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4
004화. 인간의 적 (1)
“하아… 하아…. 살았나?”
유충들이 셔터를 두드려대기만 할 뿐 부수진 못한다는 걸 재차 확인한 민준은 그대로 바닥에 누워 숨을 골랐는데.
“저기요! 힘든 건 알겠지만, 어서 일어나야 해요!”
그가 헐떡거리거나 말거나, 그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던 단발머리 여자가 민준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아직 다른 출구가 열려있어요. 빨리 그쪽을 막으러 가야 해요!”
“방금까지 내가 못 들어오게 발로 밀어놓고, 들어오자마자 이러는 건 너무 뻔뻔한 거 아닙니까?”
“…그, 그건.”
주위를 둘러보자, 조금 전 유충은 물론 기어들어 가려는 자신까지 밀어내던 셔츠 사내와 다른 몇몇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다른 출구를 도와주러 간 듯싶었다.
“…그럼 그렇게 누워있다가 벌레한테 죽어버리던지, 알아서 하세요!”
“젠장…. 쉽게 가는 법이 없네.”
내가 가지 않을 거면 본인이라도 빨리 도와주러 가야 한다며, 단발머리가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곳은 안전한 곳이 되어야만 했으니. 민준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그에 더해 단발머리 여자는 끝까지 자신까지는 구하고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했던 게 기억나기도 했고….
“저기요! 이름이 뭡니까?”
“소희요. 정소희.”
“그럼 이것 하나만 더 물읍시다. 그래서 계획은 있는 겁니까?!”
“골든 아파트로 연결되는 통로만 열어두고, 다른 곳은 다 닫아버릴 거예요! 역 중심으로 가는 통로까지 싹 다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역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민준은 이 지경이 돼서도 몸을 사리는 인간들을 보니 열이 뻗쳤지만, 그녀의 말대로 지금 당장은 문을 닫는 게 시급했다.
잠실역 중심으로 연결된 지하상가 길목, 네 곳의 방화 셔터를 닫은 둘은, 지체하지 않고 6번 출구로 뛰어갔다.
그곳도 조금 전 7번 출구와 다를 것 없이, 녹색 체액으로 범벅이 된 사람들이 셔터를 닫기 위해 분투 중이었다.
‘다만.’
아까와 같은 난리통 속에서, 여러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차이 나는 한 사람이 눈에 계속 밟힌다는 점만이 달랐다.
홀로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깔끔한 양복 차림에, 흐트러짐 없이 말끔히 넘긴 머리와 금테 안경.
옷깃에 달린 국회의원 배지가 그 정체를 말해줬다.
그 인간은 방어선에서 멀찍이 떨어져, 두 명의 보좌관에게 보호를 받으면서도 연신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러대는 중이었다.
“밀어내야 합니다, 여러분! 힘을 내세요! 김 비서관! 거기 비었잖아!”
그의 호통에 조금 전 민준을 내쫓으려 했던 셔츠 사내가 큰소리로 대답하며 의자로 유충들을 밀어냈다.
입만 산 의원의 행동에 민준의 인상이 찌푸려졌으나, 왜인지 시민들은 그의 행동을 묵인하고 있었다.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 그런가…? 뭐, 어쨌든.’
벌레들을 막기 위한 사람들의 분투로, 방화 셔터의 버튼이 있는 곳 근방까지 유충들을 밀어낸 상황이라는 점은 국회의원 나리의 꼴 보기 싫은 행태와 달리 다행이라 할만했으니.
민준은 아무렴 어떻냐는 생각에 의원에 대한 관심을 꺼버렸다.
‘결과만 좋으면 됐지. 얌체 같은 인간이 눈에 보이건 말건 무슨 상관이야.’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기 위해 아등바등 애써야 했던 대학교 조별과제에서도, 트롤 한두 명이 껴있는 건 상수에 가까웠다.
