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라미레스 쟁탈전(11)
***
글쎄.
나는 눈앞에 펼쳐진 치열한 ‘부자싸움’의 현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이 같은 상황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어느 정도는······ 그래,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이니까.
소년만화에서 이 같은 소재는 웬만해선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얀의 서사에, 그 성장 배경에 짤막하게나마 아버지의 존재가 섞여 있질 않았던가.
하여, 언젠가는 분명 어떤 형태로든 사건이 얽힐 거라 짐작은 했었다.
다만,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이건 뭐랄까······ 이상했다. 전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일단 두 사람 간의 힘의 격차가 엄청나기도 한데다, 관계를 긴장시킬 만한 별도의 사건이 발생했던 것도 아니다.
이는 곧, 둘의 전투를 통해 어떠한 감정의 고조도, 별다른 긴장감도 이끌어내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더욱이 그로니얀이 레오 모험단을 대놓고 적으로 규정했다고 보기도 애매하지 않은가.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나였으니.
하여, 굳이 얀을 상대하겠답시고 그로니얀이 초장부터 난입을 한다는 게······ 뭔가 흐름상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현재 적 팀의 최종보스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즉, 암묵적으로는 나와의 ‘최종결전’이 약속된 인물이라는 것.
헌데 녀석이 대뜸 튀어나와 나를 지목함으로써, 나 또한 대전이 앞당겨지게 되었다.
과연 독자들이 이 같은 흐름을 납득할까?
이뿐만이 아니었다.
‘왜······ 아무도 지금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거지?’
주변의 반응 또한 기이했다.
누구하나 말리는 이가 없었고, 하다못해 의문을 가지는 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웬만하면 ‘암살 총회장께서 나서실 만한 상대는 아닌 듯합니다’ 라든가, 혹은 ‘쉬고 계시지요, 잔챙이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등의 말들이 좀 나와 줘야 하지 않나? 얀이 아들이라는 걸 저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는 설정도 아닐 텐데.
어떻게 ‘최종보스가 시작부터 설쳐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가 없을 수가 있을까.
암만 생각해도 도통 답이 나오질 않았다.
하여, 나는 칼 자이드 쪽을 쳐다봤다.
녀석이라면 그래도 좀 반응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제아무리 그로니얀이라 할지라도, 칼 자이드까지 무시한 채 행동할 순 없을 테니까.
그러고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
나는 어쩐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칼 자이드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딱히 불쾌한 반응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말없이 보기만.
웃기게도, 나는 순간 그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반응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돌아봤더니, 보자마자 반응이 없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꼴이랄까. 그렇기에 자연히 충돌한 두 의식의 부조화에 잠시간 멍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하, 멍청하긴······.’
나는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칼 자이드로선 별 반응이 없는 게 당연했다. 그에게 있어 그로니얀은 보스가 아니었으니까. 본인의 ‘위’가 아니었으니까.
그게 실제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칼 자이드란 캐릭터 자체가 그랬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위에 두지 않는 인간.
즉, 그냥 자신보다 못한 녀석이 먼저 전투를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먼저 나선 게 그로니얀이 되었든, 혹은 지무스나 겔롭이 되었든······ 아무렴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본인 차례가 아니었으니까.
이를 깨닫자마자, 다른 이들의 반응 또한 이해가 되었다.
아주 간단했다. 그들 또한 그로니얀을 최종보스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로니얀이 먼저 칼 자이드에게 화친을 제안했다고 하니, 아마 그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하, 하하······.”
그제야 알았다. 여기 모인 이들 중, 오직 나 혼자만이 그로니얀을 저들의 대장이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물론 이는 나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내겐 그가 가장 강력한 상대가 맞으니까.
이미 전부터 약점을 알고 있던 칼 자이드와는 달리, 본 적도 없고, 고유능력도 모르고, 그 한계조차 모르는······ 난데없이 등장한 강력한 적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내,
‘핑계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생각이 짧을 수가 있을까.
작가의 입장에선 나보다 레오나 키리코 쪽을 부각시키려 하는 게 당연한 일이고, 나와 그로니얀의 대전 대신, ‘진짜 보스’와 주인공 일행의 싸움을 뒤로 미루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거늘.
내가 작가였어도 이런 식으로 전개를 펼치려 했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 내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고 해서, 당연히 그게 그대로 갈 거라고 생각했다니······ 그냥 어처구니가 없었다.
‘안일했어.’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되었다. 계획은 변경하면 그만이니.
나는 다시금 전장으로 눈을 돌렸다.
