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라미레스 쟁탈전(9)
***
똑같은 고유능력으로 겨뤘을 때 상대를 이길 수 있는가?
만약 이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내 대답은 대부분 ‘그렇다’일 것이다.
단순히 해당 고유능력의 발전된 미래를 흉내 낼 수 있어서가 아니라, 같은 수준의 능력이라 해도 응용력이 몇 수나 앞설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였다. 현 시점에서 만나게 될 상대는 아직 본인의 능력을 100% 활용할 줄 모를 게 아닌가.
다만 그 외에 두 가지 답변이 더 추가적으로 나올 수가 있는데, 이는 바로 다음과 같다.
첫째, 이긴다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압도할 수도 있다.
둘째, 절대 이기지 못한다.
키리코의 [작열하는 여섯 탄환]의 경우, 후자에 가까웠다.
키리코의 고유능력은 단순히 ‘격’이 높아진다고 해서, 내 신체능력이 우월해진다고 해서, 혹은 도움 되는 특성이 많아진다고 해서 잘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이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무조건적으로 많은 연습이 뒤따라야만 한다.
가령, 과녁에 탄환을 적중시키는 것, 탄환을 빠르게 겹쳐 쏘는 것, 재빨리 약실을 회전시켜 탄환을 바꾸는 것 등등이 다 반복연습 없이는 빠르게 할 수 없는 동작들이다.
핵심은 ‘속도’가 붙어야 한다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느린 총잡이’가 활약할 수 있는 전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즉, 일정 수준 이상의 숙련도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게 바로 이 [작열하는 여섯 탄환]인 것이다.
하여,
“흠흠, 살살 좀 가자고.”
나는 키리코 녀석과 총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에 약간 긴장한 상태였다.
탄환에 담긴 힘이야 내 것이 더 강하겠지만, 총질 자체는 녀석이 훨씬 더 잘 할 테니까.
더군다나 내가 직접 새로운 ‘탄환조합’까지 일러주지 않았던가. 실제론 쓰지도 못하는 기술을 코미어가 마련해준 장비의 힘을 빌려 ‘쇼’까지 하면서.
내가 본인 성장을 위해 제법 애썼다는 걸 이 녀석이 좀 알아야 할 텐데.
그때였다.
“똑똑히 보라고.”
키리코가 난데없이 내게 겨누었던 총구를 위 허공으로 돌렸다.
“응?”
그러곤,
타타타탕!
타타타탕!
허공에 갈겨대는 것이었다.
뭔 짓인가 싶었다.
“지금은 이 정도다.”
“뭐?”
“솔직히 말하지. 도움이 됐어.”
키리코는 그러곤 총구를 슬쩍 내린 뒤, 다시금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네놈이 총을 어떻게 쏴야 위력적인지 알려준 덕에······ 여러 녀석들을 꽤나 손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고.”
“오······ 그래?”
생각지도 못한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이거 혹시?
“헌데 네가 했던 것처럼은 잘 되지 않더라고.”
그야 그렇겠지. 그건 에너지 포까지 겹쳐 쏜 거였으니까.
물론 이를 고백할 순 없었다.
“그걸 제대로 알려준다면······.”
본론인 듯했다.
“알려준다면?”
“보답으로 고통 없이 끝내주지.”
“······.”
착각이었다.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나는 슬쩍 장비에 비축된 에너지를 확인했다. 두어 번 큰 공격을 날릴 수준은 되었다.
‘오케이, 파워는 될 것 같고.’
문제는 충족시켜야 할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끌려선 안 된다.
큰 부상을 입혀서도 안 된다.
심지어 각성을 시켜서도 안 된다.
“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일격에 기절시키는 것.
‘······해보는 수밖에.’
나는 양팔에 부착해둔 에너지 포를 대기 상태로 돌린 다음, 허리춤에서 리볼버를 뽑아들었다.
그러곤 곧바로 약실을 회전시켰다.
촤르르륵-
탁! 탁!
맞춰진 탄환은 왼쪽이 ‘섬광’, 오른쪽이 ‘폭발’이었다.
