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71
171화. 이주민 (4)
백록의 구역은 전체적으로 서쪽에 앞코를 둔 신발 모양을 띠고 있는데.
그중 민준 일행이 출발한, 백록의 보금자리는 특이하게도 그 권역의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도 자장 외곽이라고 볼 수 있는 장지동, 즉 서쪽 앞코 부분.
이는 민준이 플레임렉을 죽이고, 별을 정화한 곳이 그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 출발해보죠.”
쿵.
민준의 말에 소희가 자신의 거대한 방패를 등에 메자, 묵직한 무게 때문에 지면이 작게 울렸다.
하지만 그녀의 동료들은 그러한 과정이 익숙한 듯 다들 자신만이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준비를 마치자, 민준이 길잡이를 맡게 된 동길에게 물었다.
“방향은 계속 북동쪽입니까?”
“그렇지. 거여동과 마천동이었던 숲의 심처에 대부분의 틈이 몰려있으니까, 그쪽으로 가야겠지.”
“그럼, 가장 가까운 틈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흐음……. 어디 보자.”
민준의 질문에 동길이 품에서 지도를 꺼내 펴고는 눈을 얇게 뜨고는 유심히 훑어봤다.
백록이 여섯 개의 틈을 짚어주면서 변해버린 송파 5지역의 지형을 대략적으로 그려준 지도였다.
그는 마침내 검지로 한 곳을 짚었다.
“옛 위례 호수공원 자리군.”
백록이 짚어준 틈 대부분이 자리한 심처로 가려면 북동쪽으로 북상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첫 번째 관문인 장지천과 위례 호수를 건너가야 했다.
그곳은 종말 후 지형이 급변하면서 천은 강으로, 호수는 더욱 커다란 호수로 변해버린 곳이었는데.
물길 자체가 숲의 심처를 보호하는 거대한 장애물이 된 탓에, 숲의 심처를 가기 위해선 언제고 한번은 지나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더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로 가시죠.”
목적지가 정해졌으면,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지금 그들에게 시간은 금이었으니 말이다.
민준을 시작으로 지면을 박차자, 동료들이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거목으로 드러난 뿌리가 이리저리 엉켜있고, 낮은 절벽과 언덕이 빈번한 숲길이었지만, 그들은 능숙하게 이를 스쳐 지나갔다.
송파구 내에서 최소 열 손가락 내에 꼽힌다고 볼 수 있는 실력자들의 집합이 민준의 무리였다.
달리는 것에 이능을 사용하는 것?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서,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진 지경이었다.
그런 이들이었기에 작은 장애물들은 방해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초목이 내쉬는 상쾌한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그들의 후각에 비릿한 물 냄새가 감지됐다.
탓-!
목적지가 가까워졌음을 눈치챈 이들이 동길의 안내에 따라 더욱 빠르게 달렸고, 숲을 나와 본 광경은 그들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동길 아저씨……. 여기 원래 이랬었나요?”
아무리 별이 정화되면서 지형이 변모했다지만, 이건 선을 넘은 상황이었다.
아니, 위화감부터 들었다. 그곳은 명백히 백록과는 대척점에 있는 듯한 모습의 경관을 띄고 있었으니까.
당장 코를 찌를 듯한 악취부터가 이곳이 뭔가 잘못됐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분명 지도에는 강이랑 호수라고…….”
동길은 믿지 못할 광경에 다시금 지도를 보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환경은 변하지 않았다.
하얗게 메말라버린 거목들과 그사이에 넓게 펼쳐져 있는 검은색 액체.
그리고 그곳에서 물을 먹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변종들.
죽음의 기운을 스멀스멀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늪은, 지도에 그려져 있는 싱그러운 호수와 무척 상이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백록의 말에 따르면, 그 거물이 젤니아 너머에서 건너왔을 거라고 했지…. 놈이 주변 환경을 이렇게 오염시킨 건가?’
대체 어느 틈에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기에 만전의 태세로 대비해야 했다.
거대한 늪 한가운데서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관문과, 오염된 백록의 영역은.
상대가 만만치 않은 존재일 거라 얘기해주는 듯 했으니 말이다.
