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역습 (2)
역습을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대전략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사람들이 모인 후에 서로 지지고 볶다가 결국 인간들끼리 싸우는 건 의미가 없다고 협의하는 과정이 있어야 했으니.
제아무리 빠르게 의견을 모은다고 한들, 여러 세력의 각기 다른 인간들이 결집하기까지는 제법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나이브 했나?’
북쪽 저 멀리에서 한줄기만 피워 올라오던 연기가 네 줄기가 되어 하늘을 수놓고 있는 게 보였다.
최고등급의 비상신호.
시간이 제 편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는지, 영악한 벌레 놈들이 급작스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체조를 멈추고 문득 이를 올려다봤고.
“민준 씨, 뭐…? 어?!”
내 뒤에서 어기적어기적 체조를 따라하던 소희 역시 나를 뭐라고 타박하다 말고 내가 바라보는 방향을 빤히 응시했다.
“저, 저거…?!”
“어찌, 쉽게 가는 법이 없군요.”
그녀를 시작으로 주차장에 있는 모든 인원이 고개를 돌린 방향.
북쪽, 저 멀리. 녀석들의 공습이 시작됐다.
““….””
피 튀기는 전투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지긋지긋한 것이 또다시 그들을 삼켜버린 것이다. 일몰로 인해 생기는 그림자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왜애애애앵-!!
서의 옥상에서 초소 근무를 서던 인원이 수동식 사이렌을 마구 돌리자, 귀청을 찢을 듯한 소음이 캠프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간이 사열대에 서 있던 동길이 즉시 고깔로 된 확성기를 입에 대고 인원들을 지휘했다.
“빨리 움직여! 2팀장, 뭐해?! 강상철 정신 차려! 어서 팀 꾸려서 정찰 나가야지, 뭐해. 인마! 나머지 팀원들도 각자 위치로 움직여!!”
그렇게 서의 인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와중, 지휘체계에 속해있지 않은 소희와 송 씨 남매가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내 그림자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단우는 품에 우리의 무구를 잔뜩 품에 안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각자의 갑주와 무기를 차면서 대화를 나눴다.
“민준 씨, 어떻게 할까요?”
“우선 무장부터하고, 소희 씨는 캠프를 보호해주세요. 인원들이 모두 나가면 이곳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럼 우리는?”
“너희는 나랑 같이 가자.”
“좋아!”
“우리는 변종 혹은 정예 사도들만-”
우웅-
물하는 도중 순간 강한 기시감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
그 맑은 하늘에는 여인의 실루엣을 지닌 정체불명의 존재가 허공에 두둥실 뜬 채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젠장! 저놈이 왜 여기에….’
캠프에 있는 이들은 모두 어느 정도 한 가닥 하는 이들이었기에, 그녀의 기운으로 말미암아 그 정체를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여타 다른 네임드 사도, 마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마기가 한데 뭉쳐 형상화한 것 같은 저게 바로 성주, 아크티네라는 걸.
민준은 곧장 심장을 가득 채우던 별을 순환시켜 사지에 기운을 보냈고.
동시에 [패왕에 갑주]를 이용해 무색의 갑옷을 몸에 씌웠다. 그리고.
두쿵!
말이 채 끝나기도 민준이 동료들로부터 멀어져 하늘로 치솟아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머리 위에는 하얗게 불타는 광륜이 왕관처럼 씌워져 있었고, 두 눈에는 흰자와 검은자 대신, 찬란히 빛나는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
그런 그를 보던 여인이 매혹적으로 번들거리는 붉은 입술을 뗐다.
“많이 컸네? 오랜만이야?”
분명 성주는 외신의 별을 두고 멀리 떠나지 못한다.
아마도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은 아주 잠깐에 불과할 터.
이를 알고 있었기에, 민준은 놈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지?”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인사나 할 겸 왔지. 예상보다 네가 음흉한 구석이 있더라고.”
“….”
