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이주민 (2)
달(月)이 한 번 차고 이지러지는 기간.
보통 초승달이 보름달이 되고 다시금 그믐달이 되는 기간을 한 달이라고 칭한다.
백록이 그린 그림은 그런 의미가 있었다.
“최소 한달이라는 소린가?”
민준의 물음에 백록이 기다란 목을 좌우로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최대가 한 달. 그 이상은 절대 불가능해. 우리가 상대하는 성주의 영악함을 고려한다면 그보다 더 촉박할지도 모르지. 이미 녀석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기도 하고…….”
맞다. 이미 민준은 놈의 성향을 알고 있다. 자신의 계획을 간파하고 성동격서로 공격하는 것은 물론, 이를 막아낼 것까지 감안해 스파이까지 심어놓을 심계를 가진 놈이 아니던가.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계획한 치밀함이라면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을 터였다.
“어쩔 수 없네, 시간이 촉박하겠어. 벌여놓은 일도 마무리하고, 사람들도 규합하려면.”
“어떤 일이 생기던 최소한 보름은 확보해보도록 할게. 물론 나만 잘한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그 기간은 어떻게든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아.”
“그거면 충분해. 이것마저도 없었으면 판세를 뒤집을 기회마저 잡을 수 없었을 테니까.”
민준은 녀석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아무리 적의 적은 동료고 그들 또한 성주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지만, 전쟁에 끼어드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이니까.
“아니야. 애초에 민준 네 덕에 자유를 찾을 수 있었는걸. 너를 돕는 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준서랑은 어때? 잘 맞는 거 같아?”
민준은 타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별은 애초에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말. 그리고 그 자격이 되는 게 시간 제한자라는 말이었다.
민준이 지닌 [별 해방자]라는 칭호 말고도 [별 소유자]라는 칭호가 괜히 있던 게 아니었던 셈.
애초에 타니와 백록이 민준 자신에게 친근한 척 구는 데에는 이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게 편하긴 하겠지만…. 그래선 아크티네를 죽일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아직 한곳에 묶여 있을 수 없었다.
낙인을 새긴 아크티네를 죽여 자유를 찾아야 했고, 자신과 동료들이 안전히 지내려면 사도들을 송파구에서 멸절시켜야 했다.
민준이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백록이 저 멀리 혼자 놀고 있는 준서를 보더니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재능이 뛰어난 아이야. 애초에 민준 네가 내 파트너가 됐으면 좋았을 테지만….”
“주인님은 내 주인님이야!”
푸릉! 파지직-
백록의 말에 린이 민준의 앞으로 튀어나가며 성난 콧김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들이받을 것 같이 전류를 뿜어내는 린.
그런 린이 귀여운지 백록은 여상이 대꾸할 뿐이었다.
“아이야, 그냥 하는 말이란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맞아, 린. 나 어디 안 가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민준은 무릎을 꿇고 걱정하는 린과 시선을 맞추곤 녀석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민준의 마음이 와닿았는지, 녀석이 귀를 쫑긋거리더니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린이 평온을 되찾았음을 확인한 민준은 본론을 이어 나가기 위해 백록을 바라봤다.
하지면 백록은 이미 민준이 이곳에 방문한 이유를 알고 있는지, 그 본론을 먼저 입에 담았다.
“준서의 안부만 물어보러 그 번거로운 길을 헤쳐온 건 아니겠지? 내 생각엔 내 구역에 생긴 이상 현상에 대해 물어보러온 것 같은데, 그게 맞아?”
“역시 너도 알고 있었군. 아니, 모를 수가 없겠지.”
“응, 나도 요새 그 일 때문에 골치가 아팠거든.”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민준은 물음에 백록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틈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 만들어 놓은 결계에 알 수 없는 존재가 기생하고 있어. 그곳에 담겨있는 내 힘을 계속해서 빨아먹고 있는 거 같아.”
‘설마…….’
백록의 말에 민준의 뇌리에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펜스를 떠나기 전에 전병철 캠프장이 보여주었던 끔찍한 생물들이. 분명 그는 그 생물들을 5지역에서 잡아 왔다고 했다.
‘어? 그런데 잠시만…. 틈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
그 생물에 대한 생각이 이어지다가, 민준은 백록의 말에서 자신이 무엇인가가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바로 질문했다.
“‘틈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라고? 그러면 평소에는 너희가 그걸 막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 너희는 몰랐었겠구나. 틈이 벌어지는 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야. 우리가 그걸 막고 있던 거고. 사실 막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틈으로 이어지는 세계 또한 우리가 바꿔 놓은 것이지.”
“잠시만…. 생각 좀 정리할게.”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성주를 죽이고 별을 정화함으로써 이곳의 모든 환경이 달라졌으니까.
그렇기에 그 원인을 성주 혹은 별 때문이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녀석의 말을 들음으로써 확실해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벌어지던 틈이 더 이상 커지지 않던 것도, 틈이 연결하던 차원이 사도들의 세상에서 젤니아로 변한 것도.
그건 모두 정화된 별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던 거다.
하지만 본디 배움이란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을 모르는 설화 속 탐(貪)과 같아서, 틈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네가 말한 그 ‘결계’라는 게 설마….”
“맞아, 이 숲 자체야. 별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띠긴 하지만, 타니와 나는 숲을 애용하곤 했지.”
“그럼 틈은 왜 생기는 거지?”
“….”
근원을 건드는 민준의 질문에 백록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침묵 후, 천천히 말을 꺼냈다.
“…지금 궁금해야 하는 건 그게 아니지 않아?”
“비밀인가?”
“말하면 못 해줄 것도 없어. 사실 단순한 내용의 이야기거든. 하지만….”
