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각자의 사정 (2)
방 한쪽에 설치된 샤워부스 안.
쏴아아아-
샤워 헤드에서 강력하게 뿜어지는 차가운 물이 머리를 적시고 몸으로 흘러내린다.
덕분인지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가 조금은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기적이었어….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다.’
명 팀장님과 그의 두 동생을 자신과 처음 연결시켜준 이가 단우였다.
특히 둘째인 명남호 선생은 단우와 종말 전부터 인연이 있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조차 자신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들의 핏줄에 따뜻한 피 대신 차가운 수은이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틀낙의 미로원에서에서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맺은 끈끈한 유대로 이어져 있다.
수없이 많은 괴물에 맞서 등을 맞대고 싸웠고, 몇 번이고 찾아온 죽음의 위기를 서로 도와줌으로써 넘긴 채 지금까지 왔다.
제 목숨까지도 거리낌 없이 맡길 수 있는 사이. 그게 우리라는 얘기다.
이곳의 누구 하나 단우를 포기하기 싫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을 믿고 있는 다른 수천의 생존자들이 있으니까. 지금 이 캠프를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으니까.
단우를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으리라.
‘하아-’
캠프의 동료들이 그런 선택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통을 감내했을지 지금 자신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세준이.
시급을 다투고,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그 현장에 있었던 녀석이야말로.
본인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낼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가장 큰 부담감을 느꼈을 거다.
그럼에도 녀석은 침착하게 대응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상황에서 그리고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의 범위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냈는데.
자신이 회의장에서 한 말은, 그런 세준이의 노력을 무시하고 그들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말 부끄럽고, 미안했다.
‘단우가 그리 움직인 건 내 지시 때문이었는데,’
정작 지금 미안해하고 있는 세준이는 단우가 사라진 걸 확인하자마자,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고.
다친 몸이지만 임무만큼은 완수하기 위해 노식 부자와 함께 끝내 백록이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애초에 이 커다란 판을 짠 것도 자신. 그리고 단우에게 임무를 직접 부탁한 것도 자신 아닌가.
잘못한 게 없는 이들이, 내가 내린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후….’
나는 스페이스 마켓에서 산 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아무런 향이 나지 않는 제품으로 사도와의 싸움이 일상이인 이라면 자주 애용하는 물건인데.
지금은 거품 속에서라도 머리를 벅벅 긁어대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문지를 때마다, 계속해서 크기를 부풀려가는 상념처럼 거품이 급격히 팽창했다.
‘하, 병신. 대체, 뭘 한 거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건 명백하게 내 잘못이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잘못을 수습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왜, 세상이 망하기 전에 상영된 여러 딜레마를 안고 있던 영화들을 생각해보면,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고장 난 선로 위의 사람이 묶여있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사망하는 인원을 달라지는 문제라거나.
전쟁 중 갑자기 울음 터뜨린 아이를 침묵시키기 위해 한 어머니의 슬픈 선택과 같은 것들 말이다.
선택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 어떠한 길을 정하더라도 기다리고 있는 건 베드엔딩 뿐. 애초에 명쾌한 답이 없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 행동에 따라 조금은 더 나은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어느 게 정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 내가 어떤 행위를 하냐에 따라.
나 혹은 동료들, 더 넓게는 인간이라는 종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 테니까.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선택에서 오는 책임의 무게 때문에 회피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짓누르며 다시금 문제를 대면했다.
그리고.
복잡한 머릿속에서 내가 놓쳐선 안 되는 가치를 내버려 두고는, 남은 것들을 하나둘 현실 상황에 맞춰 버리기 시작했다.
똑똑똑.
그 순간, 저 멀리서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요!”
나는 샤워기 한 번으로 머리와 몸을 한 번에 씻어버리고 대충 물기를 닦은 후, 급하게 문을 열었다.
방문에는 쓰게 웃고 있는 세준이 서 있었다.
* * *
민준은 세준을 들여보내고 의자에 걸려있는 기능성 반팔 티와 바지를 대충 주워 입었다. 애초에 전투하면서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였다. 속옷 정도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 뭐가 없어서, 커피라도 사줄까? 아, 너 카페인에 민감했지.”
“응, 난 괜찮아.”
스페이스 마켓에서 산 커피를 꺼내며 말을 걸자, 세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품에 있는 나비가 졸린 지 긴 하품을 하고는 민준에게 껌뻑이며 눈인사를 했다.
민준은 나비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런데 무슨 일이야?”
“형한테 줄 것도 있고 할 말도 있어서. 이번에 떠나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잖아….”
“그렇지….”
““…….””
민준의 긍정과 함께 방안에 짧은 침묵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서준아, 미안해.”
“미안해, 형.”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은 둘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고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은 것이다.
그리고 먼저 선수를 친 건 민준이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했다. 생각이 짧았어. 너도 동료들도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고통스러웠을 텐데…. 나만 깨끗한 척을 했어. 막상 단우를 사지로 몰아넣은 건 난데…….”
그의 말을 들은 세준이 조심스레 대꾸했다. 자신의 말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는 모습이 세준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형은 그런 자기 파괴적인 생각에서 좀 벗어날 필요가 있어 보여.”
“…?”
