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39
139화. 단서 (2)
“어떻게 살리긴 했는데…. 이젠 어쩌죠, 조장?”
편안한 안색으로 나란히 누워있는 부자(父子)를 보며 상철이 난감한 듯 말을 꺼냈다.
사실 아이를 구했던 건, 무조건 반사와도 같이 본능에 따라 움직였기에 벌였던 행동이었다.
사실, 냉정하게 판단했으면 구해선 안 됐지만.
어린아이의 죽음을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다는 생각 그리고 이 아이와 관련된 시스템의 비밀 때문에 뒤를 생각하지도 않고 일단 구하고 본 것에 가깝다.
당장 그들은 이곳을 떠나 또 다른 관문으로 향해야 했고, 성주 플레임렉과의 전투를 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근처에는 둘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쉘터도 없지. 설령 있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둘을 맡길 시간이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서를 지키고 있는 동길과 동료들이 맞이할 위험이 커진다.
그리고.
그들이 무너지면,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고.
‘그걸 잘 알면서도, 이들을 구한 건.’
그들의 뇌리 깊숙이 박혀있는 경찰이라는 책임감과 죄 없는 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양심의 외침을 따른 결과물인 것이다.
“뭐, 어떡하긴 어떡해. 살려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사람을 구하는 데에 있어, 날 선 모습을 보여줬던 것과 다르게.
막상 동범은 둘을 구하고 나자 그는 그들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구하지 않았을 거면 아예 관여도 하지 말았어야지. ‘한번 맡은 사건은 끝까지.’ 너희들은 형사란 것들이 이런 말도 몰라?”
그의 말도 일견 맞았기에 무리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건’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또 다른 책임감을 꺼내 들었다.
“구 선배님, 말이 맞아요. 그런데, 한번 맞은 사건은 끝까지……. 그 말은 곧 한번 맡은 작전은 끝까지 완수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죠.”
“미영아, 난 그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물론 사람들을 구하는 것도 중요해요. 하지만 이 작전에는 서장님과 동료들의 목숨은 물론이고 저희 캠프의 존폐도 걸려있어요.”
“야, 최미영 너…! 그럼 이 사람들 버리고 가자는 거야?!”
“아니요. 신중하게 생각하자는 말이에요. 어느 쪽을 선택하든 대안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이제 플레임렉과 싸우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인데, 저 둘은 어떻게 책임지시려구요?”
동범을 바라보던 최미영이 말을 끝마칠 때쯤에는 민준을 바라봤다.
지금은 명확한 정답이 없었고, 대개 이런 애매한 상황에서는 현재 무리를 이끄는 이의 의사가 중요한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곳의 모든 이의 시선이 민준에게 머물렀다.
이 작전의 알파이자 오메가, 플레임렉과 싸우는 건 다름 아닌 민준이었으니까.
민준은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생각의 호수로 깊게 침잠했다.
‘작전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성공시켜야 해.’
팀원들은 단순히 서에 있는 동료들과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했으나.
큰 그림을 보고 있는 민준에게 이번 작전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그가 만나길 간절히 바라마지않는 아크티네와 조금이라도 비벼볼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었다.
‘송파 5지역을 해방시키면 상황이 급변할 거야.’
민준이 이러한 작전계획을 떠올리게 된 건, 인간의 몇 가지 본능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첫 번째로 인간은 생각 보다 물리적인 ‘공간’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단적인 예로, 단칸방 안으로 한 사내가 들어갔을 때, 그는 방을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와서 방을 가로지르는 붉은 선을 그어 놓고 사라진다면?
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 공간으로 느꼈던 단칸방을 ‘선 밖과 선 안’의 공간으로 인식한다.
이는 꽤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선 밖’과 ‘선 안’을 인식한다는 건 ‘우리’와 ‘너희’를 인식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니까.
우리 편은 아군.
그리고 너희 편은 적.
그러한 관점에서.
민준이 플레임렉을 죽이고 ‘송파 5지역’을 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목표는.
송파구를 옛날의 남한과 북한처럼, 반으로 싹뚝! 나누기 위함이었다.
‘이미 아틀낙의 4지역은 정화했으니까. 5지역의 플레임렉만 남았나?’
송파구 남서쪽의 4지역.
송파구 남동쪽의 5지역.
이 두 곳을 모두 해방하게 된다면, 남쪽의 생태계는 사도가 들끓는 북쪽과 완전 다른 생태계가 펼쳐질 것이고.
