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1
011화. 성주(星主) (3)
“후욱… 훅….”
가랑비가 조금씩 옷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끝내 신발과 양말까지 다 축축해졌다.
인제 와서는 이게 땀인지 빗물인지 알 수도 없게 되었고, 병아리 녀석 몸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는 둘이서 얼마나 오랫동안 도주하고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줬다.
“팀장님! 이쪽으로 가야 합니다! 왼쪽 골목에서도 놈들이 몰려와요!”
전방을 주시하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이놈은 망원경 없이도 멀리 볼 수 있는 정찰 스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전투능력을 지닌 나와 같은 페어를 맞춰서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생존시간의 소모가 크기 때문에,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건만…. 녀석이 또 스킬을 사용한 것 같았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위험하다는 거겠지…. 젠장, 이대로 가다간 다 죽겠는데.’
만약 둘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다면, 하다못해 저 병아리만이라도 살려 보내야 했다.
벌써 순직하기에는 앞으로 남은 삶이 창창한 놈이라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야 정찰한 정보를 서(署)에 전달해 줄 수 있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서에 있는 인원들도 성주가 출현했다는 메시지는 봤겠지만, 그게 어떤 괴물인지 알아야 도망치든 반격하든 대처를 세울 것이 아닌가.
물론 반격은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하는 동길이었으나, 이렇게 괴물들이 판치는 세상이 된 판국에 이에 대항하는 구원자가 없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아니, 일단 헛된 생각일랑 말고 지금 당장 도망치는 것에 집중하자.’
동길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 멀리 몰려오는 유충 무리를 뒤돌아봤다.
‘잘만하면 뚫을 수도 있을 거 같긴 한데….’
서장의 명령으로, 지금 서에 남아있는 모든 인원들은 거미든 유충이든 벌이든 한 마리 이상씩은 잡아본 경험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신이라면 작은 유충 몇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떼거지 같은 숫자와….
‘저, 거대 유충이지.’
작은 유충 몇을 잡아 죽이면서 길을 뚫어볼까 싶다가도, 저 뒤에서 느지막이 쫓아오는 황소만 한 유충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마음이 쏙 들어갔다.
‘씨X, 저 새끼는 우리한테 무슨 원수를 졌길래 악착같이 쫓아오는 거야.’
놈은 끈질기게 자신들을 쫓아왔다.
작은 유충을 앞세운 놈은 아무리 떼어내고 도망가려 해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
마치 작은 유충이 주는 정보를 따라 자신들을 추격하는 것 같았는데.
‘지능이라도 있는 것처럼 우리를 몰고 있어.’
놈들이 점점 구석의 막다른 길로 자신과 병아리를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 그대로 ‘몰이 사냥’, 딱 그것과 같았다.
‘저놈들한테, 이 상황을 지휘하는 개체가 생긴 게 분명하다.’
올림픽 공원에 있는 벌들도 지휘체계가 있긴 했지만, 그놈들은 무작정 두목을 따라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깡패의 느낌이 강했고.
잠실의 유충들은 조금 더 조직화 된 군대의 냄새가 났다.
“팀장님! 사방에서 놈들이 몰려옵니다. 어디든 탈출로를 뚫어야 해요!”
막내에 외침에 정신을 차린 동길은 주변을 살폈다.
간절한 소망이 닿았을까, 눈에 띄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저거다!’
그 건물을 보자마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병아리, 이쪽으로!”
그렇게 달려가 도착한 곳에는 넓은 부지의 골프 연습장이 있었다.
연습장에는 40m 정도 돼 보이는 트러스 기둥이 여러 개 꽂혀있고, 그 기둥마다 골프공을 막는 초록색 그물이 걸려있었다.
‘땅값 비싼 잠실에 왜 이런 게 있는지 모르겠다만, 우리에겐 다행이다.’
“야, 병아리! 여기서부턴 내가 맡는다. 넌 뒤도 돌아보지 말고 서로 뛰어가!”
“팀장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 말에 병아리 녀석이 발끈하며 대꾸하자, 버럭 하고 화를 냈다.