민준은 이 세준이 이렇게 또박또박 말할 수 있는 녀석이었나 하고 놀랐다가, 세준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 그 또한 진지한 자세로 임하고 경청했다.
“우리가 누구를 구심점으로 모였는지 잊었어? 알잖아, 다들 형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거란 걸.”
“하지만-”
“전 캠프장님이 아까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캠프장님이 오전의 있던 일을 다 듣고 나니까, 나보고 형한테 가보라고 하더라고. 분명 자책하고 있을 거라고. 그런데 캠프장님 말이 딱 맞네.”
“….”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야. 그러니까, 괜히 그런 일로 힘 빼지마. 아까 명 팀장님 말 잊었어?”
맞다. 안 그래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타니와 백록의 별에 들려서 학범과 준서가 무사한지도 확인해야 했고, 송파 5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도 알아봐야 했다.
“아니야. 어떤 사고가 벌어졌으면 책임질 사람이 필요한 법이야. 그리고 그 사람이 있다면 나뿐이지. 네 말대로 그들은 나를 중심으로 모였으니까.”
“그래도-”
“짜식, 형이 너한테 너무 얕보였나보다. 널 걱정시키기까지 하고.”
민준은 세준의 덥수룩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냥 평소처럼 믿어줘라. 그건 형이 알아서 할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내가 할 말은 없지만.”
“그건 그렇고 줄 게 있다는 게 뭐야? 작별 선물?”
“아, 별건 아니고…. 형이 그렇게까지 말하면 이걸 주라고 하시더라고 캠프장님이.”
세준이 품에서 꺼낸 건 작은 지도 한 장과 찢어진 종잇조각 하나, 그리고 짧은 글이 적혀있는 쪽지였다.
“이 지도는 얼마 안 되지만, 짧은 시간 동안 우리가 정찰한 송파 5지역을 최대한 담아놓은 거야. 아마 단우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세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민준이 종잇조각을 들어 올리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송단우’의 계약서 조각」
등급: 고급(Uncommon)
분류: 기타
정보: 송단우와의 계약이 적혀있었던 계약서의 조각.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을을 추적할 때 사용할 수 있다.」
“이건….”
“단우를 찾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하면 알 거라던데? 참고로 이거 하나 주시느라 캠프장님 생존시간의 반이 날아갔어.”
그 말을 들은 민준은 말없이 쪽지에 쓰여진 글을 읽었다.
[은인 님, 고심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저야 종말 전부터 그런 압박감을 느껴왔던 터라 괜찮지만, 은인 님께서는 젊으시니 그런 경험이 생소하실 것 같네요.하지만 괜찮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은인 님은 그 나이 때의 저보다 훨씬 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도 잘살아왔으니, 충분히 잘 이겨내시겠지요.
그리고…. 불행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지만, 제가 드린 종잇조각이 움직임이 없는 걸 봐서 단우는 아마 ‘힘든 상황’에 처해있을 겁니다. 그런 단우를 찾으러 가시는 길은 당연히 위험할 테구요.
물론, 그럼에도 은인 님은 녀석을 찾으러 가시겠죠.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그런 당신께 도움을 받았으니, 차마 가지 말라 말씀은 못 드리겠군요.
하지만, 그 대신 몸 성히 다녀와 주십시오. 은인 님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추신.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 조각은 챙겨가십시오. 현장에서 반응할지도 모르니까요.]
단우가 살아있을 확률이 낮다는 건 민준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흔적이라도 찾아와야 이후에 추모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이들은 그만 보내주라 말할지 몰라도 녀석의 동생, 서우를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저번처럼 인사도 안 하고 몰래 떠나려고 했다. 괜히 부담을 주는 것 같기도 했고, 사람들이 말리는 일을 억지로 하러 가는 것이니 걱정시켜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또 훌쩍 떠나버릴까 봐, 이렇게 연락을 남겨놓으셨구나.’
이 모든 걸 간파한 병철은 민준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남겨놓은 것이다.
사실 그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자체로 남은 이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줄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효과가 있는 것 아닐까?
민준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 또한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물건을 남겨놔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민준이 품에서 물건을 꺼내려는 순간.
선수를 친 단우가 작은 알약 하나를 꺼내 들고 있었다.
“이건, 내가 주는 가끔 쓰는 건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 그리고…. 단우 꼭 찾아줘. 나는 못 했지만, 형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믿어.”
「[각성 알약 – (영물용)」
등급: 희귀(Rare)
분류: 기타
정보: 영물에게 숨겨진 재능을 1회에 한정해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강제로 끌어냅니다.
*부작용: 상태 이상 탈진 (24시간)」
이렇게 자신과 단우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잠시나마 원망하다니. 민준은 얼굴을 들 수 없었으나, 조금은 뻔뻔해지기로 마음먹고 고개를 들어 똑바로 녀석의 눈을 응시했다.
“고맙다. 내가 단우 꼭 찾아올게. 그리고 이거 받아.”
민준은 품에서 타니에게 받은 [막시앙의 귀걸이]를 꺼냈다.
“네가 쓰던, 너에게 소중한 이에게 주던, 마음대로 해도 돼.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떻게든 한 번 정도는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거야.”
“고마워.”
그렇게 세준은 민준의 방을 떠났고, 민준은 그날 밤 야음을 틈타 캠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