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
001화. 종말의 날 (1)
“이민준 씨, 뇌종양입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입을 열자, 민준은 멀뚱거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선생님이 방금 뭐라고 하신 거지?’
최근 속이 좋지 않고 구역감이 심해졌던 그는, 얼마 전 내과를 찾았었다.
그리고 그곳에선,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다고.
이후에도 계속 구역감이 느껴진다면 신경외과를 한번 가보는 건 어떻겠냐며 이곳을 추천해주었다.
속이 아픈데 왜 신경외과를 가야 하는 건지 의아했지만, 의사 선생님이 하는 말이니 못 이기는 셈 치고 한번 와봤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분명 자신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는 역시나 헛걸음했다며 혼잣말이나 중얼거리고 있어야 했다는 말이다.
“교모세포종이라고 자세한 건 조직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위치가 좋지 않아요. 두통과 구역질이 나는 것도 다 이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
‘꿈인가?’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찌릿한 고통이 신경을 타고 뇌로 전달됐다.
“그럼 치료하면… 되는 겁니까?”
“….”
“아! 수술해야 합니까? 무섭긴 하지만, 나으려면 어쩔 수 없죠. 날은 언제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수술… 해야죠. 최대한 종양을 들어내고, 방사선치료를 해야 합니다.”
“…선생님?”
“환자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완치되는 경우가 전혀 없는 병도 아니고-”
“….”
“마음을 굳게 먹으셔야 합니다. 그래도 임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관리를 통해 완치된 사례도-”
교모세포종 환자에게 평균적으로 남은 수명은 12개월 남짓이라는 말을 차마 의사는 입 밖으로 내뱉기 어려웠나 보다.
다른 환자들의 통계라며 보여준 차트 아래에 적힌 영문을 내가 알아보지 못하리라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게 그 의사가 시한부 환자를 대하는 나름의 방법이었을까.
의식이 몸을 떠나 허공을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1년.”
고아로 자라 자식에게만큼은 그가 겪었던 가난과 고통을 전해주고 싶지 않았던 민준은 정말 지독하게도 공부했다.
알바를 하는 시간 외에는 밤낮을 잊고 오직 공부 하나에만 절절히 매달렸다.
그렇게 전액 장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전에야 사회초년생이 된 그였다.
‘이게 무슨….’
의사가 뭐라 뭐라 떠들고 있음에도 비척비척 일어나 진료실을 나섰다.
우우우웅-
진료실 문을 닫자, 아직 할부가 끝나지 않은 그의 신형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네, 김 대리님.”
[오, 민준 씨. 병원은 잘 다녀온 거예요? 이따가 사무실 들어올 때 클립이랑 볼펜 좀 사 와요. 법인카드 들고 있죠?]“…대리님. 저 뇌종양이라고 합니다.”
[네, 알겠…. 네? 뭐라고요?]“1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런데, 우선 오늘은 집에서 쉬어도 되겠습니까?”
[아, 아… 네. 소장님께는 말씀드려 놓을게요…. 푹 쉬고 일단 내일 얘기해요.]뚝.
끊어진 통화음을 잠시 듣다가 주머니에 휴대폰을 욱여넣었다.
어지러웠다.
잠이 절실했다.
‘자고 일어나면 분명, 꿈에서 제대로 액땜했다며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을 거야.’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주차장에 도착해 차 키의 버튼을 눌렀다.
취직기념으로 샀던, 연식이 오래된 중고 경차가 눈을 깜빡이며 민준을 맞이했다.
문을 열고 탑승해 바로 주차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끼이이이익-
힘겨운 소리를 내며 열린 창문 밖으로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올림픽대로를 타자 이곳저곳에 푸른 새싹이 움트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바깥엔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누구 맘대로 시한부야. X까라 그래.’
그의 인생도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는 중이었다.
아니. 그 끝이 1년짜리 시한부인 줄은 모르고, 병X처럼 봄이 오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민준은 혼이 반쯤 빠져있는 상태였지만, 그의 손은 익숙하게 그의 보금자리가 있는 가락시장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송파대로에 올라서자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하늘에 서울타워가 우뚝 솟아있었다.
“내 꿈….”
열심히 일해서 언젠가 저곳에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보겠다, 마음먹었더랬다.
그랬기에 지금 살고 있는 작은 원룸도, 어디서든 서울타워가 보이는 가락시장 방면에서 잡았던 것이었다.
물론 신이란 놈은 그런 행복을 선사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X발…. 미리 말이라도 해주던가. 혼자서 김칫국만 드럽게 마셨네.”
쾅!
그는 씹어먹듯 중얼거리며 핸들을 세게 내려쳤다.
눈앞이 안개가 낀 듯 흐려졌다.
흐르는 콧물을 삼키며, 눈가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 냈다.
“무조건 산다. 수술하고, 치료받아서 꼭 살아남을 거야. 내가 지금 이 출발선에 한 번 서보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X발…. 절대 포기 못 하지.”
형형한 안광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차를 몰았다.
그렇게 잠실역 사거리를 앞뒀을 때.
피슈우-
계기판이 꺼지면서, 잘 달리고 있던 차 시동 또한 꺼져버렸다.
“어? 뭐야? 이거 왜 이러지?”
빠아아앙! 빵! 빵!
동시에 전방에서 거친 클락션과 충격 소리가 들리더니 앞차가 급정거했다.
쿵!
비상등 한번 없이 멈췄기에 민준 역시 앞차를 박을 수밖에 없었는데, 동시에 터진 에어백이 민준을 보호했다.
