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69
069화. 사람 사는 곳 (3)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사람의 마음이란 정말 복잡하고, 이중적이기 때문에,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그만큼 지난한 일이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그저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민준은 속으로 계속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태랑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손은 고생 한번 안 한 것처럼 곱고 부드러웠다.
“안녕하십니까. 이민준입니다.”
“어후, 시카리우스와 프라우스를 죽이고 관문을 폐쇄한 영웅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뭐, 결과가 어찌 됐든 그건 충분히 존경받을 일 아닙니까.”
“……반갑습니다.”
민준은 잠시간의 침묵을 두고 가까스로 대답을 뱉어냈다. 그의 말에 가시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천태랑은 전혀 그런 악의가 없었다는 것마냥 씽긋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어째 말과는 다르게 표정은 반갑지 못하신 거 같은데……. 제 기분 탓인가요? 하하하.”
“아니요, 그쪽이 추측한 대로입니다. 당신들과 만나는 게 기분이 유쾌할 리는 없죠.”
“이익, 이 새파랗게 어린 게-”
민준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자, 시위자들 쪽에 서 있던 삼백안을 지닌 중년 남성이 눈을 희번뜩하게 뜨며 뭐라 말했고.
“박태구 님. 분명 제게 맡겨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천태랑이 이를 제지했다.
“아니, 청년. 이 어린놈이 싸가지없이 구니까-”
“그럼! 그냥 돌아가실까요?”
순간 천태랑의 실눈이 서리가 맺힐 듯이 차가워졌다가 다시금 사그라들었다.
아무런 능력도 없이 마석을 구걸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백 명을 대표하는 인간 정도 되면 어느 정도는 능력치를 올린 사람도 있나 보다.
천태랑의 압박에 박태구라 불린 중년 남성은 헛기침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크흠. 알겠네. 미안허이.”
“민준 씨? 죄송합니다. 이거 참, 저희 쪽 생존자분이 억울한 마음에 실수하셨군요.”
천태랑은 삭풍 같은 분위기를 순식간에 갈무리하며 민준을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뭐, 조금 솔직하면 어떻겠습니까. 편히 이야기하시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레기나의 관문을 폐쇄하러 갈 수 있게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럼 레기나를 사냥한 직후. 현재 저희가 보유한 캠프 중 하나를 양도해드리겠습니다.”
“이런, 혹시 전병철 캠프장님께 저희 쪽 의견을 못 들으셨나요? 모든 캠프의 전권을 넘겨주시거나, 자유롭게 마석을 채취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시면 저희야 언제든지 길을 열 의향이 있습니다만…. 말씀하신 조건은 너무 박한 것 같네요.”
“….”
빠드득-
옆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 둘러보니, 그의 동료들이 차게 식은 표정으로 시위의 대표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며칠 동안 자잘한 마찰이 있었기에, 저들과 민준의 캠프 인원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민준은 눈길로 팀원들을 진정시키면서 천태랑의 말에 대꾸했다.
“어차피 캠프에서 생산되는 양으로는 생존자 여러분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고작 하루에 125명 정도의 시간밖에 채워주지 못하죠. 결국, 누군가는 거미를 잡으러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글쎄요…. 저는 영웅님께서 절대 거짓말을 안 하실 것이라 확신하지만, 저희 동료분들은 조금 의심이 드는 모양입니다.”
천태랑이 그리 말하자, 박태구라고 불린 중년 남성을 비롯한 나머지 세 명의 탁한 눈알이 번들거렸다.
저들은 얼마 전까지는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거지였지만, 지금 강도가 되어 자신들의 마석을 탐내고 있었다.
“…저희가 마석을 독점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어우,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 처리가 그렇듯, 작은 실수나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그 부분을 염려하고 있을 뿐입니다.”
‘후…….’
민준은 매끄러운 변명을 주워 삼으며 노골적인 논쟁을 피하는 능구렁이를 보며 속에서 치솟는 울화를 꿀꺽 삼켰다.
저런 놈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끊임없이 인간에 대한 불신과 살의가 치솟아 올랐지만.
민준은 도움 없이는 정말 생존 자체가 어려운 이들에 대한 연민을 동력으로 이성의 끈을 붙잡고자 노력했다.
‘다만.’
눈앞의 강도들을 더 이상 같은 인간으로 취급할 생각은 없었다.