“지구엔 이상한 규칙이 있다며? 악당은 주인공이 변신을 마칠 때까지 공격하지 못한다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왜 악당인지 모르겠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그 상식을 무참히 깨버리려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천사, 혹은 여신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여인.
그녀는 민준을 바라보면서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왼쪽 눈을 쓰다듬었다.
“….”
애꾸눈.
그녀의 왼쪽 눈에는 긴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나의 오점이 그녀의 미색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아크티네…. 나머지 눈깔 하나도 잃고 싶어서 왔나?”
“어머? 자그만치 성주 시해자라고 불리는 인간이 내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니, 이거 영광이-”
쩌저저정!
괴물이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채 기회만을 엿보던 이의 참격이 이어지는 말을 잘라냈다.
“그딴 말이나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끝인가?”
“그때도 지금도 예의 없는 건 그대로네? 내가 남겨준 낙인은 잘 지니고 있지?”
날개를 휘감아 민준의 장도를 가뿐히 막아낸 아크티네.
단, 한 번의 공방으로 아래의 숲과 대지엔 깊은 상처가 남았으나, 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화했다.
“하? 남의 집에 무단침입 한 놈이 예의를 따지나?”
“새 주인이 들어왔으면 집을 비워야지 버티고 있는 놈이 잘못된 거 아니야? ‘그날’ 말씀하신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거니?”
“내 의사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야, 알 바 아니고…! 중요한 건, 너희들이 죄 없는 인간들을 죽였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너희들을 몰아낼 차례라는 거지.”
민준은 검으로 아크티네를 밀어내며 거리를 벌리곤 생각을 정리했다.
‘차라리 잘됐어. 이 녀석만 죽이면 끝나는 싸움. 여기서 매듭짓는다….’
민준은 자신의 모든 기술을 꺼내들었다.
여태까지 아등바등 싸워오며 얻었던 많은 스킬과 칭호들이 모두 지금 이 상황을 위해서 얻은 것이었으니까.
상대방의 움직임에 디버프를 거는 [공간장악]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상대방의 거짓된 움직임을 강요하는 [군림(君臨)]. 그리고 시공간을 멈추게 만드는 [시간 역장]이 주변을 잠식했다.
그리고 민준은 자신의 것이 된 공간 속 [시간 이격]까지 꺼내든 채로 녀석을 압박했다.
“고작 이걸로? 큰소리치기에는 조금 아쉬운걸?”
확실히 아크티네는 강했다.
상대의 시간은 옥죄고, 제 시간은 늘려 시도하는 공격은. 얼핏 보기에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자아내는 듯 기괴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였으나.
녀석은 입을 멈추지 않고, 그 부조리한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물론, 지금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아크티네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운신에 제약이 있을 게 분명하니 전투를 지속하면 유리한 건 민준일 테지만 말이다.
쿠르릉-!
과연,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새하얀 빛을 내는 날벼락의 녀석을 향해 내리꽂혔다.
찰나의 순간 번쩍인 눈앞과 뒤이어 울리는 우레소리.
누구의 소행인지 짐작이 갔지만, 민준은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동방의 예기]를 착검했다.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그 어떠한 전조도 없이.
서걱-
어느샌가 뽑혀져 나온 [동방의 예기]의 끝에 아크티네의 팔 한 짝이 걸려들었다.
“…!!!”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파악할 겨를은 없다.
중요한 건 기회가 왔고, 자신은 지금 기회를 반드시 살려야만 한다는 것뿐.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걸 활용해서 지금은 녀석을 몰아쳐야만 한다.
민준은 신중한 움직임으로 접근을 함과 동시에 누군가의 호의가 담긴 귀걸이에 의지를 담았다.
자신이 해방시켜주고 이름까지 지어준 준재.
‘타니.’
민준은 녀석을 부를 수 있는 한 번뿐인 기회를 사용했다.
그리고.
장막을 들추듯 공간이 벗겨지더니 그 속에서 흰 토끼가 나타났다.
