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5
005화. 인간의 적 (2)
“후우… 후우….”
찰나 간의 정적이 흐르고, 그제야 참아왔던 거친 숨을 내쉬었다.
놈의 위세에 비해 허무한 죽음이었으나, 지금 의미 있는 죽음이 대체 어디 있던가.
놈들도 생명체인 만큼 머리가 떨어지면 죽는 건 똑같았다. 단지, 그걸 내가 먼저 성공했을 뿐.
띠링!
새로운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연계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생존시간 100시간을 획득하셨습니다.]별다를 게 없는 알림에 떠오른 메시지를 지워냈지만, 알림은 아직 끝난 게 아닌지 새로운 메시지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레이드를 완료하셨습니다.]「[기여도 순위]
이민준 80%
정소희 17%
권대희 2%
이준영 1%」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됩니다.] [보상으로 ‘일반등급 무기 교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거대 유충을 제거하고 30시간의 생존시간을 노획했습니다.] [구역 내 최초로 거대 유충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칭호 ‘유충의 천적’을 획득하셨습니다!] [업적 달성으로 근력, 민첩, 체력의 레벨이 1 상승했습니다.]안전 장소로 이동하라는 연계 퀘스트도 함께 완료된 걸 보고 나서야, 이곳을 향한 유충들의 공격이 끝났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후…. 이제 좀 한숨 돌리겠네.’
마지막으로 떠오른 안내 창을 대충 닫아버리고는 바닥에 털썩 앉아 숨을 골랐다.
지상에서부터 잠실역 7번 출구를 지나 지금 이곳 6번 출구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달려왔다.
언제 유충들이 달려들지 몰라 항상 긴장된 상태를 유지해야 했고, 마지막으로 싸운 거대 유충과의 전투에서는 죽기 싫다면 내가 낼 수 있는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당장은 보상이고 뭐고, 조금 쉬고 싶었다.
이게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져서, 몸은 물론이거니와, 조각 조각난 정신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의 용감한 시민께서 괴물을 물리쳤습니다! 여러분들의 일꾼, 송파의 아들, 저 ‘이기동’은 이 일을 절대 묵과하지 않을 것이며, 의회에 상정해 마땅한 공로와 피해보상을 받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세상은 날 가만두지 않았다.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혼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국회의원이 다가와 팔을 잡고 들어 올리며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다짜고짜 시작된 이기동의 연설에 싸우지 않고 몸을 사리던 다수의 시민이 호응하며 손뼉을 쳤다.
“이제 조금 뒤면, 위성 전화로 연락한 서울경찰청장이 저희를 구하러 올 겁니다. 그동안 저 이기동을 믿고! 통제에 따라주십시오. 그러면 분명!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겁니다!”
‘아, 이거였나?’
조금 전 방어선을 이루던 사람들이 이기동 의원의 눈꼴 시린 행동을 묵인하던 이유.
그건 바로 위성 전화로 경찰에게 구조요청을 했다는 말이, 사람들에겐 아직 정부와 군, 경찰이 제 기능을 하고 있고 당신들을 구하러 올 거란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아니…. 혹시 메시지가 모든 사람에게 뜬 게 아닌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시민들의 손목을 살펴봤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다들 손목에 숫자로 된 문신을 지니고 있었고, 그렇다는 말은 모두 메시지의 내용을 봤다는 소리였다.
‘현실도피구나.’
저들은 쓰디쓴 현실을 피해 달콤한 환상을 보고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가엽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했다.
군대와 경찰은 오지 않는다. 설령, 그들이 온다고 하더라도 100시간 안에 괴물을 잡지 않으면 죽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헛된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이건 저 사람들이 아니야, 나를 위한 일이다.’
최소한, 나중에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도록 한번은 설득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희망으로 가득한 그들의 얼굴에 찬물을 붓고 싶지 않았지만, 마침 옆에 있던 국회의원이 이목을 끌어준 덕분에 다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역을 자처하기로 했다.
“이렇게 앞에 나서게 된 김에 한마디만 해도 되겠습니까?”
내 돌발행동에 의원은 속으로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과연 국회의원은 허투루 된 게 아닌지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호방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물론이지요! 시민께서 저희 모두를 구해주셨는데요. 희망이 될 수 있는 한마디 해주시죠!”
“…여러분 대부분은 아마 4일 뒤면 죽을 겁니다.”
“….”
당신들은 곧 죽을 것이라는 싸늘한 말 한마디는 순식간에 좌중(座中)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다.
“당장은 제 말이 이해되지 않으실 텐데…. 다들 왼쪽 손목에 처음 보는 문신이 새겨져 있는 게 보이시죠? …제가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그게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시간, 즉 남은 수명입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 하하! 우리의 영웅께서 꽤나 재미없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하하하.”
이 말을 농담으로 치부한 의원이 웃어넘기려고 하자, 나는 의원을 뚫어질 듯 응시하면서도 조곤조곤 말을 뱉었다.
“의원님이 지하철을 이용하진 않으셨을 거 같고, 지상에서 대피하셨겠죠? 그렇다면 똑똑히 보셨을 거 아닙니까. 우주에서 떨어진 별똥별을, 하늘을 가득 메우던「외눈」을, 그리고 저 벌레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도륙하고 있는지도요.”
“그, 그건 우리의 자랑스러운 국군장병들이….”
“혹시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만약 군대가 저 벌레들을 소탕하고, 우리를 구하러 온다 해도. 손목에 새겨진 시간이 다 되면 우린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도, 들이닥치는 유충들도 봤으면서, 왜 생존시간에 대한 것은 믿질 못하는 걸까.