사실 이 두 탄의 조합은 엄청난 파괴력을 띄거나 하진 않는다. ‘폭발’에 일정 이상의 힘이 실리긴 하나, ‘섬광’의 용도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섬광’은 본디 적의 ‘시각’과 ‘청각’을 제압하는 용도로, 대상의 시야를 교란시키는 것이 주목적인 탄환이다.
즉, 이 조합은 섬광으로 상대를 속이고 폭발로 타격하는 방식이 기본이다.
다만, 내가 이번에 활용할 방식은 그것의 정반대였다.
폭발로 교란하고, 섬광으로 공격하기.
섬광을 상대의 얼굴 가까이에서 터뜨리면,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빛과 폭음에 대상의 감각이 일시적으로 마비된다.
즉, ‘기절’시킬 수 있다는 것.
이는 [작열하는 여섯 탄환]의 ‘고급응용’ 중 하나로, 상대를 사살이 아닌 제압할 용도로 키리코가 써먹는 방식이었다. 무려 킹스로드를 건넌 이후의 어마어마하게 발전된 녀석이.
‘운 좋은 줄 알라고. 지금 몇 년 치를 선행학습 시켜주는 거니까.’
이어 나는 머릿속으로 ‘동시에 해내야 할 세 가지’를 되뇐 후,
-폭발로 키리코의 눈을 속인다.
-에너지포로 키리코의 공격을 상쇄시킨다.
-유도&섬광으로 키리코의 감각을 해제시킨다.
“어제 그거 어떻게 쏜 거냐고 물었지.”
격발 태세에 들어갔다.
“지금 한 번 더 보여줄 테니까, 다시 보면서 직접 익혀보라고.”
그러자,
“······좋아.”
키리코 또한 긴장된 기색으로 리볼버를 잡았다.
촤르르르-.
탁!
그와 동시에, 주위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
서부극을 볼 때면 늘 궁금했었다. 어째서 두 사람이 곧바로 총질을 하지 않고, 괜히 상대의 눈치만 살필까. 이유가 다 있었다.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총을 내려다보는 순간, 미간이 꿰뚫릴 것만 같아서.
“후······.”
그렇게 숨 고르는 소리만이 장내를 채웠다.
이어 불길한 고요가 착 가라앉을 무렵,
“이 멍청이들이!”
등 뒤에서 갑작스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코코아였다.
‘이런······.’
제지해야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선을 떼는 순간 탄환이 날아들 테니.
‘오지마라, 오지마······.’
그러나,
“멈추라니까, 이 얼간이가!”
내 바람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퍽!
“······.”
조막만한 발에 엉덩이를 맞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죽어! 이 바보 주걱턱! 멍청이, 얼간이!”
퍽퍽!
조막만한 손에 머리를 두 대나 맞았지만 움직일 수 없었······.
그 순간,
“어, 야! 뭐해! 어디 가! 위험해!”
나는 놀라 소리쳤다.
코코아가 난데없이 키리코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의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뛰어간 녀석은 이어,
“이 멍청한 빨강머리! 얼간이, 멍청이!”
키리코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퍽.
하지만 키리코는 움직이지 못했다.
“총에서 손 안 떼!? 이 얼간이가!”
퍽퍽.
곧이어,
“······뭐냐 이 꼬맹아.”
키리코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역시나 아팠던 게 아닐까.
코코아는 그에 대답하는 대신,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웬 기계장치였다.
“녹음기야. 그 여자 제법 똑똑하네. 이런 상황도 다 예상한 걸 보면.”
이어 코코아가 버튼을 누르자,
-아아, 멍텅구리 키리코 씨?
녹음기에서 시아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주걱턱 씨 손 잡고 조용히 와요. 지금 급하니까.
“······뭐?”
-레오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얼른 와요, 알았죠?
“뭐, 뭐!? 잠깐, 잠깐만!”
녹음된 음성은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이미 충분했다.
“······.”
슥-.
어느새,
“무슨 일인지는 가면서 듣지.”
