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43
143화. 폭풍전야 (1)
시간의 흐름이란 세계를 지탱하는 순리이면서도, 그 자체로도 완전하고 더없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한정된 공간, 찰나에 불과한 짧은 순간일지라도.
누군가 이를 멈출 수 있게 된다는 건.
곧, 그 존재가 일반적인 생명체를 넘어, 한층 더 고차원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
손에 닿는 범위 내의 모든 것이 멈췄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신비를 접한 순간.
민준은 얼이 빠진 상태로 이를 확인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힘을 거두었다.
정확히는 넓게 확장되었던 내면의 심상을 품 안으로 갈무리했다는 표현이 맞을 터.
민준의 기운이 사라지자, 다시금 그의 주변으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네킹처럼 멈춰있던 린이 눈에 이채를 띄며 말을 꺼냈다.
“성공하셨군요?”
“음, 어쩌다 보니까…?”
린의 얼굴에는 경탄의 기색이 어려있었다.
조언을 한 번 듣는 것만으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아무래도 자신이 주인 하나는 제대로 고른 것 같다.
인간에게 ‘어깨뼈에서 날개를 돋아내 펄럭거리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한들 그걸 누가 실제로 행할 수 있겠는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불가해한 일이었다.
“말도 안 돼요! 아니…. 오해하지 마세요. 그만큼 엄청난 일을 하셨다는 말이었어요. 저희 종족조차도 성체가 되어서나 겨우 할 수 있는 능력인데….”
“크흠, 부담스러우니까 그만해줄래?”
민준은 린이 보내는 선망의 눈길에 부담스러움을 느끼며 시선을 돌렸으나.
잔뜩 흥분해서는 민준의 업적을 자랑하는 린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니요. 그건 찬양받아 마땅한 업적이라구요! 주인님은 방금 그것으로 시간을 멈추셨겠죠?”
“그렇지?”
“주인님 특성이 시간이어서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 같은데, 주인님이 깨우친 건 이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이 가능할 거예요. 예컨데, 이능을 사용할 때도 가능할 거고, 기감을 퍼뜨리는 데에도 유용할 거예요.”
“다른 방법으로도?”
민준이 말하자 린은 흥분했는지 콧김을 훙, 불며 말을 이어갔다.
“네! 우선 그 현상에 대한 것부터 얘기를 드리면…. 방금 주인님이 하신 것처럼 내면의 소우주를 팽창시켜 세계에 영향을 주는 그런 일을. 저희는 보통 ‘권역(圈域)’ 혹은 ‘전능 공간’으로 부르고 있어요.”
“권역으로 부르도록 하자……. 전능…. 뭐시기라니, 그건 내가 차마 내 입으로 못 꺼내겠다.”
“여하튼! 그 능력의 효과와 적용 가능 범위 같은 건 개체마다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권역을 깨우쳤느냐 깨우치지 못했느냐 만으로도 전투, 생활 모든 일에 현격한 차이가 생긴다는 거예요. 저희는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냐 없냐에 따라, 종족의 온전한 기린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갈리거든요.”
“그래, 그래. 고맙다. 결국 이걸 다른 것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거지?”
“네!”
민준은 방금 느꼈던 감각을 곱씹으며 방금 떠올랐던 스킬창을 확인했다.
[시간 역장 Lv.1] : 사용자를 제외한 반경 5m 내의 모든 이치를 일순간에 멈춘다. (1분당 2000시간의 생존시간을 소비.)‘역시 좋은 스킬답게 소모되는 시간이 빡세네….’
맨 처음 [시간 이격]을 얻었을 때, 1분당 사용시간이 500시간이었던 걸 기억하면 무려 4배에 달하는 소비값이 드는 셈이다.
‘그 소년처럼 팔다리를 잃는 것보다야 훨씬 싸게 먹히는 장사긴 하지…. 물론, 나는 시간을 되돌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뭐.
그 효과를 생각해봤을 때, 이 정도면 상당히 괜찮을 스킬이 아닐까 싶다.
민준은 새로운 무기가 생겼음에 뿌듯해했고.
