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복수 (5)
민준이 고민 없이 바닥을 박차자 그의 손목에 있던 팔찌가 찰랑거렸다.
원래라면 색이 바래, 탁한 은빛을 냈을 팔찌가 꺼풀을 벗고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나타난 팔찌의 빛깔은 겉면에 새겨진 화려한 세공으로 붉은 기운을 띠고 있는 황금색. 저 하늘을 물들인 노을과 비슷한 색이었다.
누군가 보면 장식용 금팔찌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빈곤한 삶 속에서 학업에 충실했던 민준은 보자마자 이 팔찌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청동(靑銅).’
구리와 주석을 혼합한 합금이자,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전부터 사용했던 금속.
아이템 정보를 통해 알게 된 팔찌의 원 주인을 고려한다면, 아마 이 추측은 틀리지 않을 거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는 세트 효과와 스스로 패왕의 위에 올랐던 이라면.
그게 누구를 가르키는 건지는 뻔한 것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갑옷이 다시 한번 변화하며 지어진 아이템 이름이 항적의 패기이기도 하고…….’
이름보다 자(字)가 더 유명한 사내이자, 전투에 한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싸움꾼. 항우(項羽).
이 갑옷은 분명 그자의 물건임이 분명했다.
‘내가 린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 운이 없던 건, 이 아이템을 고르면서 모든 운을 다 써버려서 그런 게 아닐까?’
잠시 생각에 빠진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사실 난 운이 안 좋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네.’
사실 그랬다. 고작 고급등급 아이템을 샀을 뿐이었는데, 그게 성장하고 성장해 전설 등급까지 오른 건 둘째치고.
이런 세상에서는 특히 더 보기 힘든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죽기 직전까지 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결국엔 살아남았다.
지금도 봐라, 위기를 맞이한 순간 기가 막힌 아이템이 제게 생명줄을 내려주지 않았나.
‘미쳤네, 진짜…. 팔찌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평소의 몇 배나 상승했어.’
아무런 대가 없이 역발산기개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사기와 다름없었고. 아이템의 설명에 따르면 그러한 사기적인 능력들을 모두 지니고 있던 항우의 모든 것을 자신이 물려받았다.
항우의 또 다른 별칭은 만인적(萬人敵).
그것은 가히 만 명과도 겨룰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칭호였지만…. 민준이 느끼기에 자신의 변화는 그런 표현조차 부족할 정도로 격렬했다.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아.’
스윽-
민준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머리 위에서 하얗게 이글거리던 헤일로의 잔상이 긴 꼬리를 남기며 칼라미테스 바로 앞에 다다랐다.
‘무조건 단기 결전이다.’
[시간 이격]을 사용해 제 사고를 가속하고 있던 민준.그는 약 기운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린의 기파가 불규칙하게 튀고 있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
아마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난다면, 린은 탈진 상태에 접어들고 말 터.
민준은 한 번의 격돌로 이 전투를 종결지어야겠다 마음먹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더 강한 공격.’
민준의 눈이 사용자의 용기와 기개에 따라 그 위력이 결정되는 ‘무기이자 갑주’라는 문구로 향했다.
이전의 [패왕의 갑주]가 무형의 기운으로 갑옷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쳤다면, 이번에는 무기까지 만들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무기를 소모품처럼 사용해도 되겠지.’
급격하게 성장한 자신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깨질까 염려했기에, 힘껏 휘두르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으니까.
애초에 그것들로 얻을 수 있는 ‘구휘법’과 같은 단물은 이미 다 빼먹은 상태였다.
물론, [‘깨어난’ 용살자]와 같은 아이템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차피 자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쓸 수도 없는 조건을 지닌 아이템이다.
그러니 적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히고 한 줌의 먼지로 화할 수 있다면 필히 남는 장사 일터다.
‘우선 [동방의 예기]….’
핑!
그렇게 억지로 늘려버린 시간선이 민준의 칼부림 한 번으로 끊어지며 빠르게 감겨 돌아갔다.
말 그대로 찰나를 쪼개는 검결.
그그그그- 쿵!
