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라미레스 쟁탈전(10)
***
돌아와서 보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이는 처음엔 별 것도 아닌, 그냥 시답잖은 것인 줄만 알았는데, 기이하게도 되뇌면 되뇔수록 ‘어······? 이게 이렇게까지 복잡한 일이었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유형의 문제였다.
나는 문제의 시발점이 된 인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첫 번째 타자는 내가 나간다.”
“······.”
키리코는 나의 무응답을 명백한 부정으로 받아들였던지,
“분명히 말했다. 양보 못해.”
다시 한 번 윽박지르듯 내게 선언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굳이 네가 첫 번째로 나가야 하는 이유는?”
“잔반을 처리할 생각은 없으니까.”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먼저 숟가락 드는 게 아니면, 죄다 먹다 남은 게 되냐? 손 한 번 안 댄 반찬도?”
“그런 건 모르겠고, 여하튼 난 말했다.”
“······.”
순서.
새롭게 나타난 문제는 바로 순서였다.
누가 먼저 출전할 것인가.
본래 이를 시답잖은 것으로 생각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미 각자가 상대해야 할 적들은 모두 정해져 있었으니까.
꽤 힘들긴 하겠지만, 일단 얀이 최대한 떨거지(?) 여섯을 처리한다. 다음으로 복수도 할 겸 레오가 지무스를 맡고, 이제 남은 셋을 나와 키리코가 잘 분담해서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순서야 뭐, 저들이 나오는 것에 맞추면 되니까.
간단하잖아.
큰 틀에서는 키리코 또한 이에 동의했다.
다만 문제는,
“칼 자이드와 붙겠다. 방해하지 마.”
“첫 번째로 하겠다며.”
“그러니까 첫 번째로 칼 자이드와 붙겠다고.”
“하······.”
이 녀석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운다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자고. 너야 뭐 첫 번째로 나간다고 쳐. 그럼 상대방은? 네 생각엔 저기서 누가 첫 번째로 나올 것 같냐?”
“칼 자이드.”
“허허······ 저기 죄송한데 칼 자이드는요, 저쪽의 대장격인 인물이거든요? 네가 이런 대결을 많이 안 해봐서 잘 모르나본데······ 원래 좀 약한 애들끼리 먼저 붙는 거라고, 아니, 상식적으로 이벤트 매치보다 타이틀전을 먼저 하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
그러자 한다는 말이,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아주 가관이었다.
그냥 대화 자체가 안 됐다.
“하······ 근데 어차피 저기서 그냥 다른 녀석을 먼저 내보내면 끝 아닌가? 그땐 뭐, 상대를 바꿔 달라 할 거야? 어쩔 건데?”
나름 반박불가의 논리라고 생각했다.
헌데 녀석은 피식 웃더니,
“간단한 걸 묻는군. 녀석에게 첫 순서로 나오라고 하겠다.”
정말 간단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니, 뭔 자신감이야.
“네가 부르면 나오냐?”
“기다려 보라고.”
그러곤 대뜸 산 아래로 달려가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칼 자이드! 나와라 칼 자이드! 나와 한 판 붙자!”
키리코의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허······ 저 망할 놈이.”
이에 놀란 나는 얼른 녀석을 뒤쫓아 내려갔다.
물론 칼 자이드가 키리코의 부름에 응답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내가 염려했던 건, 키리코를 상대로 다른 녀석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얀의 상대가 되어야할 녀석들이 말이다.
‘잘못하면 다 꼬이겠네······.’
키리코의 말마따나, 녀석이 칼 자이드를 상대하는 건 사실 그리 나쁜 매치업이 아니었다. 내 부담도 꽤 덜어지는데다, 무엇보다도 레오 모험단의 격을 드높이기 위해 그만한 상대가 없으니까.
라이벌의 지위를 고수하려는 입장에서, 레오 모험단의 위상은 내게도 무척이나 중요한 사항이었다. 녀석들의 입지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덩달아 나의 존재감도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이벌의 격이 곧 나의 격이 되는 이치랄까.
문제는,
‘돌겠네, 저 약해빠진 놈이······.’
칼 자이드와 붙기 전에 키리코가 먼저 각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와의 전투 중에 각성을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더 쉽고, 빠르게 할 수 있을지도.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이는 도박에 가까웠다.
이유야 간단하다. 칼 자이드는 원작에서 녀석을 각성시켜주는 카포네보다도 한 차원 위의 강자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칼 자이드의 전투방식은 차근차근 데미지를 주는 식의, ‘쉬이 각성할 수 있도록 단계별로 위기를 제공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려 강력한 한두 방으로 시작하자마자 끝내는 경향이 강했기에, 미처 각성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경기가 끝날 위험도 있었다.
