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12
112화 라미레스 쟁탈전(13)
***
“괴물······ 이시군요.”
보는 내내 입이 잘 다물어지질 않았다.
근래 이렇게까지 놀란 적이 있었던가.
하카는 조심스레 턱관절을 풀었다. 실제로 뻐근함이 들 정도였다.
우드득.
다만, 그제까지도 두방망이질 치고 있던 심장은 당최 진정시킬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는 공포에 의한 것일까, 감격에 의한 것일까.
‘감당 못할 괴물의 동료라······.’
어쩌면 둘 다 일지도.
표현할 말이 적당치가 않았다.
뭐랄까, 감히 ‘인간이라 칭하기 힘든 존재들’의 전투라고나 할까.
힘의 단위, 혹은 규격 자체가 아예 다른 느낌이었다.
혹여나 휘말릴까 싶어 물러나기 시작한 게, 어언 수백 걸음이 넘었다. 그럼에도 전장 부근에서 잇따른 모래폭풍이 여태 불어오고 있을 정도였다. 가까이 있던 몇몇은 실제로 휩쓸려 날아가기도 했고.
특히나 마지막 그 두 일격······ 그 거대한 힘들의 충돌은 가히 ‘재해’와도 같았다.
휘말렸다면 아마 가루조차 남지 않았을지도.
하카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시금 정면의 전장을 바라봤다.
거기, 피칠갑을 한 듯 새빨간 몸을 한 거인이 하나 있었다.
반쯤 부서진 창을 쥔 채 고요히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은 흡사 전쟁터의 장군을 연상케 했다. 단신으로 적 진영에 처 들어가 단칼에 적장의 목을 베어버린.
흉흉한 오라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듯했다.
“······오싹하네.”
물론 검은 그림자의 단주도 무력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놀랍다는 표현이 송구스러울 만큼, 그는 어마어마한 강자였다.
하지만 보다 놀라운 건 역시나 주걱턱 씨였다. ‘깡통’을 입은 그가 저만한 힘을 발휘할 줄이야.
느닷없이 빨강 물감을 뒤집어쓰고 나타나긴 했지만, 저건 분명 어젯밤 그가 보여준 그 ‘깡통’이 맞았다. 전투의 보조를 위해 대충 주변 공장에 굴러다니는 것들을 주워 만들었다는.
가끔 그 능력의 끝을 짐작하지 못할 땐 있었지만, 이만한 무력까지 발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여간에 도깨비 같으니라고······.’
하카는 그제야 어째서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그토록 즐거웠는지, 그의 말을 듣는 게 전혀 거북스럽지 않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주걱턱의 모습은 그가 아주 옛적부터 바라던 이상, 바로 그것이었다.
신출귀몰하고 재지 넘치는 도깨비 같은 인간. 심지어 음습한 교활함까지 겸비한 성정까지.
‘후훗, 어쩌면 저······ 당신을 존경하고 있는지도?’
그러고 감탄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문득,
‘······잠깐.’
주걱턱 씨가 맡겨둔 임무가 떠올랐다.
이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지막 충돌이 있은 지 이미 30초가량이 지났다.
그로니얀은 쓰러졌다. 분명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는 건, 지금 당장 결단을 내려야한다는 뜻이었다.
곧바로 ‘그 일’을 시행하느냐, 아니면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느냐.
허나, 결정을 내리기엔 상황이 조금 묘했다.
주걱턱 씨가 말했던 상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의 대결이 꽤나 앞당겨졌다는 것.
주걱턱 씨가 요구했던 정확한 주문은 ‘그로니얀과의 최종전이 끝났을 때 그 일을 시행하라’였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그로니얀과의 전투가 끝나긴 했지만, 과연 이 대결을 최종전이라 부를 수가 있을까.
물론 임팩트 자체는 어마어마했다. 이제까지 본 그 어떤 대결보다도 압도적이었으니.
하지만 ‘순서’가 애매했다. 전체로 따졌을 때, 이제 고작 3라운드를 치른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심지어 그로니얀보다도 더한 괴물이라 여겨지는 칼 자이드와의 대전을 앞둔 상태이기도 하고.
