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호사다마(好事多魔) (4)
뒤늦게 도착한 정진호와 강세진 그리고 나비.
그들과 전병철에게 들은 정보를 합산한 결과, 다행히도 세상에 찾아온 변화의 흐름이 자신의 예상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거점 캠프 (2), (3), (4)’ 주변을 다 돌아다녀 본 결과, 이 일대에 생긴 틈은 최소 서른 개 이상. 그리고 여기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건 눈앞에 있는 틈과 같이 모두 동일했습니다. 타니라는 존재가 이를 막고 있다고 하더군요.”
‘타니가 막고 있다라…….’
녀석이 왜 틈을 막고 있을까. 저 너머로 가선 안 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
민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여러 생각이 고개를 쳐듦에도, 이를 알 리 없는 정진호는 자신이 알게 된 정보들을 계속해서 보고했다.
“그리고 새로 생겨난 괴물들은 곤충 형태였던 기존의 사도들과 달랐습니다. 크게 설치류, 고양잇과, 조류, 그리고 간혹 개과 괴물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도심에 살아가던 동물들이 변한 것이겠죠.”
“네, 대장. 나비가 변한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들에게는 각자의 영역이 있는 듯한 게, 얼마 전 거대한 쥐 수십 마리와 호랑이와 비슷하게 생긴 거대한 짐승 하나가 대치하는 모습을…….”
‘틈이 생기면서 그 옆에 있던 나비가 변했다.’
정진호의 보고가 계속됨에도 민준의 머릿속에서는 새로운 정보를 듣는 것과 동시에 여태까지 들었던 정보를 바탕으로 정립된 생각의 가지가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금 하나로 합쳐져 추론 하나를 완성했다.
‘새로운 틈의 성격은 강력한 이계화(異界化). 아니, 사도의 틈과는 다른 모습으로 지구를 탈바꿈하고 있으니, 명칭도 다르게 부르는 게 좋겠어.’
비록 민준, 자신이 편하게 부르고자 붙인 명칭에 불과하나 엄연히 다른 곳임이 분명하니만큼 명칭 또한 다르게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정화된 틈 너머에 있는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일단 지금 이곳, 그리고 사도의 이세계와는 다른 곳일 것이 확실하니, 별세계(別世界)라고 부르자.’
무식하고 단순하지만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자신이 부르고 구별하기 쉬우면 그만인데.
어쨌든 별세계와 연결된 틈을 통해 주변의 모든 게 변하고 있었다.
도심에 거대한 숲이 자라났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동물들이 변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쁠 건 없었다. 아니,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피어난 변화의 새싹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새싹이 어떻게 자라날지 현재 모든 걸 추측할 수 없지만, 인간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있었으니. 민준은 타니의 태도에서 분명한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현재까지 돌아가는 상황이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인간을 노리는 새로운 적이 생겼지만, 적어도 그들은 무작정 인간을 배척하려 들지 않았고.
생존자들은 그들을 통해 생존시간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변화된 환경에선 마석이 두 배로 자라나고 있다.
시간의 저주, 섭리(攝理)에 놓인 인간들이 생존하기에는 조금이나마 더 수월해진 것이다.
‘이런 뜻이었나…?’
그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대리자(代理者)] 칭호를 받았던 그때.‘이걸 받으면 내 안위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생존확률이 높아진다는 말…….’
그때 당시만 해도 자신이 강해짐으로써 자신과 친우들을 지키기 수월해진다는 것으로만 이해했었는데, 구세주는 아마 지금 상황까지 내다본 듯했다.
성주를 죽일 수밖에 없는 자신이 대리자 칭호를 얻게 됐을 때 벌어질 일들을 말이다.
‘일이 좋게만 흘러간다면, 나야 나쁠 것 없지.’
어쨌든 현재 상황에서 민준,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급박하게 변화한 상황은 생각보다 인간에게 이로웠고, 이러한 상황을 확실히 알기 위해선 틈 너머로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이마저도 타니가 막아놨다 했으니까.