얀은 생각보다는 오래 버텼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더 보여줄 게 없느냐?”
“······헉, 헉.”
“그럼 이만 하자꾸나.”
“헉······ 헉헉.”
곧이어,
“일섬(一閃)!”
그로니얀의 일격에 얀이 소환한 유령 여섯의 머리가 동시에 터지면서, 전투는 싱겁게 종료되었다.
나는 키리코에게 업혀 나가는 얀을 잠시간 바라봤다.
얀은 끝내 킹을 소환해내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각성이란 건, 간신히 극복 가능한 위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계속해서 한계를 뛰어넘는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되어야만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저만한 격차의 상대가 이를 허용할 리가 없으니.
그나마 웨일스를 상대로 또 다른 기술을 개발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곧이어,
“이제······ 진짜가 등장할 시간인가?”
녀석이 나를 천천히 돌아봤다.
그뿐이었다. 따로 뭔가를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나를 정면으로 마주한 것에 불과했다.
헌데 그 순간, 나는 움찔하고야 말았다.
그야말로 야수 같은 맹렬한 눈빛이었다.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거 아닌가?”
물론, 순순히 밀리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리석은 질문이군.”
“그나저나 안 쉬어도 되겠어? 좀 힘들어 하는 것 같던데.”
“훗, 아이 재롱이나 감상한 정도이거늘. 피곤할 게 무에 있겠느냐.”
“무리하지 말라고. 나이도 드신 양반이.”
“호오, 동년배가 아니었나?”
“······선 넘네.”
그 무렵,
-네, 이로서 2차전은 우리 암살협회 총회장이신 그로니얀 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뭐, 당연히 예상되었던 결과였고요, 그럼 저쪽의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요? 역시······ 주걱턱 인가요?
2차전의 끝을 알리는 마이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얀 때와는 달리, 다소 느릿느릿한 진행이었다.
“물어 뭐해. 빨리 빨리 하자고.”
나는 한 발 앞으로 나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약간 빛바랜 메인이벤트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이들 생각은 해줘야지.
그때였다.
“잠깐.”
내 걸음을 멈추게 하는 음성이 하나 들려왔다.
진원지는 적의 진영이었다.
이어 그곳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이는,
“응?”
다름 아닌 칼 자이드였다.
“그만하면 된 것 같은데. 이제 내가 하도록 하지.”
녀석은 그렇게 말하곤 그대로 내 앞까지 걸어왔는데,
“주걱턱 네 놈은 내가 상대해주마.”
정말이지 그로니얀은 안중에도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그야말로 안하무인 그 자체랄까.
“허······.”
실제로 그 같은 행동에 나보다도 그로니얀이 더욱 황당해 하는 눈치였다.
“지금 뭐하는 짓이지?”
“보면 모르나? 말까지 해준 것 같은데.”
“······말했으니, 들어라?”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호오.
나는 난데없이 일어난 둘의 대립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이건 확실히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칼 자이드의 행동 하나하나가 내 존재감을 그대로 격상시켜 주는 격이었으니.
이러니 주관이 뚜렷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놓으면 작가가 고생할 수밖에 없다.
톡톡 튀거든.
흐음.
나는 이를 지켜보다 씩 웃었다.
그러니 이제 나 같은 놈이 필요한 것이다. 저런 녀석의 기행을 잡아줄 또 다른 캐릭터가.
‘하여간에 작가도 내게 고마워 할 줄 알아야 할 텐데······.’
괜히 뒤통수 칠 생각만 하니 원.
그즈음,
“기다려.”
나는 칼 자이드를 보며 점잖이 타일렀다.
“차례는 지켜야지?”
“의아한 발언이군. 네 상대는 내가 아니었나? 그리고 저 자는 이미 하나를 상대한 다음이다. 어리석게 격이 맞지 않는 상대를 고르긴 했지만.”
“아들이라고 하잖아. 그래서 잠깐 교육 좀 시키겠다고 한 거고. 본 목적은 처음부터 나였던 거지.”
“그건 저 자의 사정이지.”
“욕심도 많네. 그리고 어차피 이기는 사람이 계속이야. 간단하잖아?”
그러고 씩 웃어주자,
“······자신만만하군.”
잠시간 침묵하던 칼 자이드가 이내 한 발 물러났다.
“좋다. 다만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말도록.”
“몸이나 풀고 있으라고. 어차피 누가 먼저 얻어 터지냐 차이니까.”
그러고 칼 자이드가 진영으로 돌아가자마자,
“무척 재미있는 대화였다.”