당시엔 학점을 위해 억지로 총대를 메고 자료 준비부터 발표까지 모든 걸 주도해야만 했지만, 누가 생계유지를 위한 알바를 병행하면서 그런 일에 시간을 쏟고 싶을까….
그런 역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곤 들었지만, 적어도 민준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만 해도 뒤늦게 합류했기에 이곳에서 잡은 괴물이 많지는 않은 상황.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데, 좋은 흐름을 망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막… 막아!”
“으아아악!”
그러니까…. 불과 3초 전. 난데없이 들려온 비명들과 함께 방어선 한 면이 순식간에 뚫리는 일만 벌어지지 않았으면.
굳이 자신이 나서는 일은 없었을 거란 말이었다.
‘….’
아주 잠깐, 설마 하는 마음으로 생각만 했을 뿐인데. 불길한 상상이 곧장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저, 저건 또 뭐야!”
와르르 무너진 사람들 앞에 나타난 황소만 한 크기의 거대 유충이 두터운 제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끼에에에에엑!
“도망쳐!”
“…저놈 좀 어떻게 해봐!!”
놈은 방화 셔터 라인 내부로 들어와 사람들을 유린했고, 그놈을 따라 다른 유충들도 무너진 방어선을 타고 몸뚱이를 욱여넣었다.
“여러분 저놈을 밖으로 밀어내야 합니다! 지금 셔터를 내렸다가는 다 몰살이에요!”
어느새 안전한 후방으로 빠진 의원은 그런 와중에도 끝까지 지휘를 멈추지 않았다.
도대체 저 황소 같은 놈을 어떻게 밀어내려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민준은.
“그냥 셔터 닫아요!”
“너 뭐야! 지금 의원님이 상황 통제하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럼 저 많은 벌레 새끼들을 다 역사로 들일 겁니까?!”
김 비서관으로 불린 셔츠 남성이 화를 내든지 말든지, 그를 밀치고 스위치를 눌러버렸다.
“너-”
“셔터를 안 내리면, 저 벌레들이 다 들이닥칠 텐데. 그거 아저씨가 다 잡을 겁니까?”
“어린놈의 새끼가…. 어른한테 바락바락 대드는 거 좀 보게. 작은놈들이 문제야? 저 커다란 놈을 역사로 들이면 대체 누가 저놈을 잡을 건데! 네가 잡을 거야? 못 잡을 거 같으니까 의원님께서 어떻게든 밀어내자고 하신 거잖아!”
“무슨 말 하시는지는 알겠는데, 그럼 제가 잡을 테니까. 아저씨는 빠지세요.”
아까는 더 이상 못 막는다고 다짜고짜 셔터를 내렸던 사람이었는데, 이번엔 경우가 다른가 보다.
애초에 더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에, 이후 들려오는 아저씨의 말은 무시하고 떠오른 퀘스트창에 시선을 던졌다.
「[서브 퀘스트 – 레이드]
난이도: D
클리어 조건: 거대 유충 처치
제한시간: 없음
보상: 기여도에 따라 차등 지급
실패 시: 사망」
‘난이도가 D.’
지금까지 떠올랐던 퀘스트의 난이도는 전부 F였다는 걸 감안하면, 확실히 저 황소 같은 녀석이 강하긴 강하다 싶었다.
‘그래도…. 어차피, D나 F나 둘 다 못 깰 만큼 어렵다는 소린 아니잖아?’
잠실 사거리에서 이곳, 잠실역까지 세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유충을 죽였다.
그리고, 괴물을 죽이고 퀘스트를 깨는 순간마다 보상으로 제 신체 능력이 말도 안 되게 상승했음을 확인했다.
‘단지 크기만 조금 더 크지. 저것도 똑같은 벌레야.’
떠오른 메시지를 치우고, 놈을 응시하던 중.
쾅!