* * *
“어이, 박씨! 거기 제대로 매게! …어허! 그렇게 하면 무너진 데도.”
쿵. 쿵.
“목재를 결구시킬 땐, 이렇게…. 아구가 딱 물리도록 해야지. 이걸 소홀히 하면 다 무너지는 게야.”
“할아범! 이쪽도 한번 봐주소!”
“어허! 그렇게 하면 큰발톱 곰의 앞발 한방에 다 무너진다니까?!”
가락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펜스’.
현재 이곳에서 김학범은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었다.
다른 이들의 공격일랑 그 어떠한 것도 허하지 않을 듯 굳건해 보이는 캠프의 외관이라던가.
일행이 안정적으로 사도들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게 해주는 방어시설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모두 김학범의 손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러한 공로를 세울 수 있던 건 새롭게 각성한 스킬 덕분이었는데.
[유통기한]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스킬은 손대는 물건의 수명을 비이상적으로 길게 만들었고.그러한 스킬과 경찰병원이라는 요새를 지었던 김학범의 경험이 만나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어르신, 조금 쉬면서 하세요.”
“됐어, 내가 아니면 누가 해?”
이제 열 개 정도로 늘어난 캠프의 방어시설에 모두 관여하는 그.
간부들은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만큼 바쁘게 지내는 김학범을 걱정했으나.
‘펜스’라는 명칭이 지어진 것에 제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학범은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일을 하곤 했다.
‘녀석 보기에 부끄럽진 않아야지….’
이곳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 사람이자, 아직까지도 펜스의 간부들과 초창기 멤버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청년.
그가 자신들을 지켜주기 위해 남긴 울타리는 지금보다 더욱 커져야만 했으니 말이다.
‘녀석은 지금 잘 지내고 있으려나.’
문득, 녀석이 떠오르는 날이었다.
과거에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이력이 있어서 그런 걸까. 자신도 그렇지만, 녀석은 너무 몸을 사리지 않는 경향이 있었으니.
이렇게 주변에서 자신을 말리고 들 때면, 왠지 모를 유대감 때문에 녀석도 함께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가락동에 있는 거미를 죽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하나를 더 잡았다니. 나, 원.’
자신들은 최근에서야 새로운 틈으로 넘어가 젤니아의 주민들을 죽이며 에센스를 모으기 시작한 참이었는데.
아무튼 난 놈은 난 놈이다.
“할아범! 쉬러 안 갈 거면 여기 좀 봐줘라!”
“이놈이, 너도 다른 양반들처럼 말이나 곱게 좀 해봐라. 늙은이 잡을려고 작정을 했나. 멀 그렇게 보채쌌는….”
쿠구궁-
“…어?”
“할아범, 이거.”
“쉿!”
미세하게 진동하는 대지.
댕-댕-댕-
이제는 본부가 된 가락 성당의 종탑으로부터 울리는 경보.
“모두 전투 위치로!”
“습격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일대의 약탈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평정했다. 물론 일부 광신도 같은 잔존세력이 남아있었지만, 전시태세로 변환하는 종을 울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야 기수만 출동시키면 될 테니까.
그럼에도 종을 울렸다?
그건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 습격이 있다는 소리였다.
학범은 곧바로 땅을 박차 성당으로 이어진 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방법을 알지 못해서 일 뿐이지, 조건만 알아낸다면 곧바로 플레티넘 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실력자.
학범이 땅 박차자 곧장 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쿵!
그리고 커다란 목재 양개문을 거칠게 열어 재끼자 이미 그곳에는 모든 간부들이 모여있었다.
“할아버님을 마지막으로 모두 모였군요. 이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캠프장, 도대체 무슨 일이오.”
“나방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그 빌어먹을 녀석들이…?!”
“브리핑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집중해주세요.”
직후.
캠프장의 입에서 과거 학범을 그렇게도 괴롭혔던 녀석들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