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53
153화 턱주가리의 상천세계 일지
***
[3일 차]눈여겨본 열매를 먹어보기로 결정했다.
딸기처럼 생겼는데, 바나나 향이 난다.
아직 먹지는 않았다.
먹고 나서 감상을 적도록 하겠다.
일단 맛은 없다.
그래도 다행히 세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배가 아프진 않다.
식량으로 삼을 순 있을 것 같다.
하하하하.
일기 같은 걸 써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영 어색하군.
이곳에 온지 일주일 하고도 이틀이 지났다.
대략적인 주변 지형과 생태는 파악이 끝났다.
여긴 그냥 숲이다. 특별한 건 없다.
바깥과의 차이점이라면, 요괴와 같이 일정 수준의 지능이 있는 생명체가 보이진 않는다는 점.
하지만 아직 없다고 단정하긴 이를 듯싶다.
여기저기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흔적들이 몇 존재하긴 했으니.
식량수급에 있어선 일단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아직 맛있는 걸 찾진 못했지만, 그럭저럭 배를 곯지는 않을 듯하다.
맛있는 걸 먹고 싶다.
[13일 차]슬슬 대략적으로 이 세계 전반을 파악해봐야 할 듯했다.
규모든, 생태든, 거주하는 다른 요괴나 생명체가 있는지 등등.
슬슬 현재의 거주지를 떠나기로 했다.
일단 여기 너무 심심함.
[15일 차]내 생각보다 숲은 넓었고, 산은 컸고, 세계는 조막만 하지 않았다.
대충 데모라 정도의 크기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보다는 훨씬 더 큰 듯했다.
다만 가도 가도 숲이고, 산이다.
좀 짜증이 난다.
챙겨온 열매들이 다 떨어지고 있는 터라 일단 오늘 내일 중으로 한 곳에 정착해야 할 듯하다.
그나저나 현재 내가 강해지고 있는 게 맞나 모르겠다.
눈에 확 띄는 변화가 없으니, 약간 답답한 것 같기도.
지나다 보이는 커다란 바위를 부숴보긴 했는데, 명확히 차이점이 느껴지진 않았다.
고작해야 2주에 많은 걸 바라는 건가?
하루하루가 아까워 여태 한 번도 풀지 않은 상태다.
일단 이대로 쭉 가본다.
[17일 차]토끼를 잡았다.
산을 돌아보던 도중, 웬 자그마한 게 이리저리 움직인다 했더니 토끼였다.
놀라 얼른 잡았다.
약간 이상하게 생기긴 했다.
귀가 세 개에, 눈이 시뻘겋고, 앞니가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녀석이었다.
요괴라기엔 그래도 아직 동물에 가깝긴 했다.
일단 구웠다.
맛은 없었다.
[23일 차]요괴를 봤다.
세 번째로 이동해온 산에서 처음으로 요괴를 봤다.
이곳에도 요괴는 존재했다.
아, 이건 너무 당연한 말인가.
심지어 꽤 많은 수였다.
내가 본 건 늑대무리였는데, 그 중 대장은 직립보행을 하는 녀석이었다.
딱히 강해보이진 않았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이곳의 요괴는 어느 수준일까? 말은 할까?
한 녀석 몰래 잡아다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볼까 생각중이다.
늑대요괴들이 나에 대해 완전히 눈치를 챈 듯 보인다.
마치 나를 찾아다니는 것 마냥 수상 쩍인 행동을 취하고 있다.
마지막에 납치했던 녀석이 내 존재를 분 모양이다.
귀찮게. 겁을 덜 줬나.
늑대요괴들이 딱히 저 거대한 뱀과 관련이 있어 보이진 않지만, 아직 준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요괴들과 엮여 좋을 건 없을 것이다.
일단 당장 거처를 옮겨야할 듯싶다.
어느샌가 나를 쫓는 요괴들이 늘었다.
걸어 다니는 늑대무리, 사람 말을 하는 멧돼지무리, 기묘한 외형의 족제비무리 등등······.