마침 타이밍 좋게 방화 셔터가 닫히면서, 거대 유충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놈은 그저 시간을 빨아먹는 데 열중할 뿐 전혀 겁먹은 모습이 아니어서, 놈은 순식간에 미라가 되어버린 시체를 끝까지 빨아먹고 나서야 민준을 바라봤다.
키르르륵!
놈이 갈고리를 들고 짧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포효했다.
‘사람을 몇 명이나 빨아먹었길래 저렇게 커진 거야?’
민준은 놈의 포효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설 순 없었다.
도망가면 당장의 위험은 피할 수 있겠지만, 다음에는 잠실역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죄 먹어치우고 덩치를 키운 놈과 싸워야 할 것이다.
지금의 싸움은 서로가 배수의 진.
퇴로는 이미 모두 막힌 것과 다름이 없었다.
‘….’
민준은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들의 무장상태를 살폈다.
방어선을 유지하던 열 명 중. 제대로 된 무기를 들고 있는 건, 소희라고 했던 단발머리 여자를 포함한 3명 정도가 끝이고.
나머지는 식당에서 가져온 의자나 옷가게에서 들고 온 마네킹 다리 따위가 전부였다.
즉, 이곳에 있는 대부분 ‘스페이스 마켓’이 뭔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몇 없는 무기조차, 사시미 칼이나 장도리, 멍키스패너 따위의 것들이었으니.
이 사람들이 스페이스 마켓을 뭔지를 알게 된다고 해도 지금 나무토막을 들고 있는 상황과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몰랐다.
결국, 좋든 싫든 무기다운 무기를 들고 있는 자신이 처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건 그가 리더십이나 책임감이 있어서라기보다, 살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문제에 더 적합했다.
다른 사람들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 그가 해내지 못하면 모두가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제가 놈의 주의를 끌겠습니다! 그동안 빈틈을 노려주세요!”
캉! 캉!
민준이 도끼로 표지판을 치면서 주의를 끌며 소리쳤다.
놈도 가장 위협적인 상대가 누군지 파악했는지, 빨대 입을 까딱거리며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걸음. 또 한걸음.
민준은 푸르게 빛나는 놈의 겹눈을 응시하며 서서히 뒷걸음쳤다.
‘어서 공격해라. 피하는 순간 갈고리를 두 동강 내줄 테니….’
놈들의 각질 갑옷은 플레이트 아머처럼 무척 단단했지만, 이음새와 그 속살을 비롯해 각질 외의 부분은 굉장히 연약했다.
민준은 그 틈을 노리고 있었다.
휘-익!
예고 없이 날아오는 갈고리가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덩치는 커도, 결국 공격 방식은 작은놈들이랑 똑같아.’
놈들이 주로 공격하는 방식은 갈고리를 날리는 것과 빨대 같은 주둥이로 찔러오는 것. 단, 두 개가 끝이다.
미리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기에, 짓쳐들어오는 갈고리는 바깥쪽으로 돌아 들어가며 회피할 수 있었고.
공격을 피해낸 보상으로 눈앞에 놈의 팔 이음새가 훤히 드러났다.
‘공격에 실패했으면 팔 한 짝은 내놔야지.’
민준이 휘두른 토마호크가 정확히 각질 사이를 파고들었다.
* * *
키륵?
민준의 손도끼는 분명 놈의 살갗을 파고들었고, 지금껏 민준은 이 방법으로 수십 마리가 넘는 괴물을 학살해왔다.
단지…. 지금껏 그 방법이 유효했던 놈들은 모두 갓 태어난 유충이라는 것과 놈의 덩치가 가지는 힘을 간과했을 뿐.
“제기랄….”
생각보다 두꺼웠던 놈의 팔은 단번에 잘리지 않았고, 거대 유충의 화만 돋웠다.
끼에에에엑!
잔뜩 성이 난 놈이 포효와 함께 반대편 갈고리를 휘둘렀다.