이는 송파구를 반으로 가로지르는 보이지 않는 선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벌레들이 들끓는 북쪽과 다르게 비교적 살아남기 편한 남쪽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그렇게까지만 하면 일은 자연스럽게 굴러갈 것이다.
곳곳에서 인간끼리 벌이는 무의미한 싸움은 점차 사라지고, 외세의 적, 사도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인간들은 제각기 결집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사도 군단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이 몸집을 불리게 됐을 때.
결국엔 종족 대 종족의 싸움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인간 vs 사도.
그때가 되면 민준은 드디어 아크티네와 마주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물론, 동길 아저씨와 동료들은 무조건 구해야지.’
숲을 보다가 눈앞의 나무를 잃게 되면 본말이 전도된다.
항상 잊지 말아야 했다. 이 싸움은 결국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걸.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저 부자를 여기 두고 작전을 수행하러 가는 게 백번 옳다.
‘분명…. 그게 맞는데….’
목에 생선 가시가 걸려있는 것처럼, 무언가가 민준의 신경을 계속 거슬리게 했다.
‘…뭐지? 뭐가 문제지?’
민준은 바르게 누워있는 소년을 바라봤다.
생존시간이 0이 되어도 죽지 않는, 이레귤러. 어떤 비밀이 있기에 이 아이는 시스템에서 벗어난 존재가 된 것일까? 왜 자신은 계속 뭔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하는 걸까?
‘…비밀. 비밀이라.’
“잠깐.”
순간 짙은 안개가 껴 있는 듯한 민준의 머릿속이 환하게 개였다.
문득 그가 종말 전 자주 하던 좀비 게임이 떠오른 것이다. 주인공은 둘인데 둘 중 하나가 백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면역자라는 설정의 게임이.
‘그래 면역자는 백신을 만들어 낼 수 있지?’
그리고, 이 아이는 생존시간이 모두 사라지면 죽어야 하는 세상에서 생존시간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비밀을 품고 있다.
이 아이를 구해내 비밀을 알아내고.
그 비밀을 알아내 동료들에게 적용할 수만 있다면?
골치 아프게 전선을 만들고, 적을 두고 생존자들을 규합하는 헛짓거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예전처럼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놈들을 상대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된다.
사도 사냥에 목멜 필요가 없어지고. 누구나 부담 없이 자신의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민준은 두 가지 옵션 중 보다 높은 확률의 선택지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
이 부자를 구해내 서로 돌아가 생존시간과 생존에 대한 비밀을 파낼 것인가.
아니면 이 전쟁을 계속 진행해 승리로 이끌고 갈 것인가.
““….””
이번에는 민준이 어떤 혜안을 내놓을까 기대하는 동료들이 침묵 속에서 모두 그만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
굳게 닫혀있던 민준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자, 이렇게 하시죠!”
* * *
우거진 숲이 들어선, 그렇기에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 가락동과 문정동.
이곳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싸움으로 조용할 틈이 없었다.
과거 이곳에서 벌어졌던 ‘보물찾기’라는 퀘스트 때문에 수많은 세력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그 상태에서 별이 정화되며 생존하기 좋은 환경이 되니 너나 할 거 없이 가락동과 문정동에 정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비대한 인구가 모이니 자연스럽게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전쟁을 주도하는 세력은…….
“건호야!”
“흐읍!”
소희의 외침에 건호가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튀어가며 할버드를 휘둘렀다.
그렇게 넓은 반원을 그리자, 커다란 후드를 쓰고 있는 자들의 목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콰가강!
연달아 터지는 폭발이 후드 무리 머리 위로 터졌고, 그들이 폭발에 놀라 고개를 숙였을 때 그들 근처의 허공에서 돌연 단검 한 자루가 튀어나와 그들의 목에 꽂혀 들었다.
“끄르륵….”
단우의 단검에 찔려 얼굴을 드러낸 후드의 정체는 아직 어린 티도 채 벗지 못한 소년, 소녀들이었으나.
그들의 안광은 그 나이 때의 순수함 대신, 오직 광기만이 남아 일렁이고 있었다.
“끄륵…. ‘펜스’에게 그분…. 크륵…. 의 천벌을!!”
“이런 쓰벌!”
나사 하나 빠진 듯한 표정으로 이상한 소리를 외친 후드 소녀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고.
단우가 이제는 떠나간 누군가에게 배운 걸걸한 욕을 뱉어냈다.
“단우야!”
소희의 외침과 동시에 단우와 그녀의 자리가 서로 스위치 되었고.