“으으윽…. 갑자기 뭐야….”
차 보닛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발을 움직여봤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긴 했지만.
“이 새끼야!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새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테 말하는데, 어디 반말을 찍찍-”
“아 됐고! 보험사 불러!”
밖에 소란스러운 걸 보니, 사고 차량이 한두 대가 아닌 듯했다.
사고가 나면 일단 뒷목부터 잡으라는 누군가의 조언을 따라, 차 문을 열고 나가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이봐요. 그렇게 급정거를 하시면….”
그렇게 뒷목을 잡으며 사거리를 바라본 민준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잠실역 사거리는 온갖 차들이 뒤엉켜 연기를 피워대고 있었고, 각 차에서 내린 십 수명의 차주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예상보다 큰 스케일에 놀라 민준이 버벅거리고 있을 때, 사거리 중심에 있는 SUV 차량의 문이 열리면서 웬 중년 남성이 굴러떨어졌다.
주변 사람들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느라, 그 남성이 피를 흘리든 말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 그래도. 사람이 쓰러졌는데.”
빠르게 달려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를 올바른 자세로 눕히고 상태를 살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다행히 정신은 있었지만, 상태가 위중해 보였다.
“으으…. 괜찮… 아요. 그냥 머리만 좀… 윽!”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119 버튼을 눌렀지만, 통화음 자체가 울리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왜….’
전화뿐 아니라 아예 휴대폰이 먹통이었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닌지, 보험사에 전화하던 차주들 몇몇도 인상을 찌푸리며 계속해서 폰을 두드리고 있는 게 보였는데.
통신사와 제조사를 떠나, 어느 누구의 휴대폰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주변이 혼잡한 가운데.
쿠구구-
‘어? 방금 뭐가…?’
돌연히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 하나가 귀를 거슬리게 했다.
“아저씨, 잠시만요.”
쿠구구-
‘…?’
쿠구구구구구-
‘뭐가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 같…?!’
뭔지 모를 소리를 이제야 정확히 들었다고 생각한 찰나.
갑자기 땅이 울리며 사고 차량들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지… 지진이다!”
“어, 어어…. 어!”
“꺄아아악!”
민준 역시 소리치며 다친 운전자를 감쌌다.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들려왔고. 인도와 차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주변 물건을 붙잡고 자세를 낮췄다.
도로에 면한 빌딩들은 낮은음의 비명을 지르며 거체를 흔들어댔고, 그 위로 낭창낭창 휘어지는 고층빌딩들은 이내 깨진 창문과 가구들을 밖으로 뱉어냈다.
“나와! 나와!”
“어어어…!”
인도를 걷던 건장한 남성은 노인을 밀치며 도망쳤고, 쓰러진 노인 위로 책상이 떨어졌다.
그 옆에 서 있던 차주는 노인의 피가 흥건한 책상 조각으로 머리를 보호했으며, 다급한 어른들의 발에 아이가 깔려 죽었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연달아서 발생했다.
노약자 보호?
윤리?
자연재해 앞에서 그런 말랑한 가치는 무용(無用)했다.
사람들에게 치여 쓰러진 임산부 너머 순식간에 발생하기 시작한 사상자는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제 덩치를 불려갔고, 잠실역 사거리는 혼돈에 빠졌다.
쩌저저적.
설상가상으로 지진은 사람들의 의식의 속도보다 한걸음 빠르게 탐욕스러운 아가리를 뻐끔거렸다.
도로의 아스팔트가 갈라지며 차들과 사람들의 다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신호등은 이리저리 흔들리다 부러졌고, 그로 인한 스파크로 화재가 발생했다.
사람들은 지옥도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으나, 꽉 끼어버린 다리는 그들을 물고는 놔주지 않아서…. 그들 위로 떨어지는 물건이 끊임없이 안타까운 생명을 앗아갔다.
휴대폰을 붙잡고 애꿎은 긴급 전화번호만 마구 클릭했다.
“제발…! X발, 제발 쫌! 이건 왜 자꾸!”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이 사태를 빨리 누군가가 알아야 했다.
벌써 이곳에서만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사망자가 생겼고,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눈이 닿는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 * *
멈췄다고 생각한 지진이 다시 한번 찾아왔고,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깊은 절망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었다.
두 번째 온 흔들림은 처음 것보다 강했다.
“두 번째? 젠장…. 도망쳐야 하는데….”
주진(主震).
뒤늦게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했던 지구과학책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콰가가가가강!
강하게 흔들리던 서울타워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반 토막 난 것을 시작으로 흔들리던 고층빌딩들이 하나둘 지진을 이기지 못하고 반파(半破)되어 갔다.
운 좋게도 민준이 서 있는 곳으로는 반파된 건물 조각들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그건 민준이 운전자를 구하러 사거리 한복판으로 나왔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물건들이 떨어지는 길가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것뿐이었고.
주변에서 무너진 건물 탓에 분진으로 시야가 자욱한 건 여기도 매한가지였다.
거듭되는 재난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병으로 죽기 전에 당장 지진으로 죽게 생겼음에도, 그저 거대한 재연 재해에 무력하게 당하고 있을 뿐.
연달아 찾아온 지진에 민준은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땅이 세로로 기우는 듯하기도 해서, 흔들리는 몸을 가누는 것만 해도 힘겨웠다.
그만큼 인간이란 존재는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무력하고 나약했다,
무너지는 건물은 굶주린 아귀처럼 사람들의 비명을 잡아먹고, 실제로도 그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로 잡아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