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89
089화. 새로운 보금자리 (3)
고요한 침묵 속에서.
병원장실에 놓여있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자잘한 흠집과 딱딱하게 굳은 핏물이 묻은 대형 니퍼가 놓여있었고, 김학범은 그 무기를 우수에 찬 눈길로 바라봤다.
아마 병원장이 작고한 그 날을 떠올리는 듯했다.
“하지만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남은 사람들이라도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나. 세영이가 건호를 목 놓아 기다리고 있으니. 우선 거기부터 다녀오게.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해주도록 함세.”
이곳에 들어오면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먼저 들었기 때문인지, 웬만한 일이 아니면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는 김건호의 얼굴에 조급함이 묻어있었고.
이를 알아본 김학범은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는 대신, 그들을 보내주었다.
“그래요, 대장. 본론을 꺼내기 전에 해야 할 일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도 우리 팀원들이 무사한지 빨리 확인해 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 그 사람들도 있었지. 아무래도 이 늙은이한테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나 어디 도망 안 가니 어서 급한 불부터 끄고 오게나.”
김학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건호는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눈길로 일행을 보챘다.
민준 또한 그들이 걱정되는 건 매한가지였기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금방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민준은 곧장 일행을 이끌고 병원장실을 나섰고, 마음이 급한 김건호의 빠른 걸음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복도를 꺾어가며 어느 한 병실에 도착했다.
“후우….”
김건호는 그렇게 도착한 하얀 병실 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파리한 안색을 한 채로 깊게 심호흡했다.
온갖 안 좋은 상상이 그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며 그를 괴롭게 했다.
확실히 줄어든 경찰병원의 인원. 늘어난 환자들과 작고하셨다는 병원장님까지.
분명 김건호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지키기 위해 떠났었는데, 그로 인해 그녀의 옆을 지켜주지 못하게 된 상황이 됐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미닫이문을 열었고.
드르륵-
그 틈으로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한 여성이 보였다.
경찰병원을 떠나기 전 소희가 치료를 했기에 금방 떨쳐내고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던 이세영이었다.
“…오빠 왔어?”
“….”
그녀의 모습을 본 김건호는 그 자리에 서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세영은 품이 넉넉한 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왼쪽 팔이 허전하게 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은 김건호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옆에 섰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허전한 왼팔을 쳐다봤다.
“….”
그의 눈길을 느낀 이세영은 시선을 피하고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야. 목숨에는 지장 없다고 했어.”
“무슨 일이었어?”
평소에도 딱딱하게 말하는 김건호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긴. 살아남으려다가 그런 거지.”
“자세히.”
“소희 씨의 치료 덕분에, 오빠가 떠나고 나서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어. 그리고 한동안은 평화로웠지. 거미들이 나타나지 않았거든. 그런데…. 어느 날 유충들과 나방이 나타났어.”
‘……젠장.’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더니, 역시나 주차장을 거쳐 오며 보았던 유충 사체에는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미로원 내부에서 난리를 치는 자신에게 온 신경을 쏟느라, 거미들은 외부 영역에 대해 신경 쓰지 못했을 것이고, 그 틈을 유충들이 노린 것일 터다.
“혹시, 잠실 쪽에서 온 놈들입니까?”
“네. 처음에는 소수였는데 점점 공격해 오는 빈도가 잦아지고, 수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어요. 거미가 쳐들어왔을 때보다 더요. 그렇게 전투를 거칠 때마다 부상자는 점점 늘어가고, 싸울 수 있는 인원은 줄어들었죠. 그렇기에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요. 그 후에는…….”
“악순환의 반복이었겠군요.”
“네.”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던 소희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포션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비싼 걸 쟁여두고 쓸 만큼 저희 상황이 넉넉지 않았어요. 그래서 팔을 붙이는 방법을 찾기보단 목숨을 건지는 방법을 선택했죠.”
“…내가 잘못 선택했다. 떠나지 말아야 했다. 네 옆에 있어야 했다.”
김건호가 두껍고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고는 웅얼거렸다.
그는 그녀의 곁에서 자리를 비운 본인을 자책하는 듯했지만, 이는 온전히 자신의 탓이었다.
“미안하다, 건호야. 네가 너를 끌어들이지만 않았더라면…….”
“….”
민준의 말에 김건호가 복잡한 감정을 담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달싹거리는 입술.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가 무엇이라고 말하려는 찰나, 이세영이 먼저 입을 뗐다.
“오빠….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거 알잖아.”
“….”
“오빠가 민준 씨와 미로원을 부수러 가지 않았다면, 유충이 아니라 거미에게 당했겠지.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지, 결과는 같았을 거야.”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지켜주면 되잖아? 나 팔 이렇다고, 앞으로는 나 안 지켜줄 거야?”
축 처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세영이 새침한 표정으로 건호에게 질문했고, 그는 즉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니까, 이제 지나간 일을 그만 덮어두자. 그것보다 이제는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싶어. 살아남기 위해선 그래야 하니까…….”
그렇게 자신의 팔에 대한 이야기를 일단락한 이세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민준을 돌아봤다.
