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82
082화. 투기장 (5)
갑자기 찾아온 암흑은 방금까지 활활 불타던 장작에 찬물을 붓듯, 광기로 넘실대던 투기장을 한순간에 싸늘하게 만들어버렸고.
“이거 뭐-”
관객들이 당혹감을 내비치기도 전에, 덜컹거리는 소리와 다시금 경기장을 비추던 서치라이트에 불이 들어왔다.
미처 추스르지 못한 정신으로 경기장을 바라보는 관객들.
“““….”””
인위적인 불빛으로 드러난 적나라한 사실은 기백 명에 달하는 인간들에게 기이한 침묵을 강요했다.
가로세로 50m의 정사각형 케이지 안에 뒹굴고 있는 거대거미의 사체와 인간 둘의 시체.
그리고 그 위에 오롯이 서 있는 한 청년.
꿀꺽-
그리고 초봄의 살얼음처럼 유지되던 투기장의 침묵은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와 함께 깨졌고.
그 속에 구겨지듯 갇혀있던 광기는 수백 명에 달하는 관객들의 함성과 함께 쏟아져나와 낙원을 뒤흔들었다.
* * *
후욱- 후욱-
귀는 먹먹하고 정신은 붕 떠서, 공중을 부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민준에게는 전혀 힘든 일이 아니었음에도 관객들의 광기에 전염된 것인지, 끝을 모르고 치솟은 아드레날린은 전투 때 느꼈던 묘한 고양감을 계속 이어가게 만들었다.
텅-
조명으로 주변이 밝아지자 민준은 거친 숨을 갈무리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리저리 토막 나 바닥을 뒹구는 거대거미의 사체들.
“….”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난 채 뜬눈으로 누워있는 서필조와 그 옆에 엎어지듯 쓰러져있는 소년, 강세진이 눈에 띄었다..
민준의 예민한 감각에 의하면 이 경기장 내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숨 쉬고’ 있는 존재는 없었다.
소년이 안고 있는 새끼고양이조차도 마찬가지.
꿈틀.
고양이의 뒷다리가 자신만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게 떨렸지만, 민준은 이를 의식하지 않았다.
‘사도는 다가가길 꺼리고, 그에 더해 죽은 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지능을 지닌 동물이라….’
소문으로 들었던 난투장에서의 사건과 방금 경기에서 사도들의 공격을 받지 않던 모습으로 미뤄보았을 때, 저 새끼고양이는 특별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강세진이 고양이의 모습과 흡사한 야수로 변신하는 것 또한 그 의심에 무게를 더하기도 했고….
지금 당장 명쾌하게 알아낼 순 없었지만,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그에 대해 알게 되는 건 물론이고 저 고양이와 비슷한 존재를 얻게 되리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띠링!
[콜로세움의 ‘투기장’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서브 퀘스트 – 투기장’을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업보 -1.0’, ‘1,000시간’, 칭호 ‘투기장 우승자’를 획득합니다.]그렇게 민준이 상념을 이어가는 도중, 알림음이 들리면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투기장 우승자]
등급: 고급(Uncommon)
효과: 근력 +Lv.2, [이기적인 결투 Max] *스킬 상시적용」
[이기적인 결투 Max] : 손에 닿은 대상과 시전자를 ‘3초간’ 세상과 유리(遊離)된 경기장으로 출전시킨다. (1회당 200시간의 생존시간을 소비)민준은 뒤이어 떠오르는 보상을 빠르게 훑었다.
능력치 레벨이 공짜로 오르는 건 환영할 일이었지만, 칭호 등급이 고급이었음에도 그에 딸려있는 스킬의 효율이 심각하게 나빴다.
고작 3초 동안 유지되는 스킬을 한번 사용하는데 드는 시간이 무려 200시간.
[시간 이격] 스킬을 24초나 쓸 수 있는 시간이었다.‘어차피 보상을 얻기 위해 한 퀘스트도 아니었으니, 보너스 능력치만으로 만족해야 하나?’