단우를 대신해 그녀가 커다란 스쿠툼으로 폭발을 대신 막아냈다.
스으으으-
그렇게 민준이 떠나고 남은 세력, ‘펜스’만이 자리에 남았다.
캠프를 거대한 목책으로 둘러쌓아 진지를 구축하고, 여태 한 번도 침입을 허용한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기에 지어진 이름 ‘펜스’.
이들은 강력한 방어력과 뛰어난 개개인의 힘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자진에서 그들의 산하로 들어가길 원하던 동부지방법원을 밑에 두고 있으며, 그 외 저항하던 대부분의 세력은 무력으로 복속시켰으니.
이제 그들에게 반하는 세력은 게릴라로 덤벼드는 저 광신도들뿐.
“돌아가시죠.”
오늘도 바퀴벌레처럼 튀어나오는 광신도들을 때려잡고.
일반 생존자들의 신고로 긴급출동 후 소희와 동료들이 복귀했다.
끼이이익-
높은 목책 문이 열리자, 그 안에 붉은벽돌로 지어진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희 일행은 그 가운데, 잘 닦인 대로를 따라 일직선으로 나아갔고 그 끝에 있는 성당에 들어갔다.
더 이상 종교시설로써 이용되지 않는 가락 성당.
그곳이 현재, ‘펜스’ 세력의 본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선 소희는 땀과 다른 이의 피로 흠뻑 젖어있었음에도 씻지도 않고 곧장 예배당으로 향했고.
지금은 지휘전략실로 이용되고 있는 그곳에는 넓은 지도를 펼치고 이를 바라보고 있는 간부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명 팀장의 그 의견에는 반대야. 이곳으로 나아가면 스케빈져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곳은 어떻습니까?”
“그건 제가 반대합니다. 그쪽은 뼈 꼬리 재규어의 진화 개체가 무리 지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진입하는 것 자체가 위험합니…. 어? 딸?! 왔어?!”
소희는 자신의 아버지인 정진호조차 무시하고는 안경을 쓰고 지도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검은 테 안경이 무척 잘 어울리는 지적인 외모의 사내는 소희가 다가왔음에도 계속 무시하고는 할 말을 이어갔다.
“캠프장님, 출동 다녀왔습니다.”
“…그럼 들어가도 쉬어도 좋습니다. 정 ‘단장’.”
“아니요. 저는 확답을 받고자 왔는데요.”
“후….”
‘팬스’의 캠프장인 전병철.
그가 보물처럼 아끼는 안경을 고이 벗어 마른세수를 했다.
“정 단장이 빠지면 전력에 얼마나 큰 공백이 생기는지 알면서도 계속 그런 부탁을 하시는 겁니까?”
“애초에 약속을 해주셨잖아요. 주변 세력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보내주시겠다고.”
“결국 은인 님께 가려고 하십니까?”
“네.”
“분명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따라오지 말라고요. 분명 기꺼워하지 않을실 겁니다.”
“괜찮아요. 제가 기꺼우니까요.”
“후….”
전병철은 정진호를 바라보며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그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애초에 자신의 말이라곤 눈꼽 만큼도 들어먹지도 않는 딸이었다.
“이 주변에 잔당들을 모두 소탕했을 텐데요. 애초에 저 하나 정도 빠지는 것 정도로 무너질 우리가 아니잖아요. 누가 가르치고 교육시킨 정병들인데.”
“그게 ‘펜스’의 1기수가 할 말입니까?”
“어우, 저는 그 기수라는 시스템부터 소름 돋는다고요.”
소희는 그렇게 말하며 울타리가 그려져 있는 흑색 쇳조각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무려 성주를 시해한 검의 파편으로, ‘펜스’의 기수들만이 이를 신분증처럼 들고 다녔다.
무력 순으로 줄을 세우는 기수 시스템상 소희가 이를 반납한다는 건 펜스에서 강자로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을 반납한다는 뜻과 같았다.
그 신분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전병철이 긴 침묵 끝에 말을 꺼냈다.
“……그럼 단우랑 서우도 데려가세요. 매번 찾아와서 은인 님께 가고 싶다고 떼를 쓰는데, 아주 진절머리가 날 정도니까.”
“…진짜죠? 말 바꾸면 안 돼요?!”
소희는 전병철의 입에서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도망가듯 지휘전략실 밖을 나갔다.
“하아, 이걸 어쩐담.”
그렇게 남은 사내들 중, 정진호만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