‘최종전이라······.’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니얀을 우선시해야 할까, 아니면 순서일까.
흐음.
잠시 후,
“······어렵게 생각할 것 없겠지.”
하카는 직감을 따르기로 했다.
이번 라미레스 쟁탈전에서 이 이상의 대결은 나올 수 없다.
조금 일찍 시작된 것일 뿐, 저 둘의 대결이 최종전이 맞다.
쟁탈전의 승자는 이번 대결로 이미 가려졌다.
“이게 맞지.”
하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이어,
스스슷-.
하카의 전신이 땅으로 쑥 꺼졌다.
결정을 내렸으면 행동은 빨라야 한다.
주변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든 하카는 은밀하고도 신속히, 라미레스를 향해 접근했다.
*
나와라, 칼 자이드!
“······.”
주걱턱이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며 뚜벅뚜벅 걸어오는 걸 보면서도, 칼 자이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머릿속에서 정돈되지 않는 생각과 ‘낯선 감정’들이 서로 뒤엉키는 바람에,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명확한 사고 판단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움찔-.
오른쪽 발목에서 이따금 일어나고 있던 경련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아킬레스 건 쪽에서.
갑작스런 경련이 시작된 건, 괴상한 강철로봇 속에 들어간 주걱턱이 처음으로 상대에게 반격했을 때부터였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경계해야 할 힘’을 느꼈을 때부터.
칼 자이드는 뒤꿈치에 힘을 주곤 꾹 눌렀다.
경련은 금방 멎었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통제되지 않는 몸의 반응이라니.
이 같은 일은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대체 뭐냐 이건.”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의 연속이었다.
해석할 수 없는 감정들도 그렇고, 멈추지 않는 발목 경련도 그렇고.
그러나 잠시 후, 이를 가만 되뇌던 칼 자이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일련의 현상들을 촉발시킨 하나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기이하고도 낯선 감정이었다.
두려움.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같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엔 없었다.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이 익숙지 않은 낯선 감정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공포였다.
‘내가······ 겁을 먹었다고?’
당혹스러웠다.
녀석에게 과거 한 차례 당한 적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그저 운이 나빴던 것뿐이다. 녀석의 최후공격이 하필이면 자신의 약점에 닿았던 것이니. 방심하지만 않았다면, 코웃음 치며 날려 버렸을 상대였다. 접근하기도 전에 목숨을 취했을 것이다.
다시 만났을 때, 녀석이 제법 강해졌다고는 생각했었다.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긴장을 해야 할 상대라고도 느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밀릴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녀석이 단순한 무력을 넘어선 제법 요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여전히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것?
충분히 감안하고도 남았다. 외려 그 정도의 핸디캡도 없다면 시시한 싸움이 될 뿐이지.
그것이 바로 저 둘의 대결이 시작되기 직전까지의 마음가짐이었다.
아니, 저 괴상한 로봇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엔 변화가 없었다.
그 무렵엔 외려 주걱턱보다도 그로니얀이라는 자에게 훨씬 더 신경이 쏠려 있던 상태였다. 그는 정말이지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엄청난 강자였으니까. 이제껏 겨뤘던 그 모든 상대들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였으니까.
헌데, 주걱턱이 로봇에 올라타면서부터 뭔가가 뒤바뀌었다. 그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졌던 것이다.
칼 자이드는 그때의 순간을 되뇌어봤다.
녀석은 그로니얀의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냈고, 또한 믿기지 않는 속도로 반격까지 감행했다. 그의 공격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 그것에 놀랐다는 건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겁이라니. 그건 감당하지 못할 적을 봤을 때나 드는 감정이 아닌······.
바로 그때,
“······그렇군. 감당이 안 된다라.”
칼 자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외면하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주걱턱의 능력치는 모든 면에서 감당 가능한 존재였다. 공격도, 또 방어도.