“저게 그 틈이군요. 벌써 관문으로 변한 걸 보니, 저것 때문에 주변 지형이 변했나 봅니다. 다들 조심하세요. 분명, 이 주변에-”
첨벙-
민준이 말도 잇기 전에 그의 바로 앞의 늪에 물이 일렁이더니, 거대한 악어 형태의 괴수가 튀어나와 거대한 입을 벌렸다. 그리고.
“…어딜!”
민준이 장도를 뽑기도 전에 무색의 거대한 해머가 놈의 입 위로 떨어졌다.
* * *
처음 늪지대에서 등장한 악어는 시작에 불과했다.
소희가 녀석의 머리통을 해머로 내려찍기가 무섭게, 동심원 하나 없이 잔잔하던 늪에 해일이 인 듯이 거대하게 물결을 일으키더니 그 안에서 수많은 악어 괴물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세크’를 죽이고 500시간을 노획합니다.]물론.
그들은 이미 성주도 살해한 적이 있는 역전의 용사들.
민준의 장도가 칼집에서 뽑혀 나올 때마다 놈들의 질긴 가죽은 두 갈래로 갈라져 시간을 뱉어내야 했다.
물에서 거주하는 놈들이니만큼 서우의 공격에는 별 피해를 받지 않았지만, 서우가 놈들의 시야 차단에 집중을 두니 전투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소희와 서우의 공격에 놈들이 경직되면 이를 동길과 민준이 공격의 바통을 이어받아 마지막 타격을 가했고.
그들은 한 몸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놈들의 사체로 늪 한쪽에 동산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녀석들의 숫자가 제법 줄어들었을 무렵.
부글부글.
늪 한가운데에 수많은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놈이 나타났다.
[검은 늪의 주인, ‘세드베크’와 조우합니다.]방금 전, 베어낸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두꺼운 가죽과 입가 사이로 보이는 톱날 같은 수많은 이빨. 그리고 시꺼먼 목구멍 속에 있는 깊은 심연.
단지 목구멍이 어둡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몇 번 차원 이동이라는 걸 겪어본 민준은 놈의 목구멍이 다른 차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백록이 말했던 거물 놈은 아니야, 하지만…….’
퀘스트에서 말하는 에센스를 준다는 그 이름과는 다르다. 하지만, 저놈은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제 동료들을 압박할 수 있을 만큼 강했다. 괜히 심처로 들어가는 곳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 터.
필시 그만큼 강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게 분명했다.
민준은 곧장 늪으로 뛰어들었다.
‘….’
이능을 사용했기에 늪에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민준은 흑색 건틀릿에서 실을 뿜어내 놈의 팔다리에 연결하고자 했고.
이는 녀석이 몸을 한 번 터는 것으로 무효화되었다. 다만.
‘그래, 큰 걸 바라지 않았다.’
자신이 접근하기까지 놈의 신경이 분산된 것이면 충분했다.
민준은 아직 몸을 털고 있는 놈의 두꺼운 목 위로 장도를 내리그었다.
크그그극-
그리고, 제법 많은 성신력을 둘렀음에도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 녀석의 가죽을 향해 몇 번이고 검격을 쏟아냈다.
한 번으로 부족하면, 두 번을.
두 번으로 부족하면, 세 번을 벴다.
민준의 횡베기는 시선으로 쫓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동일한 위치에 도달했고.
그 모습은 민준이 휴식 시간도 없이 수련했던 [구휘법]을 상당한 수준으로 체화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카가가가각-
계속되는 연격은 놈에게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는지, 어느새 사방으로 털어대던 몸을 멈춘 세드베크가 팔을 들어 이를 막아냈다.
그리고.
세드베크가 곧장 팔을 내리자, 녀석의 주둥아리에서 웬 검은색 기운이 민준을 향해 쏘아졌다.
기습적인 역습이었다.
‘이건 맞으면 안 된다.’
녀석의 주둥이에서 쏘아진 기운은 보자마자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저걸 맞으면 돌이킬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민준은 곧장 [군림(君臨)]을 사용해 주변에 있는 세크를 들어 올렸고.
이를 이용해 검은 기운이 쏟아지는 세드베크의 턱을 올려쳤다.
