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약속은 깨라고 있는 법이지
***
껌벅-.
번쩍 눈을 뜬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킨 뒤, 우선 주위부터 확인했다.
“흐음······.”
일단 기대했던 최고의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옛 용의 둥지는 이와 같은 작은 방이 아니었으니.
뭐,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내 의도나 목적, 계획 따위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또한 자기변호를 장시간에 걸쳐 하지도 않았고.
그저 대뜸, 함께 데려가 달라고만 했지.
이전에 내가 했던 행동들을 부인하기는 했으나, 딱히 확인할 방법도, 자초지종을 들은 것도 아니다.
즉, 나에 대한 수상함이 풀릴 리가 없다는 것.
저들로선 우선 나의 신병을 확보한 다음, 내게 물어야할 것을 정리하고, 질의응답을 거쳐 나의 의도를 파악한 뒤, 이후 상황에 맞춰 행동하자는 결론에 이르지 않았을까.
그러니,
삐걱-.
지금 내가 이 삐걱거리는 침상에 누워 있다는 것은, 옛 용의 둥지에서 깨어난다는 최고의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다음 순위는 되는 것이었다.
내게 숙소가 제공되었다는 건, 이를 마련해준 이의 호의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
즉, 굉장히 경우 있는 대접을 받은 것이다.
이를 제공한 녀석이 누구인지야 쉬이 짐작이 가능했다.
‘내 몸속에 번개를 심어두고 갔다면······ 내가 깨어난 것도 금방 알아차렸겠지?’
아마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끼이익-.
방문이 열리면서 역시나 예상했던 이가 슥 얼굴을 들이밀었다.
레오는 나를 보자마자 씩 웃었다.
“일어났어?”
녀석은 어쩐지 전에 비해 꽤나 편해진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기절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딘지 모르게 딱딱함을 풍기고 있었는데.
나는 녀석에게 인사하는 대신, 양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호의는 고마운데······ 나 안 묶어놔도 괜찮나? 두 손 두 발 다 자유로운데.”
“흐음, 굳이?”
“드라카의 딸한테 들은 거 아냐? 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악당인지?”
그러자,
“오해라며?”
레오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오······ 그걸 믿는다고?”
“물론 네가 속임수에 능숙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런 짓을 저지를 녀석은 아니니까.”
“······.”
뭐,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주인공이 보내는 신뢰라니.
이어, 나는 여태껏 미루고 있던 재회의 인사를 녀석을 보자마자 느꼈던 첫 감상으로 대신했다.
“그나저나 너······ 강해졌구나.”
“······.”
“몰라보겠는데?”
이에 잠시간 머뭇거리던 녀석이,
“······조금은?”
이내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겸연쩍어하는 동시에, 본인의 성취에 꽤나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조금이 아닌데 뭐. 물론 나의 훌륭한 지도를 받은 데다, 그간의 시간도 있었으니 어느 정도 발전할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검정 번개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 말에 녀석은 잠시간 놀라워하더니,
“역시 너도 알고 있었구나? 사실 이 색을 띠게 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어. 약간이지만 강해지긴 한 모양이야. 그래도······ 다음 단계까진 아직 멀었지만.”
“······.”
약간 당혹스러웠다.
검정의 번개를 사용하는 것에 모자라, 이미 더 높은 경지를 겨누고 있을 정도라니.
나는 새삼 복잡해진 마음으로 녀석을 재차 바라봤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난 독자 코멘트를 훑으면서 레오가 꽤나 강해졌으리라곤 예상했었다.
그걸 보고도 레오의 성장을 유추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솔직히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챕터의 목적과 방향성이 그것만을 의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건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이유야 간단한데, 아직 진행되지 않은 에피소드가 한참이나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메인 흐름의 줄기가 될 대형 에피소드들이.
모든 에피소드에는 그에 필요한, 혹은 적합한 수준의 능력이라는 게 있다.
주인공이 어떠한 적도 쉽게 갖고 노는 먼치킨 이야기가 아닌 이상에야,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적이나 관문이 존재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야 ‘긴장감’이라는 걸 줄 수 있을 테니.
헌데 6개월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현재까지 진행된 에피소드는 원작에 비해 극히 미미한 정도였다.