의원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금 시민들을 바라봤다.
“후우…. 물론 여러분들의 멀쩡한 옷차림을 보니 지상의 기이한 광경을 보지 못한 분들이 많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죠. 사실 저도 아직 믿기지 않습니다.”
답답함을 숨에 실어 내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튜토리얼 퀘스트’는 받으셨을 겁니다. 벌레를 죽여서 시간을 벌든, 살인을 해서 시간을 벌든, 선택하라던 그 메시지 말입니다.”
왼팔을 번쩍 들어 사람들에게 손목을 보여주었다.
손목에는 분명히 검은 글씨로 488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여러분은 아니, 최소한 서울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전부 ‘시한부 환자’입니다. 시스템이 말한 ‘스페이스 마켓’에서 무기를 사십시오. 그걸로 벌레를 죽이고, 퀘스트를 완료하세요. 이곳이 안전하다고 해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간 남는 건 죽음뿐입니다…. 부디,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삶을 쟁취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사실 마지막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애초에 1년짜리 시한부 인생이었으니, 생각해 보면 지금 상황은 내겐 오히려 호재였다.
갈구하며 쟁취하는 만큼 살아갈 수 있으니까. 시한부 인생을 자신이 고쳐나갈 수 있으니까.
띠링!
내가 그렇게 마음을 먹는 순간,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 (1)]
난이도: D
클리어 조건: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마친 당신.
다음의 조건을 완료해,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시오.
① 능력치 레벨 합계(15/30)
② 생존시간 수집(488/5000)
제한시간: 무제한
보상: ① 칭호 ‘최소한의 자격’ 획득
② 스페이스 마켓 회원등급 상승
실패 시: 없음」
‘후, 이건 또 무슨….’
새로 떠오른 퀘스트를 보니, 쌓여왔던 피로가 다시 한번 밀려들었다.
내용은 잠시 후에 확인하면 될 일이다.
난 곧장 퀘스트 창을 꺼버리고는 정면을 주시했다.
어쨌든, 자신은 양심에 부끄럽지 않도록 나름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노력했다.
이제 선택은 그들의 몫이었다.
‘….’
민준은 얼어버린 의원과 보좌관, 비서관 그리고 대중들을 뒤로하고 골든 아파트의 쇼핑몰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골든 아파트 화장실.
쾅! 쾅! 쾅!
깔끔한 정장을 입은 사내가 화장실 거울을 주먹으로 치면서 분풀이를 했다.
“X발! 개 같은 새끼!”
붉은 선혈이 흐르는 조각 조각난 거울 파편 속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는 남성.
이기동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어린놈의 새끼가 나 ‘이기동’이가 차려놓은 밥상에 흙을 뿌려?!”
이기동의 흰자위가 순간 붉게 물들었으나, 깨진 거울에 비친 눈은 언제 그랬었냐는 듯 다시 하얗게 되돌아와 있었다.
그는 화장실 티슈를 꺼내 피범벅이 된 자신의 주먹을 닦아 냈다.
“위험에 빠지면 결국 제 안위만 챙길 새끼가. 혼자만 다 아는 척, 착한 척, 사람들을 위하는 척! 후우….”
분명 수조에 다 담을 수 있는 물고기들이었다.
그런데 어떤 어린놈이 나타나 훼방을 놓더니, 다 잡아놓은 물고기의 절반이 도망가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괜찮다…. 괜찮아. 큰 그림에서는 사소한 부분일 뿐이야. 그래도 몇 마리는 건져냈으니까. 문제없어.”
이기동은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면서 숨을 골랐다. 그리곤 습관적으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확인했다.
716.
‘커다란 괴물을 잡아낸 놈도 나보단 시간이 적다….’
“음? 잠시만. 716?”
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가 ‘퀘스트창’이라고 작게 읊조리자 눈앞에 무언가 떠올랐다.
「[서브 퀘스트 – 암살]
난이도: F
클리어 조건: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살인.
① 살해 인원 (5/10)
제한시간: 24시간
보상: 일반등급 암살용 대거, 모든 능력치 레벨 Lv.1 상승
실패 시: 사망
Tip) 클리어 조건 초과달성 시 혜택이 존재」
“응? 뭐야, 왜 하나가 비어?”
이기동이 뒤돌자 화장실 바닥이 피로 흥건한 게 보였다.
저벅. 저벅.
그는 끈적거리는 피 웅덩이를 천천히 밟으며 걸어가, 화장실 마지막 칸막이를 열었다.
그곳에는 서로 엉켜있는 시체 여섯 구가 있었는데,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낸 이기동이 다시 시체들의 목을 하나씩 찌르기 시작했다.
푹. 푹. 푹.
푹!
몇 차례 다른 시체를 찌르던 중, 웬 노인의 목을 찔렀을 때 차갑게 식지 않은 뜨거운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아, 죽은 척하고 있던 게 할배였습니까? 이미 살 만큼 살았으면서, 뭘 그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셨길래 그래요?”
이기동이 차가운 날붙이로 몇 번이나 노인의 몸을 헤집었다.
열 개, 스무 개.
노인의 몸에 자상이 늘어났다.
이제는 더 이상 몸에서 멀쩡한 곳을 찾기도 어려워졌을 때쯤.
소리조차 내지 못한 노인의 신형이 허물어졌고, 상처에서 쏟아져 내리는 피는 물줄기를 이뤄 저승의 강으로 흘러갔다.
“자, 이제 남은 물고기들을 잡으러 가볼까나.”
인간사냥을 선택한 국회의원이 손수건을 꺼내 나이프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