이는 곧, 실은 키리코야말로 가장 섬세하게 대진표 설계가 들어가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얀이나 레오가 만나야 할 상대를 피하는 동시에, 각성의 재료로 삼아야 할 상대와 각성한 후의 상대까지 고려해야 했으니.
하여,
“이 자식아 멈춰! 멈추라고!”
나도 모르게 급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내가 막 키리코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때마침,
저벅저벅-.
걸어 나온 녀석을 보곤, 숨이 탁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저, 정말 나왔다고?’
칼 자이드였다. 황당하게도, 녀석이 키리코의 부름에 응답을 했던 것이다.
낭패였다.
‘하······ 씨.’
물론 이기면 된다. 각성해서 이기기만 하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후훗, 이거 보라고. 바로 나왔잖아. 물러나 있어 주걱턱.”
도통 이 자신만만의 표정의 빨강머리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지.
아직 시간은 있었다.
나는 재차 차분하게 키리코를 설득했다.
“그러지 말고, 일단 물러나. 이게 지금 네 마음대로 상대를 정하고 할 그런 게······.”
바로 그때,
“싸움을 받아주지.”
칼 자이드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헌데 그 내용이 이상했다.
“주걱턱.”
“······응?”
“분명 네놈이었겠지? 그때 그 로봇. 어떻게 흉내를 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흥미로웠다. 덕분에 현재까지도 나의 ‘성장’에 지장이 있는 상황이지. 슬슬 그때의 일을 마무리 지었으면 하는데.”
칼 자이드는 외려 내게 싸움을 걸어오고 있었다.
오호라?
이에,
“이 자식이······ 싸움을 요청한 건 나야! 내가 먼저다 칼 자이드!”
분노한 키리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칼 자이드의 반응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넌 뭐지?”
“······뭐, 뭐?”
“너 따위에겐 볼 일 없다.”
순간,
“······주, 죽여 버릴 테다!”
키리코의 얼굴이 자기 머리색마냥 시뻘겋게 물들었다.
“풉······.”
이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저거 왜 이렇게 쌤통이냐.
어째 칼 자이드를 칭찬해주고 싶단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어쨌거나 기회였다.
“미안한데, 나는 마지막 주자야. 나와 붙고 싶으면 마지막에 나오라고.”
나는 얼른 칼 자이드에게 내 순서를 주지시켰다.
그러자,
“······역시 그렇군. 혹시나 싶어 나왔던 것뿐이다. 마지막이라······ 좋다, 기억해두고 있지.”
칼 자이드는 그 말과 함께 칼 같이 돌아섰다.
키리코에겐 정말이지 눈길 하나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저 빌어먹을 자식이!”
키리코는 분통을 터뜨렸지만, 발을 동동 구르는 것 외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상대가 상대를 안 해준다는데 지가 어쩔 거냐고. 뒤에서 총알을 박을 것도 아니고.
나는 한껏 웃음을 참은 채,
“자자, 일단 다시 올라가자고.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저 녀석을 상대하고 싶으면, 순서를 잘 맞춰야지.”
새로운 녀석이 튀어나오기 전에 얼른 키리코를 잡아끌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첫 상대부터 깨부수고 올라가겠다. 언젠가는 칼 자이드가 나오겠지.”
“조용히 하시고요, 일단 가서 애들이랑 상의를 좀 해보자고.”
그러곤 나는 적진을 향해 외쳤다.
“대전은 앞으로 30분 후다! 금방 올 테니 기다리라고!”
*
잠시 후.
갖은 설득과 회유, 은근한 공갈 끝에 내가 원하던 대답이 나왔다.
“그, 그럼 제가 먼저······ 나가볼게요.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후······.”
대답이 나오는 순간, 어째선지 감개가 무량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먼저 싸우겠다는 놈 만류하고, 뒤에 하겠다는 놈 쪼아대고······ 이 당연한 결정이 나오기까지 이렇게나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마침내 얀이 첫 번째 순서로 정해졌다.
돌아 돌아오긴 했지만, 어쨌거나 첫 단추는 꿰었다.
“너도 실은 아버지와 한 판 붙고 싶었을 거 아냐. 그런 심정을 억누르고 형편에 맞게 출전하는 거······ 그래, 그게 진짜 모두를 위한 마음가짐이지. 좋아.”
“아, 아버지요? 아니, 전혀 그런 건 아니······.”
“됐고, 지금부터가 중요해. 얀, 규칙은 알지? 승자가 계속해서 대전을 이어갈 수 있다는 거.”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누구까지 상대할 거야?”
이에 얀이 약간 주저하며 대답했다.
“누, 누구까지요? 그, 그야······ 힘닿는 데까지······ 일까요?”
나쁘지 않은 답이었다. 아마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할 것이고.
평소의 얀은 굉장한 소심쟁이지만, 전투에 들어간 이후엔 180도 돌변하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아냐, 아니라고. 네겐 최소한의 할당량이 있어.”