‘동길 아저씨의 신원만 확인하면 되나…?’
민준은 눈앞에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틈을 바라보며 생각을 마무리했다.
이미 정진호는 보고를 마친 상태였고, 캠프의 인원들은 모두 민준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
주변의 인원들에게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사이 많은 생각을 정리한 민준이 입을 뗐다.
“그럼 현시점에서 저희에게 해가 될 건 없겠군요.”
“송파 경찰서로 가실 겁니까?”
“네, 지금 제가 떠나더라도, 여러분들은 잘 헤쳐나갈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민준이 떠나기 전 마지막 확인차, 달라진 틈에 대한 설명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빛무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민준은 당연하게 떠오를 불가 메시지를 기대했으나.
[사용자의 등급을 감지합니다.] [플래티넘 등급 사용자의 입장을 ‘타니’가 허합니다.]입장을 허락한다는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뭐…? 이런 젠-’
콰륵-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민준은 틈 속으로 종이가 구겨지듯 빨려 들어갔다.
““…….””
그와 동시에 침묵으로 물든 야외 훈련장.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그의 동료들은 얼이 빠진 얼굴로 민준이 사라진 빈자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 * *
한낱 종이도 7번 이상 접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틈을 통과하면서 민준이 받은 느낌은, 마치 사람의 몸을 그 이상 수십 번을 접어 작은 구멍 속으로 구겨 넣으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극악무도했다.
콰륵!
“…우-왁!”
민준은 그러한 더러운 기분을 유감없이 표현하며 틈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당황과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도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이곳이 어딘지부터 파악하려 애썼다.
그가 정한 생존의 제1 규칙이 바로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한 파악이었고.
지금껏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보니, 의식하지 않아도 이를 수행하기 위해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스템 메시지에 따르면 무려 플래티넘 등급이 되어야 넘어올 수 있는 세계였다.
그만큼 위험이 산재해 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일 테지만….
“….”
그런 걱정과 다르게 주변은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푸르른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목(巨木)으로 이뤄진 숲속.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빗줄기처럼 떨어지는 햇빛 아래에 서 있는 자신.
“X병…….”
그 간극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기분에 민준은 가장 당황스러울 때, 혹은 가장 엿 같을 때 내뱉던 욕을 뇌까리며 다시금 틈에 손을 댔다.
회의적이었지만, 혹시나 다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틈 사용 대기시간 24:00:00]틱.
과연 슬픈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는 건, 거의 진리에 가까운 사실.
역시나 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민준은 깊은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이 좋게 풀리는가 싶더니 결국 또 마지막에서 삐끗한다. 민준이 쉽게쉽게 가는 걸 보기 싫은 누군가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 전화위복이라잖아? 좋게 생각하자. 혹시 여기서 몸의 좋은 영약이라도 발견할 수도 있는 거잖아? 게다가 예전처럼 틈의 핵을 부수라는 등의 짜증 나는 조건은 아니니까.’
우연히 밖에서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을 테고.
이곳에서 하루 동안 잘 숨어있으면 다시 넘어갈 수 있으니, 하루 휴가를 받은 셈 치면 될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 별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김에 그때 마무리하지 못했던 재정비를 해야겠어.’
당장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빠르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한다.
거목의 드러난 뿌리 틈 사이에 몸을 숨긴 민준이 상태창을 열었다.
사실 별을 정화하고 들이닥친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러 가지를 하지 못했었다.
능력치 레벨을 올리지도 못했고, 새로 해금된 희귀 등급 아이템 마켓도 둘러보지 못했다.
우선 민준은 무려 가지고 있는 생존시간의 절반에 가까운 95,700시간을 소비해 능력치 레벨을 모두 Lv.80에 맞췄다.
