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미로 찾기
***
10분 전.
치누아비의 귀에 갑작스런 음성이 들려온 건, 미소년의 성질난 고함에 정령들이 회의를 하겠답시고 막 돌아선 즈음이었다.
-저기······.
그 나직하면서도 묘한 음성은 살랑거리듯 불어온 바람에 실려 있었다.
귓가에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치누아비는 깜짝 놀랐으나, 그 기색을 밖으로 내비치진 않았다. 혹여나 목소리의 주인이 되레 놀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저희와 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는 듯해, 실례를 무릅쓰고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같은 기운? 치
누아비는 그 말에 의아함을 가졌지만,
‘아······ 오행의 술(術) 때문인가?’
이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분명 오행의 술은 저들의 힘과 완전히 맞닿아 있는 것이었으니. 어쩌면 자신에게 친숙함을 느꼈을 수도 있으리라.
-괜찮으시다면 대화를?
치누아비는 먼저 주위부터 슬쩍 둘러봤다.
형님이나 소원요정들은 목소리가 자신에게 접근한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보였다.
치누아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저희를 위해 나서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 불한당 같은 자에게 이대로 쫓겨나기엔 너무 억울하여······.
응?
치누아비로서도 이번엔 솔직히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저 불한당과 한패라는 걸 모를 수가 있나? 함께 왔는데?
-어떤 약점이 잡혀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희도 선생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순간,
“······푸흡.”
치누아비는 황급히 웃음을 참았다.
이 순수한 자들은 본인들과 같은 기운을 가진 자가 설마하니 저 불한당과 호형호제 할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한 듯했다.
-또한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저희가 준비할 수 있는 내로 뭐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호오.
그즈음 이들의 진심이 온 몸으로 전해졌다.
마침 목소리가 귀 주변을 살랑거림과 동시에, 땅바닥이 움찔움찔 발바닥으로 신호를 보내왔던 것이다.
또한 갑작스레 하늘을 가리고 있던 나뭇잎들이 슬쩍 벌어지며 햇볕이 들고, 그에 더해 진한 나무 향까지 솔솔 전해져 왔다.
뭐랄까, 숲속의 자연물들이 자신에게만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느낌이랄까.
곧이어,
“······좋아.”
치누아비는 씩 웃었다.
당장 바라는 뭔가가 생각났다거나, 별도의 꿍꿍이가 생겼던 건 아니다.
그즈음 치누아비를 움직이게 한 동력은 하나의 생각이 전부였다.
재미있겠네.
치누아비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곤,
“······원하는 건 뭐든 내어준다는 것이지요?”
놀란 얼굴의 미소년을 뒤로한 채, 정령들 쪽으로 이동했다.
치누아비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담담히 즐겼다.
“얌마! 너 지금 무슨 짓······.”
“사연을 들어보니, 먼저 잘못을 저지른 건 그쪽 형님네 요정이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그건······.”
“이를 지켜보다 문득, 마음이 아파와 말이지요. 저는 이들을 위해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허.”
그 무렵, 미소년의 눈빛이 약간 가라앉았다.
이윽고,
“그래서 뭐 어쩌자고?”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나랑 싸우자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형님도 중재를 위해 나선 것 아니십니까? 다툼을 멈추고, 서로의 요구사항을 확인하고, 조율지점을 찾는 것.”
“중재······ 아니 뭐······ 그렇긴 하지?”
“하지만 충돌하는 지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요. 이에 대해선 어느 한쪽이 양보를 해야 할 터이고. 고로, 저와 종목을 정해 내기를 하시지요. 지는 쪽은 순순히 물러나는 걸로.”
이에 미소년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허허, 요 녀석이? 진짜 나랑 해보겠다고? 그리고 물러나긴 뭘 물러나. 여긴 소원요정들의 터전이야. 여기서 물러나면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아뇨, 물러나는 건 형님 쪽이죠. 저들은 대가를 치를 뿐이고요.”
그러자,
“······그게 네 마음대로 되겠냐?”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그건 두고 볼 일 아니겠습니까? 어떠십니까, 하시겠습니까?”
“······너 후회하지 마.”
치누아비는 씩 웃었다.
“그럼 일단 종목을 정하기에 앞서, 양측의 요구조건부터 먼저 정하시지요.”
이어, 합의된 양측의 조건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정령 측.
1. 소원요정 측 우두머리의 사과.
2. 앞으로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서약을 남길 것.
3. 특히 문제가 된 요정의 신변을 넘길 것.
4. 피해보상비용을 지급할 것.
소원요정 측.
1. 정령 측 우두머리의 사과.
2. 훼손된 터전의 완전 복구.