즉, 에피소드가 채 진행되기도 전에 이를 수행해야 할 캐릭터가 현격한 오버파워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
이렇게 되면 해당 에피소드의 적이나 관문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보상체계가 엉망이 되고, 이를 보는 독자들도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에피소드 자체가 그 존재이유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챕터야 상황에 따라 건너뛸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전부를 넘길 건 아니지 않는가.
‘······그 많은 내용들을 어떻게 다 풀어내려고.’
그러고 내가 자못 심각해진 눈으로 쳐다보자,
“정말이라니까?”
레오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건 빈말이 아냐. 그렇게 경계할 것까진······”
“응?”
녀석은 이 이야기 전반의 관한 내 우려 깊은 시선을, 본인에 대한 경계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이번에 만난 드라카는 물론이고, 심지어 힘을 빼앗기 전의 너에게도 아직 미치지 못하는 걸······.”
“······.”
뭐? 심지어?
나로선 황당함이 들 수밖에 발언이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무려 600일을 넘게 상천세계에서 구르며 간신히 습득한 힘인데. 그것도 칼 자이드의 고유능력을 풀로 돌리면서.
암만 주인공이라지만, 고작 6개월 만에 내 힘을 넘으려는 건······ 아무래도 좀 심한 거 아니냐고.
물론, 지금 그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헌데 레오는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
느닷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미들랜드로 넘어온 뒤, 내가 무척 강해진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럴수록 더 조급함이 생기더라고.”
갑작스레 자신의 고민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황당하게도, 주제는 본인의 ‘약함’이었다.
“아직도 턱없이 부족해. 이대로라면 탑의 정상은 구경조차 하지 못할 거야. 특히 이번에 드라카를 보고 그게 더 심해졌지. 녀석의 힘은······ 글쎄, 내가 지금보다 몇 배 더 강해진다고 해서 과연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영역이었어. 그런데 그런 녀석조차 무려 몇 천 년이나 오르지 못하고 있다는 거잖아? 심지어 그런 존재가 한둘도 아닌 여섯이나 더 있다는 거니······.”
“······.”
어이가 없었다.
그게 지금 힘을 다 빼앗긴 사람을 두고 할 말이냐고.
게다가 가지고 있는 생각조차 짧고, 얕았다.
이에,
“바보 아냐? 탑의 정상까지 가는 게 힘만으로 되는 거였다면, 말마따나 칠왕이라 불리는 녀석들이 이미 한 번씩 다 해먹었겠지.”
“······응?”
나는 간단히 쏴붙여 주었다.
“네 다른 동료들은 폼이냐? 길잡이나 해독가가 왜 있겠어? 탑의 정상에 오르는 자를 부르는 명칭은 모험왕이야, 싸움왕이 아니라. 그곳에 누가 먼저 도달할 수 있느냐의 싸움이라고.”
“그야 그렇지만······.”
“힘은 센데 몇 천 년이나 오르지 못했다? 그건 그냥 미련한 거 아냐? 미안하지만, 지금이라도 다른 길 알아봐야 돼.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
“1등 뽑는 달리기에서 중간에 멈춰서 있는 놈이 ‘힘은 그래도 내가 제일 세!’ 하고 외쳐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라고. 녀석은 그냥 거기 머물러 있는 놈일 뿐이야. 경쟁상대조차 안 된다고.”
물론, 그런 놈들이 죽자고 달려들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
그즈음 레오는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는지, 새로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나마 깨달았다면 다행이다. 이제야 좀 제대로 에피소드가 돌아갈지도.
그건 그렇고.
“그나저나······ 본론은 이게 아닐 텐데?”
쓸데없는 화제에 시간이 소요되고 말았다.
내가 그러고 빤히 쳐다보자,
“아, 그렇지!”
레오 또한 깜박했다는 듯 이마를 탁 쳤다.
“먼저 물어볼 게 있어. 네 의도와 목적, 계획, 드라카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 등등. 그게 확인되지 않으면······.”
“됐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게 너만 궁금한 건 아닐 거 아냐. 아니지, 너 또한 다른 누군가가 의문을 대신 물어봐주는 것일 뿐이겠지.”
“응?”
“그냥 바로 안내해.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한 번에 말해줄 테니까. 딸 쪽이 궁금해 하는 것과 아빠 쪽이 궁금해 하는 것 양쪽 다. 근래 수상쩍은 루덴코프 모험단의 움직임은 모두 다 내 계획 하에 진행된 거야. 다른 층을 습격하는 것에서부터 칠왕들의 회동을 주최한 것까지. 분명 그쪽도 나와 직접 대화하고 싶을 거라고.”