“이 폐급 자식이 끝까지 말 안 들어 처먹네! 빨리 안 뛰어? 여기서 둘 다 뒈져야 속이 시원하겠어?! 누군가는 우리가 본 걸 서에 전달해야 할 거 아니야!”
“팀장님….”
말끝을 흐리는 병아리를 뒤로하고 성동길 팀장은 골목 한편에 서 있는 트러스 기둥으로 뛰어갔다.
쾅!
허리춤에서 꺼낸 진압봉이 휘둘러지자, 큰 충격음이 들리면서 쇠파이프가 우그러졌다.
“뛰어! 어서!”
“…팀장님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동길의 외침에 녀석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내며 골목 저편으로 뛰어갔다.
“저 꼴통 새끼. 나 죽으라고 사망 플래그까지 살뜰하게 세워주고 가네.”
매번 폐급이라 욕했지만, 사실 유능한 놈이었다.
선수 출신 특채로 뽑힌 자신과 다르게 경찰대를 수석 졸업한 녀석이니 여러 말 해봐야 입만 아프지.
녀석 정도면 그나마 얇은 포위망 정도는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쾅!
끼이이익-
진압봉을 다시 한번 휘두르자, 기둥이 비명을 지르며 기울어졌다.
두두두-
저 앞에서 유충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급해진 동길은 수명을 대가로 강타 스킬까지 사용해 사정없이 기둥을 때리기 시작했다.
쾅! 쾅! 쾅!
한 번 칠 때마다 기둥이 기울어지긴 했으나…. 동길이 바라본 손목의 숫자는 정직했다.
32.
스킬을 연달아 썼더니 벌써 생존시간을 많이 소비해버렸다.
‘이제 많이 써야 두 번이 한계.’
어차피 놈들에게 잡히면 뺏길 시간, 시원하게 써버리는 게 낫다.
쾅! 끼이익.
쾅! 끼이이이익-
콰가가가가강!!
간절한 소망이 닿았는지 마지막으로 사용한 강타에, 거대한 트러스 기둥이 쓰러지며 몰려오는 유충을 덮쳤다.
유충들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굉음에 묻혔다.
81.
아이러니한 건, 기둥에 깔린 유충을 잡은 것으로 쳐줬는지 생존시간이 다시 늘어났다는 것이다.
사즉생(死卽生)이라고 했던가?
“크크, 그래 봤자지.”
어차피 막내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려면 고사 속 장판파의 장비가 되어야 했다.
달그락. 달그락.
부서진 건물의 잔해 속에서 놈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한 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수십 마리.
골목을 가득 메운 유충들이 다시금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빗물이 떨어져 놈들의 갈색 외피를 타고 흘러내렸다.
끼륵. 끼륵-
놈들이 겹눈에 묻은 빗물을 연신 닦아 내며 나를 주시했다.
목숨을 내려놓을 각오를 마쳤다지만, 몸은 솔직한지 긴장감에 입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진압봉을 꽉 움켜쥐었다.
무려 80시간을 주고 산 진압봉이었으니, 끝까지 자신을 지켜줄 터였다.
휘익-
놈들의 공세가 시작됐다. 가장 선두에 자리 잡고 있던 놈이 달려들자, 옆에 있던 놈들도 다 같이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머리!’
콰득.
우선 정면에 있는 놈의 골통을 깨부수긴 했으나, 좌우에서 짓쳐오는 갈고리에 스쳐 피가 튀었다.
지금 상처 따위에 신경을 쓰는 순간 저 거대한 파도에 쓸려나갈 것이란 생각에, 동길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발을 놀렸다.
죽도(竹刀) 대신 쥐어 든 진압봉.
그래도 과거에 검도선출로 날렸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나이가 있으니 그때처럼 움직일 순 없겠지만, 경험만은 온전히 남아 벌레들의 머리를 터트리는 데에 힘이 되어줬다.
