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87
087화. 새로운 보금자리 (1)
미로원에 들어와 관문의 주인인 아틀낙의 세 딸을 죽이면서, 나는 그들의 신체 일부를 보상으로 받아왔다.
시카리우스를 죽이고 독에 대한 면역력을 지니게 해주는 [시카리우스의 피] 스킬을 얻게 되었고, 프라우스를 죽이고 나서는 [프라우스의 눈]이라는 소켓형 보석을 얻었었는데….
이번에 얻은 아이템 또한 그녀들의 능력과 관련된 아이템이었다.
「[‘레기나’의 손]
등급: 희귀(Rare)
분류: 방어구
필요 능력치: 민첩 Lv.20, 성력 Lv.10
정보: 한때, 레기나 인형술의 총화가 담겨있던 손.
지금은 영혼이 없는 존재만 조종할 수 있는 마리오네트 핸들이자 건틀릿이 되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손가락 끝부터 팔꿈치까지 이어지는, 거무스름한 빛을 띠는 건틀릿.
손으로 한번 슥 쓸어보면 차가운 금속이 아닌 다른 재질로 이뤄져 있음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색깔을 봤을 때 아마 레기나의 외골격인 것 같았다. 이전에 얻었던 샷건 또한 그랬었으니까.
머릿속에서 [주인을 잃은] 갑주 세트와 같이 입은 모습을 상상했는데 외견상 꽤나 잘 어울릴 듯 보였다.
민준이 침대에 누워 [레기나의 손]을 조심스레 착용하자, 여느 아이템처럼 착용자의 신체에 맞게 수축했고.
달그락. 달그락.
민준은 곧바로 손가락을 놀리고, 손목을 돌려보면서 이음매의 가동범위를 확인했다.
방어구에 아무리 특별한 능력이 붙어있다고 한들, 무구로서의 기본이 되어있지 않으면 무용했기 때문이었다.
내구성은 물론이고,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가동범위는 특히나 중요했다.
어느 정도 움직임이 익숙해진 민준은 본격적으로 아이템의 용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근데,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여느 아이템이 그렇듯 친절히 사용 설명서가 있지 않기에 어찌 사용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찰나.
그가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자마자, 컨틀릿의 날카로운 다섯 손가락 끝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실이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그렇게 뻗어 나간 실은 수납장에 놓여있는, 서우에게 선물 해줬다가 이쁘지 않다고 반품당한 더미 인형에게 들러붙었고.
민준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인 손가락에 맞춰 더미 인형이 마구잡이로 팔과 다리를 버둥거렸다.
“…”
와장창!
그로 인해 수납장에 있던 비품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지만, 민준은 벙찐 얼굴로 엉망이 된 방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대장! 무슨 일입니까?!”
딸의 명령 아닌 명령에 민준의 방을 지키게 된 정진호였다.
혹시나 벌어질 위급상황에서 누군가를 구조하고 살려내는 데 위급현장에서 일했던 전직 소방 팀장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그가 민준의 방을 그가 지키고 서 있던 것이었는데.
“아…. 죄송합니다. 새로 얻은 아이템을 써보다가 그만…….”
“아이고, 저는 또 무슨 일 난 줄 알았지 않습니까. 그냥 푹 쉬시지 뭘 또 훈련을 하시고 그러셔요.”
“아, 좀이 쑤셔서요…….”
정진호는 방문 밖으로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복도를 살피고는 다시금 민준을 보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꺼냈다.
“이해합니다만, 대장이 이러는 거 제 딸애가 알면 잔소리를 우다다다 내뱉을 겁니다. 그건 대장도 곤란하시죠?”
“그렇죠…….”
“제가 오늘 저녁내로 움직이실 수 있도록 이야기 잘해볼 테니까, 그때까지만 조금 조심해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말입니다……. 대장이 데려오신 꼬마 말인데요.”
“아, 세진이요.”
“낌새를 보니 적은 아닌 거 같긴 해서 방 하나를 배정해 주긴 했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눈이 붉다 보니까 인원들이 불안해해서요.”