“치, 칠왕끼리의 회동을 주최했다고?”
그러고 레오가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으나,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씩 웃어줬을 뿐이다.
그러니 곧장 가자고, 옛 용한테.
*
“······뭣이?”
루덴코프는 귓가에 들려온 황당한 소리에,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잡혀? 그 녀석이? 누구한테?”
“그게 저······ 잘은 모르겠는데요? 그······ 부두목이 감시하라고 하던 꼬마 옆에 갑자기 나타난 녀석인데, 더벅머리에······ 아, 번개와 관련된 능력을 쓰는 녀석이라고만······.”
“······.”
이게 무슨 얼토당토 않는 소리란 말인가.
잡으러간 녀석이 되레 잡혔다니.
그것도 누군지도 모르는 놈에게.
루덴코프는 자신이 주걱턱에게 빌려줬던 힘의 목록에 대해 떠올려봤다.
이어,
“······말이 안 돼.”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설사 칠왕이 상대라 하더라도, 몸 하나 빼는 덴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녀석이 빌려간 것 중엔 한 때 칠왕이 소유했던 힘도 있으니.
아니, 애당초 누군가에게 잡힐 녀석이 아니었다.
무력도 무력이지만, 희한하리만치 경계심이 높은 녀석이 아닌가. 본인에게 닥칠 위험을 파악하지 못 했을 리가.
실제로 요즈음 루덴코프는 그 녀석이 자신에게 잡혀온 것 또한, 녀석의 계획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즉,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녀석은 일부로 잡힌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무렵,
‘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루덴코프는 머리가 지끈거려 옴을 느꼈다.
빌어먹을.
녀석과 만나고서부터 두통이 늘었다.
퍽-.
루덴코프는 자신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친 다음, 소식을 전한 부하를 향해 재차 눈을 돌렸다.
“그래서 지금은 어딘데?”
“······예?”
“그 녀석 어디에 있냐고.”
“그게······.”
황당하게도, 이어지는 대답이 없었다.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뭐야, 안 따라붙었단 말이야?”
“그, 그게······ 그 더벅머리가 너무 빨리 사라지는 바람에······.”
순간,
“켁! 케엑······.”
루덴코프가 부하의 목을 움켜쥐었다.
“근데 엉!? 내게 보고를 하러 왔단 말이야? 소재파악도 못한 주제에? 엉? 엉!? 너 죽고 싶냐? 엉? 엉!!?”
“자, 잘못······! 컥, 커억······.”
그러나 잠시 후,
‘아니지. 아니지······.’
루덴코프는 움켜쥐었던 부하의 목을 다소곳이 내려놓았다.
물론, 녀석의 목이 이미 부러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바보 같긴.’
다시 생각해 보니, 당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갈 곳이야 뻔하지 않은가.
옛 용의 둥지.
당장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쩌면 계획만 살짝 변경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딸을 납치해 오는 게 아니라, 곧장 그리로 가는 것으로.
“흐음······.”
그즈음 루덴코프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였다.
하나. 일단 주걱턱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둘. 본래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
어차피 주걱턱이 준비는 다 끝내놓고 간 상황이었다.
곧장 출정하기만 하면 된다.
이윽고,
‘뭔지는 몰라도······ 아무 말 없었으니 그대로 진행하면 되는 거겠지?’
루덴코프는 결정을 내렸다.
정해진 일정에 맞춰 그대로 움직이기로.
이어,
“다들 준비해! 부두목이 옛 용의 부하에게 잡혀갔다! 전쟁이다!”
곧바로 부하들에게 준비하라 일렀다.
목적지는 탑 55층. 옛 용의 둥지였다.
잠시 후,
“두목, 전원 준비됐습니다!”
부하들로부터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루덴코프 또한 채비를 갖추고 막 나가려던 참에,
‘······너무 급한가?’
문득, 자신이 녀석을 너무 믿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메시지가 없었음에도, 이것이 당연히 녀석의 계획 중 일부라 믿는 것.
녀석의 능력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는 것.
물론 이는 그간 주걱턱이 보여준 행동과 녀석의 그 놀라운 정보력에 근거한 것이긴 하나, 그럼에도 그 믿음이 스스로도 놀랄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언제 이렇게 다른 녀석을 높이 산 적이 있었나?
