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해내야 하는 것 (5)
눅눅한 습기.
빛줄기 하나 들어오지 않는 암흑 속에 작은 소란이 찾아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각자 작은 LED 라이트를 들고 거침없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기 때문.
“후욱….”
“훅.”
지금 이 계단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전부터 오랜 시간 동안 계속 달려왔기에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세 계단씩 성큼성큼 오르고 있는 강상철과 그 뒤에 통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큰 덩치의 1팀장 구동범.
그들은 이러한 길이 익숙한 듯 동료들을 격려하면서 오르다가, 이내 자신들끼리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 기분 나쁜 길만 벌써 세 번째인데, 영 적응이 안 되는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꼭 등에 귀신이 올라탄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그들이 오르고 있는 건물은 사실 건물이라고 보기도 힘든, 구조물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무렴 방이라곤 하나 없이 건물은 오로지 꼭대기에 오르는 계단으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그나마 공간이랄 곳은 꼭대기의 감옥뿐이었기 때문이다.
“구 선배. 이번에는 어떨 거라 보십니까.”
“뭐.”
“아시지 않습니까.”
“….”
“이번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젠장.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벌레 X끼들.”
앞서 습격했던 마천동의 두 곳에서도 꼭대기에 사람이 갇혀있다는 제보를 받고 이 기분 나쁜 건물을 올랐던 둘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이 찾을 수 있었던 건 오직 말라비틀어진 미라뿐이었다.
이 구조물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내용물 또한 피라미드와 비슷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 손목에 새겨진 숫자…. 분명 ‘0’이었죠?”
“갇혀있었으니 생존시간을 벌 방법도 없었겠지.”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저는 그 점이 의문입니다.”
“뭐가?”
“놈들이 이 구조물을 짓기 위해 노예처럼 부린 사람들한테는 그래도 하루 치 마석 정도는 분배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기껏 잡아 온 사람들한테는 생존시간을 주지 않았을까요?”
“그놈들한테 이유가 어딨어? 본능에 따라 사는 벌레 새끼들인데, 그냥 주기 싫었나 보지.”
“…흠.”
“쓸데없는 데 기운 쓰지 말고, 빨리 올라가자고. 그래야 이 엿 같은 건물을 부술 수 있으니까.”
그들의 정확한 역할은 어디까지나 이 구조물을 부수기 전에 혹여나 생존자가 남아있는지 확인하는 것.
그들에게는 이 거대한 건물을 부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에, 도맡은 인선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
“흰소리하지 말고, 빨리 오르기나 해 인마. 시간 없어.”
그렇게 그들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아파트 20층은 족히 되는 계단을 단숨에 올랐고.
드디어 출구 밖으로 쓸데없이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윽.””
다만, 고대하던 옥상이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인상 역시 점차 사정없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맡아도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고약한 냄새.
그로 인해 연상되는 기분 나쁜 풍경이 그들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 X발.”
여느 때와 같이 세 평 남짓한 철창 감옥만이 존재하는 꼭대기.
그 안에는 역시나 바짝 말라죽은 시체들이 뉘여져 있었다.
“이런 X같은….”
“조장에게 신호를 보낼까요?”
“…쉿! 잠깐만.”
“왜 그러시는-”
“쉬이!”
건물을 부숴도 된다고 신호를 보내려는 강상철의 손을 붙잡은 구동범이 갑자기 침묵을 강요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
쎄엑- 쎄엑-
“…?!”
그렇게 주변이 고요해지자.
상철의 귀에도 이상한 소리가 감지됐다.
가쁜 숨소리. 너무나 미약해서 ‘최소한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그들조차 정신을 곤두세워야 들을 수 있을 만큼 미약한 호흡이 들려왔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
이를 확신한 구동범 외팔로 도끼를 꺼내 나무 밑동을 찍듯 가냘픈 철창을 찍었고.
성력이 실린 날붙이는 철창을 수수깡 부러뜨리듯 가볍게 해치웠다.
직후, 앞선 둘보다 약간 늦게나마 옥상에 도착한 최미영이 바로 그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가 다시 철창 밖으로 나왔을 때 그녀의 품에는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 안겨 있었다.