“하, 할당량이요?”
“그래, 할당량을 넘기는 건 괜찮아. 다음 차례의 부담을 줄여주니까. 근데 그 전에 끝나서는 안 돼. 다음 사람이 위험해 지거든.”
“위, 위험······.”
“아까 말했잖아, 네가 오래 버텨야, 레오도 버틸 수 있다고.”
레오는 현재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여전히 골골대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도 홀로 동굴에 틀어박힌 채 회복에 전념하고 있었고.
이는 레오가 원체 심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작열하는 여섯 탄환]의 한계 때문이기도 했다.
‘치유’탄은 뭐랄까······ 완전한 치유계 능력이라기보다는 전투보조 쪽 계열이라, 회복력이 그리 크진 않았기 때문이다. 응급처치에 좀 더 가까운 느낌이랄까.
하지만 물론, 레오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고 있진 않았다. 사실 원작에서도 이와 동일한 전개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한 번 된통 당했던 상대에게 온전치 못한 몸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것.
실제 육체나 능력의 힘이 아닌, 의지와 끈기, 정신력으로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이게 이번 에피소드에서 레오가 보이게 될 모습이었으니.
하여, 나는 처음부터 녀석을 완전치유가 아닌 ‘활동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것까지를 목적으로 했었다. 그리고 그건 이미 어느 정도 달성한 상태였다.
레오를 들먹거리니 얀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럼 제가 어디까지 해야······.”
“너도 알겠지만, 지금 저 쪽은 강함의 격이 세 등급으로 딱딱 구분되어 있어. 만만한 이가 여섯, 중급이 둘, 그리고 최강자가 둘. 물론 만만하다고 해서 그게 약한 걸 의미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구분은 그렇게 된다는 거야. 알지?”
“예······.”
“쉽게 생각하면 돼. 네 역할은 약한 여섯을 모두 잡는 거야.”
“여, 여섯 모두를요?”
“그래, 어려울 것 없어. 다 고만고만한 녀석들이니까. 알겠지? 힘닿는 데까지 하는 건 네 선택사항이지만, 여섯 명을 다 잡는 건 필수야. 무조건 다 잡아줘야 돼.”
“여섯을······ 내가 다······.”
“할 수 있어. 아니, 꼭 해야 돼. 주먹 꽉 쥐고. 기합 넣고.”
나는 그러고 녀석의 등을 때렸다.
찰싹-!
얀은 꽤나 복잡해진 얼굴로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미덥지 못한 모습이긴 했으나, 아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약한 녀석이 아니니까.
나는 이어, 키리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너는 레오 다음이야. 레오가 지무스를 상대하고 나면 안 그래도 없던 힘이 완전히 다 빠질 테니까.”
“순서는 중요치 않다. 상대가 중요할 뿐이지. 내 상대는 칼 자이드다.”
“칼 자이드만이 아니라, 더 해야 돼. 너는 일단 겔롭이라는 사이보그부터 잡아야 돼. 녀석을 먼저 잡아야만 아마 칼 자이드를 상대할 수 있을 거다.”
“그 어벙하게 서 있던 기계인간을 말하는 모양이군. 좋아, 그 정도는 문제될 게 없지.”
“······좋아.”
물론 나는 내가 직접 칼 자이드를 상대하는 것이, 분량과 임팩트 면에서 무조건적으로 이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것이 독자들이 기대하는 바라는 것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키리코에게 이를 양보할 생각을 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간단하다. 최대한으로 승리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이미 그로니얀이 팀을 모은 시점부터 원작에서의 쟁탈전과는 구도와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이 대결의 승자가 누가 될 지 전혀 정해진 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본래 이와 같은 전개에서 대부분은 주인공이 속한 팀이 이기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일단 이 쟁탈전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레오 일행이 아니다. 바로 나지.
같은 팀에 속해 있긴 하나, 여기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굳이 팀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지 않더라도, 주인공 일행은 본인들의 상대를 이기는 것만으로도 원작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각성하고, 능력 개발하고, 동료 얻고.
즉, 무조건적으로 승리해야 마땅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딱히 잃을 게 없으니.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이겨야 했다. 모두가 져도, 나만은 이겨야 했다.
최종 승패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바로 나니까.
그러나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레오라면 절대적으로 지지 않겠지만, 나는 다르다. 내게 주인공 보정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까.
순수하게 실력으로 이겨내야 했다.
고로, 승리를 위해 모든 수를 다 써야 한다는 얘기였다.
대전 상대를 맞추는 것도, 이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모두 다 이것의 일환이었다.
분량이고 임팩트고 간에, 일단은 이기고 봐야 했으니까. 이기지 않으면 모든 게 다 허사로 돌아갈 테니.
