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아라네움 (2)
“제길….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때 빠졌어야 했다고.”
“아니! 내가 나만 살자고 그랬나?! 보물 못 찾아내서 꼰대가 나 쫓아내면, 어?! 서 수사관도 끈 떨어진 연 신세잖아! 그럼 얼마 안 가서 쫓겨날 게 뻔하고. 안 그래?!”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다들 죽어버렸…….”
그렇게 티격태격 다투며 걷던 두 사내의 손전등이 민준을 비추자, 그 둘은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동시에 창백해지는 얼굴. 마치 도깨비라도 본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앞선 생존자들처럼 지레 겁먹고 도망가지는 않았다.
‘밖에서 순위 경쟁하던 무리 중 하나다.’
민준은 곧장 둘을 알아봤다.
팀별 기여도 5위 안에 들던 이들 중에 유일하게 멀쩡한 생존자들이었으니까.
“혹시 동부지방법원…. 맞습니까?”
민준이 묻자 일견 양아치처럼 보이는 올백 머리의 젊은 사내가 잔뜩 경계하는 눈길로 대꾸했다.
“맞는데…. 무슨 일입니까?”
“아, 별건 아닙니다. 간만에 멀쩡한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반가워서요.”
“저희도 반가웠습니다. 그럼, 이만-”
“잠시만요. 혹시….동행이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
밖에서 벌어졌던 난리 때문인 건지, 그들의 행색은 좋게 말해도 거지꼴을 면하기 어려워 보였다. 올백 머리 사내는 셔츠로 급하게 만든 부목으로 한쪽 팔을 감싸고 있었고, 중년 사내는 서 있는 게 불편해 보이는 게, 다리에 부상을 입은 듯했다.
그렇기에 민준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넬 겸, 이곳에 대해 머리 맞대고 고민할 ‘멀쩡한’ 사람을 구할 겸 동행을 요구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떨떠름해 보일 뿐이었다.
“…강요입니까? 그런 거라면 별수 없지만 따를 수밖에.”
“예? 강요는 아닙니다. 왜 저를 길에서 만난 불량배 대하듯 대하시는 건-”
“아닙니까?”
“예?”
“힘만 센 불량배. 맞지 않냐는 말입니다. 밖에서 봤을 때는 그렇게 보이길래.”
‘하…….’
그 사내의 말에 민준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라네움으로 들어오기 위해 날뛰었던 모습이 저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간 듯했다.
민준은 억울함을 토로하듯 그들에게 항변했다.
“아닙니다.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지는 알겠는데, 이 눈동자를 보면 제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 제 전 직업 특성상, 멀쩡한 세상일 때도 선량한 시민인 척하는 싸이코 X끼들을 너무 많이 봐서……. 아, 그쪽이 그렇다는 말은 절대! 절대 아닌데. 그렇게 들렸으면 또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크흠.”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민준이 상처 입은 마음을 부여잡으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그를 세밀히 관찰하는 올백 머리의 사내의 눈동자에 푸른 광망이 맺혔다 사라졌다.
“그리 불편해하시니 저는 그만 가보는 게 낫겠군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민준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발길을 돌리자, 그 순간 뒤에서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과 상반되는 무척 공손한 태도.
“죄송합니다.”
“…?”
“방금 전, 무례를 범해 죄송했습니다. 그쪽이 선량한 시민이라는 말, 이제는 믿습니다.”
“…이제 와서 말입니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사내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민준은 그가 어떤 변명을 할지 두고 보기 위해 잠시 멈춰 섰다.
“보시다시피 저희가 좋지 않은 상황을 겪은 직후라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미궁이라면, 사람인 척하는 괴물을 만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 또한 맞는 말이었기에 민준은 쓰린 속을 다스리며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조금 전 만 해도 가벼운 모습으로 동료와 티격태격하던 올백 머리 사내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차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옆의 중년 사내는 이 양반이 왜 또 이러나 하는 얼굴로 그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군요. 그럼, 그쪽 말대로라면 왜 저를 다시 붙잡으신 겁니까. 진짜 ‘괴물’이면 어쩌시려구요.”
“멸망 전 직업 덕분인지 전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스킬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세한 효과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민준 씨가 쌓은 엄청난 업보 수치를 확인했다는 것만큼은 말씀해 드릴 수 있겠네요.”
민준은 몇 가지 힌트만으로 스킬의 효과를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단순히 업보만을 알 수 있는 스킬이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터. 그러니 숨겨진 능력이 있다는 소리는.
‘제한적으로나마 상대방의 시스템적 정보를 엿볼 수 있는 스킬일 수도 있겠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스킬이었다.
민준은 그의 시선에서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그렇기에 그에게 호기심이 샘솟았다.
그리고, 옆의 사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 비단 민준만이 아닌 듯했다.
– 아니, 구 검사님 저 사람이랑 뭘 어쩌시려고요. 저희는 그놈들과 같은 팀을 짜기로 하지….
– 아씨, 조용히 안 해? 상황이 이렇게 꼬여버렸는데, 그런 범죄자 놈들이랑 한 약속 따위 지켜서 뭐하게. 그 X끼들한테 신뢰가 있어, 뭐가 있어. 게다가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놈이 우리랑 한 약속 따위를 지킬 거 같아? 일단 살아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내 눈 못 믿어? 저 사람 장난 아니라니까? 나중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던 지금은 저 사람 꼭 붙잡아야 한다고.
– 그래도….
