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한 발짝 더 (2)
서늘한 가을바람과 함께 민준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의 동료들에게 작게 속삭이고 난 후였다.
‘제가 먼저 간을 볼 테니, 상황 봐서 들어오세요.’
처음 만나는 종류의 적이었다.
사도도 아니고 마인과도 모습이 달라 보였다. 원래는 인간이었을 테니 마인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녀석의 빨대 입에선 유충의 모습도 보였기에 정확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단 말은 놈이 어떤 종류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우선 확인된 것만 능력치 디버프에 스킬 봉인, 독, 신체 조형 능력인가…? 너무 다양해서 종잡을 수가 없어.’
사실 나방이면 나방, 거미면 거미, 벌이면 벌. 사도들은 벌레의 형태를 띠고 있기에 능력 또한 대강은 짐작 가능한 면이 있었는데.
태자귀에서 변한 태주란 놈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놈이었으니, 어떤 해괴한 기술을 사용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모든 공격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자신이 먼저 접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기도 하고.
사륵-
민준이 사라진 자리에 흩날리는 성신력이 별무리처럼 반짝이며 지면에 내려앉기도 전에, 그가 태주의 머리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허상처럼 불투명한 갑주.
성신력으로 새하얗게 불타오르는 장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민준은 벼락처럼 검을 내리찍었다.
– 아파….
쿠르릉!
그리고 실제로 그의 검에는 성신력에 더해 벼락이 묻어있었다. 어느새 나타난 린이 초뢰로 번개를 씌웠기 때문이다.
– 아파, 아파, 아파….
다만.
태주는 눈도 없는 얼굴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웅얼거릴 뿐 별다른 반응을 취하지 않았다.
‘고통이 길진 않을 거다.’
그리고, 처음 공격 이후에 별다른 대응을 보여주지 않는 녀석의 머리 위로 민준의 검이 녀석의 닿기 직전.
– ………!!
“윽!”
태주의 머리가 진동하더니, 엄청난 세기의 음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민준은 귀와 코에서 피를 선혈을 흘리면서도 이를 버텨내다가,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거센 파동에 휘말려 날아갔다.
“조장!”
사태를 관망하며 끼어들 틈만 노리던 동길이 소리쳤지만, 민준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린이 어느새 성체로 변해 그를 받아내기 위해 허공을 내달렸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민준이 전장을 이탈하고.
“…이 X끼가!”
어느새 나타난 소희가 눈과 코, 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 자리를 메꿨다.
쿵!
어느새 태주의 옆에 도달해 빛을 머금은 주먹을 휘두르는 소희.
스킬이 봉인된 탓에 그녀가 주력으로 사용하는 불투명한 방패를 꺼내 들진 못했으나,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짓쳐드는 주먹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런, X발 놈…. 이…….”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소희는 주먹을 뻗은 채로 허공에서 몸을 부르르 떨고 있고, 태주는 그런 소희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벌벌 떨리는 턱을 움직여 씹어먹듯 욕을 뱉어내는 소희의 뺨에서 식은땀과 피가 섞여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런 소희를 바라보는 상태로 녀석은 계속해서 자신만 들릴 정도로 계속해서 속삭였고.
– 엄마야? …응? 아니야, 너는 엄마가 아니야…. 날, 그냥 내버려 둬. 난 여기 있을래. 아, 따듯하다……. 죽어. 다 죽어버려.
태주의 중얼거림은 진언(眞言)이 되어 주술로서 화했다.
[태주(太主)가 저주를 퍼붓습니다.] [신체 능력치 레벨이 3할 추가로 감소합니다!] [상태 이상 ‘경직’에 빠집니다!] [상태 이상 ‘쇠약’에 빠집니다!].
.
.
[상태 이상 ‘착란’에 빠집니다!]기이한 주술에 속박된 소희와 이를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리는 태주.
뿜어내는 힘의 파동은 사방을 울리고 있었지만, 활개치는 기운과는 다르게 가만히 멈춰있는 둘 사이로.
파동에 거칠게 너울대는 늪 아래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토막 난 고깃덩어리와 다를 바 없었던 세크 무리.
어떤 세크는 기다란 입 부분이 꼬리에, 반대로 육중한 파괴력을 지닌 꼬리가 팔에 붙어 있는 끔찍한 모습들이었으나, 녀석들은 기형적인 제 모습 따윈 전혀 상관없다는 듯 몸을 일으킨 뒤, 얼어버린 소희에게로 걸어갔다.
사족보행 하는 녀석들의 관절은 굽혀지지 않는지 걸음이 불편해 보였지만.
콰드득!
자신들의 살점과 뼈를 부러뜨리고 찢어가면서라도 기어코 소희에게 몰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으으어-”
그렇게 죽은 생선처럼 탁한 세크의 눈알에 담긴 소희의 모습이 점점 확대되어가는 순간.
묵빛 장검이 가로로 그어지면서 세크 몇몇을 다시금 토막내고는 소희을 낚아채 후 전장의 외곽으로 멀어졌다.
콰아아앙!
그리고 절묘하게 소희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크리에이터가 생겨났다.
“크롸라라라!!”
하늘로 치솟는 늪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세드베크.
소희가 후두둑 떨어지는 진흙을 맞으며 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압은 고사하고 죽이는 것도 힘들 거 같은데….’
처음 민준이 제압을 부탁했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불쌍한 존재라고는 하지만 현재는 자신들의 적이었고, 동료를 위험에 빠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놈이었으니.
빨리 처리하고 단우를 구하러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희가 민준의 말에 군말 없이 따른 것은. 민준이라면 어떤 생각이 있으리란 믿음 때문이었는데.
‘그래도 저건….’