민준은 투기장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것에 만족하기로 하고, 기억을 되짚어 정전되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성공한 건가?.’
서로가 워낙 근접해있던 때였기에 관객들 몰래 계획을 실행하기에 절호의 기회라 여겼고.
민준은 곧장 방패를 쥐고 있던 손에 계속 들고 있던 알약을 꺼내 강세진의 목구멍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그때….’
마치 신이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정전이 되었고.
그로 인해 민준의 계획은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으나, 정작 본인조차 성공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게 됐다.
그의 감은 성공을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두 눈으로 확인하진 못했으니 볼일을 보다만 듯한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어.’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더 이상은 뭘 할 수가 없다.
쉽게 풀어갈 수 있는 경기를 일부러 베베 꼬아가면서까지 한 시도였고, 자신의 작전이 실패할 수도 있는 페널티를 감수하면서까지 만든 계획이다.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실패했다면 그건 소년의 운이 거기까지라는 뜻이겠지.
민준이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할 때, 누군가는 믿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원망에 가득 찬 눈초리로, 또 다른 누군가는 일확천금을 맞았다는 희열에 가득 찬 눈빛으로.
사방에서 쏟아지는 자신을 찌를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든 민준은 그들의 시선 하나하나를 마주했다.
이곳에 마지막까지 서 있는 자는 자신이라는 것을 그들 뇌리에 똑똑히 각인시키려는 듯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미친개…. 미친개만 서 있다!”
“젠장! 믿고 있었다고!!”
“우어어어어! 투기장 우승자가 나왔다!!”
그리고 누군가의 중얼거림을 시작으로.
적막 속에 잠겨있던 기백의 인간들이 동시에 철장을 흔들며 날것 그대로의 함성을 경기장 안으로 쏟아냈다.
저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환호는 마치 마약과도 같았다. 사람을 죽여야 하는 투기장을 또 한번 참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곳의 있는 모든 존재가 나를 향해 열광하고 있다.’
환희, 경외, 쾌락, 경악, 욕망.
민준을 향해 보내는 그들의 여러 감정들은 키메라를 연상시키듯 이리저리 흉하게 뒤섞여, 그의 사고(思考)를 마비시켰고.
어그러진 그의 감정 저편에서 희열이라는 감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준은 그 감정의 편린을 인식하자마자 자신의 존엄성이 진창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X발.’
민준은 욕과 함께 볼을 세게 깨물었다.
아릿한 느낌과 함께 비릿한 혈향이 정신을 일깨웠다.
‘쾌락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 정신 차리자.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자. 쾌락에 매몰되어선……. 안 돼.’
저 광기에 오염되어서는 절대 이전에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민준은 자기최면을 계속해서 입으로 되뇌이며 맨정신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천장에 붙어있는 거대한 스피커가 둔탁한 기계음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 더욱 X 같았던 이번 투기장의 진정한 우승자는……. ‘미친개’!!
““와아아!””
– 더! 더 환호해라!! 이따가 그분께서 오실 때도 이따위 환호성밖에 내지 않을 생각이냐?!!
““우워어어어-!!””
스피커가 누군가를 언급하자, 관객들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으로 자신의 모든 기력을 싹싹 긁어모아 함성으로 치환했다.
– 그래그래, 이래야지. 자, 그럼 우승자의 특권을 쓸 차례군. 미친개.
““…””
– 생존시간을 받을 건가, 아니면 ‘은혜’를 입을 건가?
사회자의 물음과 함께 민준에게 선택권이 주어지자 모든 관객이 그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가 은혜를 선택한다면 그녀의 존안을 뵐 수 있는 행사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간절히 뵙길 바라는 존재이자, 민준 또한 만나길 마지않는 존재 ‘레기나’.
‘드디어 목표했던 단계까지 한걸음 남았다.’
민준은 고지가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리고 사회자의 응답에 대답하기 전, 고개를 슬쩍 돌려 대기실에 있는 천태랑에게 눈을 흘겼다.
