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요정의 숲
***
결국 참다 참다 못 참았는지,
“저······ 근데 형님.”
“왜.”
“흠, 저기 이게······ 맞는 건지?”
치누아비가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
나는 잠시간 멈춰선 채, 녀석을 힐끔 바라봤다.
치누아비의 얼굴은 약간의 불안과 숱한 의문으로 가득했다.
“너무 깊숙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무턱대고 따라간다는 게······.”
“여기까지 왔는데 뭘. 그냥 가.”
“지금 길 곳곳에 수많은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수수께끼들도 널려 있고요. 물론 저 자그마한 요정이 익숙한 듯 피해가고는 있으나, 만약 저이를 놓치게 된다면······.”
“안 놓쳐. 그리고 쟤는 나랑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녀석이야. 나쁜 마음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그렇긴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뒤, 나는 녀석을 말없이 슥 훑었다.
그러곤,
“······일단 가, 일단.”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치누아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 가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소란 피우지 말고, 대충 동물구경이나 다니면서 휴식이나 취하라고 말한 당사자가, 말을 꺼낸 지 10분도 채 되기 전에 이런 ‘불길하기 짝이 없는 숲’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게,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겠지.
근데 뭐······ 난들 이렇게 될 줄 알았겠냐고.
솔직히 이즈음엔 나 또한 약간 아차 싶은 심정이었다.
화르르-.
“이크!”
“조심해! 이쪽으로 와! 붙으면 잘 안 꺼지니까!”
“······.”
솔직한 심정으로, 치누아비보다도 내가 더 묻고 싶었다.
아니, 여기 요정의 숲 아니냐고.
요정의 숲이라 하면, 뭔가 산뜻한 바람과 촉촉한 이슬, 신비로운 안개와 밝은 햇살이 따사롭게 우릴 반겨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대체 왜······ 왜 검고 푸른 불길에 숲이 불타고 있냐고.
“얼른 와! 불도 불이지만, 잘못하면 안개에 먹혀!”
“······.”
“지독한 운무네요. 수룡과 화룡을 싸움 붙이면 간혹 이 정도로 부연 안개가 생성되긴 하지요. 암만 봐도 자연적으로 발생한 건 아닌 듯싶은데요?”
치누아비가 다시금 다가와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일단 가.”
물론, 전혀 괜찮지 않았다.
실은 나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으니까.
애당초 나는 이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게 될 거라고나, 난감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냥 요정들 구경이나 좀 하고, 힐링이나 하자는 느낌으로 따라 나선 것이었지.
경계하지 않은 이유야 별 게 없었다. 여긴 요정의 숲이니까. 요괴나 마물의 숲이 아니라.
그래, 요정.
어감부터가 다르지 않나.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늘 곁에 있는 작은 친구 느낌이랄까.
물론 이들 중에서도 사악한 녀석이 있을 수 있다. 난폭하고 진상인 녀석은 어느 무리에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내겐 요정들을 좋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원작에서 이들이 ‘빌런의 조력자’로 나오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중립적인 녀석들 편에 서는 정도?
게다가 비중 있는 역할로 나오는 요정들은 죄다 착한 녀석들이었다.
고로, 애초에 내 머릿속엔 하나의 공식이 딱 박혀 있는 상태였다.
요정들은 다 착하다.
더욱이 내가 무슨 처음 만난 낯선 요정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녀석의 안내를 받는 것 아닌가.
경계를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웬걸, 이런 희한한 광경이 펼쳐질 줄이야.
그즈음,
‘에이, 아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본래 요정들 같이 작고 귀여운 녀석들일수록 노리는 녀석들도 많고, 천적도 많은 법이다. 아마도 이를 방비하기 위해 자구책으로 트랩 따위를 설치해둔 게 아닐까.
무엇보다도, 저 녀석이 나를 꾀어 함정에 빠뜨리는 일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앞장서 우리를 인도하고 있던 요정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이어,
“······가서 생각하자.”
최대한 스스로를 합리화한 채 말없이 걸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저······ 형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조금 전과 바뀐 거라곤 치누아비의 말수가 보다 늘어났다는 것뿐이었는데, 이 또한 긍정적인 전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체된 함정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연적인 불길은 절대 아닌 듯합니다.”
“어쩌면 이곳······ 외부 세력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쯤 되니, 나도 계속해서 긍정회로만 돌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분명, 이건 뭔가 잘못된 게 맞다.
“하······.”
어쩐지 말도 안 되게 반기더라니.
저 녀석의 본 성격을 생각하면, 사실 황당한 반응이긴 했다.