지금도 몇몇 요괴들이 내 아래를 지나쳐갔다.
가만 보니, 여기 산에 있는 모든 요괴들이 나를 뒤쫓는 느낌이었다.
뭔가 나에 대한 소문이 돈 게 아닐까.
그냥 다 조져버릴지, 아니면 몰래 벗어날지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지금 약간 놀란 상태로 기록을 남긴다.
나를 쫓아온 어느 한 요괴무리의 대장에게서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겠냐고. 잘해주겠다고.
대번에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그 자리를 벗어나긴 했지만, 놀란 가슴은 쉬이 진정이 되진 않았다.
당최 왜 나에게 함께 하자고 하는 건지.
심지어 눈까지 반짝반짝 빛내면서.
특히 당황스러웠던 건, 그 멧돼지가 잘해주겠다며 은근한 미소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설마 암컷?
미친. 그게 더 무섭다.
그리고 오늘, 내가 이 산의 요괴들에게 ‘털 없는 턱주가리’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러모로 기분이 나쁜 날이었다.
[38일 차]이 산의 요괴들이 나를 뒤쫓는 이유에 대해 얼핏 듣게 되었다.
나를 일원으로 삼아 웬 ‘대전’에 참가하려 한다는 건데······ 희한한 일이었다.
요괴들이 싸움판을 벌인다는 것도 희한하고, 거기에 나를 용병으로 쓸 생각을 한다는 것도 희한하고.
물론 제대로 들은 게 아니라 확인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냥 말이 되나 싶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놀랍게도, 이 요괴들은 내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즉, 인간이 뭔지 모른다는 것.
이는 이 요괴들이 단 한 번도 인간을 본 적이 없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요괴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이곳이 자체적으로 생과 사의 사이클이 형성되어 있는, ‘자생 가능한 세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뭔가 감이 오는 느낌이다.
새로이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세계.
뱀이 만년 동안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이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나를 만나고 싶다며, 원숭이요괴 무리가 갑작스레 찾아왔다.
쥐어 패 쫓아내려던 중에, 간절하다며 손을 모으길래 일단 말해보라고 했다.
그 후, 이들을 통해 이 세계의 시스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한 기록을 여기 남긴다.
놀랍게도, 이 세계엔 계급제도란 이름의 운영시스템이 존재했다.
기본 체제 자체는 간단하다.
총 다섯 단계로 계급이 구별이 되며, 하위계급은 무리의 명운을 건 전투를 통해 상위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계급별로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이 다르며, 혜택 또한 다르다.
등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넓고, 경쟁자도 적으며, 먹이가 많은 산을 배정받게 되는 것이다.
전투는 무리끼리의 단체전도 있지만, 웬만해선 한 무리의 대장끼리 겨루는 방식이다.
대장전의 승패에 따라 무리 전체의 등급이 달라진다.
또한 승리 시 전리품이 주어지는데, 이를 통해 요괴들은 나름의 파워업(?)이 가능하다.
이것이 저 요괴들이 나를 스카우트하려는 이유였다.
지금 내 눈앞엔 나를 두고 멧돼지 요괴와 원숭이 요괴가 설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지들이 먼저 찜을 했다느니, 자기네들과 함께 갈 거라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저들끼리 뭐하는 짓인지.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45일 차]요괴대전을 한 번 경험 해보기로 했다.
최하급 요괴들의 싸움판에 참전한다고 한들, 딱히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저 뱀에게 있어 나는 벌레에 불과하지 않은가. 눈에 띄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뭐, 심심했으니까.
일단 나는 원숭이요괴의 일원으로 들어갔다.
어디를 선택할까 고민하다 그냥 원숭이 녀석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최대한 생김새의 유사성을 살리기 위함도 있었지만······ 사실 멧돼지 녀석들은 너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왜 자꾸 본인들 무리의 암컷 비율을 강조하려드는지.
싸움판이 열리는 곳엔 내일 이동하기로 했다.