그로니얀이 슬쩍 앞으로 나왔다.
“말없이 잘 듣고 있던데? 내 말에 동의했던 거 아냐?”
“그 유명한 회색 사자가 저와 같이 힘만 센 아이와 같은 자였을 줄은 몰랐지. 제법 잘 달래는 것 같기에 별 말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곤 그는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봤는데, 전혀 흥분한 기색이 아니었다. 외려 전투를 앞두고 보다 차분해진 기색이었다.
‘약간 아쉽네.’
역시나 칼 자이드보다는 여러모로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럼 시작해볼까?”
곧이어,
-그럼 3회전······ 주걱턱과 그로니얀 총회장님의 대결이 시작되겠습니다!
아주 자연스레 전투가 시작되었다.
나는 섣불리 고유능력을 고르는 대신, 그로니얀을 면밀히 관찰했다.
능력자들 간의 대결에선 기본적으로 상성이 중요한 법이니.
헌데 녀석 또한 제자리에서 가만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곤,
“그렇게 보고만 있을 셈인가?”
의아한 듯 내게 물었다.
“지는.”
“선수를 양보하지.”
“마찬가지야. 들어와 봐.”
아직 녀석은 어떠한 능력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의 공격들은 죄다 수련으로 습득한 검술 및 암살기술들.
일단은 녀석의 본 고유능력을 끌어내는 게 순서일 것이다.
하여 이를 목적으로 도발하니,
“그래? 그럼······.”
곧이어 녀석이 자세를 잡았다.
나는 긴장한 채 녀석을 주시했다.
이제 온다.
그리고 그 순간,
“사양 않지.”
나는 경악했다.
쉭-.
“흐읍······!”
나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어올려, 간신히 ‘뭔가’를 막아냈다.
퍼엉-.
나는 뒤로 날아가면서도 방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발이었나? 손?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로니얀이 희끗하며 사라짐과 동시에, 뭔가가 내 명치부근을 강타하려 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큿······ 흡!”
어느새 다가온 녀석이 내 옆구리를 찍으려 해 이를 막으니, 동시에 반대 쪽 옆구리를 가격당하고 말았다.
이어,
“커헉······!”
단 한순간이었지만,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눈을 한 번 깜박이자 내 몸이 반으로 접혀 있었고, 다시 한 번 깜박이자 수십 미터를 날아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주먹에 맞았나? 발에 채였나? 무기에 의한 것인가?
정신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곤, 날아가려던 의식을 간신히 붙잡는 것뿐이었다.
아직 뿌옇게 흐려진 시야는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으나, 그즈음엔 얼추 상황파악이 가능했다.
단 한 호흡에, 기절할 뻔 했다.
“후읍······ 후······ 후읍······.”
그때부터 몸이 덜덜 떨려왔다.
예상 밖? 아니, 그냥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이건······ 이건 말이 안됐다.
세 살 배기 아이와 어른의 격차가 이러할까.
모험가 자격시험 당시 칼 자이드를 맞닥뜨렸을 때보다도 더한 벽이 느껴졌다.
“하, 하하······.”
그즈음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길 수 없다. 절대로.
그즈음,
“호오······ 역시 단단하긴 하군.”
그로니얀이 저 멀리서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떨려오는 몸은 내 통제를 잘 따라주지 않았다.
이빨들이 딱딱 부딪혔다.
“······실력을 숨겼나?”
“내가? 전혀. 애초에 보여줄 만한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으니.”
“······.”
그제야 나는 어째서 그로니얀의 고유능력이 여태 나오지 않고 있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고유능력이 곧 전투력’인 캐릭터가 아니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사실상 전투에 고유능력을 활용하지 않는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한다.
고유능력이 없다는 게 아니다. 전투상황에 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지.
소위 ‘능력 빨’을 타지 않는 녀석들이라는 것.
어찌 보면, 이 같은 캐럭터의 시작이 바로 칼 자이드다.
녀석의 고유능력은 실제 전투에 있어 따로 활용되는 유형의 것이 아니다. 또 녀석에겐 특별한 공격기도 없다. 그저 빠르게 때려 부수고, 베는 게 전부이지.
하지만 강하다는 것.
그리고 칠왕의 대부분이 이와 같았다.
그들의 고유능력 중엔 하나의 대상을 제압하는 유형이 거의 없었다. 대개 ‘세계의 법칙’에 관여하거나 이를 변형시키는 쪽에 가까웠지.
능력의 ‘규격’ 자체가 다르다고나 할까.
