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0
010화. 성주(星主) (2)
툭. 툭툭.
미지근한 봄비가 아스팔트 바닥을 짙게 물들이고 있는 아침.
거대 유충 하나가 작은 유충들 사이를 가로질러 잠실역 사거리의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요?
– 서울 월드의 팬더 조각상이 보이는 걸 보면 이쪽이 남쪽 맞습니다.
민준과 소희가 쓰고 있는 ‘벌레탈’ 내부는 눅눅한 봄비가 스며들어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덥고 습했으며, 좁은 구멍으로 보이는 시야는 답답함을 한층 가중시켰다.
– 이걸 이고 3km를 걸어가려면 죽어나겠네요.
– 벌레들에게 쫓기는 것보다야 나으니까요.
제아무리 유충의 내장을 들어냈다고 하지만, 단단한 외골격 자체의 무게 또한 상당했다.
이는 유충을 죽여 근력 레벨이 늘어났음에도 그랬기에, 소희의 말마따나 이걸 이고 가려면 평상시 걸어가는 시간에 배 이상은 족히 걸릴 것이 분명했다.
낑낑대며 탈을 들고 옮기던 그녀는 조금이나마 힘듦을 덜고자 입을 열었다.
– 그런데 새삼스럽긴 하지만 저 ‘별’이란 건 대체 뭘까요?
출발하기 전에 봤던, 사거리에 있는 검은 돌에 대한 이야기다.
– 저 끔찍한 물체에 대고 ‘별’이라니, 모순적으로 들리는군요.
– 하늘에서 떨어진 별똥별이 저 검은 돌이니까 ‘별’은 맞죠. 하여튼 민준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 글쎄요. 상식을 벗어난 상황이 벌어지던 순간부터,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소희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부지런히 주위를 살폈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보다, 당장 처한 상황이 더 중요했다.
– 치. 재미없게. 저는 말이죠, 이렇게 생각해요. 저 별이 유충들을 생산하는 일종의 ‘부화소’인 거죠. 그래서 돌을 부숴야 벌레가 사라지는 거고요.
그건, 민준 역시 의심하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저 상상대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 봉착하게 될 테니 믿지 않으려 외면해왔을 뿐이었다.
– 소희 씨 말대로 저 ‘별’을 부숴서 벌레가 사라진다고 합시다. 그럼 생존시간은 어디서 얻죠? 그렇게 따지면 저 돌을 부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그건….
– 정답이 안 나오지 않습니까? 자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당장 집중해야 하는 건, ‘가락시장까지 어떻게 무사히 갈 수 있을까.’인 겁니다. 우선 그것만 생각하죠.
– 네…. 알겠어요.
민준의 대답에 한껏 시무룩해진 소희는 앞에 서서 걷는 그의 발에 맞춰 발걸음을 옮기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전진해, ‘벌레탈’이 잠실역 사거리를 지나 석촌호수에 다다랐을 때.
두두두.
– 소희 씨 잠시… 방금 소리 들었습니까?
– 무슨 소리요?
– 방금 땅이 울리지 않….
두두두두두-
둘은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밀려드는 유충들의 파도를 마주했다.
왜 이제야 발견했을까. 좁은 시야각 탓에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인지, 그는 땅에서 갑자기 솟듯이 갑자기 나타난 유충들을 보며 소희에게 소리쳤다.
– 젠장. 탈 반대 방향으로 돌려요!
– 네?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왜요?!
– 설명은 이따가 할 테니 어서요!
벌레탈의 꼬리 부분을 맡고 있던 소희는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의문을 가졌으나, 민준의 다급한 음성에 서둘러 탈의 방향을 그들이 지나왔던 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무언가가 소희와 민준의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 어… 어어!!
– 탈 꽉 붙잡고, 흐름에 몸을 실어요! 여기서 엎어지면 100% 사망이니까!
민준의 외침에 둘은 이를 꽉 깨물고 벌레탈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들이 발을 구르지 않았음에도 파도를 탄 서핑보드처럼 북쪽으로 밀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 아이씨! 어떻게 내려갔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잖아요!