녀석의 동태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탓에 가까스로 표지판을 사용해 놈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충격까지는 막을 수 없었던 탓에, 결국 민준은 멀리 튕겨 나가 바닥을 굴러야 했다.
“으윽….”
팔이 미친 듯이 저려왔다.
그러나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고, 어떻게든 다시 자세를 잡고 일어나야 했다.
“조심해요!”
소희의 외침에 앞을 바라봤을 땐, 창살만 한 유충의 빨대 입이 코앞으로 짓쳐들어온 후였다.
‘저 녀석이 바라는 건 내 시간이다.’
유충들은 모두 주둥이에 달린 빨대를 꽂아 시간을 빨아먹었다.
거대 유충 역시 시간을 모두 빨아먹기 전까진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나는 녀석의 주둥이만을 주시했고.
덕분에…. 가까스로 몸을 낮춰 쏘아지는 놈의 빨대 주둥이를 피할 수 있었다.
키에에에엑!
녀석이 내게 주둥이를 꽂아 넣기 위해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거대 유충의 모든 신경은 제 몸에 상처를 낸 나를 향해 쏠려 있었고, 난 필사적으로 놈의 주둥이를 피해내며 시간을 벌었다.
혼자인 놈과는 달리, 내 주변에는 녀석을 죽이기 위해 모여든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니, 본의 아니게 내가 충실한 탱커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격이었다.
말을 맞춘 적이 없어,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다행히…. 거대 유충이 내게 정신이 팔린 틈을 이용해 놈의 뒤를 잡는 소희의 모습과 조심스레 다가오는 몇몇 다른 인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빡! 빡!
멍키스패너 따위로 이루어진 공격이 유의미한 피해를 준 것 같진 않았으나.
놈도 다른 사람들이 거슬리긴 했는지, 나를 향해 쏟아지던 공세가 실시간으로 무뎌지는 것이 확연하게 체감되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다시 녀석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전황은 천천히 우리를 향해 웃어주기 시작했다.
* * *
끼에에에엑!
‘기회다!’
차츰 기울어가던 탑이 일순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완벽하게 놈의 사각으로 숨어든 소희의 장도리 질에 놈의 각질 갑옷 일부가 깨져 버린 탓에, 이제까지 큰 피해를 주지 못했던 공격이 놈의 연약한 살을 파헤쳤고 내장에 손상을 입혔다.
놈이 앞다리를 번쩍 들며 고통에 찬 굉음을 질렀지만, 놈이 그러했듯이 나 또한 기회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빗나간 놈의 빨대 주둥이를 한 손으로 쥔 나는 나뭇가지를 쳐내듯 토마호크로 놈의 주둥이를 찍어내렷다.
‘이거나 먹어라.’
잘라낸 놈의 빨대 주둥이는 창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날카로워서, 곧장 빨대 입을 바투 잡고 놈의 야들야들한 아랫배를 향해 찔렀고.
약간의 저항감 이후 빨대가 녀석을 몸을 뚫고 끝도 없이 들어갔다.
프스스슷-
곧, 놈의 등 뒤로 튀어나온 빨대 끝으로 초록색 진액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녀석이 고통에 몸을 파르르 떨어대는 것이 맞댄 몸을 통해 진동으로 느껴졌다.
“제발 좀 뒤져라!”
이번에 죽이지 못하면 뒤가 없다.
반대편으로 삐죽 삐져나온 놈의 빨대 주둥이는 놈의 갑각을 뚫는 것을 마지막으로 고정된 탓에.
토마호크를 꺼내 들고는, 정말 젖먹던 힘을 다해 녀석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다행히 녀석도 힘이 꽤나 빠진 탓인지. 토마호크가 조금의 저항도 없이 공간을 가로질렀고.
‘X발!!’
그렇게.
뎅겅-
툭. 데구르르-
바닥에 떨어진 유충의 머리가 굴러와 내 발치에 닿으면서 시스템이 전하는 메시지가 귓가에 들려왔다.
[연계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