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e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91
091화. 새로운 보금자리 (5)
“대장, 정신이 좀 들어?!”
“괜찮아요, 민준 씨?!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에요?”
민준은 그들의 입에서 우다다 쏟아져나오는 속사포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이내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글쎄요,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저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저분들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한 거 같네요.”
민준이 그렇게 말하면서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를 내려다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흑사병에 걸린 듯 검었던 피부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해져 있었고, 그들의 안색 또한 평온하게 바뀌어 있었다.
움찔. 그리고 그의 민감한 감각에 하율이라고 불린 여성의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곧이어 주안이라고 불린 사내도 속눈썹을 부르르 떨며 점차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모습.
민준의 시선에 소희와 정진호도 침대에 누워있는 둘을 바라봤고, 그들이 조금 전과 다름을 알아채고 탄성을 내뱉었다.
“…깨어나셨다!”
“하율아, 주안아. 정신이 들어?”
곧바로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춘 정진호가 먼저 눈을 뜬 하율이라는 여성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메마른 논밭과 같이 쩍쩍 갈라지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으으 …정 팀장님? 여기가 어…. 디죠?”
“후,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여기는 경찰병원이야. 가락시장 옆에 거기 알지?”
“…병원이요? 분명 우리는….”
방금 깨어나 비몽사몽한 그들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정진호는 계속해서 대화를 유도했고.
그들이 온전히 사고할 수 있을 때가 되자, 모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민준이 그들을 레기나로부터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해줬다는 사실을 말이다.
“민준 씨라고 하셨나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저희가 어떻게 갚아야 할지….”
두 남녀는 계속해서 성치 않은 상태로 몸을 일으켜 감사의 인사를 하려 했고.
민준은 이를 말리느라 진땀을 흘리며 말려야만 했다.
“저희를 구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막내와 팀장님까지 구해주셨다고요? 이거, 참. 어떻게 보답을 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밤송이마냥 삐쭉삐죽 솟은 머리 스타일을 한 주안이라는 사내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괜찮습니다. 정 팀장님의 동료면 제 동료이시기도 하니까요. 오히려 나머지 두 분을 구해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죠.”
“…그 친구들은 …어쩔 수 없겠죠. 애초에 저희 직업이 목숨을 내놓고 활동하는 직업 아니겠습니까. 끝까지 민간인들을 구하다가 갔으니, 아마 천국에서 흐뭇한 얼굴로 저희를 내려다보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두 환자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듯 보이자 정진호는 민준의 몸을 이곳저곳 만지며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대장,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순간 대장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열기가 엄청났었다니까? 몸에서 막 수증기도 피어오르고…. 아무튼 큰일 나는 줄 알았어.”
동료가 깨어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살려주었던 은인의 목숨을 앗아가길 바라진 않았기에.
정진호는 죄책감을 지닌 표정으로 민준에게 안부를 물었다. 이는 옆에 서 있던 소희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습니다. 아까도 그렇고, 이번에도…. 오히려 제가 선물을 받은 거 같은데요?”
민준은 그들을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으면서, 방금 전 떠올랐던 시스템 메시지와 스킬창을 확인했다.
[시카리우스의 정(精) Max] : 시카리우스의 독과 피가 어우러지며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그녀의 정이 녹아있는 사용자의 피는 만(萬)가지 독을 치료하는 해독제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이로운 영약에 가깝다고 전해진다.
이전에 얻었던 [시카리우스의 피]는 독에 내성이 강화된다는 정도의 문구만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걸어 다니는 해독제가 되었다는 식으로 스킬 설명이 바뀌어 있었다.
만가지 독을 치료하는 해독제란 말은 곧 자신이 웬만한 독에 당하지 않는 몸이 되었다는 소리와 매한가지인 얘기였고.
피가 영약에 가까워졌다는 문구 때문일까?
‘성력의 수발이 자유로워진 게 바로 체감될 정도로 몸이 바뀐 거 같은데?’
심장에서 끌어낸 성력을 사지로 퍼트리자, 신체 곳곳으로 그물처럼 퍼져있는 혈관을 따라 거침없이 뻗어 나갔다.
전의 혈관이 잡석을 깔아 만든 도로였다면, 지금은 매끄러운 아스팔트 도로 같달까?
성력 레벨이 오른 건 아니었지만, 지금이라면 전과는 배 이상의 출력을 낼 수만 있을 것 같다.
예전에 유명한 야구선수가 제 행운을 올리기 위해 꾸준히 쓰레기를 줍는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얼핏 들은 적이 있었는데, 자신 또한 선행으로 인해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이건, 다른 사람의 독을 대신 흡수해서 얻은 거라면. 아까 세영 씨 건은 타인에게 대가 없이 시간을 베풀어야만 얻을 수 있는 히든피스 같은 건가?’
뭐가 됐든 작은 도움이 더 큰 이득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민준은 물 만난 물고기마냥 돌아다니는 성력 갈무리하며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방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미소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민준은 그저 미소지을 뿐 구태여 이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보다 저분들과 개인적으로 나눌 이야기가 많으실 텐데 하고 계시죠. 저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끝났으니, 김학범 할아버지에게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천천히 가지 않으시구요.”
“아시잖아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거. 지금도 사방에 수많은 생존자들이 가락시장으로 모여들고 있을 겁니다. 게다가 유충들이 습격한 문제도 있고요. 그러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죠.”
“그렇긴 합니다. 서둘러 방비를 해야 캠프가 안전할 테니까요. 그럼 저는 이 녀석들과 해후를 나누고 있겠습니다. 이놈들을 제 밑으로 들이려면 스킬이나 능력치도 알아봐야 할 거 같구요. 그럼 소희야. 네가 대장과 같이 다녀와라.”