둘은 그들만의 방법을 이용해, 다른 이는 들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눴고.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눈빛만으로도 의견에 충돌이 있음을 눈치챈 민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크흠…. 두 분의 의견이 다르신 거 같은데, 저는 이만 가-”
“아! 아닙니다. 제가 잘 설득했습니다. 저는 동부지방법원의 구영기 검사라고 합니다. 원래라면 동부지검 소속이지만 종말의 날에 그쪽은 무너져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수사관, 서서기 수사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옆에 서 있던 중년 사내, 서서기가 머뭇거리며 허리를 굽히자, 민준 또한 자신을 소개했다.
“네, 안녕하세요. 이민준이라고 합니다. 그럼 두 분 다 동행에 동의하셨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런데 동행하기 전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민준 씨 실력이면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실 텐데 왜 굳이 저희를…….”
“아무래도 이곳을 탈출하려면 여럿이서 머리를 맞대야 할 것 같더군요. 그래서 한시적으로나마 이곳에서 함께할 동료를 찾고 있었습니다.”
무력이 필요한 부분이야 자신이 얼마든지 감당 가능하나, 현시점에서 필요한 건 이곳에 대한 이곳을 직접 겪었던 다양한 정보였으니까.
오히려 협력은 민준에게 더욱 절실했다.
“어……. 설마 이곳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모르고 계셨던 겁니까?”
마치 당신 정도 되는 이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얼굴.
누군가가 그 표정을 봤다면 화부터 냈을 테지만, 정보를 얻고 싶다는 갈증에 고통받던 민준이었기에 경탄의 감정이 먼저 들었다.
“그럼 두 분은 알고 계셨던 겁니까?!”
민준의 질문에 구영기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으로 답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누렇게 빛나는 금속 조각 세 개.
민준은 말없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길잡이의 나침반’ 조각 A]
분류: 재료
정보: 사용자가 바라는 장소를 안내해주는 ‘길잡이의 나침반’의 조각. 세 종류의 조각을 모으면 완제품을 얻을 수 있다.」
‘아.’
그리고 그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을 만났던 이들이 그렇게 놀라며 도망쳤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들은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자신에게 빼앗길까 저어했던 것이었다.
“지금 저희에게 A 조각 하나와 C 조각 두 개가 있습니다. B 조각만 얻으면 되는 상황이죠.”
“이걸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아직 ‘방’을 발견하신 적이 없으시군요.”
“방?”
“흠, 민준 씨가 방을 클리어할 사람을 구하려고 동행을 찾으시는 줄 알아서 저희가 짐이 될까 걱정했는데……. 이걸로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렇게 구영기는 이곳에서 겪었던 자신의 경험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민준에게 생소한 것이었다.
이 미로 안에는 곳곳에 있는 ‘방’이라는 공간. 그곳에서는 무작위로 적이 출현한다.
숫자로 밀어붙이는 거미 떼가 나타날 때도 있었고, 특별한 능력을 지닌 특수개체 거미가 등장할 때도 있었으며, 마인이 만난 적도 있다고 했다.
“특수개체까지는 부침이 있어도 저희 팀원끼리 힘을 합쳐 어찌저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마지막 B 조각을 얻기 위해 방에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저희는 그곳에서 마인들을 만났는데……. 이런저런 마인이야 밖에서도 만난 경험이 있었으나, 놈들은 그런 어중이떠중이와는 궤를 달리하는 놈들이었습니다. 그나마 동료들이 목숨 걸고 막아준 덕분에 저희 둘만 겨우 도망칠 수 있었죠…….”
민준은 그제야 그들의 행색이 왜 이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단지 밖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전투 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방이란 걸 그렇게 자주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저는 여태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는데요.”
“저희가 특별한 케이스긴 할 겁니다. 물론,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건……. 운이 안 좋았다는 말로 퉁치기에는 조금 대단한(?) 일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반대로 생각하면 운이 엄청 좋으셨던 걸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별다른 위험에 빠지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저걸 위로라고…….’
구영기는 민준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며, 옆에 서 있는 서서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여기, 서 수사관이 방금 말씀드린 ‘저런 사람’ 입니다. 저희가 방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이 사람 덕분이거든요. 예전부터 숨어버린 범죄자는 물론이고, 은닉한 비자금 등, 무언 갈 찾는 행위에는 도가 튼 사람입니다. 예전에 이 사람을 제 수사관으로 데려왔단 것 또한 그런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죠. 그러니 길잡이를 찾으셨던 거면 잘 선택하신 겁니다. 민준 씨는 편하게 따라오시죠.”
“그럼 방을 찾는 건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그 대신 방을 클리어하는 건 저에게 맡겨주시죠.”
민준의 부탁에 서서기는 말 대신 앞장서서 걸어감으로써 이에 대답했고.
그렇게 셋은 출출해질 때마다 에너지바와 육포로 끼니를 때우며 미로를 헤매기 시작했다.
생존시간이 줄어들질 않으니 확인할 순 없었지만, 3번의 식사시간을 가졌으니, 아마 하루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것으로 추측되던 날.
민준의 눈에 앞장선 서서기가 갈림길에 설 때마다 어느 때는 왼쪽으로 어느 때는 오른쪽으로, 그렇게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기준이 있는지, 아니면 어떤 스킬이나 칭호의 효과를 받고 있는지 알 순 없었으나, 그만의 기준이 있는 듯 보였다.
“…어?”
그러던 중. 일행이 처음으로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민준은 벽에 커다란 거미 무늬가 그려진, 평소의 막다른 길과는 조금 다른 생김새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