단 하나, 그 마지막 일격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래, 그건······ 주걱턱의 창끝에 실려 있던 건 감히 맞서볼 생각조차 들지 않던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거력이었다. 당장 이를 피하기 위한 퇴로부터 떠올렸었으니.
그로니얀의 정면승부를 어리석다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건 분명······ 나도 결코 버티지 못했겠지.’
그로니얀이 산산이 흩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생각이 미친 순간,
움찔-.
진정된 줄 알았던 경련이 재차 시작되었다.
“······어이가 없군.”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일격이었다.
그 마지막 일격에 비단 그로니얀 뿐 아니라, 자신의 자신감 또한 꿰뚫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나만이 홀로 최강이라는 자신감이.
그즈음,
“움직이지 않는데?”
“못 들었나?”
“설마······ 겁을 먹은 건 아니겠지?”
주변에 있던 이들이 자신을 보며 쑥덕거렸다.
물론 그들의 시선이 신경 쓰인 건 아니었다.
그저 이를 부인할 수 없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을 뿐이지.
“······빌어먹을.”
이윽고,
덜커덩-. 덜커덩-.
칼 자이드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새빨간 로봇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왜 아직 그대로 서 있지? 귀가 멀었나? 발이 얼어붙었나?”
“······지친 것 같아 쉴 시간을 주고 있던 것뿐이다.”
“호오, 갑작스레 마음이 넓어진 건가? 아니면······ 설마 겁이라도 먹은 건 아니겠지?”
“······.”
움직이자,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물러나는 것보다 수치스런 일은 없다.
칼 자이드는 애써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건방진······.”
그러곤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 싸움만 반복해서 발전할 수 없는 법이니.
저 녀석만 넘는다면, 자신은 보다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움찔-.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땅에 고정이라도 된 듯,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칼 자이드는 부서져라 이를 꽉 깨물었다.
의지를 바로 세워야 한다. 걸어야 한다.
물러서지 않는 기개를 보여야 한다.
‘나는 사자다······ 포식자다. 내가 뒷걸음질 치는 건 말이 안 되는······’
바로 그때,
“단주님의 원수! 가만두지 않겠다, 주걱턱!”
느닷없는 일이 일어났다.
웬 고함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자신의 앞으로 튀어나왔던 것이다.
“······뭐?”
희한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녀석이었다.
녀석의 두 손엔 큼지막한 무언가가 들려 있었는데,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대경할 수밖에 없었다.
라미레스였다.
정확히는, 라미레스가 부착된 기계.
좀 전까지 하늘에 떠 있던 라미레스가 어찌된 일인지, 녀석의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이다.
곧이어,
“라, 라미레스다!”
“저 녀석 대체 언제!?”
“저거 뭐하는 놈이야!?”
이를 알아본 몇몇이 소리쳤다.
주걱턱 또한 당황한 듯,
“뭐······ 라미레스?”
멍하니 이를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 괴물! 너를 죽일 순 없겠지만······ 이 정도쯤은!”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 벌어졌다.
녀석이 대뜸 주걱턱을 향해 라미레스를 비추곤, 냅다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곧이어,
팟-.
기계가 라미레스에 비친 이미지를 허공 위에 영사했다.
거기 나타난 건, 웬 설명이 한 가득 적힌 텍스트였다.
▶ [흉내쟁이 곡예사]
-설명 : 특정 조건 만족 시, 타인의 능력을 흉내 낼 수 있다
-기본 특징
: 흉내 가능한 능력의 총 개수엔 제한 없음.
: 흉내 대상의 능력을 뛰어넘을 수 없음.
: 한 번에 두 가지 능력 흉내 불가능.
: 흉내쟁이 종료 후, 24시간 내 같은 능력 흉내 불가능.
: 흉내 종료 후, 1시간 내 능력 발동 불가능.
-흉내 조건.
1. 능력을 쓰는 이의 얼굴과 본명을 알고 있어야 한다.