“후우… 후욱….”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동길은 진압봉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유충을 죽이고 늘어난 시간은 다시 강타를 사용함으로 사라졌고, 유충의 초록색 진액과 빗물은 섞여 옷을 적셨다.
세 놈이 달라붙으면 한 마리는 꼭 지옥으로 보내줬다.
‘하, 씨…. 내가 조금만 더 젊었어도.’
세 놈이 달라붙으면 한 마리는 꼭 지옥으로 보내준다는 말은 곧, 2마리는 남아서 동길의 시간을 빨아먹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숫자 앞에 장사 없는지, 점차 몸에 박히는 놈들의 주둥이 숫자가 늘어났고.
이제는 유충을 죽인 후에도, 강타를 사용할 시간이 부족해졌다.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니, 몸에는 점차 더 많은 주둥이가 꽂혔다.
피를 많이 흘려서일까 아니면 생존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조금씩 뭉개졌는데.
흐릿한 시야로 유충이 하나가 달려드는 게 보였다.
‘이제 끝인가?’
사람들이 말하길, 죽기 직전에 살아왔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그때가 찾아오니, 그런 이야기는 순 거짓말임을 깨달았다.
지금 드는 생각은 오직 한가지였다.
‘살고 싶다.’
‘개똥밭을 굴러서라도 살고 싶다.’
콰득!
생에 마지막 순간.
눈앞의 유충이 터져나가는 걸 보며 동길은 간절히 생을 염원했다.
‘잠깐만…. 콰득?’
눈앞의 유충이 폭사하면서 얼굴로 초록 진액이 잔뜩 튀었다.
자신이 죽인 것도 아닌데, 눈앞의 유충은 어떻게 혼자 터져버린 걸까.
얼굴에 튄 질퍽한 진액의 느낌에 정신을 차린 동길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저놈이 왜 나를…?’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는 지금도 믿기지 않았지만.
자신을 구해준 건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쫓아왔던 ‘거대 유충’이었다.
의아했다. 도대체 유충이 왜 인간을 살려준단 말인가.
잡아가서 아껴먹으려고? 아니면 나를 인질 삼아 다른 인원들을 꿰어내려고?
지금까지 보여준 놈들의 움직임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생각이 들었다.
동길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야 하나라고 고민할 찰나.
“…어?”
동길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태어나 여태껏, 이처럼 당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당황한 건 자신만이 아닌 듯했다.
벌레 놈들에게 표정 따위는 없을 진데, 놈들의 동요가 여실히 느껴졌다.
‘이게 무슨….’
자신을 구해줬던 거대유충이 탈피(脫皮)하더니, 그 속에서 사람 두 명이 튀어나와 유충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다 하다 놈들이 인간형으로 진화까지 하는 건가?’
어이없는 생각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지만, 그렇다 한들 제 동료를 학살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대유충으로부터 튀어나온 둘을 유심히 살폈다.
한쪽은 짙은 이목구비에 건장한 체격을 지닌 남성이었고, 다른 한쪽은 작은 키에 귀여운 외모를 지닌 여성이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둘은 인간이었으나, 죽기 직전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함께 살아난 동길의 사고는 아직 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저씨! 우리도 기둥에 깔려 죽을 뻔했잖아요! 그건 그렇고 아저씨 이름이 ‘성동길’ 맞아요?”
“…에? …예예.”
그들이 다가와 말을 걸어준 후에야.
자신이 죽은 게 아닐까 착각하던 동길의 뇌가 다시금 생을 이어갔다.
‘구세주를 바랬다고 진짜 보내준 건가?’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보다 말이 안 되는 장면을 눈앞에서 봤기에, 그의 상상은 오히려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민준 씨, 이 아저씨 선 채로 기절한 거 아니에요?”
“충분히 놀랄만한 상황 아닙니까. 그럼, 제가 시간을 버는 동안 치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야 퀘스트를 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저씨, 들으셨죠? 일단 상처 좀 이리 내봐요.”
소희라고 불린 여성이 그렇게 말하고는 동길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역시 사즉생(死卽生)이란 건가….’
죽고자 했더니,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