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81
081화. 투기장 (4)
기어코 ‘미친개’가 사고를 쳤다.
‘그 인간 백정을 이기다니…….’
김영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해당 경기에서 미친개에게 걸려있던 배당은 9.3배. 자신이 쏟아부은 전 재산은 무려 500시간이었으니.
단순 계산으로 김영길이 이번에 얻은 시간만 4,650시간이었다.
‘와, 씨. 수수료를 뗀다고 해도 4,000시간은 족히 나오겠는데?’
천 시간도 손에 넣어본 적이 없던 김영길에게 찾아올 시간은 폭력적일 만큼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나도 이제 부자야. 더 이상 생존시간에 쫓겨 허덕거리지도, 강한 놈들에게 개처럼 빌붙어 헥헥거리지 않아도 된다고!!’
4,000시간은. 정말 시궁창에 박힌 인생을 끄집어내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시작하기엔 더없이 만족스러운 양이었다.
만약…. 김영길이 무사히 시간을 수령하고. 그 후의 마무리까지 순탄하게 끝낼 수 있기만 했다면.
그러니까…. 그가 그토록 많은 시간을 벌었다는 걸. 무사히 숨길 수만 있었다면.
김영길은 정말, 그간 품어왔던 바람대로 새롭게 인생 2막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X발.’
이딴 도시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 * *
“헉…. 헉…….”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하고, 숨이 차오른다.
하이에나 같은 놈들에게 쫓기면서, 가까스로 눈을 붙인 쪽잠 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어제 온종일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추격해오는 놈들 때문에 숨었다가 다시 도망치길 여러 번.
이제는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갈피도 잡히지 않았다.
‘X같은 놈들. 이 진드기, 거머리 같은 놈들. 빨아먹을 게 없어서 나같이 불쌍한 놈 걸 빨아먹으려 들어?! 똥물에 코 박고 뒈질 놈들이.’
분명 어제만 해도, 자신은 투기장의 투표권을 생존시간으로 교환하기 위해 기분 좋게 매표소로 향하고 있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 모든 게 꽃밭이었다.
헌데, 그렇게 즐거움 발걸음으로 매표소 코앞까지 도착해 투표권을 꺼내려 품 안에 손을 넣은 순간.
“어이 형씨,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
김영길은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가 제 어깨에 손을 올리는 걸 느꼈다.
묵직하고 커다란 손바닥.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투표권을 꺼내면 그 순간 빼앗긴다.’
여태껏 강약약강으로 살아남았던 본능이 경종을 울렸고.
“…사람 잘 못 보셨어요.”
그 순간 김영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어깨를 털어버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군중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들켰다! 잡아!!”
어깨에 팔을 올린 사내가 소리친 시점.
그때부터 놈들의 몰이 사냥이 시작됐다.
얼마나 집요한지 도박장에 숨어도, 매춘굴에 숨어도, 자신만의 은신처에 숨어도, 귀신같이 자신을 찾아낸 놈들은 거머리처럼 밑도 끝도 없이 달라붙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공짜로 뭔갈 받았던 적도 없고, 돈을 빌려본 적도 없는 자신이 이 피 같은 돈을 바쳐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놈들은 떼인 제 돈을 받으려는 사채업자마냥 끈질기게도 달려들었다.
‘후욱…. 후욱…….’
놈들에게 거의 잡히기 직전까지 몰렸을 때, 뚫린 어깨의 구멍을 부여잡고.
김영길이 자조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누런 붕대로 급하게 압박한 상처에서 점점 피가 묻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너무 티 나게 응원을 했었나? 아니면 매표소 직원이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겠네…….’
이 X같은 도시엔 빈틈이 너무 많아서 대체 정보가 어디서 흐른 건지도 파악이 어려웠다.
‘어쨌든.’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자신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물론, 투표권을 놈들에게 줘버리고 바짝 엎드린 채 목숨을 구걸하면 살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얻어낸 기회인데. 절대, 절대 놓칠 수 없어.’
이 비루한 삶에 내려진 황금 동아줄을 이리도 허무하게 포기할 순 없었다.
어떻게든 이걸 생존시간으로 교환하고 이 낙원에서 탈출해야 했다. 그리고 새 삶을 살 것이다.
높은 능력치 레벨과 고급등급 아이템을 끼고 떵떵거리면서.
‘우선 놈들을 떨궈내야 하는데. 김영길! 쥐어 짜내라.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있다?!’
간절한 소망의 결과일까.
평소에는 탁한 안개가 끼어있는 듯이 돌아가지 않던 뇌가 퉁탕거리며 간신히 한 가지 묘책을 찾아냈다.
물론 도박수가 짙은 방법이긴 했으나.
그것조차 시도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점점 느려지고 있는 자신은 놈들에게 잡혀 죽어버릴 게 분명했다.
주변을 돌아봤다. 술과 본드에 취한 몇몇 빼고는 한적한 상태.
모두 투기장 결승을 보러 간 것이 틀림없다.
