 뚫린다면, 그 다음은 이 시녀들이 몸을 날려서라도 요귀를 막을 예정인 것이다.
천제께 기도를 올리며 제발 무관들이 무사하길 기원하는 시녀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절실하다.
비에 홀딱 젖은 설란이 태자궁 안에 들자,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며 설란의 안위를 물었다.
“모두 자리를 지키거라!”
그대로 설란은 달려서 뒤쪽의 주방 쪽으로 향했다.
주방 입구는 온갖 잡동사니로 틀어막혀 있었다. 그것을 타고 올라, 덧창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다.
으리으리한 크기의 주방에서 더 안쪽으로 달려들어가, 아궁이를 지나서 장작이 잔뜩 쌓여있는 창고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보인다.
그 나무문을 박차고 아래로 쭉쭉 내려가고, 또 다시 잔뜩 쌓인 방호벽 사이에 자그마한 몸을 끼워서 들어간 뒤 술 창고로 통하는 바닥문을 열어제꼈다.
-콰당탕!
“꺄아악!”
너무 어두운 데다가 온 몸이 홀딱 젖어있어서 그대로 미끄러져버린다.
그렇게 먼지를 흩날리며 술창고의 최심부에 도달하자, 정예 호위병 둘을 대동한 현원 태자가 보였다.
나풀나풀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제 별선 시녀의 모습이 보인다.
먼지 가득한 술창고 구석에 박혀있던 현원 태자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설란의 모습에 일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양팔엔 생채기가 가득하고, 먼지투성이에, 물에 빠진 생쥐꼴이다.
당장에 탈진해서 나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다.
허나, 그런 설란은 그게 뭐 어땠냐는 듯 세상 밝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다.
“무사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태자 전하!”
온 세상이 요귀로 들이차서, 가장 정예 병사들조차도 공포에 가득차 있는 이 순간에.
그저 현원 태자가 무사했다는 소식 하나가 뭐 그리 희소식이라고…
그러나, 설란은 굳건하게 몸을 일으키고서는 입구를 틀어막으며 다부지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바깥 상황은 전해 들으셨습니까?”
설란이 그리 말하자, 현원 태자는 그 특유의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거대한 요귀가 나타나서… 적궁의 건물을 부쉈다고 들었다. 그게 전부다.”
“일귀라고 하는 거대한 특귀입니다. 아마도 그 괴물의 목적은… 저일 것입니다.”
“…뭐라고?”
천도공녀 아현, 검존 설태평, 중등시녀 설란.
그 괴물이 죽이고자 하는 삼인이다. 그 중 한 명인 자신이 이 태자궁에 있으면, 언젠가 일귀가 직접 이곳으로 찾아올 수도 있다.
지금은 왕한이 시간을 끌어주고 있으니, 얼른 해야할 일만 마치고 다시 떠나야 했다.
“태자 전하의 별선 시녀로서, 전하께서 안전한 환경에서 잘 보호받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허나, 지금 시점에서 제가 이곳에 있는 건 오히려 태자 전하를 위험하게 만들 것입니다.”
설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제가 일대의 하등귀와 일귀를 끌고 청도궁 밖으로 나가겠사옵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무엇보다, 그 정도 되는 괴물이 왜 고작 시녀 하나를 죽이려고 움직인다는 것이냐.”
“자세한 설명은 상황이 마무리되면 꼭 드리겠사옵니다. 지금은 상황이 급박하오니, 무장들을 시켜 바깥을 살피다가 요귀 무리의 세가 약해지면 호위병들과 함께 말을 타고 본궁 쪽으로 달리십시오.”
“…”
“본궁 쪽에는 성사욱 대장군을 중심으로한 본대가 있사옵니다. 어원에 딱 붙어있는 이곳은 너무 위험하옵니다. 바깥의 무관들이 뚫리기 전에, 빠르게 결단하셔야합니다.”
죽음까지 각오한 설란이건만, 그 얼굴에 비장함은 없다.
오히려 해야할 일을 당연히 한다는 듯한 느낌이다.
“반드시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전하.”
그렇게 인사를 올린 설란은 휙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사다리를 타고 위쪽 주방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기다려라!”
“죄송합니다! 시간이 경각에 달한 터라!”
황태자의 지시를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며, 제 스스로 희생하겠다고 뛰쳐나가는 설란의 모습에 패기가 가득하다.
*
장군급 관료들이 당장 동원 가능한 병사들을 데리고 궁내에 퍼져 요귀들을 제압하기 시작한다.
본궁에 가까운 건물들은 금방 병력 지원을 받아서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금씩 군 내의 체계가 잡혀가기 시작하고, 지도부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허나, 그것도 본궁 주변의 이야기일 뿐이다.
어지간한 마을보다도 훨씬 더 큰 곳이 청도궁이다. 내부의 모든 요귀를 다 베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걸린다.