“아, 그 친구. 마인은 아니라 정신이 오염되진 않았어요. 그저 피치 못할 상황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나쁜 친구는 아니에요.”
“대장의 사람 보는 눈이야 당연히 믿고 있죠. 그럼 붉은 눈은…….”
“네, 전 캠프장님이랑 똑같이 [정화] 스킬을 걸어줄 겁니다. 준비되는 대로 캠프장님과 세진이 둘 다 제 방으로 오라고 말씀 좀 전해주시겠어요?”
“넵, 알겠습니다. 곧장 불러오겠습니다. 그럼 푹 쉬십쇼!”
말년 병장이 할 것만 같은 경례를 붙이고는 조심스레 문을 닫는 정진호.
민준은 장난스러운 그의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짓고는 다시금 건틀릿과 더미 인형을 번갈아 보았다.
‘전투에서 제대로 사용하려면 연습이 좀 필요하겠어.’
안 그래도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게 좀이 쑤셨었는데,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되니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엄지와 소지가 인형의 양다리. 검지와 약지가 각각의 팔. 중지가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는 머리. 그러면 손가락을 이렇게…….’
그렇게 한참을 집중하며 여러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어느새 더미 인형이 아기가 아장아장 걷는 것처럼 방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실전에서 사용하려면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하겠지만, 일단 기본은 잡힌 셈이었다.
그렇게 아이템 사용법이 점차 익숙해지자, 자연스레 그의 머릿속에 잡념이 스며들었다.
‘그런 그렇고. 이제 앞으로가 문제인데…….’
레기나를 죽이고 ‘아틀낙의 미로원’이 해제되자마자 연계 퀘스트라고 뜬 ‘보물찾기’라는 이름의 퀘스트.
그 퀘스트로 인해 홀로 조용히 가락시장에 잠입해 아틀낙을 잡으려 했던 민준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로원까지 해제되어서, 이 인근에 있는 생존자라는 생존자는 모두 몰려들 게 뻔하고.’
종말이 오기 전, 대한민국의 지난해 복권 판매액은 무려 6조 4,000억이었다.
타의든 자의든 한국인만큼 ‘한 방’에 목숨을 거는 민족은 드물었고, 그런 이들이 100,000시간과 특별한 힘을 얻을 수 있는 ‘보물찾기’ 퀘스트를 놓칠 리가 없었다.
자신은 밖에 나가지 못해 직접 보진 못했지만, 정진호의 말에 따르면 이미 생존자들이 가락시장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홀로 다니는 거미들을 노리고 있다고 들었으니.
여태 수동적이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거미를 사냥하기 시작한 건 다행이지만…….’
걱정되는 부분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한 사고들이었다.
이미 캠프의 마목(魔木)에서 열리는 마석으로 인해 한차례 홍역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찌어찌 넘어갔었지만, 이번에 걸린 ‘상품’은 한 알에 10시간을 주는 마석 조무래기가 아니었다.
생존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한 미공개의 힘.
그게 아니더라도 100,000의 생존시간만 해도, 생존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법한 보상이었다.
‘판이 너무 커졌어. 저번엔 수백 명이 모였으니, 이번에는 그 배 이상이 모여들겠지. 누군가 보상을 획득한다면 저번처럼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거고, 피바람이 불 게 뻔한데…….’
‘복권’의 당첨자는 무조건 1명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최소 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닭 쫓던 개가 될 테고, 이들 중 또라이는 열에 하나만 있다고 쳐도 백여 명.
소란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개중에서 또 꿩 대신 닭이라는 마음으로 민준의 캠프를 공격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된다면?
‘퀘스트의 해결은 해결이고. 우리를 함부로 건들 수 없게, 체급부터 키워야 한다.’
안 그래도 이번에 레기나를 죽이고 [가락 거점캠프 (4)]를 얻게 되면서, 인원에 비해 관리해야 할 구역이 늘어난 상황이다.
자신이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닌다면 막을 수 없는 건 아닐 테지만, 언제까지고 자신이 이곳에만 머물 수는 없었으니.