그즈음,
-시간 됐다, 이 자식들아! 감춰둔 라미레스와 함께 얼른 첫 번째 출전자를 내보내라! 당장 나오지 않으면 패배한 걸로 간주하겠다!
적 진영에서 마이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출전할 시간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얀을 붙잡고 얘기했다.
“얀, 가기 전에 하나만 더.”
“넵?”
“유령 쓸 거지?”
“옙? 아, 예······ 아마도.”
“하나만 기억해. 합체.”
“네? 합체요?”
시작이 가장 중요했다. 이 녀석이 ‘킹’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래서 여섯을 감당하지 못하면, 처음부터 비틀리고 말 테니까.
“그래, 합체. 나는 다 말해줬어. 그 이상은 알아서 풀어. 그럼 가.”
“······.”
이어 어리둥절한 표정의 얀과 함께, 나는 결전의 장소로 향했다.
*
얀은 처음부터 고전했다.
“이것도 한 번 막아봐라, 애송이.”
“······피하면 그만이지요.”
타핫-!
아이작 웨일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위태로웠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좋아!’
이를 보는 나의 입가는 흐뭇한 미소로 채워졌다.
상황은 아주 이상적이었다. 내가 딱 바라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적절한 위기, 고조되는 긴장감, 깜짝깜짝 터져 나오는 임기응변.
그리고 매순간 발전하는 듯한 얀의 움직임.
딱, 각성을 위해 필요한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어!? 저 녀석······ 벌써부터 저걸 쓴다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신기술을 사용하기까지.
아이작의 ‘일격필살’을 피하지 못할 것 같자, 위기에 처한 얀이 행한 건 다름 아닌 ‘위치 바꾸기’였다.
유령들 중 하나와 본인의 현재 위치를 바꾸는 것.
내가 기억하기로 이는 한참 뒤에나 사용하는 스킬이었다. 분명 킹스로드를 넘어 미들랜드에 상륙한 직후 새로 개발한 게 있다면서 선보였던 것 같은데.
하여, 실제로 나도 아직 써볼 생각조차 못해본 기술이었다.
‘개, 개꿀······.’
아이작 웨일스는 공격이 쉽게도 파훼 당하자, 금방 힘을 잃는 모습이었다. 하나의 대상을 공격하는데 특화된 나머지 저렇듯 다수의 유령을 동원하는, 심지어 위치마저도 바꿔버리는 얀을 상대하기가 벅찼던 모양이다.
“크, 크윽······ 정정당당하게 1대1로 붙자!”
“유령도 제 능력의 일부입니다만?”
그리고 끝내,
“끄, 끄윽! 자, 잠깐, 잠깐만······!”
“쉬시죠.”
승부가 났다.
······.
“헉, 헉······.”
상황이 아주 괜찮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음에 대기 중인 녀석을 살폈다.
큰거북이 모험단의 대장거북이.
이 또한 마음에 들었다.
녀석은 특히나 방어에 특화된 능력자가 아닌가.
생각보다 금방 킹을 뽑아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저 녀석의 방어구를 깨부수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할 테니.
“헉, 헉······.”
물론 이미 꽤 지친 듯 보이긴 했다. 호흡소리가 이 정도까지나 들려올 정도였으니.
하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지지 마라.’
그즈음,
-크, 크흠! 운도 좋군요. 1차전은 저기 저 왜소한 꼬맹이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마이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얀을 쉬게 두려 하지 않으려는 듯, 잽싼 진행이었다.
-하지만 과연 2차전에도 운이 따라 줄까요? 다음 차례는 큰거북이 모험단의 단장, 대장거북이의 차례······
그때였다.
“다음 차례는 나다.”
누군가가 난데없이 얀의 앞으로 난입했다.
그리고 그 순간,
······.
장내가 얼어붙었다.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난 장대한 체구의 거한.
다름 아닌, 그로니얀이었다.
“······뭐?”
녀석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뒤틀렸다. 갑작스레 모든 게 다.
그렇게 모두가 경악에 빠져 있을 즈음,
“꽤 하는구나, 얀.”
그로니얀이 얀의 앞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 마냥 평온한 모습이었다.
얀은 완전히 얼어붙은 듯, 가만 그를 쳐다만 볼뿐이었다.
그로니얀은 그런 얀을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주위를 훑기 시작했다.
이어,
“아아, 거기 있었군.”
녀석의 고개가 내게서 멈췄다.
두 눈이 마치 용암 마냥 끓어오르고 있었다.
“애 교육시키는 데까진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다. 그러니······.”
그와 동시에, 그 거대한 몸에서 짐승과도 같은 살기가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목이라도 씻어 놓고 기다리도록 해라. 다음이 바로 네 차례니까 말이다, 주걱턱.”
“······.”
예상과는 달리, 출전시기가 굉장히 앞당겨질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