피골이 상접 했다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을 정도로 삐쩍 마른 소년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상철아! 빨리!!”
구동범이 후배를 다그치자, 강상철은 황급히 메고 있던 백팩을 벗어내 소형 마석 하나를 꺼냈으나.
최미영이 이를 막았다.
“아니에요, 선배. 포션이 필요해요.”
“응, 빨리 이거…. 어? 포션? 아니 이렇게 마른 건 생존시간이 부족해서-”
“아니에요. 영양실조에요. 그리고 이 아이…….”
그녀가 말을 채 잇지 못했을 때, 버틸 힘 하나 없는 소년의 팔이 허공에 달랑거렸고.
그렇게 보인 손목에 새겨진 숫자는.
[0]제로였다.
* * *
또 그 단어다.
‘…시간 제한자.’
그것이 종말 첫날에 봤던 것처럼 스쳐 지나가듯 언급하는 게 아닌, 무려 처음 받아보는 ‘히든 퀘스트’로 눈앞에 나타났다.
물론 비밀에 싸여 있는 놈답게 난이도도 보상도 실패 시 손해도 미정으로 되어있었지만, 처음으로 실체를 드러낸 유형의 퀘스트인 것이다.
‘게다가 살려낸 시간 제한자가 셋이라고?’
시스템이 숫자를 카운트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잘못 센 게 틀림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시한 제한자는….
‘김 할아버지 한 명……. 그리고 나도 시간 제한자니 살아남은 나 자신도 포함되려나? 만약 그렇다고 해도 둘인데…. 마지막 하나는 대체 누구지?’
사실 자신이 구해준 사람을 손에 꼽자면 양 손가락을 열 번은 훨씬 넘게 접어도 될 거다.
구해줬다는 의미를 포괄적으로 잡지 않고 보수적으로 잡아도 그 정도인데,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기억한단 말인가.
‘내가 구한 사람 중에 자기가 시간 제한자라고 말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고, 그걸 내가 오며 가며 구했나 본데….’
뭐, 어쨌든. 그 덕분에 히든 퀘스트를 받게 되었다는 게 중요할 뿐, 지금 당장 신경 쓸 사안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민준의 곁에 린이 다가왔고.
“끼잉- 낑.”
녀석은 민준이 손에 들고 있는 구슬을 바라보며 군침을 뚝뚝 흘려댔다.
“왜? 먹고 싶어?”
그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흔드는 린.
자식이 잘 먹는 걸 싫어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 게다가 계속 편식으로 속 썩이던 아이가 그런다면 뭐든지 구해다 주고 싶을 것이다.
지금 민준의 기분이 딱 그랬다.
그는 대견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린에게 구슬을 건넸고, 녀석은 이를 한입에 꿀꺽 삼켰다.
과연 10레벨에 오르면 뭐가 바뀔까? 녀석의 방어막을 린도 배울 수 있을까?
이번 구슬은 유독 기대되는 부분이 많았고, 민준은 침묵하며 녀석의 반응을 기다렸다.
‘혹시 날개가 돋아나진 않을까? 그래서 막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지. 음…. 아니면 지네의 능력을 받아들이면서 우람한 갑옷이 입혀진 군마로 변하는 거야. 그런 녀석을 타고 다니면서 검을 휘두른다면? 크으….’
어렸을 적 보고 자랐던 만화영화들.
0과 1이라는 디지털 숫자로 이루어진 몬스터와 함께 하는 모험부터 물리법칙을 가뿐히 무시하며 공 속으로 들왔다가 나갔다를 반복하는 몬스터가 나오는 그 만화들이 민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헛된 망상에 빠진 민준이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드디어 구슬을 삼킨 린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반응이 나타났다.
갑자기 눈이 커지고, 배 부분이 둥그렇게 부풀더니 사지가 딱딱하게 경직되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가상의 현실이지만 몇 번이고 보아왔고 상상했던 모습이다.
자신이 그 몬스터들의 친구가 된다면, 그리고 그 녀석들이 더 나은 모습으로 진화한다면 자신은 어떠한 태도로 대해야 하나.