3. 요정 간 ‘영역 침범’을 일정부분 허용할 것.
대결 종목을 정하기에 앞서, 치누아비는 정령들과 잠시 의견을 나누었다.
“솔직히 말해 저기 소원요정 측의 대리인을 이기기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치누아비는 선뜻 인정하고 나섰다.
그는 강자다.
“물론 저희도 은인이 홀로 짐을 지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대충 아무 종목이나 정하시면, 저희가 지형지물을 조절하는 식으로 도와드릴 생각입니다. 간단히 달리기 같은 걸 하시면······.”
“아뇨, 쉽지 않을 겁니다. 그는 땅을 밟지 않고도 이동할 수 있고, 집채만 한 바위가 굴러온다 해도 단숨에 터뜨릴 힘을 가지고 있지요. 또 세찬 바람도 코웃음 치며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에 다들 놀라 웅성거렸다.
“저 불한당 같은 이가 그렇게 대단하단 말입니까?”
“예, 웬만한 종목에선 그를 이기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치누아비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단순 대련이나 달리기 따위와 같은 신체능력 상의 대결은 피해야 한다.
소년의 몸으로 얼마나 힘을 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본래 몸으로 되돌아간다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필패다.
또한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 따위의 종목도 피해야 한다. 그는 쉬이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 하나하나가 전부 신출귀몰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물론 그가 그 능력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쓸 수 있는 능력이 하나라고 해서, 이를 무시해도 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특히나 데모라에서 그가 썼던 ‘유령소환’은 힘과 신출귀몰함에 더해, 심지어 쪽수조차 늘어나는 것이었으니.
“그럼 혹, 자신 있는 종목 같은 게 있으십니까?”
“자신 있는 종목이라······.”
가장 자신 있는 건 역시나 도깨비 씨름이었다. 경험도 많고,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에도 도가 텄으니.
다만,
“후······ 글쎄요.”
치누아비는 고개를 저었다.
도깨비씨름은 애당초 따로 마련된 모래판과 도깨비심판이 없으면, 시합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간단한 이유였다. 교란과 미혹을 실력으로 삼는 경기에 심판이 없으면, 경기진행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굳이 샅바를 잡고, 넘겨야 한다는 식의 씨름규칙을 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상대의 입에서 졌다는 말만 나오게 하면 그만인데.
“혹, 지식대결 같은 건 어떻습니까? 저희 바람 정령이 세계에 관한 많은 지식들을 몰래 속닥거려 드릴 수 있을 텐데.”
“······.”
치누아비는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지식대결 또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이제까지도 형님의 그 방대한 지식에 매번 놀라곤 했지만, 이번 ‘시간축이 비틀린 공간’에 대해서까지 그가 알고 있다는 것엔 정말로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이는 자신 또한 아주 오래 전, ‘요괴소굴’을 다녀온 어느 한 도깨비에게서 우연찮게 들은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러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였지, 상세한 부작용에 대해선 금시초문이었고.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도깨비들 중에서도 그 같은 경험을 한 게 그 도깨비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형님의 견문이 어느 정도인지는 당최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더욱이 이 지식대결에선 실제로 예전에 한 번 패배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질문의 수준 자체도 대단히 높아, 그는 감히 대적키 어려운 상대였다.
그나마 비슷한 유형으로 겨뤄볼 만한 종목이라곤 ‘말이 안 맞는 수수께끼’, ‘세상의 세 가지’ 정도나 될까.
다만, 형님의 내력에 ‘도깨비’가 들어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 또한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이것들을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그럼 어떤 걸로······.”
“지, 지금이라도 그냥 저 불한당을 회유하는 게······.”
하지만 물론,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마침 생각한 게 하나 있으니. 이 숲 전체가 외부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함정들로 가득하더군요.”
“예? 아, 예예······ 그렇죠. 같은 요정인 저희도 저들과 대면하기까지 꽤 오랜 시일이 걸렸을 정도니까요.”
“근데 그건 왜······?”
질 생각은 없었다.
재미로 시작한 일이지만, 일단 시작한 이상엔 이겨야 하지 않겠는가. 이 또한 내기이니.
내기에 목숨을 걸지 않으면 도깨비가 아닌 법이다.
“혹, 이 숲 전체에다 좀 더 짙게 운무를 깔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당장 그와 겨뤄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부분은 단 하나뿐이었다.
해독가로서의 역량.
일명, 요정의 숲 미로 찾기.
*
미로의 출발지점으로 가는 길.
미로 찾기라곤 하나, 실상은 별 게 아니었다.
그저 숲의 초입으로 되돌아간 뒤, 다시금 요정들이 있는 곳까지 찾아가는 것.