희한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전이 열리는 곳은 바로 옆 산이었다.
거기엔 놀랍게도 경기장이 존재했고, 경기 관리자들이 있었으며, 관객을 위한 객석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체계가 굉장히 잘 잡혀있는 모습이었다.
경기장의 수는 두 개에 불과하나 요괴의 숫자가 많아, 한 판을 벌이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와중에 다른 녀석들의 싸움을 직관할 수 있었는데, 굉장히 재미있었다.
그 전투의 수준을 떠나, 박진감이 넘친다고나 할까.
흡사 로마시대의 검투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가장 의아했던 점은 승자가 패자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요괴들의 싸움이니만큼 무조건적으로 승자가 패자를 죽이거나, 잡아먹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외려 관리자들이 흥분한 승자를 패자에게서 떼어놓는 일까지도 있었다.
희한했다.
내 상대로 나온 요괴는 거북이처럼 생긴 녀석이었는데, 놀랍게도 다리가 길었다.
심지어 서서 걸었고, 또 빠르기까지 했다.
다만 그게 다였는지, 무력은 최하급요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유능력 비슷한 게 있는 것 같긴 했는데, 그게 뭔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형편없었다.
다리가 길어지는 게 능력인지, 몸집이 커지는 게 능력인지······.
게다가 당황스럽게도, 등딱지를 깨버리자 녀석이 곧장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 녀석이었던 모양이다.
약간은 혼돈의 첫 대전이었다.
어쨌거나 1승을 올렸다.
[60일 차]세 번째 녀석을 이기니, 등급이 올랐다.
이제 나와 내 무리인 원숭이요괴들은 네 번째 등급인 하급요괴가 되었다.
원숭이 녀석들이 나를 보며 환호하고 있다.
이상하게 보람찼다.
새로운 거처를 배정받았다.
조금 떨어진 지역에 있는 산이었는데, 확실히 뭔가가 달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과수가 풍부했고, 곳곳에 개울이 흘렀으며, 요괴가 아닌 산짐승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이전엔 요괴들로 북적대는 산에 있다 보니, 딱히 남는 게 없었던 것이다. 요깃거리가 될 열매든, 작은 짐승이든.
원숭이 녀석들이 내 침소를 만들었다며 보여주는데, 나름 기분이 괜찮았다.
물론, 굳이 이 요괴대전에 진심일 필요는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 기분도 살짝 들긴 하고.
다만 뭐랄까······ 이편이 확실히 좀 더 재미가 있다고나 할까.
현재 내가 강해지기 위해 필요한 건 오로지 시간뿐이다.
어떠한 수련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시간.
즉, 내가 이겨내야 할 건 지루함뿐인 것이다.
그래서 그냥······ 이걸 계속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이건 꽤 재미가 있거든.
[85일 차]승승장구 중이다.
벌써 요괴대전도 12승째.
가리지 않고 상대를 잡았더니, 어느새 중급요괴가 되었고, 별명도 얻었다.
무서운 턱주가리.
이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만 따로 하진 않겠다.
중급요괴까지 오르긴 했지만, 아직 내 일격을 견뎌낼 녀석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녀석들이 약한 건 아니다. 내가 강한 것이다.
요즈음엔 확실히 느껴졌다. 내 몸이 한결 튼튼해졌다는 게.
강도(剛度) 확인 차, 쑥쑥 눌러 본 바위들이 죄다 물컹하고 들어갈 정도였으니.
하여, 현재는 약간 힘 조절에 들어간 상황이다.
한 방에 보낼 거, 두 방에 보내고.
약간 힘든 척 연출도 하고.
중급요괴대전까지 치르면서, 이를 관리하는 녀석들이 늘어난 게 확 실감이 됐던 것이다.
또 높은 등급의 요괴들이 관람을 오는 경우도 생겨나고.
자제를 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자칫 저 뱀의 이목을 살지도 모르니.
[100일 차]무려 100일이 지났다.
그냥 그렇다고.