키리코가 두 손을 든 채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리볼버는 허리춤에 그대로 메인 상태였다.
“이야······ 말 잘 듣네.”
나는 이어 코코아를 돌아봤다.
“야, 이런 게 있었으면 진즉에 말을 했어야······.”
“두고 간 주제에 말이 많네. 건방진 주걱턱.”
“음······.”
뭐, 어쨌거나 싱거운 결말이었다. 다행이기도 했고.
나는 코코아의 머리를 슥 쓰다듬어줬다.
“잘했다.”
“흥, 기본이지.”
“오케이, 그럼 가보자고.”
그러곤 곧장 출발하려 할 때였다.
삐빅-.
때마침 송수신기의 신호음이 울렸다.
하카였다.
“무슨 일이라도?”
-주걱턱 씨, 지금 큰일 난 것 같은데요?
“큰일?”
-칼 자이드와 그로니얀이 손잡았습니다.
“······그래?”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나는 두어 차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라? 안 놀라시네요?
“예상했었으니까.”
-호오······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요?
“어떡하긴. 일단 거기 계속 붙어 있어. 또 특이사항 생기면 일러주고.”
-예, 알겠습니다.
연결을 끊자마자, 키리코가 호기심을 표해왔다.
“뭐지?”
“엄청 안 좋은 소식이야. 적이 늘었거든.”
“그래? 좋은 소식인 것 같던데. 칼 자이드 녀석과 한 판 붙게 되었다는 거 아닌가?”
아아, 그랬지.
그러고 보면, 원작에서도 레오와 키리코가 이즈음 칼 자이드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곤 했었다. 그러다 한 번 둘이 같이 덤벼들어 된통 당한 적도 있었고.
레오는 지금 그 대상이 나로 바뀐 듯했지만, 키리코에겐 여전히 칼 자이드인 모양이었다.
물론, 원작에서나 여기서나 각성도 안 한 주제에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너 지금 약골들 좀 만져줬다고 자신감이 꽤 붙은 건 알겠는데······ 칼 자이드가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말할······ 휴, 아니다. 됐다, 일단 가자.”
말한다고 들을 위인도 아니고.
그러고 다시금 출발하려할 때였다.
삐비비빅-.
또 다시 송수신기의 신호음이 울렸다.
“응? 또 할 말이 남았······.”
그런데,
“어? 잠깐.”
신호음이 달랐다. 방금 것과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코미어!”
나는 얼른 품속을 뒤져 또 다른 송수신기를 꺼냈다.
일전에 코미어가 건넨 것이었다. 일이 생기면 연락하겠다고.
“코미어?”
-다행히 받기는 하는군.
“그럼. 왜, 무슨 일이야?”
-몰라서 묻나?
어쩐지 말투가 싸늘했다.
“뭔데?”
-하늘.
“엉?”
-하늘을 보라고. 문제가 뭔지 알 수 있을 테니.
나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촘촘히 붙은 석면지붕들 틈 사이로, 밝은 햇살이 눈가를 찔러왔다.
“지붕이랑 햇살밖에 안 보이는데?”
잠깐의 침묵 후,
-······라미레스가 없어졌다. 설마 행방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다시금 코미어의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그거?”
그러고 보니 말한다는 걸 깜박했다. 이 녀석은 지금 그게 자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어어, 아냐. 잠시 다른 곳에 보관 중이야. 기계들 위치신호 잡히는 거 보면 알잖아. 계속 나와 붙어 있었다는 걸. 아, 지금은 잠시 두고 멀리 나오긴 했지만.”
그러자,
-······알겠다.
코미어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딱히 추궁을 하려 했다기보다는 그냥 확인 차 연락한 듯했다.
그러곤,
-반납기한은 알고 있겠지? 3일 내로 가져오면 된다. 물론, 귀찮은 파리들은 모두 제거한 채로.
곧바로 끊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녀석을 잡았다.
“잠깐, 잠깐! 마침 연락 잘했어. 나도 할 말이 있었거든.”
-할 말?
“너도 좀 와야겠는데?”
-······뭐?