즉, 녀석들이 하나의 대상을 직접 타격하기 위해 고유능력을 쓰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고유능력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와의 대적에서도 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설정된 캐릭터 자체의 강함이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로니얀은 무려 칠왕과 흡사한 캐릭터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고유능력 없이도 강하다는 것.
아니······ 그냥 말도 안 되게 강하다는 것.
그 무렵,
“후······.”
어째선지 나도 모르게 입에서 한숨이 푹 나왔다.
안일했다, 안일했어.
이 에피소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안일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어째서 은연중, ‘당연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처음 보는 캐릭터를. 그것도 고유능력도 모르면서. 약해진 주제에 말이다.
게다가 애당초 이 녀석은 설정 자체가 나를 없애기 위한 ‘자객’으로 기획된 녀석이었다.
공공연히 암살자임을 드러내며 나를 노렸던 데다, 나와 싸웠던 이들을 고스란히 휘하로 끌어들이며 내 서사까지 잡아먹으려 든 녀석이질 않나.
심지어 작가가 그걸 숨긴 적도 없다. 하나하나 다 보여줬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이를 가볍게만 여겼을까.
고작해야 초반부 빌런 집단인 ‘검은 그림자’가 그 등장배경이라서?’
아니면 그냥 기존에 없던 캐릭터라서?
앞으로의 서사가 준비되지 않은, 결국엔 일회용으로 제작된 휘발성 캐릭터라고 생각해서?
“하······.”
웃기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말 멍청한 생각이기도 했다.
앞으로의 서사가 준비되지 않은 일회용 휘발성 캐릭터.
그건 다름 아닌, 나를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나는 어느새 내 앞에 선 그로니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왠지 실실 웃음이 나왔다.
몇 대 맞지도 않았는데, 이리도 큰 타격을 입게 되다니. 절망이라는 이름의 타격을.
그로니얀은 나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의미심장한 미소군.”
“그래 보여?”
“익숙한 표정이지.”
“익숙하다?”
“죽음을 예감한 녀석들이 대개 그렇게들 웃거든.”
“······킥.”
나는 부정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시시하군. 좀 하는 녀석인가 했더니.”
“······맘대로 생각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포기한 건 아니었다.
“후우······.”
나는 가만 머리를 굴려봤다. 어떤 고유능력을 흉내 낸다 해도 필패였다.
칼 자이드 때와도 달랐다. 심지어 이 녀석은 약점도 없었으니.
‘약점이라······.’
때마침 공중에 떠 있던 라미레스가 슬쩍 눈에 들어왔다.
첫 대전의 시작과 동시에, 양 진영의 정중앙에 띄워놓은 것이었다.
저걸 활용해 약점을 캐내본다?
글쎄. 가능성이 희박한 도박이었다.
게다가 그걸 알아낸다고 해서 이길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내게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잠깐, 타임.”
“음?”
나는 손을 들어 그로니얀을 제지했다.
열심히 짜둔 등장연출이 흐트러뜨려지고, 미리 계획해둔 것들이 죄다 어긋나겠지만 별 수 있나. 일단 살고 봐야지.
“인정할게. 강하네 당신.”
“생각보다 인정이 빠른 편이군. 그래도 조금 더 저항은 할 줄 알았는데.”
“저항하지 않겠다고는 안했어.”
“호오······ 보여줄 게 있나 보지?”
“왜 이래,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어쨌거나 놀랍네, 이걸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건 거짓말이었다. 꺼내게 될 줄은 알았다.
다만 ‘녀석’을 활용해도 이기지 못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숨겨둔 비장의 무기가 있거든. 잠시만 기다려줄래?”
나는 그러곤,
철커덩-.
차고 있던 양 팔의 에너지 포를 해체했다.
윗옷도 벗었다.
그로니얀은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뭐 하는 거지?”
“핵이 가슴 쪽에 있다 보니, 혹시라도 녹을 위험이 있다고 해서. 이게 잘 안 고쳐져서 시간이 걸렸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뭐, 바지가 안 녹는 게 어디야.”
“대체 무슨 소릴······.”
나는 그러고 준비를 하면서도, 속으론 절절이 다짐했다.
최선을 다하자. 다시는 안일해지지 말자.
절대 지지 말자. 꼭 이기자.
꼭 살아남자.
“후······.”
이윽고, 나는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이 세계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이능장갑기병.
코미어가 인정한, 만들어선 안 됐을 ‘규격 외의 괴물’의 이름을.
“소환, 루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