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7
017화. 삶의 방식 (3)
“이렇게 하면 다 해결되는 거 아닌가? 주장, 가지고 있는 시간도 많잖아?”
“왜, 날 쏘게? 근데, 니가 내 시간을 다 가져가면 다른 애들은 그냥 가만히 있을까? 그걸로 날 쏴봤자, 너랑 네 동생도 죽어.”
“주장을 죽이고, 나오는 시간을 나누면 되지.”
“정신 차려. 너도, 나도 진원이도 모두 다 살인자야. 모두 다 갈 데까지 간 놈들이라고. 사이좋게 시간을 나눈다? 그런 게 가능할 거 같아? 우리끼리는 해치지 않는다는 조항이 깨지는 순간,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네 동생은 무조건 죽어.”
백기혁이 말을 마치자 이진원이 총구를 까딱거리면서 총을 내려놓으라고 종용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진행된 1분여간의 대치상황을 끝으로, 윤아린이 먼저 한숨을 쉬며 총을 내려놨다.
“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주장, 진짜 재수 없어.”
윤아린은 그에게 씹어먹듯 말을 내뱉으며, 큰 덩치의 동식을 번쩍 들고는 현관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백기혁과 이진원 둘이 남은 아파트 거실.
백기혁은 자신의 총을 후배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진원아, 저년 의심스러우니까 네가 따라붙어서 감시해. 그리고 아마 네 차례까지 올 것 같으니까 준비해놓고.”
“네? 저는 아직 생존시간이 많이 남-”
“진원아.”
백기혁이 후배의 말을 끊으면서 그의 얼굴과 귀에 입을 가까이 댔다.
“내가 너 챙겨주겠다고 하잖아…. 뭐, 너보고 제발 시간 좀 먹어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해?”
“…아니요.”
“너는 내가 어떤 ‘놈’인지 알잖아. 인마.”
“….”
“알면 새끼야, 잘하자. 응?”
“네, 주장. 죄송합니다. 그런데… 막내는 어떻게 할까요?”
“걔? 아마 그놈들이 죽여버리지 않을까? 막내도 우리랑 똑같으니까…. 시간 나눠주기 아까웠는데, 이참에 잘됐지 뭐.”
그렇게 이진원에 귓가에 속삭이는 백기혁의 동공이 자글자글 갈라지더니 ‘겹눈’으로 변했다.
* * *
“백기혁, 이 새끼. 누가 네 뜻대로 놀아날 줄 알고?”
분명 저 자식은 자신을 먹이로 던지고 사냥감의 반응을 보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벌써 그렇게 저세상으로 간 부원들이 셋이었다.
“그런데, 그 새끼는 왜 못 쏘겠지?”
사실 주장을 죽이고 시간을 강탈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놈이 가지고 있는 시간이 꽤나 많았으니까.
‘그 새끼 체력 레벨이 아무리 높아 봐야 5레벨은 넘지 않을 텐데.’
그 정도면 총으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을 테지만…. 놈을 죽일까 생각할 때마다 오히려 자신이 당할 것 같은 불길한 직감은 도통 사라지질 않았다.
“그래, 일단 눈앞의 사냥감에 집중하고. 백기혁 네놈은 그다음에 조져준다.”
그렇게 합리화를 끝낸 윤아린은 그게 더 큰 실수가 될 거란 사실은 모른 채 망산 고등학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뚝. 뚝.
대검을 타고 초록 진액이 떨어졌고.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쉰 민준이 재차 자세를 다잡았다.
일행이 학교 안으로 안전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더는 꺼릴 것이 없었던 민준은 다시금 벌떼 속으로 달려들었다.
부와아아아앙-!
대검이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허공을 가르자 으깨져 버린 벌들은 땅으로 추락했고, 시야의 한켠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쉼 없이 떠올랐다.
[신체 변화율 : 73.4%] [근력, 체력, 민첩의 레벨이 1 올랐습니다.]신체 변화율이란 수치는 몸을 움직일수록 혹은 전투를 할수록 높아지는 건지, 야금야금 오르기 시작하다 어느새 73.4%까지 올라 추가로 능력치를 올려주었다.
민준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하늘로 치솟았다.
분명 지치고 힘들었으나, 그럴수록 능력치가 상승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보통은 불시에 들이닥친 재난에 화가 나야 마땅했지만, 자신은 이런 삶에 적응한 것을 넘어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손쓸 방법도 없는 1년짜리 시한부 환자가 아니라 괴물과 맞서 싸우는 만큼 더 오래,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상처 입는 것에 무뎌지고, 피 튀기는 전투가 익숙해졌으며, 식칼도 몇 번 잡아본 적이 없던 몸이 이제는 휘두르는 커다란 검을 친숙하게 다루게 되었다.
횡베기를 할 때는 앞발을 어떻게 디뎌야 힘이 강해지는지.
어느 정도의 범위로 베야 다음 연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
베는 방법에 따라 파지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팔의 궤적에 따라 힘이 극대화되는 지점이 어느 곳인지.
누군가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검을 휘두르는 방법이 체득됐다.