“되먹지도 않은 헛소리는 그만하고 본론만 빠르게 얘기하지. 우선 마석 생산량의 확인은…. 너희들 중 일부를 캠프원으로 받아들인 뒤 정보 확인 후 바로 퇴출하면 되겠지?”
돌연 내뱉은 반말과 노골적으로 경멸하듯 깔보는 말투에, 놈의 실눈 너머에 있는 눈동자가 떨렸다고 느껴졌으면 잘못된 것일까?
천태랑은 이런 취급에 익숙하지 않은 듯 보였다.
물론, 이는 민준만 느낄 수 있었던 찰나였고, 순식간에 기색을 갈무리한 천태랑이 말을 이어갔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거점캠프에 대한 전권을 넘겨주시는-”
“누가.”
“네?”
“누가 넘겨준다고 했지? 내가 피 흘리며 싸워 얻은 걸 왜 너희들에게 넘겨줘야 하는지 모르겠군. 관문을 닫아줬으니까, 오히려 보상을 받아야 하면 모를까. 우리가 너희들에게? 왜?”
민준의 강짜에 천태랑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으면서 대꾸했다.
“저희랑 민준 씨의 생각이 조금 다르군요. 저희 쪽은 오히려 피해보상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피해보상?”
“목적이 어떻든 민준 씨께서 관문을 폐쇄함으로써 일반 생존자들이 피해를 본 건 맞지 않습니까. 저희는 합당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뿐입니다.”
언젠가부터 ‘영웅’에서 ‘민준 씨’로 격하시켜 부르는 천태랑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을 뱉었다.
“…우리 까놓고 이야기해보도록 하지.”
“오! 저도 흉중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걸 매우 좋아합니다.”
천태랑은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주워섬기며 가증스러운 척을 했다.
“너희가 대체 무슨 피해를 봤지? 게다가 이 망해버린 세상에 정부가 있긴 한가? 아니면 법원은? 만약에 있다손 쳐도, 내가 법이라도 어겼나? 무슨 권리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거지?”
“음…. 모두가 누려야 할 마석을 독점하신 것, 괜히 놈들을 들쑤셔서 괴물들의 심기를 자극한 것 등등 저희는 분명 피해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생존시간에 관한 법이 있을 리는 없겠죠. 그런데, 대신 세상에는 관습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으면 보상하는 것. 법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유구히 전해져 내려온 관례입니다. 게다가….”
한번 말을 끈 천태랑은 창문 밖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토록 많은 수의 사람들이 원한다면, 그게 법이겠죠.”
“결국, 억지란 얘기군.”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럼…. 이런 관점은 어떠십니까.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레기나 그 괴물을 잡으러 가셔서 혹여나, 진짜 만에 하나, 민준 씨가 잘못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이 거점캠프가 시스템적으로 아무도 건들 수 없게 붕 떠버린다면? 그런 막심한 손해가 어디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불상사를 대비해 저희가 잠시 맡아둔다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네요.”
‘이 개X끼가….’
민준이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쥐려는 순간, 소희가 한 템포 빠르게 민준의 앞으로 치고 나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언성을 높였다
“어디 숨어서 괴물들 눈치나 보던 사람이 뭐라는 거에요? 저희가 관문을 안 닫으면 이 거지 같은 미로원에서 평생 갇혀 살다가 하나둘 거미한테 잡혀갈 거란 생각은 못 하는 거예요? 응원은 못 할망정 발목이나 붙잡고서는 하는 말이-”
저런 인간한테 끝까지 반말을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희가 얼마나 참고 참다가 쏘아붙였는지가 짐작되었지만.
상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뻔뻔하고, 이기적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그걸 원했습니까?”
“……뭐라구요?”
“저희는 저기 계시는 생존자분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표자로서 한마디 말씀드리면, 저희는 여러분들게 괴물을 잡아달라, 미로원의 결계를 해제해달라는 요구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
천태랑의 말에 다른 대표자들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마치 자신들이 듣기에도 조금 심했다고 생각하는 느낌?
그래,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저런 말을 하고서 멀쩡할 수는 없으리라.
점점 내 눈에 짜게 식어가는 동안, 천태랑의 괴변은 폭주 기관차처럼 계속 이어졌다.