“흥, 아빠가 부탁 안 해도 가려고 했거든요.”
그렇게 민준과 소희는 병실에서 나와 꼭대기 층에 있는 병원장실로 향했다.
* * *
똑똑.
“어르신, 저희 왔습니다.”
민준이 노크를 하자, 고급스러운 목재 문틈 사이로 김학범의 말소리와 함께 향긋한 차향이 새어 나왔다.
– 들어오게.
천천히 문을 열자 김학범이 접견용 테이블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병원장실 속. 늘어진 흰 수염과 갈색 두정갑을 입은 김학범은 마치 사극에 출연하는 장수를 보는 듯했는데.
방어구를 미뤄보아 앞선 전투를 겪으면서 골드등급으로 진급한 듯했다.
“왔는가. 안색이 좋은 걸 보니, 볼일은 잘 해결이 된 것 같구먼.”
“다행히도 그렇습니다.”
“그럼 우선 앉아서 차 한잔 들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이 그냥 있는 게 아니야.”
민준과 소희는 김학범의 손짓에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사기잔을 통해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그리고 그윽한 차향이 그들의 마음을 한층 차분하게 만들어줬다.
특히 돌발적으로 발생한 여러 사건 때문에 급해졌던 민준에게 그 효과는 더 탁월하게 작용하여, 그는 조금 더 침착하게 자신의 용건을 꺼낼 수 있었다.
“유충들의 습격이 있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영이가 말해주던가? 내가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군 그래. 맞네, 놈들의 계속되는 공세에 많은 사상자가 있었지. 병원장, 그치도 그 때문에 갈 길 간 것이고….”
“…죄송합니다. 그놈들이 이곳을 공격한 건 아마 저 때문일 겁니다”
“자네 때문에?”
갑작스러운 민준의 고백에 차를 마시던 김학범이 흰 눈썹을 치켜들었다.
“예, 잠실에 있는 성주가 저를 노리고 있거든요.”
“허허…. 자네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군. 그런 괴물한테 원한을 다 사고 말이지. 하지만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나. 혹시…. 자네 지금 자책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민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확인한 김학범이 자신의 손주를 달래듯 따스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지 말게. 자네가 미로원으로 떠나고 나서 거미들의 공격도 끊기지 않았나. 아마 그곳에서 분투한 자네 덕분이겠지. 그저 거미에서 유충으로 바뀌었을 뿐이야. 그저 그뿐인 게지. 누구의 탓도 아니란 말일세.”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저 거미에서 유충으로 습격자가 바뀌었을 뿐이야. 그 누구의 탓도 아니지…. 그럼, 여길 찾아온 용건은 이제 모두 끝마친 건가?”
김학범의 물음에 민준이 이곳에 찾아온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혹시 얼마 전에 떠오른 퀘스트창을 보셨습니까?”
“‘보물찾기’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세력전’을 말하는 건가? 아, 세력전의 기여도 순위도 확인했네. 자네와 처자의 이름이 올라가 있더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그 두 퀘스트 모두와 관련이 있습니다.”
“…음, 우린 지금 그 퀘스트들에 도전할 여력이 없네만?”
“퀘스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어르신. 헌데, 어르신은 그 퀘스트의 여파가 어떻게 되라라 예상하십니까?”
“앞으로 이곳이 더 시끄러워지겠지.”
“그저 시끄러운 정도가 아닐 겁니다.”
종말로 인해 서울시의 인구 중 백의 하나만 살아남았다고 가정해도 이곳 가락동의 생존자만 700명에 가깝다.
인근에 붙어있는 문정동, 석촌동, 송파동의 생존자까지 합하면 배 이상 늘어날 테고….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그들이 모두 가락시장에 모여든다고 생각해보면.
그들 중 약탈자가 10%밖에 없다고 낙관하더라도,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눈에 훤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큰 소동이 벌어질 겁니다.”
호로록-
민준이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들었음에도 김학범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불어 마시고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 상황이 좋지 않은 게 우리뿐이겠는가. 대부분의 곳이 그렇겠지. 그런 세상인 것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일을 생각하는 건 사치일 뿐이야. 우리는 그저 오늘을 살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라네.”
그는 그렇게 말을 잇고는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대형 니퍼를 바라봤다.
민준은 찻주전자를 집어 들어, 반쯤 비어있는 그의 찻잔을 채우며 넌지시 말을 던졌다.
“만약,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다가올 내일 아침을 무사히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떠시겠습니까.”
“…그런 속 편한 곳이 아직 남아있단 건가?”
“미로원 내부에서 거미들과 치고받고 싸우면서 얼마 안 되지만 동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작은 보금자리도 만들었고요. 어르신을 그곳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나를? 이번에는 내가 이렇게 말할 차례군. 말만으로도 고맙네. 하지만 나는 이곳에 남은 사람들을 지켜야 해. 그러기로 그놈과 약속하기도 했고-.”
“당연히 어르신만 모시려는 건 아닙니다.”
“…?!”
“물론 경찰병원이 상황이 이 정도일 줄은 저도 예상치 못했지만……. 그럼에도 제게 이곳에 있는 모든 분을 데려갈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은 충분히 있습니다.”
민준의 말에 김학범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아미를 찌푸리며 그를 쏘아봤다.
“그렇게 안 봤는데, 자네 농담이 지나치군.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이곳에 있는 인원은 몇인지, 환자는 몇인지 아는가?”
“몇입니까.”
“됐네. 흰소리 말고 어서 돌아-”
탁.
민준이 그의 말을 끊으며,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접견용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떤 점을 걱정하시는지 알겠습니다만, 우선 이걸 확인하고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