– 일단 살아야 다시 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군소리 말고 꽉 잡아요!
그렇게 둘이 20분에 걸려 힘겹게 내려왔던 거리를 단 3분 만에 주파하며 잠실역 사거리로 되돌아왔다.
가까스로 멈추게 된 둘은 황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 도대체 무슨 상황이에요?!
– 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유충들이 떼거리로 몰려들었어요!
민준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좁은 틈으로 밖을 살폈다.
하지만 시야에 담기는 것이라곤 잠실역 사거리를 가득 메운 유충뿐이었다.
– 어디, 저도 좀 봐요.
– 둘은 좁습니다!
민준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소희는 꾸역꾸역 탈의 머리 부분으로 왔고, 둘은 그렇게 끼어있는 상태로 작은 시야를 함께 공유했다.
– 뭔 벌레가 이렇게 많… 어? 저기! 저 흰색 덩어리. 고치 아니에요?
– 고치?
워낙 거대한 ‘별’ 탓에 눈에 띄진 않았으나, 바로 그 옆에 4m 크기의 하얀 고치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차 있는 유충들의 시선이 모두 저 고치를 향하고 있었다.
고치는 유충 혹은 번데기를 보호하는 ‘알’이다.
그 알의 크기가 저만하다는 것은 벌레의 크기가 저만하다는 것이고, 저곳에서 나올 녀석이 그냥 유충이 아니라 한 차원 더 진화한 개체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어떤 상황이든 둘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 젠장,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민준의 읊조림이 원인이었을까.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고치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 …도망치기에는 늦었겠죠?
그 모습을 본 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소희의 말에 민준이 주위를 둘러봤다. 수백 마리의 변종이 비를 맞으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고치가 변태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혼자만 튀는 행동을 하는 개체를 저놈들이 가만히 둘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둘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실금은 점차 퍼져 고치 전체를 감쌌고.
마침내, 뚜껑이 열리면서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 와, 씨….
– ….
이윽고… 고치에서부터 하나둘, 그 실체가 드러날수록 민준과 소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고치를 깨고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건 깃털 모양의 더듬이를 가진 거대한 회색 나방이었다.
일반 나방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꼬리 부분에서 뻗어 나온 네 개의 촉수 정도일 뿐. 그 외에는 전형적인 나방의 모습을 한 개체.
놈은 털이 잔뜩 달린 촉수를 꿈틀대며 4층 크기의 ‘별’ 위로 기어올랐고, 그와 동시에 수많은 유충이 몸을 낮췄다.
이를 눈치챈 민준이 망설임 없이 주저앉으면서 소희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벌레탈’도 몸은 낮추게 됐고, 다른 유충들과 같이 경배하는 모습이 되었다.
그는 쪼그려 앉은 채로 소희에게 속삭였다.
– 이거, 의식 같지 않습니까?
– 의식이요?
– 즉위식 같은 거 말입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 상황이 설명이 안 되지 않습니까.
둘이 대화하는 와중에도 주변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들렸지만, 탈이 몸을 낮추면서 시야가 바닥을 향했기에 둘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대화를 이어가는 것뿐이었다.
– 그럼 저 나방이 유충들의 왕이라는 거에요?
– 그렇겠죠? 후…. 이로써 생존 난이도가 더 올라가겠네요. 마구잡이로 움직이던 놈들에게 지도자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민준이 말을 마치자 둘 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크티네’가 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송파2지역의 모든 생물체는 마땅히 그녀를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별의 주인]
송파1지역 : 공석
송파2지역 : 아크티네
송파3지역 : 아틀낙
송파4지역 : 호넷
송파5지역 : 공석」
메시지를 확인한 둘이 눈을 마주쳤다.
– 많은 정보가 담겨있는 메시지네요.
– 그렇군요. 일단 송파구에만 5개의 별이 떨어졌고, 저 괴물 나방 같은 놈이 두 마리나 더 있다는 소리니까요.