“하지만?”
“……@!ㄹ$∀%□¿&#.”
파지직-
천천히 입만 뻥긋거리고 있는 백록 얼굴 주위로 이상한 기운이 불티와 전류가 튀듯 튀어 올랐다.
녀석이 말하는 것을 세상에 흐르는 법칙이 막아내는 듯한 모습.
“봤지? 이렇다니까. 이 사실을 너에게 전해주기 위해선 나도 어느 정도 준비와 희생이 필요해. 바로는 알려줄 수 없다는 소리야.”
“…그렇군.”
민준은 아쉬운 마음에 헛헛해졌지만, 불가능한 걸 해달라고 떼를 쓸 정도로 못 배워먹은 놈은 아니었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단우를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록은 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까.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이곳과 연결된 차원을 바꾸고, 그곳의 통로 역할을 하는 틈을 조절할 수 있는 막대한 힘을 가진 녀석이.
그에 대한 민준의 물음에 백록은 이렇게 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불가능해.”
“왜지?”
“내가 움직이면 다시 사도가 쳐들어올 테니까.”
“아.”
오장육부 깊은 곳에 올라오는 탄식을 내뱉은 민준은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아크티네 이 영악한 X끼.’
대체 어디까지 내다본 건지 알 수 없지만, 녀석은 자신의 계획을 예견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는 이럴 수 없다.
아크티네는 이쪽의 움직임을 강요하고 있다. 체스로 따지면 체크메이트, 장기로 따지면 장군을 건 셈.
당장 죽기 싫다면 움직여라.
안 움직여? 그럼 죽던가.
민준은 비웃듯 중얼거리는 녀석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네 뜻대로 움직여줄 순 없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어먹으면 된다. 백록이 해결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발 벗고 뛰어다니며 해결하면 될 터.
“그러면 그 일 내가 하지.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좋아, 그렇게 말해주길 바랬어.”
기다란 목을 끄덕이던 백록이 머리를 낮춰 커다란 뿔을 민준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여기서 끝부분만 꺾어볼래?”
“네 뿔을?”
“응, 괜찮으니까.”
민준은 생각보다 부드러운 녀석의 뿔 끝부분을 툭하고 분질렀다.
약 30cm 정도 되는 길이에 야구방망이 정도의 두께의 뿔. 그곳에선 민준도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민준은 반사적으로 아이템 감별을 했고, 역시나 시스템은 이 뿔 조각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백록’의 녹각(鹿角).」
등급: 유일(Unique)
분류: 재료
정보: 정화된 별, ‘백록’의 뿔 조각. 신령스러운 기운을 품고 있어, 이를 무기로 빗어낸다면 성검(聖劍)을, 방어구에 첨가한다면 성의(聖衣)가 될 것이다.」
‘…유니크? 내가 지닌 최고 등급 아이템이 유니크인데…….’
고작 커다란 뿔의 한 조각일 뿐인데도, ‘유일’ 등급을 띠고 있다.
민준은 짐짓 놀랐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왠지 지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백록은 고개를 쳐들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민준은 내 구역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든 녀석을 알고 있지?”
“…어떻게 알았지?”
“민준, 살면서 이런 말 못 들어봤어?”
“…?”
“얼굴에 다 티나. 방금 내 뿔을 보고 놀란 것도 말이지.”
“…크흠.”
민준은 괜한 헛기침을 하고, 다시금 본론을 이어갔다. 괜히 이야기가 길어졌다간 얼굴이 벌게지는 못난 꼴을 보일 것 같았기에.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그 벌레 놈들을 죽이고, 내가 준 뿔 조각을 이용해 손상된 결계를 복구해줘.”
그렇게 말한 동시에 민준의 품에 있던 지도가 자연스레 뽑혀 나오더니, 백록의 눈앞에 떠 있던 상서로운 빛이 스며들었다.
민준은 천천히 낙하하는 지도를 받아들었고 그곳에는 총 6군데의 X 표시가 그어져 있었다.
“장소는 총 여섯 군데. 실상은 더 많지만, 그곳이 혈(穴)과 같은 장소야. 그 장소가 회복되면 다른 곳은 자연스레 돌아올 거야. 그런데…. 그 과정이 녹록하진 않을 거야.
“왜지?”
“틈이 유독 많이 벌어진 곳에서, 생각보다 거물인 녀석이 건너왔거든. 그러니 몸조심해.”
지금껏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백록의 걱정에 민준은 여유롭게 웃을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널 정화 시켜줬는지 잊었어?”
“흐음, 그렇네. 괜한 걱정을-”
“그 어려운 일을 하는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부탁?”
“단우가 실종됐어. 녀석을 찾는 데 도움을 줘.”
“아, 그림자를 다루는 아이?”
“맞아. 나를 도와서 너를 해방시키는데 큰 도움을 준 녀석이야.”
“잠시만….”
부탁하자마자 눈을 슬며시 감은 백록이 오른쪽 앞다리를 들었다가 탁, 소리가 나게 바닥을 구르자.
민준은 보이지 않는 기운이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기운은 끝을 모르고 퍼지더니, 민준의 감각을 벗어날 정도로 멀어졌다.
“따로 내가 알려줄 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민준은 애초에 백록이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화된 별들은 후안무치한 녀석들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녀석의 말은 불길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아니, 분명 살아있긴 해. 그런데 그 기운이 너무 미약해서 정확한 지점을 짚어낼 수 없어.”
“그럼….”
민준이 말을 잇지 못하자, 백록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방금 민준이 웃었던 것처럼.
“내가 무슨 존재인지 잊었어?”
백록은 그렇게 말하곤 민준이 들고 있는 지도 너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