‘결승이 끝나고 우승자 시상식 때는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의 인형들도 모두 모여. 그렇다는 건…….’
레기나가 투기장에 찾는 순간이 곧.
낙원 대부분의 곳에 전력을 보급하기에 엄중하게 지켜지고 있는 ‘비상 발전기실’.
그곳의 관리자임과 동시에, 레기나의 인형이기도 한 놈이 드물게 자리를 비우는 시기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곳이 무주공산이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0에 가까운 확률이 조금이라도 늘어날 것이란 건 확실했고.
자신은 그 적은 확률에 승패를 걸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
‘행원의 여신은 나의 편이다. 미친 확률의 도박이 성공한 걸 봐. 분명,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의지를 굳건히 한 김영길이, 포위망을 좁히며 쫓아오고 있는 추격자의 위치를 가늠하며 비상 발전기실로 발을 돌렸다.
* * *
팔척귀 서필조는 이번 결승전에서 우승할 자신이 있었다.
한 놈은 자신이 지닌 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애송이였고, 다른 한 놈은 잔대가리만 굴리며 요행으로 올라온 놈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주변의 거미들이 살짝 거슬리긴 했지만, 저 둘만 죽이고 나면 결국 주변의 거미들도 물러갈 터.
삐이이- 철컹.
그렇기에 철장 문이 열리는 순간, 그는 보무도 당당히 경기장에 입성했다.
오늘 자신이 승리할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 와아아아!! X 빠지게 싸워라! 새끼들아
– 이기는 X끼한테 이 누나가 함 줄 테니까, 피 터지게 싸우라고!
– 킬(Kill)! 킬! 킬!! 킬!!
쏟아지는 기백 명의 함성.
서필조는 그 소리가 자신의 우승을 미리 축하하는 환호인 것처럼, 광란의 현장을 만끽했다.
‘우승하고 마석을 받으면, 우선 새로운 아이템을……. 응? 근데 저 또라이 뭐 하는-’
그렇게 그가 이른 승리의 기쁨에 젖어있을 때.
본인 별명 값을 하기 위해서인지 미친개가 이쪽 대신 돌연 거대거미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서필조가 반응하기에는 놈의 행동이 너무 급작스러웠고.
퍽퍽- 콰득!
순식간에 쇄도한 미친개의 손도끼는 빠르고 정확했다.
‘미친놈. 저러면….’
한 마리가 죽자, 나머지 스물아홉의 거대거미의 시선이 모두 놈에게 쏠렸다.
‘저 븅X. 벌써 한 놈은 제꼈고, 그럼 나는 애새X만 조지면 되는 건가?’
꽁승은 언제나 옳다. 특히 그게 목숨 걸고 싸우는 투기장에서의 승리라면 더더욱.
그렇게 머릿속에서 미친개를 배제한 서필조가 반대편의 얼빵한 애새끼 하나를 노려보던 찰나였다.
“…?”
한껏 울리는 땅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린 서필조의 눈앞에.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미친개의 얼굴이 보였다.
“어…. 어 저, 저!”
서필조는 순간 당황했지만, 단련된 몸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애병 ‘롱기누스’를 놈에게 뻗어냈다.
비록 고급등급의 단검에 긴 쇠막대를 합친 조잡한 창이었지만, 자신의 장점인 긴 리치를 이용한 이 공격은 위기상황에서 몇 번이고 목숨을 구해준 만큼 서필조가 자신하고 있던 일격이기도 했다.
‘X라이 새끼가, 사람들이 미친개라고 하니까. 진짜 미친 거냐?’
뭐가 됐건, 뒤에 거미들을 줄줄이 달고 있는 놈이 피할 수 있는 방위는 한정적이었으니.
서필조는 빠르게 놈을 처리하고, 밀려드는 거미들을 피할 생각으로 움직였다.
스윽-
하지만 놈은 무슨 스킬을 쓴 것인지, 소형방패로 창끝을 비스듬히 빗겨내더니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자신의 다리 사이로 슬라이딩했고.
“이게 무슨…. 컥?!”
갑자기 등이 걷어차이는 감각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진 서필조는 미친개 뒤를 쫓아오던 거미 떼 속으로 뛰어드는 꼴이 됐다.
그렇게 타의로 인해 거대거미와 전투를 시작하게 됐지만, 그 또한 허투루 결승전에 올라온 것이 아닌 만큼.
곧장 정신을 차리고 거미들을 상대로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후욱…. 젠장! 놈의 잔대가리를 주의했어야 했는데.’
카칵! 그드득-
참으로 개 같은 상황이다.
짧은 상념이 지나가는 와중에도 수많은 공격이 팔방에서 쏟아졌고, 자잘한 공격들은 [빠른 재생] 스킬을 이용해 몸으로 때우면서 서필조는 거미들의 공세를 버텨냈다.
“후욱- 너 이 X끼 무슨 꿍꿍이야!”
어떻게든 이 공세에서 몸을 빼내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니, 얼핏 보이는 바로는 놈도 거미들을 상대하기 시작한 모양.