이게 전부였다.
다만 이를 미로 찾기라 표현한 까닭은 이 숲 전체가 수많은 함정과 수수께끼들로 채워져 있어, 요정의 안내 없이는 한 걸음도 제대로 나아가기 힘든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해독가로서의 경험으로 짐작건대, 이 숲은 수시로 지형이 틀어지고 길이 새로 열리는 구조일 것이다.
그러니 저러고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핀다거나, 여기저기 표식을 남기며 길을 기억해보려 애쓰는 건 딱히 의미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치누아비는 그러고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자신의 상대를 바라봤다.
그는 어느새 본래의 주걱턱 외형으로 돌아온 상태였는데, 그 때문인지 정말 정령들의 표현대로 ‘우둔한 무뢰배’ 그 자체로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그가 결코 ‘우둔하지 않다’는 건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지만.
이윽고,
“너······ 속셈이 뭐야?”
막 출발지점이 보일락 말락 즈음, 슬그머니 그가 다가와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종목을 제안할 때도, 규칙을 설명할 때도 별 말이 없더니······ 약간은 의아한 행동이었다.
“속셈이라뇨?”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이유요? 흐음······.”
치누아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이에 그가 잠시간 침묵하더니,
“혹시······ 양측의 보물을 노려보겠다거나 하는, 뭐 그런 계획은 아니고?”
희망어린 질문을 던져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에겐 그 기대감을 채워줄만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그런 좋은 계획이 있었다면 미리 말씀을 좀 해주시지. 그럼 제가 이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텐데요.”
“하······.”
그는 그러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근데 언제 접근해서 어떻게 설득한 거야?”
갑작스레 생뚱맞은 질문을 던져왔다.
“설득이요?”
“네가 설득했을 거 아냐. 대리인으로 좀 써달라고.”
오해가 좀 있었던 모양이다.
“접근은 저쪽에서 먼저 했습니다. 제가 오행의 술을 쓰다 보니 친근감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제가 형님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줄 알고 있더군요.”
“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조차도 그들이 접근하기 이전엔 딱히 통하는 지점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즈음,
“뭐, 어쨌거나 진짜로 한다 이거지?”
그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물론이지요. 내기에 진심이 아닌 도깨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도 도깨비야.”
“······아하.”
“안 봐준다. 너 두고두고 잠 못 잘 줄 알아. 분해서.”
“훗, 기대하지요.”
이윽고,
-그럼 준비!
-준비!
둘은 나란히 출발선에 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원요정의 도움을 받으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이곳의 거주자들이니까요. 사전에 다 동의하셨던 내용입니다.”
“알았어, 그걸 말이라고.”
물론 그럼에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하여, 이미 정령들에게도 신신당부를 한 상태였다. 혹여나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요정들이 보이면 얼른 알려달라고.
곧이어, 심판을 맡은 양측 정령과 요정이 동시에 외쳤다.
-출발!
-뛰어요!
치누아비는 출발신호와 동시에, 도깨비 은막부터 뒤집어썼다.
혹여나 그가 자신의 뒤를 밟는 걸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곤 잠깐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뒤, 주걱턱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숲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들이 나왔던 바로 그 출구였다.
“······처음부터 틀리셨네요.”
미로는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지 않다.
그가 만약 이와 같은 생각으로 접근했다면, 큰 코 다칠 수밖에 없으리라.
이건 길 찾기가 아니라, 문제풀이니까.
이어, 치누아비는 숲 전체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맥’을 잡기 위함이었다.
세상에 널린 수수께끼와 문제들을 해독하는데 필요한 역량은 대체로 ‘이해력’, ‘직관’, ‘통찰력’, ‘경험’ 따위의 역량들이나, 사실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바로 해독하는 이가 도깨비냐 아니냐 하는 것.
세상의 모든 종족들 중, 오직 도깨비만이 모든 문제들의 핵심을 꿰뚫어볼 수 있는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무질서가 특징이라······.”
이 요정들의 수수께끼는 그렇게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치누아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 요정의 숲에 처음 들어설 때도 느꼈고, 초입으로 되돌아오면서도 느꼈으며, 지금 맥을 다시 짚으면서도 느껴지는 건, 이 숲 전체에 켜켜이 쌓인 함정과 수수께끼들에 아무런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저 무질서하게 중첩되어 있다는 것.
즉, 서로 다른 유형의 수수께끼와 함정들이 제멋대로 공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는 아마도 소원요정이라는 종족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인 듯했는데, 아마 ‘그 어떤 것으로도 구현될 수 있는 능력’이 함정의 영역에서도 발현된 게 아닐까.
어쨌거나, 목적지까지 빠르게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라야 별 게 없었다.