‘대견하다는 듯 쓰다듬어 줘야 하나? 아니야 그럼 고새 기세등등해져서 거만해질지도 몰라. 그렇다고 잘한 걸 칭찬해 주지 않는다면, 그건 잘못된 건데….’
첫 아이를 둔 부모들이 하는 고민을 하게 된 민준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구구구구-
린의 몸속에서 거대한 변화의 소리가 들려왔다.
민준은 황급히 녀석의 몸에서 손을 떼고 살짝 물러섰다.
하지만 그게 본인 입장에서나 물러선 것이지, 다른 이가 보면 뭐 그리 딱 붙어있냐고 나무랄 정도의 거리.
그렇게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녀석을 자세히 살펴보는 민준의 얼굴로.
“꺼-억!”
지독한 냄새를 품은 입자 무더기가 쏟아졌다.
분명 깨끗한 생수와 괴물들의 구슬이 아니면 입에도 않는 녀석인데, 도대체 어디서 이런 악취가 올라왔단 말인가.
민준은 이를 앙다문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그건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기보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분노를 삭이기 위한 자기최면에 가까웠다.
“…아 향기롭다. 우리 린이 밥을 맛있게 먹었구나?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무척 좋아요. 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민준이었지만,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레 시스템 창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타짜가 자신의 패를 ‘쪼듯’ 특성 부분을 가린 손을 천천히 치워 이를 살폈다.
「[영물]
이름: 린
종족: 기린(麒麟)
레벨: Lv.10
선천적 특성: [길조(吉兆)], [Loading…], [-Lock-]
후천적 특성: [신성한 불], [상갑(上甲)]」
민준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 아니 함성이 뱉어졌다.
“…오! 붙었다!!”
외형적으로 기대하던 환상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바라마지 않던 놈의 특성이 붙었다.
자신의 검조차 막아냈던 방어력이니 최소한 그에 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순 있을 터.
‘그렇다면….’
순식간에 민준의 머릿속에서 린과 함께 펼칠 수 있는 작전계획들이 스쳐 지나갔다.
물론 실전에서 새로 얻은 특성의 효용을 확인해봐야겠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도 ‘호신이 가능한 버퍼’이며. 최상의 상황은 무려 탱커와 버퍼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투잡러’다.
더욱이 민준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인 액운을 막아주는 ‘행운의 토템’ 역할까지.
린과 함께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지만, 벌써 녀석은 민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잠금이면 잠금이고, 해금이면 해금이지 로딩은 또 뭐야.’
특성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10레벨이 되자 잠겨있던 두 번째 특성 역시 드디어 해금된 것처럼 보였으나 여기서 또 추가적인 뭔가가 필요한 건지 비싼 척을 하는 것인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로딩이라니까 다른 조건은 필요 없이 시간만 필요하단 뜻이겠지?”
그래, 그 정도라면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다.
처음처럼 구슬을 [정화] 시켜 달라고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 중이었으니.
‘그런데 지금쯤이면 신호가 올 때가 됐는데….’
제단에 올라간 조원들이 신호를 보내면 자신 그것을 부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상당한 힘을 소모해야 했지만, 린 덕분에 어떻게 꾸역꾸역 해내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앞선 두 번과 다르게 이번에는 그들의 연락이 좀 늦는 상황.
‘무슨 일이 있나?’
오히려 민준이 관문을 닫기도 전에 이를 해결하고는, 높은 비탈길을 타고 내려와 같이 괴물을 때려잡던 그들이었다.
아무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드문 경우에 민준의 걱정이 쌓여갔다.
– 조장!!
– 조장님-!!
그리고 역시나 호랑이는 못 되는지, 저 멀리서 민준을 부르며, 피라미드 제단의 경사진 면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들이 보였다.
“여어어- 이번에는 좀 늦으셨습니다! 제가 다……. 어?”
민준이 손을 높이 좌우로 흔들며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려는 순간.
그의 높은 시력이 처음 보는 무엇인가가 잡혔고.
동료들의 얼굴에는 다급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