2. 능력의 발현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
3. 능력의 작동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4. 능력의 격에 맞는 신체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흉내 능력 목록
1. 레오 – [재앙을 멸하는 번개]
2. 키리코 – [작열하는 여섯 탄환]
3. 시아나 – [공평을 싫어하는 확률 조정자]
4. 얀 – [유령살수와 함께 춤을]
⦙
18. 나타울비 – [미래를 꾸는 허풍선이]
“주걱턱의······ 능력?”
그건 다름 아닌, 주걱턱의 고유능력에 대한 상세 내용이었다.
희한했다. 숨기고 싶은 게 고작해야 저것이라니.
물론 녀석의 입장에선 이를 두려워 할 수도 있다. 능력에 대한 조건과 한계가 드러나는 순간, 본인을 대비할 방법이 많아지는 건 사실이니. 게다가 녀석의 능력이 생각보다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이 까다롭기도 했고.
다만,
“저, 저기 봐!”
“괴물의 약점이다!”
“고유능력의 한계인가 본데?”
‘바보들 같으니라고.’
그렇다고 저게 지금 당장 가치 있는 정보라 보긴 힘들었다.
아니, 저 따위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약점? 웃기는 소리.
지금 저 주걱턱의 능력을 상세히 파악하게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당장 그 ‘마지막 일격’을 파훼할 수 있는 어떠한 방안도, 공략법도 나와 있지 않았으니.
‘빌어먹을······ 당장 저 녀석에게 통용될 약점은 없는 건가?’
그 순간,
“······허.”
칼 자이드는 하나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주걱턱을 극복하기 위해 라미레스에게 의존하려 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못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
그렇게 칼 자이드가 자괴감에 빠져 들어갈 무렵, 또 하나의 난데없는 일이 발생했다.
위이잉-.
라미레스가 부착된 기계가 갑작스레 허공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곤,
팟-.
팟-.
팟-.
거울에 모습을 비친 이들의 약점을 죄다 허공에 쏴 올렸다.
이어진 건, 대규모의 혼란이었다.
“으, 으아!”
“피해!”
“약점이 노출된다!”
칼 자이드 또한 본능적으로 뒤로 피신했다.
아킬레스 건이 사정없이 욱신거리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칼 자이드는 주걱턱 쪽을 응시했다.
녀석 또한 황급히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분명 라미레스를 부착한 저 기계는 주걱턱 녀석이 준비한 것일 텐데······.
하지만 주걱턱이야말로 라미레스에 의해 가장 먼저 약점이 들춰지질 않았던가.
칼 자이드는 재빨리 온 주변을 살폈다.
‘아까 그 가면······ 어디 있지?’
녀석이 보이진 않았으나, 분명한 건 지금 여기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체를 숨긴 채, 별스런 짓을 획책하고 있는 누군가가.
위이잉-.
그즈음엔 다들 라미레스에게서 멀찍이 물러난 뒤였다.
물론 모습이 비쳐지는 걸 피해 라미레스에게 접근할 수 있을 만한 능력자는 많았다. 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옆의 사람을 경계했기 때문이리라. 함부로 라미레스에 손을 대려 했다간 곧장 공격당할지도 모르니.
어느새 그로니얀 측 진영은 붕괴된 상태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니얀은 쓰러졌고 자신 또한 주춤거린 게 사실이었으니. 지무스와 겔롭이라는 녀석 또한 묘하게 거리를 둔 모습이었다. 이미 새로운 꿍꿍이들이 들어선 듯했다.
······.
그렇게 잠시간 고요한 혼란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때마침,
“뭐야, 다들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어느 경쾌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음성의 주인은 웬 더벅머리 소년이었다.
“레, 레오! 거기로 가면······.”
그리고 이어진 상황에, 칼 자이드는 기어이 당황하고야 말았다.
레오라 불린 더벅머리 꼬마가 회전 중인 라미레스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
······됐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하카를 향해 열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기계 안이라 보이진 않겠지만.
솔직히 칼 자이드에게 다가갈 때만 해도 이판사판의 심정이었다.
만약 하카가 제때 나서주지 않는다면, 내 여정은 이대로 끝날 수밖에 없을 테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하카가 눈치 챌 수 있을 만한 대사한 줄을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최종전은 끝났다, 이제 떨거지 처리만 남은 건가?