가장 쉬운 문제들을 골라가며 길을 뚫는 것.
“쉬운 문제라······.”
난도 높은 문제풀이를 즐기는 도깨비로서 그리 유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기이지 않은가.
그즈음, 숲을 훑던 치누아비의 두 눈이 강렬히 빛났다.
그로부터 10분 뒤.
“······찾았다.”
치누아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후······.”
거의 다 왔다.
미로는 생각이상으로 복잡했다.
어째서 저 순수하고 점잖은 정령들이 이 숲 전체를 그냥 밀어버리려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통과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꼼수를 쓴 상태였음에도 그랬다. 미리 정령들더러 함정이 일부 훼손된 지역에다 운무를 짙게 깔아놔 달라고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쪽이 좀 더 통과하기 수월할 수밖에 없을 테니.
헌데, 그럼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함정의 수복능력이 상상이었던 탓이다.
외려 어설프게 망가져 있다 보니, 더욱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알맞은 풀이를 내놓아도 도통 답을 인식하지를 못하니.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결국 길은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치누아비는 마침내 나타난 최종관문을 노려봤다.
절벽.
난데없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주 고전적이면서도, 간단한 문제였다.
눈앞의 절벽은 허상이다. 발을 내딛으면 건널 수 있다. 숲이었던 곳에 갑작스레 절벽이 나타날 이유가 없지 않나.
다만,
휘이잉-.
이를 방해하는 것들이 결코 허상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풀이방법을 안다는 것이, 늘 답의 도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해독가는 또 다른 역량을 시험받게 되기 때문이다.
치누아비는 양 옆으로 불어오는 맹렬한 바람에 애써 몸을 가누며, 허공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순간,
훅-
몸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치누아비는 추락하는 와중에도 걷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미 걷고 있다는 감각은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그럼에도 의식적으로나마 발을 놀렸다.
‘크윽······ 얼마 안 남았어.’
이와 같은 문제는 몇 번 푼 적이 있었지만, 이토록 생생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몸이 박살이 날 것만 같았다.
실제로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깐 스쳤을 정도이니.
하지만 다행히도,
척-.
풀이는 틀리지 않았다.
치누아비는 발끝에 닿은 땅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길은 끝나 있었고, 저기 안개 너머로 뿌연 빛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목표 지점이었다.
‘됐다. 이겼어.’
치누아비는 승리를 자신했다.
위기가 없진 않았지만, 딱히 크게 지체됐던 적은 없었다.
거의 모든 문제를 보자마자 풀이에 들어갔다.
운이 좋았다고 밖엔 말할 수 없는 속도였다.
이보다 빠를 순 없다.
그러고 자신감에 찬 치누아비가 당당히 안개를 헤치고 나올 즈음이었다.
바로 그때,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난데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뭐?”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절대 지금 들려와선 안 되는 소리이기도 했다.
“뭐는 뭐야. 나 진짜 약간 졸았다니까? 너무 안 와서?”
“······.”
뭔가,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치누아비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마침 그의 주변에 요정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설마?”
저들이 길을 터준 건가?
그러나,
“아, 아니에요. 소원요정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즈음 다가온 정령들이 고개를 저으며 말해줬다.
“하,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되는······.”
그 무렵,
“······응?”
뒤쪽에 웬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저, 저게 뭐야······.”
치누아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치 거대한 멧돼지가 숲을 가로지른 듯, 주변이 온통 초토화된 길 하나가 중앙에 뻥 뚫려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저, 저러고 그냥 뚫고 왔다고?’
이건 정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숲에 산재해 있는 함정과 수수께끼들은 저런 식으로 ‘외력’에 의해 훼손될 수가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이 숲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절대법칙이었다.
심지어 정령들조차도 함정 하나를 해제하곤 그 주변 일대를 태운다거나, 땅거죽을 뒤집는 방식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지 않았던가.
숲을 구성하는 자연물 그 자체라 볼 수 있는 요정들조차 그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을 만큼, 이 법칙은 절대적이었다.
만약 이를 힘으로 뚫으려 하면, 외려 더한 반작용이 생겨나는 구조였다. 아무리 힘이 강하다 해도 이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법칙을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이건 결코······.’
바로 그때였다.
“헙!”
치누아비가 흠칫 놀라 그를 바라봤다.
모든 종류의 법칙을 무시할 수 있는 이.
치누아비가 알기로, 그게 가능한 존재가 딱 하나 있었다.
때마침,
“뭘 그리 놀라. 정말 나를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어?”
형님이 자신을 보며 씩 웃었다.
마치 훼방꾼 신의 그것과 같은 미소를 띤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