뒤늦게 지면으로 추락하는 칼라미테스의 거대한 상반신이 눈에 들어왔다.
말 그대로 하체와 상체로 이등분하는 일도양단의 수가 잘 먹혀든 것.
안 그래도 잔뜩 이가 나간 날이 흐릿하게 일렁이더니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고, 그와 동시에 지면이 울리고 숲이 흔들릴 정도의 비명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
““으윽….””
동길을 비롯해 진법을 이루고 있는 천둥 부족 모두가 무릎을 꿇었으나.
민준과 린만은 오롯이 정신을 부여잡고 칼라미테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민준의 손에는 어느새 거대한 참마도가 들려있었고, 린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에게 남은 힘을 모두 그러모아 [신성한 불꽃]과 [초뢰]를 그 검에 씌웠다.
민준의 첫 공격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잘라낼 듯한 횡베기였다면, 두 번째는 태산마저 부술듯한 종베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칼라미테스가 살아온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생존 본능에 따라 검붉은 장막을 만들어 이를 막아냈다.
쩌저저저저정-!!
두 힘이 부딪혀 한 점에 응축되었다가, 거대한 굉음과 함께 쓰나미처럼 퍼져나갔다.
민준은 심장에 쌓여있던 성신력의 5할 남짓과 각종 디버프 및 버프 스킬을 방금 두 수에 모두 쏟아부었다.
그렇기에 그도 상태가 멀쩡하진 않았지만, 그건 칼라미테스 또한 마찬가지.
민준은 지금이 시쳇말로 ‘막타’를 먹여야 할 순간임을 눈치챘다.
물론 시간을 두고 동길과 함께 수적 우위를 가져가, 스노우볼 굴리듯 이득을 취해가며 전투를 펼치는 방법도 있겠지만, 단기 결전으로 끝내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그의 머릿속에 남은 건 정녕 ‘기세’만 있을 뿐이었다.
‘후욱….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다음 공격에 모두 쏟아붓는다.’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신 민준이 이미 손에서 사라진 [‘깨어난’ 용살자]를 떠나보내고 청동 팔찌를 어루만졌다.
이전과 같이 성신력을 때려 박을 필요도 없었다.
민준은 그저 놈을 베고 싶은 마음을 담아 그에 따른 모습을 드러내라 소망했을 따름이다.
그것으로 청동 팔찌에 반사되어 찬란히 부서지던 빛의 파편은 허공에서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띠링!
[사용자의 기백이 쌓여 거대한 언덕을 만듭니다!] [‘항적의 기백’이 태아검(太阿劍)으로 변합니다!]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거대한 언덕’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막대한 크기의 검이 민준의 눈앞에서 나타났다.
크기만 따지면 이 무기의 초창기 모습이던 [주인을 잃은 그레이트소드]는 우스울 정도.
하지만.
‘…딱 좋아.’
그래서 오히려 거인과 같은 칼라미테스를 상대하기는 딱 알맞았다.
민준이 망설이지 않고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 청동검, [태아검]을 두 손으로 말아쥐었다.
쿠구구구궁-
그런 민준의 모습에서 큰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놈의 몸에서 검붉은 색 경파와 함께 사람의 감정을 무저갱까지 끌어내리는 암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민준은 일찍이 이 기운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세상에 모든 한을 안고 있던 태주가 뿌려대던 기운. 그 지랄맞은 기운이 분명했다.
““…쿨럭!””
이에 노출된 동길과 천둥 부족이 일제히 피를 토했고, 그로 인해 진법이 흔들리며 금이 갔다.
그리고 시간을 빠르게 돌린 것처럼, 칼라미테스의 신체를 이루고 있는 나무가 삭아버리기 시작했다. 세월을 맞아 고목(古木)이 흙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빠르게 진행됐다.
‘예상했다, 이 X끼.’
하지만 이는 조심성 많은 민준의 예상범위 안에 있던 것.
민준은 여전히 침착했고.
그의 손에서 놈의 줄기와 비교하면 얇디얇은 밧줄이 뻗어 나갔다.
* * *
내가 나를 느꼈을 때.