기념하기 위해 적는다.
상급요괴가 되면서, 하나의 산을 관리하게 되었다.
최하급과 하급요괴들이 득실거리는 산이다.
놀랍게도 상급요괴는 한 달에 한 번, 요괴대전에 참가 중인 요괴를 제외한 나머지 요괴들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특권이라고.
사실 어찌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요괴들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니까. 외려, 이제까지 요괴 본연의 욕구를 제한하고 있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었지.
그리고 ‘상부’라 불린 곳에서 하사품이라며 웬 선물 하나를 보냈다.
열어 보고 토하는 줄 알았다.
웬 돼지요괴와 소요괴의 머리였다.
희한하게도, 판타지 쪽 오크와 미노타우르스를 닮아 있었다.
다른 녀석들에게 주니 냉큼 좋다고 받아먹었다.
오래 봐서 몰랐는데, 이 녀석들도 요괴는 요괴인 모양이다.
최상급 요괴가 될 수 있는 대전이 잡혔다.
굉장히 이례적인 일정이라고 했다.
본래 상급요괴들의 대전 자체도 1년에 한두 번인데다가, 최상급요괴가 되려면 그조차도 몇 번을 거쳐야 한다고 들었던 것이다.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압도적인 승리로 상급요괴가 되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상대는 현재 상급요괴 등급만 30년째라는 두더쥐였다.
뭐, 별 거 아닌 녀석이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의 나였다면 꽤 고전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이야 뭐. 조금만 만져줘도 알아서 터져나갈 정도?
잠깐 고민하다 알겠다고 했다.
이 이상 올라가면 솔직히 위험부담이 커지는 게 사실이긴 했으나······ 보다 저 뱀과 가까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슬슬 탈출 준비를 할 시기가 되기는 했으니.
내일부터는 전체적으로 점검에 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어느 정도로 강해졌는지, 지금 바깥에 있는 녀석들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는, 지금의 내가 저 뱀에게 대항이 가능한 상태인지.
최상급요괴의 등급식이 끝났다.
이제 이 세계 내 총 스무 마리밖에 되지 않는 최상급요괴 중 하나가 되었다.
여태 유래가 없는 속도라고 했다.
보통 상급요괴에서 최상급으로 가는 데 평균 5년이라고 했으니.
내 이름으로 된 지역까지 배정받았다.
턱주가리 산맥.
이 또한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
최상급요괴가 되면서 알게 된 정보가 하나 있다.
이는 어찌 보면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상급요괴 위에 하나의 계급이 더 있다.
바로 선택받은 요괴, 자요.
아들 요괴라는 뜻이다.
이는 최상급요괴들끼리의 전투로 정해지는 건 아니고, ‘어미’가 직접 최상급들 중에서 정한다고 했다.
자요로 선정된 요괴는 이 세계 모든 요괴들의 선망과도 같은 일을 허락받는다.
바로 태곳적 존재인 어미를 배알하는 것.
여기서 ‘어미’는 저 뱀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이 같은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요가 된 최상급요괴는 저 뱀을 만나는 순간, 아마 녀석에게 삼켜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녀석이 앞으로 천 년을 더 살아갈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이 뱀이 만년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체적으로 질 좋고 영양분이 가득한 요괴를 키워내는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에.
계급을 두고 보상을 차등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1. 요괴들의 싸움을 통제하고 머릿수를 조정한다.
2. 요괴들에게 계급상승에 대한 욕구를 심어 넣어준 다음, 차근차근 맛 좋은 먹이들을 걸러내는 과정을 거친다.
3. 그렇게 선정된 맛 좋은 먹이들에게 최상급요괴라는 타이틀을 준 다음, 이제 배고플 때마다 하나씩 맛보는 것이다.
천하의 간악한 뱀 같으니라고.
[185일 차]자요로 선정되었다.
이 또한 유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이 녀석들의 입장에선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즈음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건 그렇게 말이 안 되는 일이 아니다.
외려,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뱀은 모르고 있던 게 아니다.