“슬슬 출동할 때가 된 것 같아서.”
곧이어 코미어에게서 짤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출동이라면······ 설마?
“준비는 끝났겠지? ‘녀석’을 이끌고 공장지대 밖으로 좀 와줘. 거길 쑥대밭으로 만들 순 없으니까. 아, 올 때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고.”
최종 결전지에 대해선 고민이 많았으나, 결국 공장지대 안쪽보다는 외부의 벌판으로 정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양상이 아닌 이상에야,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의 결전은 여러모로 득 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연출 면에서나, 내가 동원하려는 ‘녀석’의 활용 면에서나.
물론 적들을 공장지대 안쪽으로 끌어들이라는 게 작가의 특별 요구사항이긴 했지만······ 뭐, 이미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차피 노스랜드 장비들도 이미 충분히 많이 빼둔 상태였으니.
잠시간의 침묵 후,
-알겠다. 다만 약간 늦을 수도 있다. 마지막 점검은 해야 되니까. 신호가 잡히는 곳으로 가도록 하지.
“오케이.”
이어,
“가자.”
“근데 그 대화는 뭐야? 누구야?”
“어이, 그 ‘녀석’이라는 게 뭐지?”
“몰라도 돼.”
의문에 찬 둘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
라미레스 쟁탈전 ‘승자독식 선언’ 사흘째 아침.
결전의 날.
나는 산기슭 아래로 몰려든 ‘적’들을 가만 내려다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았고, 또한 기세들이 흉흉했다.
약간 조짐이 좋지 않았다.
“흐음······.”
물론 내 심기가 어지러워졌던 까닭이 비단 저들의 수나 분위기 때문은 아니었다.
당장 문제가 되는 사항이 두 가지 정도 있었다.
하나는 챕터가 끝나지 않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
현재 계속 ‘라미레스 쟁탈전(2)’인 상태였다.
그로니얀 쪽에서 뭐 얼마나 대단한 상황들이 주구장창 이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하카에게 전해 들었을 땐 뭣도 없는 것 같더니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분명 끊을 만한 타이밍이 수차례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다섯 번이 훌쩍 넘었다.
레오가 지무스에게 쓰러졌을 때, 칼 자이드와 겔롭으로 변한 나의 짤막한 충돌이 끝났을 때, 구체를 넘겨받은 키리코에게 습격이 시작됐을 때, 키리코에게서 그로니얀에게로 메인시점이 넘어갈 때, 타냐로 변한 내가 라미레스를 탈취했을 때 등등.
솔직히 나열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챕터는 계속 그대로라는 것.
쟁탈전 양상이 바뀌고, 날짜가 바뀌고, 배경이 되는 지형이 계속해서 바뀌었음에도, 챕터만은 변함이 없었다.
심지어 별 충돌 없이 지루한 대치만 이어지고 있는 이 기간조차 끊지 않고 가다니.
이는 나를 저격한 것이라고 밖엔 생각이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는 기존의 챕터보상도, 또 작가가 내걸은 특별제안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전투에 임하게 되었으니.
더군다나 이제 ‘페널티 거부권’도 한 장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약간 심기가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고나 할까.
그리고 다음으로,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자, 주걱턱은 들어라! 이 교활한 사기꾼 같은 놈아! 라미레스를 가지고 이 많은 이들과 장난을 치려 들다니! 얼른 내놓고 무릎을 꿇으면, 네 목숨 하나로 봐주겠다. 하지만 당장 나오지 않는다면, 네 놈의 모험단은 물론이고, 너를 돕는 모든 녀석들의 목숨을 거둘 것이다!
적의 대열에서 앞으로 나온 이들은 총 열 한 명이었다.
그 중 가장 앞에 나와 마이크를 잡은 녀석은 스피커에 불과했으니, 적의 수는 총 열이라 보는 게 맞았다.
넷이 아니라 열.
본래의 대전 상대로 상정했던 그로니얀, 칼 자이드, 겔롭, 지무스 외에도 상대해야 하는 녀석이 여섯이나 더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익히 아는 얼굴들이긴 했다.