제압을 하고 말고를 떠나, 처치하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상대가 저 정도로 강하다면 그의 판단을 다시 한번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싶을 정도로.
이 장소에 한정된 힘인지 아니면 낯선 능력으로 인해 대응을 잘 못 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지금 보여주는 힘은 마치 성주를 연상케 했다.
그런 소희의 앞에.
쩌저정!
어느새 나타나 [‘깨어난’ 용살자]를 휘두르고 있는 민준이 보였다.
‘….’
태주에게 막히는 민준의 공격과 동시에, 린의 앞발이 날아들었다.
점이 되어 날아가는 태주에게 벼락이 쏟아지고, 민준이 가볍게 휘두르는 참마도에 좀비처럼 일어났던 세크들이 모두 반 토막이 났다.
불리해 보이던 형국이 정리되는 데는 정말 찰나의 시간만 필요했을 따름.
‘지금 보니…. 제압이 불가능하진 않겠네.’
다시금 앞에 있는 남자가 얼마나 강한지 실감한 소희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 * *
“괜찮습니다! 이제 적극적으로 달려드셔도 돼요!”
돌풍처럼 참마도를 휘두른 민준이 크게 외치며 동료들을 불렀다.
태주라는 놈의 스타일을 확실히 파악한 이상, 몸을 사릴 시점은 이제 사라졌다. 적극적으로 행동해 공략할 뿐.
녀석을 제압해 선업을 얻을 생각에 민준의 움직임이 더욱더 빠르고 예리해졌다.
이번 퀘스트에 걸려있는 건, 무려 +15에 달하는 선업 수치.
태주가 불쌍한 녀석이라 생각한 것도 맞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퀘스트가 주는 보상에 딸려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올리기 힘든 선업인데, 15라는 숫자는 퀘스트의 조건대로 저 녀석을 정화하더라도 승급 퀘스트를 충족하고도 남는 수치였다.
이번 기회에 그 보상을 얻을 수 있다면, 연달아 무려 두 번의 승급을 할 수 있는 상황.
원래 이런 승급 시스템은 올라갈수록 더욱 올리기 힘든 구조란 걸 보면, 승급 한 단계, 한 단계마다 그 차이가 엄청나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
두 번씩이나 승급하는 이상, 새로운 아이템 풀리는 것도 기대해볼 만했다.
‘아이템을 구매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존시간이 부족하진 않은 상황이니까.’
유일 등급이든, 그 윗 등급의 아이템이든 충분히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저것부터 마무리는 해야겠지만 말이야….’
민준은 돌연 제 감각에 무엇인가 걸리자마자 고개를 젖혔고, 아까와 같은 송곳이 다시금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아크티네 이 X끼는 도대체 뭘 만들어 낸 거야.’
늪 깊은 곳에 처박혔던 태주가 다시금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났다.
연타가 아니라, 단타긴 했으나 가슴에 정통으로 맞고도 저렇게 멀쩡할 만한 공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놈은 별다른 피해를 받은 기색도 없이 일어나 반격까지 하고 있었으니…. 퀘스트가 괜히 선업을 15만큼이나 보상으로 제시한 건 아닌가보다.
“린, 가자!”
“네!”
민준이 재차 녀석을 향해 쇄도했다.
* * *
사실 민준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현재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일 상황은 아니었다.
스킬 2개를 봉인 당하고도 전력에 크게 여파가 없을 만큼 다양하고 많은 종류의 스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으니 말이다.
나머지는 오로지 주어진 스킬과 하락한 능력치 레벨만으로 세드베크를 상대하면서 세크의 숫자를 줄여나가는 데 집중해야만 했다.
그리고.
죽은 시체라 그런지 공포도, 고통도 모르는 놈들은 아귀처럼 그들을 향해 달라붙었다.
콰득!
“서우야, 괜찮아?!”
“…난 괜찮아!”
되살아난 세크의 두뇌를 아예 곤죽을 내버린 소희가 서우의 안전을 확인했다.
하지만 소녀는 울음을 머금으면서도 꿈틀거리는 세크의 눈에 단검을 여러 차례 찔러댔다.
성력이 씌워진 날붙이가 눈알을 파고들어 피를 튀어내면서도 서우는 울음을 터트리지 않고 더욱 단검을 꽉 부여잡았다.
전투 초반 민준에게 보호받은 것에 대해 크게 느낀 점이 있었는지, 몸을 아끼지 않는 모습.
소녀는 손에 불꽃 모양의 나무 조각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단검을 쥐고는 세크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서우도 예외 없이 싸우는 치열한 육탄 공방전에서 가장 활약하는 건 동길이었다.
애초에 아이템이나 스킬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전투방식을 지니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가 지닌 검술 패시브 스킬이 막힌다고 한들, 여러 부가적인 효과가 사라질지언정 그가 익히고 있는 검술 자체가 사라지진 않으니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움직임과 검에 실어 넣을 수 있는 이능만 있다면 그는 언제나 싸울 수 있었고, 그에 더해 성력보다 더 강력한 성신력마저 지니고 있었다.
촤아아악-
그런 그의 흑검이 사방을 휘젓자, 이미 영혼이 사라진 육체들이 다시금 진토로 돌아갔다.
“…후욱, 후욱.”
그럼에도 체력이 부치는 건 어쩔 수 없기에 동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금 전장을 둘러봤다.
생각보다 서우가 분발하고 있었고, 소희는 그런 소녀를 보조하면서 차근차근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치열한 육탄 공방전.
몸을 무겁게 하는 진흙이 그들을 계속해서 옭아맸지만, 살기 위해서, 동료를 그리고 피붙이를 구하기 위해서 그들은 개싸움을 이어갔다.
동일하게 능력치가 감소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날아다니고 있는 민준을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