딱 체질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라 볼 수 있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이니만큼, 일말의 책임감이 있다면 이들이 자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은 만들어줘야 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받을 순 없어. 실력은 키워주면 되지만, 중요한 건 신뢰야.’
민준의 머릿속에 그에 적합한 단체가 한 곳 있었다. 어차피 자신이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어서 찾아가야만 했던 곳.
보물찾기 퀘스트의 제한시간이 일주일이니만큼 서둘러야 하겠으나, 그들을 데려올 수만 있다면 그 일에 대한 걱정은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소희 씨라는 큰 산을 먼저 넘어야겠지…….’
민준이 어떻게 하면 자신의 전담 치료사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는 동안.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장, 말씀하신 캠프장님이랑 꼬마 데려왔습니다.”
* * *
싱글용 침대, 정갈한 책걸상, 그리고 수납장이 전부인 무채색에 가까운 민준의 방에는 생활 집기 대신 성모상, 십자가, 묵주 등의 성물들이 놓여있다.
애초에 성당에서 물건을 보관하던 방을 배정받은 민준이 아무것도 건들지 않고 침대 하나만 구매해 두고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민준이 특정 종교에 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부터 짐을 늘리지 않는 민준의 성격에 기인한 것도 있었고.
어차피 조만간 이곳을 떠나야 했음을 알고 있기에, 다음에 이곳에 머물 이를 위해 굳이 방을 치우지 않았던 것이지.
“성부와 성자와…….”
그의 방에 들어오면서 전병철 캠프장이 이마와 가슴, 양어깨를 짚고 들어오길 바랬던 적도, 이를 힐끗 보고 강세진이 어쭙잖게 손짓을 보여주기를 바랬던 적도 없었다.
“하하, 캠프장님 이 물건들은 그냥 치우기가 귀찮아서 둔 거지, 제가 가톨릭 신자라서 둔 게 아닙니다.”
민준이 웃으며 손사래를 치자, 전병철 캠프장이 멋쩍은지 머리를 긁으며 대꾸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저를 부르신 건…….”
“저 녀석 때문입니다.”
“역시나 그랬군요.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계약서 스킬을 사용하면 되겠습니까.”
“네, 세진아 이리 와볼래?”
민준이 부르자 뒤에서 쭈뼛대며 어깨와 가슴에 손을 찍고 있던 세진이 민준의 침대에 다가왔다.
“내가 네 붉은 눈을 없애주겠다고 했었지?”
“…네.”
“그런데 그게 공짜는 아니야. 너를 정화하기 위해 나도 대가를 지불해야 하거든. 그래서 우린 거래를 할 거야. 괜찮지?”
“심한 건가요…?”
“그건 우선 네 상태를 한 번 봐야지 알 수 있을 거 같다. 이리 와서 손 좀 잡아볼래?”
그렇게 말하며 민준이 손을 내밀자, 강세진이 그의 손을 맞잡았고, 민준이 천천히 눈을 감으며 집중했다.
‘성력 레벨 필요 없이 생존시간만 5,000시간? 아무래도 마인을 정화하는 건 아니라서 그런가. 확실히 전 캠프장님 때와 차이가 나긴 하네.’
어차피 민준이 자신을 도와줬던 강세진을 대상으로 생존시간을 뜯어낼 생각은 없었으니 큰 상관은 없으리라.
생존 시간을 대신해 그가 대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민준은 반개했던 눈을 뜨고 강세진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1년. 1년 동안만 우리 캠프를 보금자리로 여기고 살아줘. 그 이후에는 네가 어디로 떠나든 붙잡지 않을게.”
“그게 다…? 형…. 너무, 손해…….”
“이왕에 기어들어 갈 것 같은 그 말투도 고치면 더 좋고.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비 있잖아. 나비에 대한 정보를 듣고 싶어.”
민준이 세진이 품에 안고 있는 노란 고양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비?”
“응, 나비. 그 녀석 일반적인 동물은 아니지?”
“…”
“그 녀석에 대한 정보를 알려줘. 그럼, 네 눈을 원래대로 돌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