“흔히들 자신이 한 일에는 책임을 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민준 씨가 저희를 구하셨고, 괴물을 잡아 미로원에서 저희를 해방하고자 하신다면. 당연히 그 이후에도 저희를 어느 정도 책임지셔야죠.”
““…?!””
“하?!”
민준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숫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 아닌가.
그의 주장을 들은 대표자들은 아까 지었던 탐욕스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창백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마 내가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미 내쳐진 걸음이라 생각하는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자신들의 무기를 힘껏 말아쥐는 모습이었다.
민준은 그들의 그 미묘한 입장차이를 느끼고는 생각에 빠졌다.
‘저걸 보면, 지금 이 자식이 말하는 건 다른 생존자들이랑 이야기도 되지 않은 사항 같은데. 도대체 이 X끼는 왜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는 거지?’
민준이 두 관문을 닫은 실력자인 만큼, 혹여나 그의 눈이 돌아가 짜증 나는데 그냥 다 죽여버리겠다고 날뛰게 되면, 천태랑 그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놈은 간이 배 밖에 나온 것처럼 선을 넘다 못해 벽을 뚫어버리고 있다.
‘이쯤 되면 그냥 원수지자는 거 아닌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인간들에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거점캠프 하나를 약속한 상황이다.
흥분으로 인해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밖의 생존자들도 아니고.
그들을 대표하여 협상하러 온 입장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얻어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터.
의도적으로 분란을 조정하려는 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배짱과 개소리의 향연이었다.
‘이 X끼……. 진짜, 뭐 하는 놈이지?’
민준은 눈웃음 짓는 천태랑을 유심히 살폈다.
실눈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눈동자가 붉지 않았으니 살인자도, 혹은 인간사육장 때처럼 거미들의 앞잡이도 아니었고.
샷건이 진동하지 않았으니 마인 또한 아니다.
여하튼 놈의 의도는 모르겠으나. 민준은 힘없는 인간을 죽일 생각도 없었고.
자신이 떠난 후 팀원들이 생존해야할 터전까지 저들에게 넘겨줄 생각도 없었다.
“후…. 너희들 이야기는 잘 알았다. 우리도 그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하니 일단 우리 몫을 제외한 마석을 넘겨줄 테니 급한 불부터 끄고 다시 대화하지.”
“아니 그럴 수는-”
“너.”
민준은 이를 거부하는 천태랑을 무시하고, 아까 자신에게 뭐라고 언성을 높였던 박태구라 불라는 중년 남성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싫나?”
“…어 …나는”
“내가 지금 너희들을 죽여버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화를 참고 있는지. 눈치껏 생각해라.”
“….”
“그럼 알아들은 걸로 하지.”
민준이 그렇게 말하며 나머지 대표자들을 노려보자, 그들은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런 X팔! 이 겁쟁이 X끼들!”
쾅! 쾅!
달도 뜨지 않은 심야.
천태랑이 자신의 은신처에서 온갖 물건을 집어던지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걸 미꾸라지처럼 그렇게 빠져나가?!”
천태랑은 오늘 오전 무심한 표정으로 나타나서는, 한참을 이죽거리다 사라진 그놈을 생각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분명 그 정도로 도발하면 화를 내고 싸움을 일으키던, 굴복하고 시위자 쪽에 협조를 하던,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는데….
“이 겁쟁이 X끼들이 거기서 쇼부를 볼 생각은 안 하고. 길고양이마냥 놈들이 먹다 버린 음식쓰레기를 주워 먹으면서도 좋다고 고개나 끄떡거리니까…. 일이 진행이 안 되잖아, 진행이! 으아아아!!”
패배자 놈들이 놈의 콩고물에 만족하며 꼬리를 말아버린 탓에 일이 틀어졌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토해낸 천태랑이 분노를 삭히며 오른팔의 소매를 걷어 문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X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박에 있던 고독이 이두를 거쳐 삼각근 언저리까지 올라와 있는 게 보였다.
이젠 생존시간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고독 때문에 죽을 판이었다.
천태랑은 어떻게 하면, 지금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를 계속해서 고민했고.
달그락. 달그락.
그가 방으로 삼은 오피스텔의 창가에서 유리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누구…?!”
– 일이 잘 안 풀리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곳에는 거미 사도 열 마리가 자신의 덩치만큼 커다란 마석을 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