웨일스 아이작, 도리안, 대장거북이, 제로니모, 금발 쌍둥이 형제.
솔직히 저들까지 죄다 끌고 나올 줄은 몰랐다.
‘기어이 써 먹네······.’
물론 뭐, 인원수로 밀어버리겠다고 하지 않은 게 어디긴 하겠냐만은.
지금 나오는 꼴을 보니, 미리 대비를 해두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인원으로 밀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누아비를 슬쩍 불렀다.
“지금 도깨비들 활동 좀 시킬 수 있을까?”
“당장이요?”
“곧 싸움 날 것 같다고, 한 번만 좀 꼬드겨 봐. 쟤네 조짐이 이상하네.”
“일단 말은 해보겠습니다.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코코아랑 같이 가봐. 희한하게 걔 말을 좀 듣더라고.”
“코코아비님이 인기가 좋긴 하지요.”
내가 도깨비들에게 부탁한 건 별 게 아니었다.
하던 것들 멈추고, 내게 지급받은 장비들 고스란히 챙겨서 내 쪽으로 붙어줄 것.
그리고 모인 다음에는,
“누가 이렇게 떠드느냐!”
“거인 샛동아비 등장이요!”
“여기 주걱턱 군단도 있다!”
“언놈부터 죽고 싶으냐!”
‘이미지 복제’와 ‘이미지 확대’를 이용해 허세를 좀 떨어줄 것.
순식간에 내 뒤편으로 어마어마한 수의 도깨비들이 등장했다.
개중엔 내 모습을 흉내 낸 녀석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칼 자이드나 그로니얀을 흉내 낸 녀석들도 있었다.
속임수가 90%긴 하지만, 확실히 수백에 달하는 거인들이 산 중턱에 솟아나 있으니 제법 느낌이 살긴 했다.
그리고 적들 또한 확실히 이에 영향을 받은 듯했고.
-크, 크흠······ 괘, 괜히 너 하나 잡는데 이곳의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릴 필요는 없는 법! 제안을 하나 하겠다! 라미레스를 걸고 소수의 인원으로 대결을 벌이는 게 어떠하냐? 10대 10! 승수가 많은 진영이 쟁탈전의 승리가자 되는 것이다!
흐음. 역시나.
대규모 전면전까진 아니나,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열 명을 뽑아오라는 것.
현재 우리는 셋이었다.
나, 레오, 키리코.
얀을 포함시키고, 코미어를 설득한다 해도 다섯이었다.
그 외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같은 편이 되어줄 전투요원이 없었다.
하카가 있긴 했지만, 이미 별도의 지령을 내려놓은 상태라 따로 전투에까지 동원하긴 어려웠다.
‘어디서 다섯을 더······.’
그렇게 골머리를 썩고 있을 즈음,
‘어? 잠깐만······.’
문득 묘안 하나가 떠올랐다.
‘뭐야,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었잖아?’
외려 조건만 잘 충족시킨다면······ 여러모로 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오케이.”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장 아래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마이크를 쥔 녀석이었다.
-확답이 없으면 그런 걸로 알고 시간을 고지하겠다! 그때까지 준비를 마치고, 출전명부를 제시······ 으헉!
녀석은 난데없이 돌진해온 나를 보자마자, 놀라 뒤집어졌다.
“워워, 진정하라고.”
이어 나는 혼비백산한 녀석에게서 마이크를 빼앗아 들었다.
-아아, 마이크 바꿨습니다. 별 건 아니고, 우리 쪽에서도 제안을 좀 할까 해서.
그러자 적 진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
심지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 무기를 쥔 자도 몇 있었다.
다만,
“그만.”
그로니얀이 이를 제지했다.
녀석은 나를 보며 계속하라며 고개를 까딱했다.
-거기는 10명으로 해. 우린 넷만 출전할 테니까. 그 대신, 방식을 좀 바꾸자고. 리그전 말고, 연토전(聯討戰)으로. 즉, 이긴 놈이 계속해서 싸우는 거야. 그러니까 승수를 챙기는 게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