일단 나부터가 미소년의 모습으로 환심을 좀 사야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매번 틱틱대던 녀석이 아니던가. 그런 녀석이 대뜸 찾아와줘 감동했다며 입 발린 소릴 늘어놨으니. 그때 뭔가 의심을 좀 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나저나······ 왜 말을 안 하냐고.’
솔직히 이해가 안 됐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고 싶다.
그냥 이렇게 말했으면 될 게 아닌가. 외려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동료를 더 부를 수도 있었을 테고.
이렇게 모른 척 은근슬쩍 끌고 가는 게 아니라면, 내가 대번에 거절 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나를 뭐로 보고 이 씨······.’
바로 그때,
“거의 다 왔어! 이제 코앞이야!”
갑작스레 녀석이 뒤돌아 소리쳤다.
“엉? 아, 어······.”
“얼른 와 얼른! 구시렁거리지 말고!”
“음?”
······.
귀신이네 저거.
이윽고,
“아, 저기······.”
저 멀리 검은 나뭇가지들과 음침한 안개 너머로, 뿌옇게 빛나는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둡고, 습하며, 냄새나고, 난데없이 불길이 치솟기까지 했던 음침한 숲길이 끝나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듯 싶었다.
이어,
“······으음.”
정면에 드러난 광경에 나는 침음을 삼켰다.
반전은 없었다.
뭔가 ‘뿅’ 하고 180도 달라진 경관이 나타날 거란 예상과는 달리, 보이는 모습은 이전의 숲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놀랍다고 느껴진 건, 거기 꽤 많은 수의 요정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었다.
요정들은 주변 곳곳에 퍼져 있었는데, 대다수가 나뭇가지나 나뭇잎들 위에 축 늘어진 채 골골대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땅바닥에 그냥 날개를 대고 누워 있는 녀석도 있었다.
그 무렵,
“데려왔어요! 내가 데려왔다고!”
내 요정 녀석이 느닷없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허······.’
날뛰는 꼴을 보니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나 이 녀석은 뭔가 지령을 받고 나를 데려온 게 틀림없었다.
때마침,
“대화 좀 하겠나?”
누가 봐도 이곳의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웬 늙수그레한 요정이 내게 대화를 요청해왔다.
*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대신 좀 나서달라고?”
실로 황당할 따름이었다.
현재 이들은 치누아비의 예상대로, 다른 녀석들에게서 공격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침공해 온 녀석들은 ‘정령’이라 불리는 또 다른 요정족으로, 주로 원초적인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무리라고 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공격을 받게 된 이유에 대해선 딱히 밝히지 않았는데, 왠지 쉬쉬하려는 느낌이 강한 걸로 봐선, 어째 먼저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한 번 떠보니, 극구 부인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이 세계의 법칙 상, 요정들끼리는 서로 싸울 수 없다.
정확히는, 서로에게 직접 공격을 가해 상해를 입힐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저기 ‘정령’들이 치사하게 자신들의 터전을 훼손시키고, 없애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를 막을 힘이 부족하다는 것.
고로, 본인들을 대신하여 이 녀석들을 좀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아니, 걔들이 그렇게 강해? 이렇게 저항이 불가할 정도로?”
“우리는 소원요정들이네. 그들과는 결이 다르지.”
“소······ 뭐?”
소원요정.
놀랍게도, 이는 원작을 수차례 독파한 내게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우리의 힘은 우리와 계약을 맺은 대상의 바람에 의해 구현되는 구조일세. 사실 요정들 대부분이 그런 과정을 거치긴 하지만, 우리가 제일이야. 즉 계약대상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실질적으론 힘을 거의 발휘할 수가 없다는 뜻이지.”
“아하······.”
신기했다.
나 또한 요정들에게도 여러 종족이 있고, 그 힘의 유형도 여러 갈래로 나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각 요정들이 어떠한 매커니즘으로 힘을 발휘하는지에 대해선 몰랐었다.
특히나 이 소원요정이라는 녀석들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대상의 바람을 직접 구현해내는 식이라니.
다만, 이를 듣고 시아나의 능력을 떠올리니 대충 이해가 가긴 했다. 그녀의 ‘승리를 향한 갈망’이 그녀의 성향과 기질 따위에 맞물리며, [공평을 싫어하는 확률조정자]와 같은 형태로 구현되었다는 것.
이것만 본다면, 다른 요정들에 비해 이 소원요정들의 힘이 가장 커다란 제약에 묶여있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구현되는 능력의 형태나 방식이 가장 자유로우며, 또 강력하니까.
어쨌거나 결론은 하나였다.
자기들로는 안 되니까, 나더러 좀 나서달라고 하는 것.
“그럼 뭐, 정확히 나보고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그냥······ 알아서 쫓아내 주기만 하면 되네. 다만, 우리 요정의 힘은 사용하지 않고서 말이야. 그것 또한 요정들끼리의 공격이라 판단될 여지가 있으니.”