쿠르릉-!!
민준이 획득한 스킬을 확인하는 동안.
저 멀리 서쪽 하늘에선 먹구름과 함께 전류가 번쩍거리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구름 속에 몸을 숨겨 유영하는 용을 보는 듯한 모습과 위압감.
이는 민준만 느낀 것이 아닌지, 똑같이 서쪽을 바라보던 린이 입을 열었다.
“엄청난 존재의 기운이 느껴지는데요…….”
“아마 성주일 거야. 플레임렉.”
아무리 빠르게 공세를 취했다고 해도, 이쯤 되면 자신들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다.
방금 막 죽였던 틈의 주인 또한 공격을 맞을 대비를 단단히 한 채로 민준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미 자신의 정보는 모두 퍼진 상태라고 봐야 했다.
‘그래도…. 제법 오래 버티긴 했네. 이제 남은 건, 장지동에 남아있는 제단뿐인가?’
아마 성주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정확히 뭘 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단이 녀석들의 숙원과 관계된 일임은 분명했고.
상당한 전력을 잃어버린 녀석들에게 그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일 테니까.
‘드디어 두 번째 성주인가.’
성주와 관문의 주인 그리고 그 휘하의 지네들까지.
그들 모두를 잡아내야만, 이 피 튀기는 처절한 싸움도 막을 내릴 수 있다.
“음, 어떻게 공략해야 할까….”
상황이 상황이니, 속도전은 더 이상 효과를 보기 어렵다.
내가 노리는 곳도, 녀석들이 지켜야 할 곳도 하나뿐이었으니, 녀석들은 이미 모든 병력이 모인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고.
동료들도 무사히 돌아갔겠다, 이제 자신과 린, 두 목숨만 건사하면 되는 민준으로서는 급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린, 우선 주위를 둘러보자.”
“네!”
민준은 장지동 내부로 바로 침투하지 않고, 이를 빙글게 돌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 * *
성인 남녀와 소년, 소녀, 총 4명이 남쪽으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타탓-
한번 발을 구를 때마다, 십여 미터씩 쇄도하는 모습.
보통의 인간이라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괴리감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서둘러야 해! 상철이 말이 맞다면, 지금쯤 제단은 장지동에 있는 거 하나 밖에 안 남았을 테니까!”
“아저씨가 아무리 무모하다고 해도, 혼자 거길 쳐들어 갔을까요? 거의 당랑거철(螳螂拒轍)이나 다름이 없는데.”
“단우야, 지금껏 민준 씨를 겪었으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니? 그 사람이 어디 이성으로 따지는 거 봤어?”
소희의 말에 단우는 서우를 업고 달리면서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그렇긴 하죠…. 아저씨가 좀 무모해야 말이지.”
“…어? 오빠 저어어기 뭐 있다!”
돌연 팀원들의 눈 역할을 하기 위해, 시력 보조에 성력을 집중하고 있던 서우가 오빠의 등에 업힌 채로 앞을 가리켰다.
집중을 해야만 간신히 발견할 수 있는 먼 거리.
그곳에는 흡사 군대라 생각될 만큼 시꺼멓게 모여있는 지네들의 군집이 있었다.
“5지역에 있는 지네란 지네는 다 모여있는 거 같은데?”
수만 마리는 가볍게 넘어 보이는 지네 떼.
녀석들은 만리장성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길게 줄지어 있는 모양처럼 보였다.
“뭘 지키려고 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게 뭘까요?”
“내가 지네 떼와 싸워본 바에 따르면, 저놈들 대장전을 할 때는 절대 끼어들지 않아. 오히려 무대를 만들어주지.”
“대장전이요?”
소희의 의문을 동길이 해소시켜주었다.
쓰러질 정도로 싸웠던 그 때를 회상하면서.
“말 그대로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누군가와 싸울 때는 절대 끼어들지 않고 일대일로 싸우게 하는 거지.”
“그럼…?”
“그래, 저놈들의 대장이라고 할 존재는 한 놈이고, 그놈과 싸울 수 있는 사람도 우리가 알기로는 한 명이지. 조장을 만나려면 저 장벽을 뚫고 지나가야 해.”