–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죠?
– 일단 때를….
피이이이이이!!
순간 민준의 말을 끊는 초음파가 대기에 울려 퍼지더니, 음파에 호응하듯 유충의 바다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 어… 어어! 이놈들 움직이는데요?
소희의 말에 민준이 밖을 내다보곤 대답했다.
– 젠장. 이놈들 동쪽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 에? 엉뚱한 방향이잖아요!
– 그러니까 어서 힘 좀 써보세요!
– 민준 씨가 근력 레벨이 더 높잖아요! 힘 좀 써봐요!
– 지금도 충분히 안간힘 쓰고 있습니다!
둘은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한낱 개인이 재해에 가까운 현상을 거스르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벌레탈’은 유충의 파도를 따라 점차 동쪽으로 휩쓸려갔다.
– 후, 이미 그른 거 같아요.
– 일단 흐름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요.
둘은 계속해서 안간힘을 쓰다가, 이내 불가항력임을 깨닫고 몸에 힘을 뺐다.
몸에 힘을 뺀 둘은 그렇게 거대한 흐름에 따라 ‘방이동 먹자골목’ 방향으로 흘러 들어갔다.
* * *
방이동 먹자골목.
동길과 우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부서진 건물만이 가득한 골목길을 달리고 있었다.
술집과 노래방 간판이 쉼 없이 둘의 시야를 지나쳐 뒤로 사라졌다.
“헉… 헉….”
그 뒤를 유충 무리가 바짝 달라붙어 이들을 쫓았다.
민첩 레벨이 높은 정찰조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잡혔을 속도였다.
“팀장님! 이제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닥치고 뛰어야지!”
“언제까지고 뛸 순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할 시간에 발이나 더 놀려! 누가 엘리트 출신 아니랄까 봐, 대가리만 굴리고 말이야!”
그렇게 말한 동길이었지만, 그 또한 머릿속이 복잡했다.
분명 멀리서 염탐했음에도 ‘아크티네’란 놈은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자신을 정확히 응시했다.
‘미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렸다.
띠링!
이토록 급박한 와중에도 메시지는 떠올랐으나, 대충 보니 유충을 따돌리고 살아남으란 퀘스트였다.
X같은 메시지를 치워버린 동길은 다시 열심히 발을 놀렸다.
‘누굴 놀리나. 퀘스트 같은 거 아니라도 살아서 도망쳐야 한다고.’
“병아리! 38구경 가져왔어!?”
“그건 왜요! 저놈들한테 총 안 통하잖아요!”
어차피 쫓기는 신세에, 총소리가 조금 난다고 저놈들이 안 쫓아오진 않을 터.
“그래도 시간은 벌 수 있을 거 아니야! 대충 갈기면서 달려!”
탕!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길의 리볼버에서 불을 뿜어져 나왔다.
화약 냄새가 비 내음과 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탕! 탕!
총알에 맞은 유충 몇이 잠깐 멈칫했지만, 말 그대로 잠시일 뿐이었다.
‘젠장, 서장이 보내줄 때 떠났어야 했는데….’
며칠 전 사고가 터졌을 때, 서장은 서의 모든 인원에게 선택권을 줬었다.
‘가족 혹은 개인의 안위를 위해 떠날 사람은 떠나라. 하지만 남을 사람은 자신과 함께 송파구의 치안을 위해 힘쓰자.’
당시 서장의 언사는 어차피 지켜야 할 처와 자식은 먼 곳에 있었던 기러기 아빠 하나를 꼬드기기엔 충분한 말이었으나….
막상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빠지게 되니, 동길은 지난날 패기로웠던 자신의 주둥이가 이리도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후…. 아니다 동길아. 정신 차리자. 20년 동안 국민을 위해 일했는데, 한순간에 판단으로 그간의 노고를 헛되이 할 순 없지.’
마음을 가다듬은 동길은 열심히 발을 놀리는 동시에 궁리하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반드시 놈들을 따돌릴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