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83
083화. 결착 (1)
레기나는 웬 발칙한 놈 하나만 떠올리면, 멀쩡하게 다시 자라났음에도 환상통 때문에 왼쪽 다리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미로원 밖이라고 한다지만 그런 수치라니.
존경해 마지않은 어머니의 장녀로서 절대 용서할 수도,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있을 ‘세력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선 사사로운 복수 따위는 지양해야 했기에 섣불리 나서진 않았지만….
‘북쪽의 나방 녀석들이 동북쪽의 벌을 흡수하고 세력을 키웠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곧장 그놈부터 찢어 죽였을 텐데.’
아쉬웠다.
그러나, 개인적인 분노와 아쉬움보다 어머니가 더 중요했던 탓에 그녀는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고자 몸을 웅크렸던 것이다.
그렇게 휘하에 인형을 늘리고, 힘을 회복하던 중.
어느 날. 레기나는 그 잡놈이 미로원에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막내 시카리우스를 죽였다는 정보와 함께.
‘그놈이 여길 들어왔다고? …아니, 근데 놈에게 시카리우스가 당해?’
처음에는 믿지 않았었다.
거미줄에서 당하는 거미라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게다가 셋째가 지닌 능력은 인간들에게 유독 더 치명적인 것이었다.
쉬이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레기나는 소식을 전달한 거미를 찢어 먹어버렸으나.
미로원을 가득 채우던 안개가 정말 사라져버리자,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차라리 잘됐다 싶었었다.
제 동생이긴 했지만, 시카리우스 그년은 원래 재수가 없기도 했고 녀석이 없어짐으로써 자신의 입지가 더 공고해졌으니 말이다.
만약, 그 잡놈이 둘째까지 죽였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레기나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인형이나 수급하고 있었을 터다.
어머니와 자신이 있는 한, 사소한 피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니까. 되려, 그 정도로 훌륭한 제물을 어머니께서 취하신다면 북쪽의 나방 따위는 신경쓸 필요도 없을 거란 생각도 있었던 탓이다.
‘근데, 프라우스까지 죽이다니…. 빌어먹을 놈이 환상은 대체 어떻게 깨부순 거지?’
하나는 괜찮았을지 몰라도, 제 동생이 둘 다 죽어버린 지금 상황은 어머니께서 노하실 수도 있는 일.
계속 손 놓고 있다가는 치명적인 전력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판단에 레기나는 뒤늦게 놈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없었다.
그녀가 놈을 견제하게끔 만든 것은 오직 세력의 강함과 어머니의 화를 피하기 위함이었으니.
실이 아닌 고독을 이용한 인형을 만들었던 것 역시 그 놈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다.
어머니께 하사받은 몇 안 되는 고독을 사용하는 건, 자신에게도 부담인 일이었지만….
‘자리를 비우거나, 마인을 만드는 것보다는 힘 손실이 적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는 수밖에.’
그렇게 고독을 이용해 유독 삶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찬 놈으로 골라 그놈에게 보낸 게 얼마 전.
녀석이라면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잡놈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고.
과연 생각보다 잔대가리를 잘 굴리는 인형이라 그런지, 녀석이 짠 계획이 어느 정도 유효하게 먹혀들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황을 보고 추가적으로 마석을 더 지원해줄 의향도 있었거늘.’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 인형에 심어놓았던 고독에서 오던 원감(遠感)이 끊어져 버렸고, 레기나는 회심의 계획이 실패했음에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현재 이 세계에, 어머니께 받은 독을 해소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는 없다.
아이들이 전해오는 소식으론 그 썩을 놈의 무리가 아직 무사하다고 했으니, 작전을 실패 후 팽 당할 것을 직감하고 자살했던가 아니면 심장으로 파고드는 고독에 몸을 맡겼던가 둘 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분명 거의 다 잡은 물고기였던 것 같은데, 뭐가 문제였을까…?’
조금만 더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으나, 어머니께 받은 고독은 이제 정말 몇 개 남지 않은 상황.
첫 실패를 맛본 레기나는 두 번째가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인형을 선별하는 기준부터, 사용하는 방법까지 기조를 달리했다.
투기장을 이용해 애초에 싹수가 튼실한 녀석으로 골랐고, 고독을 심은 인간은 아직 ‘섭리’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해 마석을 먹여 열심히도 키웠다.