“흐음.”
“······어떻게 안 되겠나?”
안 될 건 없지만, 문제될 건 있었다.
“근데 일면식도 없는 녀석들과 적대해야 된다는 게······ 게다가 나쁜 녀석들도 아니고, 다른 요정족이라 하니······.”
그때였다.
“이 자식 주걱턱! 너랑 계약이 된 내가 여기 이렇게 있는데! 다른 요정을 생각한다고!? 너 제정신이니?”
“······.”
저 놈 저거······ 아니, 이 녀석들 전부라 봐도 무방하겠지.
솔직히 전부터 느끼긴 했지만, 굉장히 뻔뻔한 기질이 있었다. 요정들은 기본적으로 다 착하다는 내 선입견에 조금씩 금을 내고 있을 정도로.
“나 주걱턱 아닌데 지금은.”
“어쨌든!”
“흐음.”
그때였다.
“물론, 대가는 주겠네.”
“호오, 어떤?”
“우리가 내줄 수 있는 선에선 뭐든, 원하는 걸 주겠네.”
“원하는 건 뭐든지라.”
약간의 제한사항이 있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나는 잠시간 고민에 잠겼다.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첫째, 요정과의 교분.
일단 이게 좀 컸다.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면, 당연지사 내 요정과의 관계가 더욱 끈끈해질 테니. 애초에 이곳까지 순순히 따라온 것도 다 이것 때문이었고.
요정과의 관계를 다져놓아야 하는 이유야 간단했다. 점차 진화하는 시아나의 능력을 흉내 내기 위해선 요정과의 밀접한 교류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아나에게 당장 그리 대단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능력을 활용하는 방식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뿐이지.
다만 중요한 건, 이즈음 시아나가 마침내 ‘대적’에 관한 활용법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시아나가 개발한 방식은 간단하다.
Step1. 대적자와의 결투에 앞서, 승패에 관한 내기 룰을 적용시킨다.
Step2. 이때 승리확률을 높인다는 개념으로, 확률조정자를 통해 적의 힘을 빼앗아온다.
일견 황당해 보이는 방식이지만, 대부분 먹힌다.
그만큼 그녀의 확률조정자, 즉 저기 소원요정들의 능력이 사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한계가 있는 방식이긴 했다. 일대일에 한정되고, 내 격을 넘어서는 상대와의 대결에선 사용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으니.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대결에선 ‘확정적으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메리트 있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시아나의 능력을 흉내 내기 위해 필요한 게, 바로 요정과의 끈끈한 교분이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요정의 보물.
달리 표현하자면, 높은 가치의 재화.
돈은 어느 모험단의 활동에나 꼭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의 경우 좀 더 그 필요성이 강했다.
바로, 코코아의 주머니를 가득 채워 놔야 하니까.
솔직히 이전엔 거기 뭘 넣는 걸 선호하지 않았었다. 넣는 족족 은근히 사라지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주인의 손버릇이 잘못된 건지, 주머니에 구멍이라도 뚫린 건지.
그런데 최근에 좀 많이 바뀌었다.
근래 코코아의 주머니만큼 중요한 역할을 해주는 게 또 없었으니.
하여 휴식을 선언한 직후, 곧바로 치누아비와 함께 돈을 벌어올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요정의 보물이나 아티팩트 따위를 얻을 수 있다면······ 뭐, 그도 나쁘진 않으리라.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정령들과 맞서야 한다는 것.
‘정령이라, 정령······.’
솔직히 어떠한 은원도 없는 녀석들을 괜히 친구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 적대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솔직히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어떠한 나비효과가 나타날지 모르니.
그즈음,
‘아, 잠깐. 그게 그 녀석들인가?’
마침 정령이라 불리는 요정들이 어디서 출현했었는지가 퍼뜩 떠올랐다.
신수.
그 녀석들은 뭐랄까······ 인간들 쪽보다는 신수들을 통해 많이 등장하는 녀석들이었다.
신수들은 특히나 직관적이고 단순한 자연계 능력들을 많이 쓰곤 하는데, 개중에 요정들의 힘을 빌려 쓰는 녀석들이 간혹 있었던 것이다.
딱히 정령이라는 말이 나오진 않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마 맞는 듯했다.
‘흐음······ 신수라.’
그럼 딱히 문제될 게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하여,
“좋아, 걔네 어디 있어?”
나는 요정들의 다툼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
정령.
역시나 내가 생각했던 녀석들이 맞았다.
불, 물, 흙, 바람, 빛 등등의 자기의 속성이 외관에 그대로 드러나는 녀석들로, 인간이나 동물을 닮은 녀석들도 있었고, 그저 형체만 둥둥 떠 있는 녀석들도 있었다.