마지막 전투에서 성력을 쓰지 못하게 됨과 동시에 아틀낙과 진흙탕 싸움을 하면서, 믿을 건 자신의 몸뚱어리 하나임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희귀 등급 무기를 찾아봐야 하는데. 뭐가 좋으려나…….’
그가 사용하던 ‘주인을 잃은’ 세트가 팔찌로 변하면서 잘 사용하고 있던 검을 잃어버린 셈이 된 민준은 새로운 무기를 구해야만 했다.
물론 [패왕(霸王)의 갑주]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무기이자 갑옷이었지만, 주먹으로 싸우는 것보다 아무래도 손에 익은 무기가 끌렸기 때문.
민준은 곧장 스페이스 마켓을 열어 해금된 희귀(Rare)등급 구역에서 무기 탭을 먼저 둘러봤다.
현재 능력치 레벨을 올리고 남은 생존시간은 총 104,280시간.
희귀등급 아이템이 1만 시간에서 6만 시간까지 되는 걸 감안하면, 쓸만한 걸 산다고 생각했을 때 최소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아이템 밖에 살 수 없었으니까.
‘어디 보자, 검이….’
그리고 가장 필요한 건 손에 익은 무기인 ‘검’이었다.
민준은 수많은 종류의 검들을 구경했다.
‘희귀등급은 이름부터가 다르네.’
[백록(白鹿)의 뿔], [세계수의 은총], [기사단의 충심], [도살자의 영혼], [피 묻은 궤멸자], [동방의 예기] 등등.이전에는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템 이름이 주인을 잃은 ‘대검’, 더미 ‘반지’, 거인 ‘해머’와 같이 도구의 명칭에 중점을 뒀던 것과는 다르게 특별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몇 가지 중 하나, [백록(百錄)의 뿔]은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칠지도와 비슷하게 생긴 한손검으로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진 백색 검이면서 ‘파사(破邪)의 힘’과 ‘자가수복’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도살자의 영혼]은 이전에 쓰던 [주인을 잃은 그레이트 소드]와 가장 비슷하게 생긴, 검신의 폭이 넓은 참수도로써, ‘생명 수확’, ‘혈귀화’라는 특성이 있었으며. [동방의 예기]는 흑단목으로 만들어졌는지, 짙은 묵색을 띠는 고급스러운 검집이 씌워진 장도(長刀)였다.‘그리고 이건 특징이-’
그렇게 마지막으로 눈여겨본 [동방의 예기]의 특성을 확인하려는 순간.
콰르릉-!!
별안간 벼락이 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커다란 짐승 하나가 나타났다.
성신력을 얻으면서 한층 민감해진 기감. 그리고 높아진 민첩 레벨로도 반응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전체적인 형태는 탄탄한 근육질을 지닌 말의 모습에, 피부는 하얗게 빛나는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목에 달린 갈기와 털이 수북한 꼬리는 마치 사자의 갈기를 연상시키듯 위용을 과시했으며, 이마에는 기다란 외뿔 하나가 달려있었다.
하지만 무언가에게 공격을 받았는지, 온몸에는 자잘한 상처와 그로 인한 피딱지가 가득했고, 사라진 앞다리 하나에선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점은 녀석이 물고 있는 작은 생명체.
모습을 볼 때 녀석의 새끼임이 분명해 보였다.
““….””
그렇게 녀석과의 대치상황이 수 초간 흘러갔다.
영성을 지닌 듯한 녀석의 눈동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녀석이 인간의 말을 하지 않는 이상에야 민준이 이를 알 길은 없었다.
“자……. 진정해. 난 너를 해칠 생각이 없어. 내가 떠날 테니까 네가 여기서 쉬어.”
민준은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놈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눈에 봐도 위기에 빠져 새끼를 구하고 싶어 하는 어미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민감한 존재를 꼽으라면, 위의 존재는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민준이 천천히 움직이는 순간.
부스럭.
멀리서 들리는 미세한 소리에 민준이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허공을 날게 된 그의 품에는 따스한 온기를 뿜어내는 작은 생명체가 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