서쪽의 적궁은 요귀들에게 당했다. 이미 요귀들의 온상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중앙부의 본궁, 북쪽의 후궁, 동쪽의 관료궁, 남쪽의 성황궁은 그나마 각각 파견나간 장군급 관료들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요귀들의 수가 끝이 없고, 내리치는 비바람은 멈출 기색도 없으며, 무엇보다 그 중심에 있는 일귀 평량이 멀쩡하다.
– 타닥! 타닥! 타닥!
시녀들과 함께 활성방 방향으로 말을 모는 왕한은 이를 악물었다.
일귀 평량은 일부러 거리를 좁히지 않고 있다. 놈은 이대로 왕한으로 하여금 설란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게 만들 생각인 것이다.
요귀인데도 머리를 쓰고 있다. 그 사실이 참으로 공포스럽다.
순수한 무력만으로도 전성기의 부수장군을 상회하는데, 이 수많은 요귀들을 마치 군대처럼 통솔하고, 심지어 상황 돌아가는 것을 나름대로 판단해 전략적으로 움직이기까지 하니… 정말로 세상에 저런 요귀도 있구나 싶다.
미친 듯이 달려나가면서도 어느 정도 직감이 들고 만다.
자신이 그저 일귀 평량의 시선을 끌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것이다.
하다못해 궁 밖으로 나갈 수라도 있으면 피해를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악물고 말고삐를 잡으며, 왕한은 벌벌 떨리는 손을 어떻게든 수습했다.
하다못해… 남쪽의 태성문 바깥으로라도 나가야만 했다.
거기까지도 안된다면, 하다못해 병사들의 주둔지로 쓰이고 있는 능연터까지만이라도.
이미 거기도 요귀로 가득하겠지만, 전투 가능한 병사들이 가득 있긴 할 것이다.
본궁이 아니라, 전장으로 일귀를 끌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두렵다… 이게 죽음의 공포인가…!’
자신을 노려보며 쫓아오는 일귀의 모습에 왕한의 오금이 저린다.
자신은 머리를 쓰는 관료이지, 몸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제발 이런 일은 안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꺄악!”
그 때, 왕한의 뒤를 따라오던 시녀 하나가 낙마했다.
극한의 긴장 상황이다.
비바람이 마치 태풍처럼 몰아치고, 사방이 요귀로 가득한 상황 속에서 긴장하지 않는 자는 없다.
그 시녀도 마찬가지인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다 못해 말 아래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 콰당탕! 철퍽!
가녀린 시녀가 전력 질주 하는 말 아래로 떨어지면, 경우에 따라서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다.
천만 다행인 것인가, 다행히도 낙마한 시녀는 기침을 해대며 어떻게든 몸을 가누었다.
허나,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어디 뼈라도 나간 것인지, 시녀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
왕한은 잠시 말을 세워 그 뒤를 보았다.
직감이 외친다.
버리고 가야한다.
이런 극한의 극한 상황에서 낙오는 곧 죽음이다. 제 아무리 별선시녀 설란이 직접 붙여준 소중한 인력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저 시녀를 살리려 들었다간 다 같이 죽자는 소리 밖에 안된다.
허나, 몸과 생각이 따로 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 똑똑한 왕한이라도, 우둔한 선택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족속이었다.
“에라이 시팔!”
왕한은 얼른 말 머리를 돌려서 공포에 찬 눈으로 주변을 보는 시녀를 향해 달렸다.
그렇게 빗속에서 얼른 뛰어내려서 시녀를 업어들었다.
상처로 인해 시녀가 격통의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런 건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추적추적 몸을 때리는 빗방울 속에서 어떻게든 다시 말 위로 올라가려는 순간이었다.
– 콰악!
말의 목이 베여졌다.
아니, 그 목이 날아가버렸다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일 듯 했다.
일귀 평량의 태도는 검날이 날카롭게 벼려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물리력만으로 생물의 형상을 없애버린다.
베이는 게 아니라, 휩쓸려 사라지는 것에 가깝다.
왕한이 고개를 들자, 입김을 뿜어내는 일귀의 모습이 코앞이다.
분노한 일귀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왕한이 자신을 기만했음을 눈치챈 듯 했다.
“내가 진짜… 못 산다…”
왕한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 카앙!
일귀의 태도가 휘둘러지는 그 순간, 뛰어들 듯이 나타나 검날을 올려쳐버린 자가 있었다.
가히 몇백근은 되어보이는 그 거대한 검을 올려쳐서 튕겨낸 것만으로도 상당히 비범한 근력이다.
왕한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적궁의 무사장 장래. 그가 코앞에서 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그 늠름한 모습을 한 장수는 무려 일귀의 검을 베어올려서 튕겨낸 것이다.
“크윽!”
허나, 그 표정은 좋지 않다.
검을 한 번 올려서 튕겨쳐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팔에 부러질듯한 충격이 오고 있었다.