“민준 씨가 돌아오시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혹시……. 그 유충들과 민준 씨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나요?”
“….”
“가장 최근에 유충 떼를 몰고 왔던 작은 나방 하나가, 제 팔을 잘라내면서 앵무새처럼 되뇌던 말이 있었어요. 어눌한 말투라서 단번에 알아듣긴 힘들었지만,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어 볼 때, 분명……. ‘낙인’이라고 했던 것 같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세영의 시선이 민준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눈썰미 좋은 그녀는 일전의 그의 손에 생긴 흉터를 보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측근인 동료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말없이 민준을 바라봤다.
누구도 그를 탓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민준의 마음속에 커다란 돌이 떨어졌다.
잠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세상이 핑핑 도는 듯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어내며, 굳어버린 혀를 가까스로 움직이며, 겨우겨우 말을 뱉어냈다.
“…죄 …송합니다. 그놈들은 아마-”
“아니다.”
“…어?”
“대장 탓, 아니다. 아까도 그 말을 하려 했다.”
김건호가 초점 없이 멍한 눈을 한 민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민준이 다시금 정신을 차렸고, 그런 민준을 향해 세영은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죄책감을 느끼라고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어차피 민준 씨가 아니었다면, 저희는 레기나가 쳐들어왔던 그 날 전멸했을 테니까요. 그저 민준 씨께 조심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거였어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놈들이 찾아온 건 제 잘못이 맞습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일을 바로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공교롭지만 제가 찾아온 이유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렇게 말한 민준은 계획을 조금 더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주어진 시간이 촉박하긴 했지만, 꾸물대다간 이들이 언제 유충에게 다시 공격받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이세영에게 닥친 문제를 그냥 넘길 생각은 없었다.
지금 세상에서 1순위의 가치는 생존이었고, 장애를 갖게 됐을 때 가장 취약해지는 것 또한 생존이다.
그런데 사선을 같이 넘은 동료의 소중한 이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
더욱이 이들은 자신의 잘못이 없다고 말하지만, 유충들이 찾아온 건 자신 때문이었고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기에 민준은 조금이라도 그에 대한 속죄를 하고 싶었다.
근본적인 해결은 팔을 돋아나게 하는 것일 테지만,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물질적인 도움뿐.
“이거라도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민준은 품에서 낙원에서 되찾은 [충성스러운 토마호크]를 꺼냈다. 자신을 지켜준 부적과도 같은 아이템이자, 원거리와 근거리 전천후로 사용 가능한 무기.
그러면서 한 손으로도 사용이 가능하니, 전투에서 꽤나 도움이 될 터였다.
민준은 이세영 손에 자신의 애병을 직접 쥐여주면서 동시에 생존시간을 양도했다.
이를 느낀 이세영이 곧바로 생존시간을 확인했고, 곧바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민준 씨, 저는 이거 못 받아요. 다시 가져가 주세요.”
“아닙니다. 받아주세요. 그래야지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아니, 그래도 10,000시간이라니…….”
그녀의 입에서 구체적인 숫자가 흘러나오자, 다른 이들의 눈 또한 동그래졌다.
여태껏 열심히 사도를 사냥해온 나머지 셋이 보유한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많은 양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당장 팔을 복구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스페이스 마켓이라면 팔을 대체할만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아니, 분명 있을 겁니다. 별의별 것을 다 파는 곳이니까요. 이 생존시간으로 그걸 구매해서 사용하세요.”
“민준 씨…….”
“치료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잃진 마세요. 등급을 더욱 올려서 마켓을 개방하면 팔을 재생시키는 마법의 물약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오래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대장…….”
김건호와 이세영이 감격한 눈으로 민준을 바라보자, 괜히 무안해진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저 그래도 생존시간 한참 남았습니다. 보이시죠? 그 정도야 저한텐 별거 아닙니다, 하하.”
물론 민준이 생존시간이 많은 건 맞았지만, 무려 보유한 시간의 사분지 일이 사라졌다. 그리고 여태 겪은 고생을 되짚어보면, 그가 쌓아온 생존시간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민준은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생존시간은 잃어도 벌면 되지만, 사람을 잃으면 되찾을 수 없었으니.
그는 망한 세상이 돼서야 겨우 만나게 된, 귀중한 인연들을 허망하게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럼 건호야 너는 세영 씨랑 이야기 좀 더 나누고 있어. 우리는 가볼 때가 있어서 말이야.”
“그래 건호야. 네 선배들은 내가 살피러 다녀오마. 제수 씨랑 못다 한 해후 좀 풀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정진호와 소희가 먼저 일어났고, 민준 또한 그들을 따라 자리를 정리하는 순간.
그의 귓가에 뜬금없는 시스템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사용자의 선한 영향력이 한계치를 초과합니다.] [‘대리자(代理者)’가 사근덕(四根德) 중 선덕(善德)을 획득했습니다.] [칭호의 숨겨진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그에 따라 권능 1개가 개방됩니다.] [‘후광(後光)’ 스킬을 획득합니다.]‘이건 또 뭐야.’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 민준은 헛웃음을 지으며 스킬창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