나를 벌레 취급한 게 아니었다.
첫날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존재를.
하긴 요천사자의 입구로 나왔고. 그때도 적어도 상급요괴 수준은 되는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니.
잘 키워 잡아먹는 것이라고나 할까.
지금, 나를 맛보고 싶어 안달 난 뱀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200일 차]마침내 200일이다.
수고한 나에게 박수.
짝. 짝. 짝.
마침 딱 내일이다.
내일 녀석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간다.
마침 정해둔 기한이기도 하고, 잘됐다 싶었다.
녀석과 붙어 이길 수 있겠단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현재 굉장히 강해진 상태다. 같은 최상급요괴라고는 하나, 다른 녀석들이 한꺼번에 덤빈다하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 뱀만은 달랐다.
도통 각이 나오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가는 이유는 어차피 내 목적은 녀석을 싸워 쓰러뜨리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출구를 봐뒀다가, 기회를 틈타 각이 보이면 바로 빠져나갈 셈이다.
이제까지 함께했던 원숭이 녀석들과는 이미 인사까지 다 마쳤다.
요괴들에게까지 정이 들어버리다니. 나도 참.
어쨌거나, 이 글이 이 수첩의 마지막이 될 듯 싶다.
나야 이걸 다시 볼 일이 없을 테니.
일단 이 수첩을 턱주가리 산맥의 가장 높은 곳에 묻어두고 간다.
만약 훗날 다른 요괴가 이걸 발견하게 된다면······ 상천세계의 전설적인 탈주요괴 ‘무서운 턱주가리’의 비밀기행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럼 이만.
⁞
[259일 차]오랜만에 적는다.
일단 현재 상태 체크부터.
온몸에 독이 퍼져 있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한 시간 정도.
그 외엔 치료에 전념하는 중이다.
독을 다 몰아낸 다음에야 끊어진 신경과 뼈들에 대한 복구 작업을 시행할 수 있을 듯하다.
글을 적기가 힘들다.
[261일 차]이틀 전에 이어 적는다.
나는 죽다 살았고, 현재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일단은 치료에 전념하는 중.
정신을 잃었던 기간이 거의 두 달 가량이다.
날짜는 근처의 다른 요괴에게 물어 확인했다.
오차가 있다하더라도 하루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운이 좋았다. 죽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으니.
여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즈음에 내가 정말로 벌레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한 마치 벌레 같은 몸이.
녀석의 힘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그 궤가 달랐다.
뭐랄까, 측정이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녀석과 마주한 순간 느꼈던 건, 무력감이 전부였다.
그때 일로 내가 얻은 건 두 가지다.
출구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것.
주제를 파악했다는 것.
잃은 것 또한 두 가지다.
건강과 자신감.
일단은 칼 자이드의 고유능력을 활용해 미래를 저당잡고, 몸의 치유부터 끝내야 할 듯싶다.
이게 회복 가능한 상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수첩을 쓸 일이 없을 듯하다.
[403일 차]흥분을 자제할 수 없어, 결국 수첩을 꺼냈다.
몸에 변화가 일고 있다.
원작에서의 칼 자이드에게 이 같은 변화가 있었던가.
능력이 진화를 한 듯하다.
힘의 성장에 가속화가 붙었다.
이제야 다시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깜깜하긴 하지만.
[489일 차]섣부른 희망이었을까.
성장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마치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한계치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칼 자이드가 만약 미들랜드 너머 모험에 탑에서까지 활약하는 녀석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 이전에 꺾이고 마는 녀석이었으니.
탈출하려면 이대로는 무리다.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 할 듯싶다.
가닥을 잡았다.
오랜만에 다시 힘이 솟는 기분이다.
D-day를 잡았다.
완벽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밖으로 나가야 에피소드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어차피 시간을 끈다 해도, 탈출 가능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됐다.
이제 다시 녀석을 만나러 간다.
부디, 이것이 내 마지막 기록이 되길.
-상천세계 일지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