휘두르는 검을 튕겨낸 것도 아니고, 가만히 집어든 검을 쳐낸 것만으로도 이 정도 충격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일귀가 포효하며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장래는 왕한을 발로 걷어차서 저 멀리 날려버린 다음, 그대로 자세를 낮춰서 일귀의 검을 피했다.
그러나, 일귀의 검이 지나간 여파만으로도 휩쓸려서 날아가서 나자빠지고 말았다.
“크허억!”
일귀는 바닥에 나자빠진 장래를 베어버리기 위해 다시금 검을 고쳐쥐었다.
──그리고, 일귀의 목이 베어져나갔다.
그 단면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 툭!
빗줄기 속에서 나자빠진 채, 땅에 떨어진 일귀의 목을 보던 왕한이 입을 떡 벌렸다.
썰려버린 일귀의 목이 있던 자리에 검을 집어넣고 있는 설태평의 모습이 슬쩍 보인다.
공중을 부유 중인 그의 모습을 보건대, 크게 도약한 와중이었다.
장래가 시선을 끄는 그 잠깐의 사이, 일귀의 등을 박차고 올라가 단 일격에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검존 설태평.
그 쾌검은 신속이라고 칭함에 부족함이 없다.
– 화악!
– 콰악!
그러나, 목이 없는 일귀의 몸뚱아리는 그대로 주먹을 휘둘러서 설태평을 후려쳐버렸다.
공중에 떠있는 상태에서는 어떻게 피해볼 수도 없었다.
“커헉!”
– 콰앙!
설태평은 그대로 일귀의 주먹에 맞아 날아가, 그대로 서고 건물의 벽에 부딪혀버렸다.
– 콰가각!
– 쿠웅! 퍼서석!
그대로 무너져내리는 건물의 잔해가 설태평을 덮쳤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린다.
“이런 미친!”
왕한은 얼른 평정을 되찾고 자리에서 일어나 시녀를 챙겼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괴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괴물은 목을 베어도 움직인다.
바닥에 떨어진 일귀의 목이 그대로 연기가 되어 흩어진다.
그러더니… 목이 없던 몸뚱아리에 다시금 그 목이 솟아올랐다.
마치, 처음부터 베인 적도 없었던 것처럼.
진짜 괴물이다.
저런 걸 어떻게 죽이라는 거냐.
그리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왕한은 시녀를 등에 업고 장래의 상태를 살폈다.
장래는 어렵사리 몸을 다시 일으키고서 검을 다잡고 있었다. 그도 직감적으로 깨달은 듯 했다.
저 일귀 평량은 자신의 수준으로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적궁의 무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등을 보이지 않는다.
갈수록 거세지는 빗줄기 때문에 시야조차도 제한된다. 그 시야의 끝에 언뜻언뜻 보이는 일귀의 눈빛에는 살기가 감돈다.
일귀가 다시금 태도를 잡아쥐고 자세를 낮췄다.
한 번의 도약, 한 번의 검격. 그것만으로도 장래의 목숨은 허무하게 날아가버릴 터다.
눈으로 쫓을 수조차 없는 일귀의 검은 제 아무리 적궁의 무사장이라도 쉬이 받아낼 수 없다.
장래는 이를 악물며 검을 다잡았다.
막으려 들면 안 된다. 그대로 다진 고기가 되어버릴 것이다.
흘릴 수도 없다. 아주 약간의 여파만으로도 뼈가 바스라져버릴 것이다.
피해야 한다. 허나,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그 검격을 어찌 피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장래가 이를 부서질 듯이 꽉 깨물며 두 눈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차였다.
– 콰악!
– 탁!
그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자가 한 명 더 있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다.
정신을 차려보면, 건물 잔해에서 튀어나온 설태평이 검집을 쥐고 일귀의 앞에 착지하고 있었다.
빗속에서도 휘날리는 그 옷깃 탓인가, 마치 나비가 풀잎 위에 착지한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도 잠시.
설태평은 그 무거운 한철중검을 뽑아내며 일귀의 검을 올려쳐버린다.
장래가 올려쳤을 때와는 그 충격부터가 다르다.
당장이라도 날아들 것 같던 일귀의 검이 한 차례 크게 위로 튀었다.
– 카앙!
– 화악!
그 한 합의 충격이 퍼져나가는 것만으로도 일대의 빗방울이 한차례 떨렸다.
일귀의 시야 아래에서 검을 다잡고 있는 설태평. 그의 눈에도 어느덧 귀기가 감돌고 있었다.
머리에는 피가 흐르고 있고, 옷에는 흙먼지가 가득히 묻어있다.
그러나,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그 눈에 서린 한기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도신을 타고 흐르는 냉기조차도 마치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끝없이 번개와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이 청도궁에, 괴물은 하나만이 아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설태평의 검이 한 번 더 일귀를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