스스로 정상인의 범주에 든다고 자부하는 서필조로서는 정녕 미쳐버린 놈의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미들을 몰아 자신을 여기에 던져둔 주제에, 지금은 다시 거미와 싸우고 있다니.
“이 녀석들도 다 시간이야. 거미들을 없애기까지는…. 흡! 임시동맹을 맺자는 소리지.”
“네놈 말을 믿으라고?”
“그럼, 니가 지금 와서 어쩔 건데, 우리랑 힘을 안 합치고 혼자 이놈들을 다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거미들을 잔뜩 끌고 오더니 뜬금없이 협력하자는 미친개.
하지만 저딴 허술한 말에 속기에는 서필조가 겪은 풍파가 녹록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주변 전황을 훑었다.
자신과 미친개는 거대거미들에게 둘러싸였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애송이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홀로 제 안위를 챙기고 있는 상황.
지금 시점에서 자신 혼자 이곳을 탈출할 수 있다면?
거미에게 둘러싸인 미친개는 자멸하고, 홀로 떨어진 애송이만 남게 된다.
“X이나 까잡숴! 거미고 뭐고 너네만 죽이면 끝나는 경기를 뭣하러! 내가!!”
생각을 정리한 서필조는 곧장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긴 창을 이용해 장대 높이 뛰기를 하듯 뛰어올라 한 번에 전장에서 벗어난 것이다.
‘킬킬. 미친개야 넌 거기서 X뺑이나 쳐라.’
그리고 공중에 높게 떠오른 그는 속으로 미친개를 비웃으면서 애송이를 향해 강하했다.
지금 모든 상황이 미친개, 민준이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고.
* * *
민준은 거대거미의 더듬이 다리를 잘라내면서 공중을 나는 서필조를 바라봤다.
‘여간 미친놈이 아닌 건 진작에 알았다만, 저걸 저렇게 가네.’
놈이 저런 ‘방법’으로 행동할 줄은 몰랐지만,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리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앞선 경기들을 통해 놈의 패턴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실력과 자기애가 합쳐져 발현된 과도한 자신감.
오로지 급소만을 노려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놈의 창처럼,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배제한 채 무작정 나아가는 확증편향적 실리주의.
이 두 개가 합쳐진다면 놈은 까다로워 보이는 거대거미보단, ‘본인 눈에’ 비교적 쉬워 보이는 출전자들을 노릴 것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휘리리릭-
민준은 투척했던 손도끼를 회수하면서 둘의 격돌을 확인했다.
‘어쨌든 첫 단추는 끼웠다.’
계획대로 서필조와 소년이 맞붙었다.
민준이 보기에 둘의 실력은 호각.
서로 박 터지게 싸우는 동안 자신은 두 번째 스텝을 밟으면 될 일이었다.
후욱-
민준은 거미 다리에 맞아 날아가고, 송곳 같은 다리 끝을 방패로 막아내면서도.
바닥을 구르고, 자잘한 공격들을 몸으로 받아내며 거미들을 헤쳐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다른 이들 보기에는 엉망진창 당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는 [시간 이격] 스킬을 사용해 철저히 계산된 움직임.
민준은 서필조와 소년 가까이로 다가가. 거미들이 소란을 피우는 둘과 자신을 함께 공격하게끔 유도했다.
“키에엑!”
“크륵-”
“이 미친 새끼! 그걸 왜 또 그걸 끌고 와!”
“나만 당하라고?”
“…젠장!”
그렇게 거대거미가 인간 셋을 노리자, 전투가 아사리판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원했던 그림이 완성됐다.
한 명의 열외도 없는 싸움. 그리고 난전.
이렇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아수라장이야말로 새로운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법이었고.
민준은 이것만이 정해진 결말에 조그만 틈이라도 만들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인간 셋은 위기에 순간에는 등을 맞대고 거미의 공격에 맞섰고, 그사이 빈틈이라도 보일라치면 다시금 서로 뒤통수를 노렸다.
– 이야, 미쳤다! 이게 진짜 난투지!
– 야, 팔척귀! 방금 미친개 찔렀어야지 뭐해!
– 그래! 뒤통수를 치란 말이야!!
서로 속고 속이는 난전이 지속될 수록 세 명의 옷은 붉게 물들었고, 거미의 사체는 둔턱을 쌓아갔으으나.
경기장의 열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리고 마지막 거대거미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몸을 누윈 순간.
“…흡!”
“이제 그만 뒤져!!”
쐐애액-
소년의 손톱이 서필조의 간장(肝腸)을 노리고 짓쳐 들었고, 서필조의 창끝은 민준의 심장을 노리고 쇄도했으며, 민준은 손도끼를 휘두르며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죽어야 한다면 너 또한 죽어야 한다는 광기.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핏물.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분노하는 관객들의 광열(狂熱)
이 모든 것이 집약된 용암과도 같은 열기가 경기장을 녹일 듯이 넘실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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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이라는 커다란 무대가 암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