부우우웅-!
덕분에 놈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들고 있음에도 민준은 묵묵히 거대한 ‘철괴(鐵塊)’를 휘두를 수 있었다.
검과 교감하며 단순히 ‘베는 것’에만 열중하다 보니, 공중을 비행하는 벌들도 낙엽 떨어지듯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사도를 죽이고 생존시간을 노획했다는 시스템 소리가 계속해서 귓가를 울렸지만, 민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너무 몰입하여 알아채지 못했다.
‘여기선 가로로.’
‘오른쪽으로 피한 뒤, 앞으로.’
민준의 몰입은 시간이 흘러도 흩어질 줄 몰랐다.
* * *
‘이제 이놈이 마지막인가?’
쐐애애애액- 콰득!!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르고, 힘차게 휘둘러진 검이 큰 턱을 딱딱거리는 거대 벌의 외골격을 박살 낸 후에야.
민준은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후욱… 후욱….”
대검을 땅바닥에 꽂아 넣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으니, 어느새 사위를 까맣게 감싸던 벌떼가 모두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무아지경(無我之境)을 경험했습니다.] [새로운 검술의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실마리의 영향으로 액티브 스킬 ‘공간장악’을 깨닫습니다!!]민준은 그제야 쌓여있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796시간 아니, 성지(星地)효과로 인해 2,388시간.
정확히 벌 189마리와 왕벌 2마리를 잡고 얻은 생존시간이었다. 게다가 스킬을 얻었다는 메시지까지.
성지의 효과는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런 방법으로도 스킬을 얻을 수 있던 거였나?’
스페이스 마켓에서 구매하거나 칭호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듯했다.
[공간장악 Lv.1] : ‘검’을 착용 시, 반경 10m 이내 시전자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의 이동속도와 공격속도가 15% 감소합니다. (1분당 5시간의 생존시간을 소비)1분당 생존시간을 무려 5시간이나 소모하지만, on/off가 가능한 스킬은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해 보였다.
‘[살충제] 스킬이랑 합치면 장난 아니겠는데? 흠, 그건 그렇고…. 이렇게 가면 또 한 소리 듣겠군.’
몸 이곳저곳을 살피자, 이미 앞선 전투들로 넝마가 된 옷은 물론이고 온몸 이곳저곳엔 찢어진 상처와 타박상이 가득했다.
자연 회복력이 좋아진 상태이긴 했으나, 소희의 치료는 불가피할 정도.
“후, 어쩔 수 없지.”
민준은 가벼운 한숨을 쉬고는 벌레의 사체를 즈려밟으며 학교로 걸음을 옮겼다.
* * *
“으휴! 내가 못 살아!”
소희가 양호실 캐비닛을 샅샅이 뒤져 찾은 수술용 실과 바늘로 민준의 팔을 꿰매며 잔소리를 쏟아냈다.
“윽….”
민준의 앓는 소리에 소희는 그의 등을 ‘찰싹!’ 소리 나게 때리곤 눈을 흘겼다.
“그러게 대충 상대하고 도망치라니까요. 그 많은 걸 다 잡고 와요?! 민준 씨는 목숨이 서너 개쯤 되는 거예요?”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조장은 너무 심할 정도로 간이 배 밖에 나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옆 침상에서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학생을 살피던 동길도 소희의 말에 한마디 보탰다.
허나 그들의 등쌀에도 민준은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충분히 다 잡을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어느 정도의 피해야 불가피한 거죠.”
민준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바닥에 찍힌 별 모양 낙인을 바라봤다.
사도들과 마주치자마자 상처에서 조금씩 흘러나온 피는 이제 딱딱하게 굳어 손바닥을 뒤덮으려 하고 있었다.
“피하기만 하다가는 또다시 성주를 만났을 때, 살아날 수 없을 게 분명하니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후우. 걱정하는 저희도 조금만 생각해주세요. 그러다가는 그 전에 몸이 다 망가지겠어요.”
“…고려해보도록 하죠.”
소희는 이곳저곳을 봉합한 상처에 깨끗한 거즈를 덧대고, 배낭에서 꺼낸 새로운 등산복을 민준에게 건넸다.
“자요, 갈아입고 와요.”
“….”
민준은 그녀가 준 등산복을 받아들며 그녀와 동길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예전의 삶은 고독 그 자체였는데, 이런 세상이 되어서야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아이러니한 감정이 들면서도, 그들의 감정의 온도가 느껴져서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이들을 빨리 떠나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 낙인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 이 사람들은 구태여 큰 위험부담을 짊어지며 성장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민준은 그들의 마음을 다 받을 수도, 자신의 마음을 다 줄 수도 없었다.
그저 헤어지기 전까지 좋은 길동무가 될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
심각한 표정으로 옷을 받아든 민준이, 환자용 침대에 처져 있는 커튼 뒤로 휙 들어가 버렸고.
“우리가 조장 사정 살피지 않고, 너무 뭐라고만 한 거 아닌 거 모르겠네.”
“그러게요. 괜히 미안하네….”
그렇게 둘이 속닥이는 사이.