“그럼 서둘러요!”
“어어어…? 나를 왜?”
휘익-
그렇게 말한 소희가 동길의 손을붙잡고, 올림픽의 해머던지기를 하는 것처럼 빙빙 돌리더니 강하게 날려버렸다.
“으아-! 아아…….”
점점 멀어짐에 따라 작아지는 동길의 비명소리.
인간 포탄처럼 쏘아진 그는,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지네 군대에게 쏘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당황을 거둔 동길이, 이를 공격기회로 삼으려고 발검을 하려는 찰나.
츠팟-
문득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방금 전까지 같이 있던 단우, 서우와 함께 서 있었다.
“어? 뭐, 뭐야…. 이게 왜?”
갑작스러운 변화가 연달아 일어나자 정신이 없어진 그는 작금의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신중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고.
업혀있던 서우가 입을 조막만 한 손으로 막으며 웃음을 흘렸다.
“히히. 아저씨 언니한테 이용당했어.”
“…응?”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예요. 저 누나 언젠가부터 저렇게 멋대로가 되어서…. 저기 봐요.”
단우의 손가락 끝으로 시선을 옮긴 동길의 눈동자에 점으로 변한 무언가가 담겼다.
그리고 그 점을 중심으로 생겨나는 불투명한 방패 하나.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그것은 손오공을 막아선 여래의 손바닥처럼 한순간에 지네 떼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입 벌리고 바라보고 있는 동길의 어깨를 단우가 툭 치고는 말했다.
“아저씨, 뭘 멍 때려요. 길 뚫렸을 때 어서 가야죠!”
“히히, 아저씨 바보.”
“이게 대체….”
얼마 전 처음 만난 어린 애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앞으로 튀어 나가고 있고.
자신은 던져졌다가 어느새 제자리에 돌아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내가 이상한 건가?’
문득 외눈박이 세계에선 두눈박이가 비정상인 것이라는 감상과 함께.
“소희 씨, 안 본 사이에 많이 변했네….”
동길 또한 땅을 박차며 앞으로 쇄도했다.
* * *
민준과 린은 우측에 거목으로 가득한 숲, 문정동을 끼고 장지동을 반시계 방향으로 크게 돌고 있었는데.
목적지를 크게 돌아가면서도 시선은 계속해서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 제단은 장지역에 있어요. 위례 호수공원에서 장지천을 따라가다 보면 보일 거예요.’
최미경 팀장이 떠나며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에 말에 따르면, 저 먹구름으로 가득한 곳이 장지역. 즉, 그들의 목적지였다.
‘또 뭘 꾸미는 거지?’
이제 놈들이 가진 기회는 저 제단 하나밖에 없기에 외곽에서부터 자신의 힘을 빼는 방식으로 총력을 다해 막을 줄 알았건만….
그 많은 지네들을 대체 어디에 숨겨둔 건지 아무리 주변을 정찰해도 다른 지네라곤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민준이 확인할 수 있는 건 그저 하늘에 있던 번개구름이 서서히 지면으로 가라앉더니, 까만 안개처럼 장지역 근처를 가득 메우는 모습뿐.
쿠르릉!
마침 구름에서 희끗한 무언가가 번개와 함께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이제는 마치 하늘을 달리는 기다란 열차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플레임렉….”
녀석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너는 어차피 여기 와야 하지 않느냐고.
고민하지 말고 일단 와서 자신과 맞붙자고 계속해서 도발했다.
‘하아, 외통수네.’
녀석이 노리는 바대로.
뭐가 됐든 자신은 저길 갈 수밖에 없다.
당장 다른 지네들의 모습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저기에 다른 지네들이 있든 없든 결과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조금 희망적인 건.’
지금까지 봤던 지네들의 특성상.
성주를 제외하고 다른 지네들이 장지역 아래에 보이지 않는 저 상황이 함정일 확률보다는.
결투를 위해 준비된 판일 확률이 더 높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 한번 해보자고.”
정찰을 마친 민준이 끝내 저 멀리 먹구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