‘네 차례다.’
‘…알았다.’
그러자 민준의 눈빛을 읽은 천태랑 역시, 때가 됐음을 인지하고 다음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뒷걸음치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가 무사히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민준은 고개를 쳐들고 크게 외쳤다.
“그분께 은혜를 입길 원한다!”
– 클클, 당연히 그렇겠지. 생존시간 따위로 갈음할 수 없을 정도로, 그분께 은혜를 입는다는 건 영광 그 자체일 테니까.
“….”
– 사실 그분께서도 ‘인간 백정’을 대신하게 될, 네 경기를 유심히 지켜보고 계셨다. 그럼 네 소원대로 투기장 토너먼트의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할 행사를 진행하도록 하지.
진행은 빠르고, 간결했다.
철컹-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의 소리가 뚝 끊기자, 철장 문이 열리면서 경기 시작 시에 거대거미들이 뱉어내던 커다란 입구가 입을 벌렸고.
“….”
민준은 어둠으로 가득한 무저갱과 같은 입구를 또렷이 응시했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 모양의 실루엣.
이를 본 관객들은 탐욕이 가득한 눈으로 민준이 우승했을 때보다 더한 격렬한 반응을 내보였다.
케이지을 뜯어낼 기세로 잡고 흔드는 놈. 손톱이 뭉개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좁은 철망 틈으로 팔을 집어넣어 휘젓는 놈. 별의별 행태를 보이는 인간군상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무언가를 갈구했다.
‘레기나가 이렇게 민심이 좋다고?’
마치 사이비 교단의 집회를 보고 있는 듯한 광경.
민준은 그들의 과한 반응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민준 역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인간 셋이 민준에게 다가오지 않고, 경기장 철창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품에 든 주머니 속 무언가를 관객들에게 뿌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석(魔石)?’
처음 봤을 땐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곧 그 정체를 예상할 수 있었다.
검게 빛나는 돌 부스러기.
잘게 빻아 만들었는지, 주먹만 한 [소형 마석] 크기조차 되지 못하는 ‘마석 찌꺼기’기가 호숫가 잉어에게 먹이를 주듯 인간들에게 뿌려졌다.
동시에 그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아귀처럼 조금이라도 더 큰 돌덩이를 얻기 위해 싸움을 시작했다.
“이 개X끼야! 그건 내꺼야!”
“니꺼 내꺼가 어딨어!”
“야! 이거 안 놔!!”
마석을 빼앗기 위해 상대에게 스스럼없이 칼침을 꽂고, 둔기로 눈앞의 뒤통수를 후린다.
투기장 안에서만 벌어지던 살인이 경기장 밖에서도 이뤄지기 시작했을 때.
달그락- 달그락-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온다.’
결승 경기를 봤음에도 나타난다? 그렇다는 건 놈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경찰병원에서 싸웠을 때는, 거대한 검과 번쩍이는 갑옷에 시선을 빼앗겨 얼굴을 잘 살피지 못했기 때문일 터.
놈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기습의 성공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이제 진짜 목표가 코앞에 다가왔다.’
나는 반드시 저놈을 죽이고 동료들과 함께 미로원을 탈출할 것이다.
이후 자신은 동료들을 안전한 곳에 두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겠지만.
그래도, 이 지긋지긋한 거미들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으리란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경기장 한가운데 서 있는 민준은 속에서 들끓는 살기를 숨기고자 수축된 근육을 이완시키며 긴장감을 해소했고.
달그락- 달그락-
소름 끼치는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놈의 거체가 경기장을 비추는 서치라이트 안으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체구.
단단해 보이는 외골격을 지닌 여덟 개의 다리.
흉측한 거미 대가리가 달려있어야 할 곳에 나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상반신.
[아틀낙의 첫째 딸이자 미로원(迷路園)의 작은 주인, ‘레기나’와 조우했습니다.]경찰병원에서 만났었던 그녀가 흑단 같은 단발을 찰랑이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