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46
046화. 독 중의 독 (2)
피를 뚝뚝 흘리며 시카리우스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마구 박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철장 속 재주 부리는 원숭이를 본 아이처럼.
“오호?! 나한테 배짱부리더니, 결국 네가 살아남았네, 축하해. 그럼 소원을 들어줘야겠지?”
시카리우스의 가증스러운 행태가 역겨웠으나, 이년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제 아내와 딸을 내보내 주십쇼.”
“누구 쟤네?”
시카리우스의 손짓에 내가 뒤돌아보자 그곳에 실신해 누워있는 아내와 울고 있는 딸이 서 있었다.
“쟤네 아까부터 있었어. 네가 한 짓을 보고도 과연 살고 싶으려나. 차라리 죽고 싶지 않을까? 그러니까 네가 편하게 보내주는 건 어때? 네 암컷을 죽이면 새끼는 살려줄게. 넓은 아량으로!”
“이이… X발년아! 약속이랑 다르-!”
쿵!
놈이 자신의 키만 한 다리를 휘둘러 나를 치자, 나는 힘없이 날아가 아내와 딸 앞에 쓰러졌다.
“흐윽, 아빠….”
“우리 수연이 착하지? 눈 꼭 감고…. 흐읍… 있어 봐.”
“왜애- 싫어. 뭐 하려고.”
“어서! 아빠가 감으라면 감아야지!”
“흐아아아앙!”
나는 피가 가득 묻은 손으로 우는 딸의 눈을 가리고 실신한 아내를 내려다봤다.
‘여보… 미안해. 나도 곧 따라갈게. 그러니까 수연이만…. 수연이 만이라도 여기서 내보내자.’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식칼을 휘둘렀으나.
턱.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떠 고개를 돌렸다.
내 손목을 붙잡은 사내의 손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젠장, 작전이고 뭐고-”
씹어먹듯 욕을 뱉은 그는 시대착오적인 중세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랬기에 오히려 이 미친 세상에 어울렸다.
“관문에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으니까 상관없겠지….”
그 사내는 가지고 다닐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검을 꺼내어 들고는 시카리우스 앞에 섰다.
“…내가 여기서 죽어도, 너는 꼭 죽이고 죽는다.”
* * *
‘심심해. 나도 나가고 싶다.’
오빠가 일하러 나가면 나는 항상 혼자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지.’
얼마 전까지는 둘 같은 혼자였으나, 지금은 넷 같은 혼자다.
삐빅- 삐빅-
“이씨, 서우는 맨날 이런 거만 하고. 치, 나도 벌레들 잡을 수 있는데….”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서우는 알람 시계를 끄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저씨들이랑 언니에게 밥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줘야 했으니까.
능숙한 손놀림으로 책상 서랍을 뒤져 페트병에 소분해놓은 쌀을 꺼낸 서우가 코펠 냄비에 담고 생수를 들이부었다.
“아저씨, 맨날 서우랑만 밥 먹다가 이제는 식구가 더 많아졌네? 오늘 밥은 야채죽이야.”
오빠가 구해놓은 양배추를 가위로 대충 잘라 넣고, 휴대용 가스버너에 냄비를 올렸다.
타닥. 타다닥.
“어? 가스가 없나? 히잉, 이게 마지막 부탄가스였는데….”
가끔 있는 일이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배가 고파도 조금 참고 오빠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서우 혼자서는 저 독 안개를 헤치고 물건을 구하러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만 배고픈 게 아니라, 아저씨랑 언니도 배고픈데. 음… 딱 한 번은 괜찮지 않을까?”
혼자 있을 때는 절대 능력을 사용해선 안 된다고 오빠가 얘기했던 게 잠깐 생각나긴 했지만.
이건 아저씨들이랑 언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 착한 일이었다.
서우가 눈치를 쓱 살피고는 살금살금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살짝 돌리고 귀를 기울였다.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빠도 서우가 배고픈 걸 싫어하잖아? 우리 오빠는 나를 무지무지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딱! 한 번만이야.’