만약 이를 내뱉은 다음에도 하카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자고.
헌데 놀랍게도, 하카는 내가 말을 뱉기도 전에 이미 움직이고 있던 상태였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을 만큼 유능한 녀석이었다.
덕분에 아주 자연스럽게 몸을 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심지어 칼 자이드가 순순히 물러나기까지. 생각 외로 트라우마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더할 나위가 없을 만큼 최고의 전개였다.
이윽고,
‘보기 좋네.’
나는 멀찍이 물러난 채로 라미레스를 향해 나아가는 레오를 바라봤다.
나를 비췄을 때 드론이 쏘아낸 건 당연지사 준비해둔 가짜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 이후의 것들은 모두 다 진짜였다.
즉, 지금 저렇게 나오고 있는 레오의 이미지 또한 모두 진실이라는 것이다.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장면.
어릴 적, 커다란 어른에게 맞서 눈이 밤탱이로 부어오른 장면.
처음으로 도둑질을 시도하는 장면.
난데없이 고유능력이 발동되는 바람에 옷이 타고 벌거벗게 된 장면.
번개가 먹히지 않는 피부를 가진 몬스터에게 패배하는 장면.
⦙
레오는 숨기고 싶은 게 많은 녀석이었다.
끊임없이 이미지가 바뀌고 있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하지만 녀석은 그 모든 게 까발려지고 있었음에도, 라미레스를 향한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그저 무심히 한 발 한 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씩 웃음이 나왔다.
그래, 저거지.
저게 소년만화 주인공이지.
라미레스는 대상이 가장 숨기려 하는 것을 비춘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 이를 통해 드러나는 건 대상의 약점이다.
하지만 아주 특수한 경우에, 라미레스는 전혀 반대의 것을 비출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현재 모든 이들의 눈에 들어오는 건 결코 레오의 약점 따위가 아니었다.
작금의 상황이 보여주는 건, 약점이 아니라 외려 녀석의 강인함과 용기였다.
모두가 숨고 피하는 상황에서 홀로 전진하는 것.
그건 오직 특별한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이니.
다시 말해, 저게 바로 주인공의 자질 증명이라는 것이다.
레오의 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실은 라미레스의 존재의의이자, 이번 에피소드가 궁극적으로 내비춰야 할 내용이었다.
잠시 후,
팟-.
팟-.
팟······ 착!
마침내 레오의 손에 회전하던 기계가 잡혔다.
이어,
와지끈!
레오는 기계를 부순 뒤, 라미레스를 그것에서 분리했다.
그러곤 이를 그대로 땅바닥에 내려놓고선 씩 웃었다.
“자, 됐지? 그럼 하던 거 마저 하자고. 누구 차례였지?”
나는 이를 보며 생각했다. 거의 다 됐다.
이제 내가 이 에피소드에서 해야 할 일은 거의 마무리된 셈이었다.
지금부터는 빠져야 할 타이밍이었다.
때마침,
“휘유······ 견고가 깨지고 장갑이 다 박살이 날 줄이야. 게다가 결국 증폭까지 활용하고. 고생했군, 주걱턱.”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선수가 도착했다.
나는 그즈음 곁으로 다가온 코미어를 바라봤다.
녀석은 어째선지 복잡 미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루카스 쪽이겠지만.
“코미어.”
“응?”
“부탁할 일이 하나 있는데.”
코미어는 금방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아······ 그렇지. 수리보수는 당연히 할 생각이야. 솔직히 나도 궁금한 게 많거든. 개발하는 것보다 고치며 얻는 게 더 많을 때가 있으니까. 게다가 네 전투를 보며 사실 꽤나 느낀 점이······.”
“그게 아니고, 음······ 아, 지금 전투장비는 다 챙겨 입은 상태지?”
“뭐? 왜?”
“지금 저거 보이지.”
나는 그러곤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막 레오가 떠난 바로 그 자리였다.
“······라미레스?”
슬슬 마무리를 지을 시간이었다.
“저것 좀 들고 튀어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