커튼 뒤에서 한참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 * *
잠시 후….
민준이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왔을 때.
소희와 동길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아, 아니. 민준 씨…? 그… 요상한 복장은 뭐에요?”
“어, 음…. 소희 씨가 아까 저런 것도 줬었던가?”
“아, 아뇨?”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저도 공감이 되더군요. 그래서 방어구를 하나 구매했습니다.”
민준의 모습은 주황색 등산복 위에 커다란 묵색 견갑을 착용한 해괴한 모습이었는데.
둘은 만족하는 민준의 모습을 보며 차마 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한참을 침묵하다, 민준이 들을 수 없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와…. 끔찍한데?”
“분명, 민준 씨 패션 센스가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아무래도-”
둘은 동시에 민준의 손바닥을 응시했다.
“저게 머리에도 영향을 끼친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 위기를 한번 겪고 났더니, 성능 말고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게 된 걸지도 몰라.”
쌓여가는 오해와 달리 이번에 새로 장만한 방어구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 민준은, 아이템의 옵션에 온정신이 팔려 외관조차 마음에 든 상태였다.
「[주인을 잃은 견갑]
가격: 2,000시간
등급: 고급(Uncommon)
필요능력치: 체력 Lv.10
정보: 정보: 누군가가 사용하던 거대한 무쇠 덩어리 견갑. 방어구의 역할보다 엄청난 무게로 상대방을 곤죽 내는데 특화되어있는 듯하다.」
비록 녀석을 구매하고 나니, 빈털터리가 되어 생존시간이 255시간밖에 남지 않았지만, 민준은 후회하지 않았다.
‘가성비가 좋은 아이템이야.’
다른 비슷한 가격의 방어구들은 여러 효과 옵션이 붙어있어 기능적으로 사용하기 좋아 보이긴 했으나, 하나같이 얇은 철판을 덧대거나 쇠사슬로 만들어진 갑옷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사람을 주로 상대해야 한다면 그런 걸 쓰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자신이 상대해야 할 놈들은 거대한 괴물들.
기능적으로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어구가 아닌, 강한 내구성, 높은 방어력을 가진 방어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가격대비 무게가 많이 나가서 뭔가 돈… 아니 시간을 버는 느낌이란 말이지.’
마지막으로 견갑에 붙은 접두어 ‘주인을 잃은’.
얼마 전 대검을 얻은 후로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던 아이템 중 하나였다.
보통 이런 이름의 아이템은 후에 진가가 드러나는 법.
민준은 그 가능성에 지금껏 모아둔 시간을 모조리 집어넣었다.
물론,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구매한 아이템들 자체 스펙만으로도 유용했기 때문에 꽝이 나와도 상관은 없다.
‘역시, 이게 최선의 선택이야.’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소희와 동길은 입을 떡 벌린 채로 자신의 견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 분 다 보는 눈이 있군.’
민준은 내심 뿌듯해하다가, 이내 자신이 구했던 남학생이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는 걸 확인하자 표정이 굳어졌다.
교복으로 보이는 옷 가슴팍에 [박선우]라는 이름표가 붙어있었는데, 아이는 정신을 잃은 채로 가는 숨을 내뱉고 있었다.
“소희 씨. ‘선우’? 저 친구는 상태가 어떻습니까?”
민준의 물음에 번뜩 정신을 차린 소희가 선우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올렸다.
“온몸에 난 상처도 상처인데, 기력 자체가 많이 쇠했는지 열이 안 떨어지네요. 미음이라도 먹였으면 좋겠는데, 저희가 가지고 있는 식량은 통조림과 라면이 전부라서요.”
“흐음….”
민준은 팔짱을 낀 상태로 양호실 안을 서성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공교로웠다.
도로 한가운데서 혼자 공격을 받고 있던 것과 자신들이 학생을 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가 총질을 한 것 그리고 이 친구를 치료하기 전까지 일행의 발이 묶인 것까지.
마치 누군가 계획한 것처럼 톱니바퀴가 맞아들어가듯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의심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둘에게 그 생각을 말하진 않았다.
구태여 그들에게 말해 불필요한 걱정을 분담할 필요는 없었고, 인간 불신이 걸릴만한 생각은 자신만 하고 있어도 충분했다.
부스럭.
그렇게 민준이 서성이는 양호실이 침묵이 흐르는 도중.
침대에 누워있던 남학생 박선우가 몸을 뒤척이며 나온 침구류 소리가 셋의 이목을 끌었다.
박선우는 악몽을 꾸는지, 몸을 조금씩 흔들며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였고…. 이내 번쩍 눈을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점차 안정이 되면서 자신에게 쏠린 이목을 알아챈 듯 보였다.
““….””
그렇게 잠시간에 침묵이 이어지다, 선우가 튀어 나가듯 침대를 박찼지만, 민준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쿵.
민준은 선우의 어깨를 짓눌러 침대에 억지로 눕혔다.
선우는 그렇게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로 민준을 잠시 올려봤다가 겁을 집어먹고는 눈길을 피했다.
그의 눈은 피에 적신 듯한 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