그렇게 생각한 서우는 무언가 고장 난 것 같은 딱딱한 움직임으로 가스버너 앞으로 걸어가, 누군가 듣고 있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룰루… 가스버너 손잡이를 돌려서 불을 붙여야지~”
그렇게, 가스버너 손잡이를 돌리는 척하면서 소리도 내지 못하는 손가락을 튕겨대던 서우의 앞으로 화륵-하고 불길이 일어났다.
“우왓! 너무 쎄! 불아 살살 해야지. 살살!”
흠칫 놀란 서우가 냄비를 뒤덮을 만큼 올라온 불을 어루만지자, 그제서야 가라앉은 불길이 냄비를 은은하게 달구기 시작했다.
“휴. 다행이다. 그럼, 이제 아저씨들이랑 언니 기저귀를 갈아줘야지.”
서우는 짐을 뒤져 물티슈와 어른용 기저귀를 꺼내고는 자연스럽게 어른들의 바지를 하나씩 내리기 시작했다.
보통은 일을 마치고 돌아온 단우가 하는 일과 중 하나였으나, 가끔 자신이 대신했던 날에는 오빠가 이쁘다고 칭찬을 해줬다.
칭찬받을 생각에 익숙하지만 조금은 엉성한 손놀림으로 두 아저씨에게 기저귀를 갈아준 서우가, 마지막으로 언니의 바지를 내리는 순간.
데구르르-
언니의 바지 주머니에서 웬 보랏빛 구슬이 떨어져 바닥을 굴러갔다.
“응? 이건….”
민준 아저씨가 오빠한테만 선물로 줬던 보물 구슬이었다.
* * *
단우는 자신의 가방을 열어 수백 개의 보랏빛 구슬, 피독주들을 바라봤다.
‘아니, 그렇게나 좋은 아이템을 이런 데 써?’
민준 아저씨는 자신이 마지못해 돌려줬던 피독주에 웬 팔찌를 가져다 대더니, 정확히 300개의 피독주를 만들어 냈다.
‘…도대체 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단, 한번. 아이템을 300개로 복사할 수 있는 팔찌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귀중한 물건이라면, 아저씨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을 복사하는 데 팔찌를 쓰는 게 맞았다.
아니, 적어도 자신이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하는 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고, 실제로 살아남은 모두가 그렇게 행동하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급 레드포션]
분류: 소모품
정보: 외상에 효과적인 효능을 발휘하는 포션」
아저씨는 혹시나 위험한 순간이 오면 쓰라며, 자신의 등급으로는 살 수도 없는 귀한 포션을 선뜻 내어줬다.
‘착해빠진 건지, 멍청한 건지.’
단우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남을 해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거기서 몇 발짝은 더 나아간 사람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언제든지 배신하고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던 단우에게 민준은 너무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멸망한 세상에서 단우가 본 어른들이란 시간을 얻기 위해, 약한 자신과 동생을 노리던 살인자들이나 어린 여동생을 겁탈하려 했던 변태들.
아니면, 이를 알고도 모르는 척 방조하는 인간들이 전부였으니까….
세상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너무 다양한 일을 보고 겪었기에, 단우는 믿음이라는 것을 함부로 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 아저씨는 조금 다를지도 몰라….’
물론.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며칠 동안 같이 생활해본 결과, 저 아저씨는 자신의 마음을 간지럽게 무언가가 있었다.
‘에잇, 어쨌든. 그건 그거고. 이 아저씨는 신호주기로 한지가 언젠데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는 거야. 무슨 일 난 거 아니야?’
단우는 잠실여고. 아니, 인간사육장의 계단 밑 음지에 숨은 채 민준의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아저씨가 한쪽에서 난리를 피며 놈들의 이목을 죄다 끌고 가면, 자신이 빈집이 된 사육장에 들어가 사람들을 탈출시키는 게 이번 계획의 핵심이었다.
‘성동격서라니, 아저씨도 제법인걸?’
송단우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손목의 시간을 바라봤다.