그러니까 자아라는 것을 깨닫고, 영혼이라는 불꽃을 지니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너무나 비루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저 바람이라는 변덕 탓에 절벽 한가운데에 태어난 나는, 나와 비슷한 존재들이 얼마나 하릴없이 스러져 가는지 모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단지 누군가 화가 났다는 이유만으로 발을 구르면 즈려 밟혀야 하고, 걷어차이면 뿌리째 뽑혀 말라 죽는 수동적인 존재.
그게 식물이라는, 한 떨기 꽃에 불과한 나라는 존재가 지닌 가치였다. 그리고.
그걸 깨닫자 처음으로 느꼈던 감정은 ‘살고 싶다’였다.
더 살면 어느 점이 더 좋은지는 몰랐지만, 그저 그러고 싶었다.
내가 필사의 노력을 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
당연하듯 분비되는 꿀과 꽃가루를 향기로운 독액과 독가루로 바꾸고, 폭신한 꽃잎을 끈적이는 주걱으로 변화시켰다.
연한 잎사귀와 줄기는 먹이를 붙잡을 수 있는 질긴 가시넝쿨로 진화했고, 성긴 뿌리는 빽빽해졌다.
당연하지만 그 변화는 한 번에 이뤄지지 않았다. 태생을 바꾼다는 건 역천(逆天)의 행위였고, 이는 고통의 연속이었으니까.
양분이, 더 많은 양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벌레를, 그다음에는 작은 새와 설치류를 잡아먹었고. 제 생존에 도움이 된다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모아 제 몸을 변형, 성장시키는 데 사용했다.
그러다 세월이라는 풍파를 맞아 절벽이 평야가 되고, 숲이 되었을 때.
마침내 자신은 그곳의 최상위 포식자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숫자라는 개념으로 셀 수 없는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남았다.
많은 경험을 쌓아왔고, 그렇게 축적된 경험은 다양한 것으로 치환됐다.
만물에 대한 지식은 물론,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지혜, 그리고 자연스럽게 쌓이는 무력까지.
‘그것들은 또다시.’
자신의 생존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실 한낱 미물들은 모르는 장막 뒤의 비밀이지만, 이는 선순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오래 살수록 쌓이는 경험이 생존력을 키우고 그 생존력은 다시금 세상이라는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들어주니 말이다.
‘이 선순환 구조의 사이클이 돌아가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는 딱 하나.’
자신이 가장 처음 느꼈던, 살고 싶다는 욕심 하나였다.
아니, 그저 욕심으로는 부족하다.
언젠가 바람과 구름에게 주워들었던 것처럼, 삶을 바닷물처럼 여길 줄 알아야 했다.
마시면 마실수록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살아남을수록 더욱 삶을 갈망해야 했다.
영생을 위한 탐욕(貪慾).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이다.
상대가 내 먹잇감인지, 내가 상대의 먹잇감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눈과 판단력. 상대를 짓누를 수 있는 무력과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기동력 등.
그것들은 살아만 남으면 언제고 따라오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매번 자신의 일을 방해하면서도 순간순간 제 목숨을 하루살이처럼 걸어대는 머저리는.
어렵지 않은 상대여야만 했다. 옆에 새끼 기린까지 있으니,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보내줄 비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별안간 이 두 놈이 모두 제 예상범위를 아득히 벗어나면서 계획이 어그러졌다.
아무런 증조조차 없이 벌어진 일이었기에 더욱 경악스러웠다.
갑자기 성체가 된 저 기린 새끼는, 이미 혈통이 끊어진 저들의 왕과 같은 기운을 줄기줄기 흘려대며 무슈들을 굴복시키질 않나.
갑자기 빛을 뿜어내며 이치에 벗어난 힘을 쓰는 저 괴물은 이미….
‘육신이라는 매체가 담을 수 있는 힘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불가해의 존재였다.
과거 젤니아에서 먼발치에서나 바라봤던, 나름 오래 산 자신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젤니아의 시작과 함께 태어났다는 ‘그 존재’와 비슷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허나.’
현명한 존재는 항상 여러 길을 상정해 두는 법.
자신은 언제나 생존을 염두에 두는 지혜로운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