그리고 역시나 그 방법이 유효했는지, 자신이 기르던 다른 마인이 새로운 인형에게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명을 달리하는 것까지 확인했다.
그랬기에 이번에야말로 그 잡놈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놈이 투기장에서 멋대로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과정에는 문제가 없었다. 자신이 예상한 대로 물 흐르듯 순탄히 흘러갔으며, 그 결괏값도 기대한 것만큼은 나왔다.
그런데 계속 무엇인가에 걸려 계획이 좌초되고 만다.
– 그분께 은혜를 입길 원한다!
‘그래, 저놈이 정말 마지막이다.’
레기나는 저 멀리서 들리는 인간의 호기로운 외침을 들으며 생각했다.
저놈으로도 실패한다면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친히 움직여야겠다고.
철컹-
그렇게 경기장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레기나가 그림자 속에서 경기장을 가득 채운 빛을 향해 나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한시라도 바삐 놈에게 고독을 심고 산란장으로 넘어가고 싶었으나.
이곳을 지키고 있는 가축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의식이었기에 급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체통을 유지했다.
– 우워어어어-!!
나아갈수록 미개한 가축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레기나는 그 만족스러운 아우성을 들으며 경기장 한가운데에 섰다.
““….””
조악한 날붙이를 들고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인간 수컷.
느껴지는 기운은 별 볼 일 없었지만, 어쨌든 저놈이 애지중지 키운 인형이 참가한 투기장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놈이었다.
‘원래 살아남는 개체가 강한 거지.’
왠지 이놈이라면 그 엿 같은 잡놈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레기나는 가축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담아 말을 건넸다.
“내 은혜를 받고 싶다 했느냐?”
“….”
“얼었나? 괜찮다. 너희는 하나같이 다 그랬으니.”
역시나 미개한 인간은 자신이 뿜어내는 마기에 짓눌려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그러니 빨리 일을 진행하는 게 이놈에게도 좋을 터.
꿀럭-
레기나는 속에서 저장해둔 고독을 뱉어 두 손에 담았다.
“조금 더 가까이 오려무나. 내 친히 입에 넣어줄 테니까.”
자신을 우러러보고 있는 인간에게 손을 건네자, 놈이 고독을 받아먹기 위해 한 발짝씩 다가왔다.
그렇게 인간의 불쾌한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놈과 가까이 붙은 순간.
촤아악-
“…?”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레기나의 앞다리 하나가 잘려나갔다.
* * *
「[서브 퀘스트 – 레이드]
난이도: C- (B-)
클리어 조건: 아틀낙의 첫째 딸이자, 어미에게 마리오네트(Marionette) 능력을 물려받은 ‘레기나’와 마주했습니다. 여러 사람과 힘을 모아 그녀를 레이드 하세요.
(권장 사항) 골드등급 1/6명
보상: 업보+1.0, 3,000시간, 아이템 ‘레기나의 손’,
거절 혹은 실패 시: 없음」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레기나.
그리고 어김없이 떠오르는 퀘스트와 낙인에서 배어 나오는 피.
저놈과 만나기 위해, 탐탁지 않은 임시동맹을 맺어야 했으며, 팔자에도 없는 연기를 하며 경기 내내 먼지로 가득한 바닥을 뒹구는 개고생을 해야 했다.
그 와중 신념을 지키기 위해 했던 피똥 쌀 것 같은 고생은 덤이었으니.
이제 그 고생에 대한 달달한 보상을 받아야 할 때였다.
민준은 깊이 갈무리하던 원초적 적대감과 들끓는 성력을 가감 없이 분출하며 지면을 밟았다.
투쾅-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거미줄을 치듯 바닥이 박살 났다.
동시에 허공을 흐릿한 선이 그어지면서, 치솟는 거대한 거미 다리.
망막에 맺힌 갑작스러운 사건이 그들의 뇌로 전달되는 찰나에도.
민준은 강제로 벌린 시간의 틈에서 홀로 오롯이 사유하고 있었다.
‘속전속결로 치고 빠진다.’
당장 경기장 안에만 해도 놈의 인형으로 보이는 인간이 셋이고.
철망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붉은 눈을 지닌 살인자가 기백이다.
무엇보다 제일 문제인 건 아파트 단지 지상에 득실거리는 수천의 거미 떼.