약속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인간사육장은 여전히 적막으로 가득했다.
‘본래라면 난리가 났어도 진작에 났어야 해.’
송단우는 의아한 마음에 스킬 [고양이의 감각]을 끌어올려 학교 본관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인간의 발소리는 들려오는 반면에, 거미 특유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미들은 죄다 자리를 비운 듯 보였고.
지금 감옥 앞에는 앞잡이 녀석들만 몇 명 남아서, 사람들을 관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냥 나 혼자 처리해버려?’
아저씨가 뭘 한 것 같기는 한데, 뭘 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답답함만 쌓여갔다.
단우는 음지에서 슬그머니 나와 [고양이의 발걸음]을 사용해 학교를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자신의 감각이 전해준 게, 거짓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감옥을 지키고 있는 놈이라곤 살인자 한 명.’
다른 놈들은 잠실여고 이곳저곳에 퍼져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고, 그 수도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사람이 부족한 건가? 저 정도면, 나 혼자서도 해볼 만할 것 같은데….’
우선은 외곽부터 정리하자는 생각에, 단우는 잠실여고 외곽을 지키는 살인자부터 하나하나 초크로 기절시키기 시작했다.
스킬을 사용하면, 민준 아저씨도 속일 수 있었는데, 이깟 녀석들 뒤를 잡는 것 정도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크으흡….”
“쉬잇-”
기어이 열 놈 모두 꽉 막힌 창고 안에 가둬두자.
드디어 학교 본관이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었다.
원래 있어야 할 앞잡이의 숫자도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적었고, 사라진 거미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민준 아저씨가 놈들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럼, 나도 내가 할 일을 해야지.’
단우는 그때부터 당당하게 발소리를 내며 복도를 걸어가, 교실을 잠그고 있던 자물쇠를 부수고는 문을 열어젖혔다.
“윽….”
단우가 교실 내부를 들여다본 순간.
지옥이 그를 맞이했다.
교실 한쪽은 인분으로 가득 차 지독한 냄새가 진동했고, 수분을 섭취하기 위해서인지 소변은 그릇이며, 페트병 같은 것들에 모여있었다.
날아든 벌레 따위를 집어 든 채로 침을 꼴깍이는.
피골이 상접한 거지꼴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두려움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좋지 않은 모습일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상상 그 이상으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거미는 다른 사람이 처리하고 있으니까. 다들 이거 받고, 어서 움직여요. 이것만 있으면 독 안개 속도 무리 없이 지나다닐 수 있는-”
“….”
“아니, 진짜 시간 없어요! 빨리 안 움직이고, 뭐해요?!”
이상했다.
교실 내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모두의 손에 피독주를 쥐여줬는데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일어설 힘도 없는 건가 싶어 사람들을 일으켜주기도 했지만.
교실 안의 사람들은 구슬을 한번 힐끗거리더니 다시금 자리에 앉아, 멍한 눈으로 벌레나 힐끗거릴 따름이었다.
“이곳에서 나가면 뭐 하는데?”
“네?”
볼이 움푹 들어가 있는 중년 여성이 힘없이 대꾸했다.
그녀의 옷이 무척 펑퍼짐한 거로 보아, 얼마나 살이 빠진 건지 조금은 예상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면 뭐 하냐고. 다시 잡혀 오거나, 거미들한테 바로 죽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차라리 여기 남아 있으면 놈들이 주는 마석으로 버티면서 근근이 살아갈 수라도 있지.”
“이게… 사는 거예요? 우리에 갇혀서 똥통에서 가축처럼 사는 게…. 이게, 정말 사는 거예요?”
“….”
송단우의 눈이 차게 식었다.
“그래. 나도 여기까지 했으면 할 만큼 했어. 아저씨, 아줌마들은 그렇게 있다가 죽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다른 사람이라도 구할 테니까.”
그렇게 송단우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그가 구해야 할 교실이 여기 말고도 많았고, 아직 스무 개가 넘는 교실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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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우는, 아무도 구해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