크으으으으으-!
거대한 레이저 줄기처럼 늪과 지면을 훑고 하늘에 닿았다.
그리고 그것과 닿은 건, 풀 한 포기조차 남지 않고 모조리 증발해 버렸다.
‘역시 육감대로 움직이길 잘했어.’
보통 같았으면 소희가 스킬을 사용해 대신 막아주었거나, 동길 혹은 서우가 놈의 주의를 끌어줬겠으나.
검은 늪은 언제 적막했냐는 듯 젤니아에서 넘어온 놈들로 득실거렸으니.
그들은 민준이 1대1로 세드베크와 싸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태였다.
‘내가 녀석을 잡아야 해.’
민준은 곧장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를 사용했다.
지금 필요한 건 녀석의 두터운 몸통을 꿰뚫어버릴 수 있는 공격력과 속도.
민준의 몸이 희끗해지더니, 곧장 세드베크의 뒤를 점했다.
그리고 이어진 발도에 놈의 꼬리가 반쯤 잘려 달랑거렸다.
“끄아아아악!!”
‘여기서 린에게 부탁을 해야 하나?’
현재 린은 뒤에서 [신성한 불]로 보조만 하고 있었다. 녀석이 제대로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선 변신이 필수였기 때문이었는데.
한번 변신을 사용하고 나면, 다음 변신까지 제법 긴 시간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민준은 중요한 전투까지 린이라는 카드를 아껴두고 싶었기에, 구태여 이를 부탁하지 않았다.
‘그냥 내 선에서 끝낸다.’
거슬리는 것은 이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발목을 붙잡는 늪과 녀석의 방어력.
똥개도 자기 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했는데, 저놈들은 어떻겠는가.
민준은 놈을 억지로 집 밖으로 꺼내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순간 사라진 민준이 녀석의 바로 앞에 나타나, 놈의 턱을 올려친 순간 둘이 사라졌다.
그렇게.
몇 초 되지도 않는 시간이 흐르고.
다시 나타난 세크베크는 수산시장의 생선처럼 여러 개로 토막 나 있었다.
* * *
서우는 나이는 어리지만 전투는 웬만한 어른보다 베테랑이었다.
아틀낙의 미로원에서 다른 어른들이 잡혀갔을 때도 살아남았던 생존력과 서우만의 특별한 능력.
그것들이 더해지자 어린 서우도 전투에서 능히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하지만.’
저 셋과 비교한다고 한다면 이야기가 확 달라졌다.
‘민준 아저씨, 동길 아저씨, 소희 언니.’
저 셋은 캠프 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민준 아저씨는 그냥 종 자체가 다른 존재라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영화관에서 보던 히어로 같은 느낌이랄까?
막상 소희는 그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었지만, 민준을 보면 자연히 그러한 모습이 떠오를 만큼.
그는 강했고, 믿음직스러웠으며 든든했다.
더욱이 이 파티에서는 자신이 공격을 성공시킬 필요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모두가 자신보다 강한데,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어디 있나.
그냥 최대한 전황을 넓게 살피며 셋을 보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게 뭐지…?’
그런데 그런 서우의 눈에 이상한 것이 잡혔다.
언뜻 보면 유모차 안에 타 있는 갓난아기처럼 생겼고, 또 다르게 보면 북쪽에서 몰려 왔던 작은 유충 새끼와도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
녀석은 무지갯빛 관문에 몸을 숨기고 그 관문에 입을 꽂아 넣고 있었다.
다만.
녀석의 크기가 너무 작아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아 보였고, 현재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그것보다 급한 전투상황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기에, 서우는 우선 이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고.
역시나 민준 아저씨가 악당 대장을 처리한 순간.
‘휴…. 이제 끝나겠다.’
고생했으니, 이번에 번 시간으로는 과자라는 호사를 누리려던 서우의 옆에서.
그 아기 유충이 귀가 찢어질 듯한 초고주파를 사방에 퍼트리더니,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에엑-!!”
이후 마치 우화라도 하는 것처럼, 유충이라는 껍데기를 벗고 새로 태어난 놈의 모습은.
물리법칙을 무시할 정도로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