동료 하나 없이, 단신으로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싸우는 만큼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천태랑이 지상에서 내려오는 거미로부터 시간을 벌어주기로 했지만, 고작해야 10분이 최대라고 했었지.’
시간을 끌수록 상대해야 하는 적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했기에, 민준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최대한 빨리 레기나를 잡아야 했다.
‘몸에 익은 무구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깨부숴야겠지.’
마침 [일당백(一當百)] 칭호 덕분인지 몸에 힘이 넘쳐난다.
생각을 정리한 민준은 곧바로 레기나의 상처를 노렸다.
다리가 잘려 푸른 피가 철철 흐르는 절단면으로 쇄도하는 날붙이.
정제된 성력으로 둘러진 손도끼로부터 찢어질 듯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민준이 손때가 타 반들반들해진 목제 손잡이를 강하게 말아쥔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콰득!
“–!!”
성력으로 상처를 지지자, 레기나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 때의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재빠르게 이어지는 민준의 후속 공격.
손에 익어버린 대검이 아닌 만큼, 민준은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공세를 이어갔다.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게 아닌 속도 위주의 연타.
잠실에서 겪었던 ‘종말의 날’ 때를 떠올리게 하는 전투 방식이었다.
750% 추가 피해를 주는 [사도의 천적]과 2초간 이속, 공속을 20% 디버프 하는 [살충제] 스킬로 범벅이 된 공격.
그 위력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셌지만, 적 또한 그때와는 급이 달랐다.
“이 미개한 것이!”
살을 지지는 듯한 고통으로 빠르게 방심에서 빠져나온 레기나가 곧장 대응에 나섰다.
그녀가 양손을 펼치자 열 손가락 끝에서 아롱거리는 무언가가 뻗어 나왔다.
경찰병원에서 만났을 적 소방대원을 조종하던 그 기술.
조명 빛에 비춰야만 언뜻언뜻 보이는 명주실 같은 것이 민준의 몸을 결박시키자.
움찔-
다음 동작을 휘두르던 민준의 움직임이 찰나지만 경직됐다.
마치 마리오네트의 인형이 된 듯한 모습.
민준의 몸에 달라붙은 실은 그의 속도를 저하시켰지만, 레기나 또한 [살충제] 스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서로를 구속한 상태에서 시작된 찰나의 공방은 백중세에 가까웠다.
“…죽어라!”
단 몇 초 동안 우리는 성력과 마력이 실린 공방을 수차례의 주고받았고.
그렇게 팽팽하게 수평을 이룬 저울에 무게를 더하는 쪽은.
역시나 아군을 지닌 레기나 측이었다.
타닥-
사방에서 들려오는 땅을 박차는 소리에 반응한 민준은 반사적으로 한곳을 향해 오른팔을 휘둘렀다.
성력을 담은 소형방패로 레기나의 날카로운 다리를 빗겨내면서였다.
그렇게 민준의 손끝에서 사라진 손도끼는 ‘퍽!’ 하는 파육음 소리와 함께. 손잡이만 드러낸 채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파트 경비의 미간에서 돋아났다.
“…끄으윽.”
안 그래도 붉었던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와중에도, 민준은 재빨리 도끼를 회수하고는 그의 옆구리를 노리는 거미 다리를 쳐냈다.
하지만 경기장 안에 있던 인형은 총 셋.
방금 쓰러진 아파트 경비를 제외하고, 매표소 안에서 표를 팔던 중년여성과 기름때가 잔뜩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는 남성이 있었고.
둘은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나이프를 들고 민준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저 기운…. 무방비로 맞았다가는 몸에 구멍 날 것 같은 느낌인데.’
붉은 기운이 성력과 비슷한 힘임을 눈치챈 민준이 이를 피하기에 다리를 놀리려 했지만.
레기나는 이번에야말로 그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하고자 더욱 공세를 퍼부었다.
‘뻥튀기된 체력 능력치를 믿는 수밖에 없나….’
‘주인을 잃은’ 무구 세트가 있었다면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를 사용하던, 성력을 실은 갑옷으로 막아내던 했을 텐데.
현재 믿을 것이라곤 1.5배로 질겨진 자신의 살가죽뿐이었다.
그렇게 숨을 들어 마시며 복근에 힘을 주려는 찰나.
까드득-
어느새 민준의 옆에 나타난 검은 털을 지닌 반인반수가 인형들의 칼날을 거친 손으로 말아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