정령들은 나를 보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기색들이었다.
그 중 하나가 소원요정들 대신에 나온 내게 소리쳐 물었다.
“이, 인간! 우리를 적대할 셈이냐?”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는······ 됐고, 왜 얘네 괴롭혀, 엉!? 나도 너희 괴롭혀줄까?”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윽박지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대가를 약속받고 나섰다고 하기엔······ 뭔가 좀 그랬던 것이다.
다만, 내 협박성 말투는 그리 좋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녀석들은 나를 대번에 무시한 뒤 갑작스레 저들끼리 회의를 하기 시작했는데, 어째 나는 안중에도 없이 보일 정도였다.
“흐음······.”
이게 주걱턱의 외형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느낌이 좀 안 오긴 했었다.
‘에이, 주걱턱으로 변해서 올 걸.’
잠시 후,
“인간, 할 말이 있다.”
정령 쪽에서 웬 녀석이 하나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인간을 닮은 외형에 굉장히 땅딸막한 녀석이었는데, 몸이 전체적으로 흙빛을 띄는 걸로 보아 흙속성의 정령인 듯했다.
이어 녀석은 갑작스레 내게 자초지종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대충 자신들이 어째서 여기를 오게 되었는지, 어떤 억울함을 가지고 있는지, 어째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따위의 내용들이었다.
“······.”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솔직히 굉장히 놀랐는데, 이는 그 사연의 억울함 때문은 아니었다.
바로, 내가 모르고 있던 설정과 뒷배경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 때문이었다.
요정들의 세력, 관계도, 그간의 다툼과 사건 등등······ 원작에선 등장하지도 않는 일들이 이렇게나 많고, 또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니.
메인스토리에 엮여있지 않다고 해서, 언급조차 없이 사라지기엔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즈음,
“······이상이다. 이제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겠지? 인간, 우리의 입장도 이해를 좀 해줬으면 한다.”
정령의 이야기가 끝났다.
대충 들어보니, 역시나 이 소원요정 놈들이 먼저 잘못을 한 게 맞았다.
지들 계약자의 소원을 들어주겠답시고 요정들 사이의 ‘영역’을 무단으로 침범해 가며 피해를 끼쳤다는데, 뭐 잘은 모르겠지만 심히도 뻔뻔한 짓들을 저질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서?”
“······뭐, 뭐?”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게 사연이 아무리 서글프고, 타당하고, 논리적이라 할지라도, 애초에 나 같은 용역은 그런 걸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돈만 받으면 그냥 움직인다고, 공정과 도덕 따위는 개나 주고.
“미안한데, 나는 그런 거 잘 모르겠거든? 얼른 안 꺼져!? 엉? 혼나볼래!?”
나는 기세등등하게 앞으로 나섰다.
어차피 계약대상자가 없으면, 저들도 그리 큰 힘은 발휘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에,
“저, 저런!”
“야만인이야!”
“폭력적인 인간 같으니라고······!”
정령들이 치를 떨었다.
나의 폭력성보다도, 뻔뻔함에 더 놀라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내 뒤쪽에선,
“잘한다! 주걱턱!”
“옳소!”
“나가라, 나가!”
더욱 뻔뻔한 녀석들의 응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 그렇겐 못해!”
“그래? 역시 한 번 혼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나 무서운 사람이야.”
“······에, 에잇! 자, 잠깐 기다려!”
그러곤 잠시간 저들끼리 속닥거리더니,
“제안을 하나 하겠다!”
난데없는 말을 꺼냈다.
“우리도 인간과 직접적으로 적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우리를 대신할 다른 이를 내세워도 되겠는가?”
“응? 아, 뭐 그야······.”
딱히 반박할 근거가 없긴 했다.
근데 그럴만한 녀석이 있다고?
나는 정령들 주위를 둘러봤으나, 딱히 눈에 들어오는 이는 없었다.
“뭐, 마음 대로 해. 근데 내가 그리 인내심이 있는 편은 아니라서. 오래 기다려줄 생각 따윈 없는데······.”
그러자,
“걱정 마. 바로 이 자리에 있으니까.”
또 한 번 희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뭐? 어디?”
그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호오······ 원하는 건 뭐든 내준다는 것이지요?”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응?
나는 멍하니 뒤를 돌아봤다.
이어,
“좋습니다, 하지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치누아비가 나를 보며 한 차례 씩 웃은 뒤,
“형님, 잘 됐네요. 누가 요정들의 보물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한 번 가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정령들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아닌가.
그러곤 대단히 기묘한 미소를 지은 채, 녀석이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기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