“흐음······.”
그러나 이내,
“뭐······ 그럴 수도 있지.”
루덴코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털어냈다.
그래봐야 쓸 만한 장기 말에 불과한 정도이지 않나.
어차피 녀석은 자신을 떠날 수도, 자신에게 저항할 수도 없는 신세였으니.
루덴코프는 호쾌히 문을 밀어 젖혔다.
“좋아, 출정이다!”
*
모험의 탑 55층.
옛 용의 거처.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성사된 만남에 놀랐다.
실은 이미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눈을 뜬 곳이 다름 아닌, 용의 둥지 내에 마련된 손님용 숙소였을 줄이야.
분명 에스트리아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반대와 거부가 있었을 텐데도 이런 일이 가능했다는 건······ 레오 녀석이 내게 가지고 있던 신뢰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리라.
‘좀 더 칭찬해줄 걸 그랬나······.’
괜히 마지막에 쏴 붙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딴엔 그게 고민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공감이나 해줄 걸.
그때였다.
“주걱턱 님? 들어오라 하십니다.”
대전의 문을 지키고 있던 한 남자가 내게 신호를 줬다.
“응? 아, 예.”
내가 그러고 꾸벅 인사하자, 그는 나보다 더욱 허리를 낮춰 인사했다.
“부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으시길.”
놀랍도록 예의바른 모습이었다.
‘역시 용인가······.’
옛 용의 둥지에 있는 이들은 모두 용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용의 모습은 수장만이 취할 수 있는 것.
함부로 본체를 드러내는 건, 그들의 수장인 드라카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용’이라는 종족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특징엔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약속을 중시하는 면’과 ‘점잖음’이다.
저들은 대게 ‘맹약’을 통해 힘을 발휘하고, 누구에게나 점잖게 응대한다.
드라카는 심지어 자신의 힘을 훔쳐간 루덴코프에게조차 존대를 잊지 않을 정도이니.
그리고 이들이 이 두 가지 면을 그토록 강조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실은 저 용들이야말로, 외려 이 같은 성향에서 가장 거리가 먼 족속들이기 때문에.
실제로 용은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인간을 비롯한 다른 종족은 물론이거니와, 바로 옆의 또 다른 용들까지도.
그래서 그들에겐 어길 수 없는 약속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용의 점잖은 모습은 기껏해야 ‘체’일 뿐이다. 점잖아 보이는 스스로의 모습에 도취될 뿐, 실제로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게 바로 저 용들이니.
즉, 아주 속이 시커멓기 짝이 없는 녀석들이라는 것.
분명 내게 허리 굽힌 이 녀석도 속으로는 ‘공무를 위해 건방진 인간 따위에게도 고개를 숙일 수 있는 나······ 멋져’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눈에 보인다, 보여 이놈아.’
내가 그러고 혀를 차고 있을 즈음,
끼이익-.
대전의 문이 열렸다.
나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와······.’
마치 밤하늘과 같은 눈빛을 가진, 아주 늙고 대단히 거대한 은색의 용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실로 감탄이 나오는 외형이었다.
저토록 신비롭고, 우아하며, 고아한 생물이라니.
상천세계의 요롱이를 봤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탄성을 참아낸 뒤,
“인사드립니다. 저는 주걱턱······ 아니, 히로라고 합니다.”
얼른 예의를 갖춰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러자,
-그래요, 반가워요.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고······.
나의 상념을 깨는 음성이 대전 내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드니, 맑고 고운 미성의 주인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후······.”
옛 용 드라카, 맹약의 주인.
무려 5000년을 살아온 칠왕 중 하나.
이 녀석 앞에선 당당해야 했다.
앞으로의 일은 모두 이 용에게 달려있다 봐도 무방한 것이었으니.
“예, 실은 드릴 말씀이 있어······.”
-말해보세요.
이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맹약의 주인이시여······ 혹시 거짓말 한 번만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
곧이어, 장내에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웬 인간 녀석이 감히, 맹약의 주인더러 다짜고짜 거짓말을 할 것을 요구하다니.
대전에 있던 몇몇은 가장하고 있던 점잖음을 내던져버릴 만큼 흥분한 모습이었다.
“저, 저 인간 따위가 무슨 망발을······!”
“지금 그게 무슨 개소리······! 크흠······.”
물론, 저들의 반응을 감상하는 것 또한 굉장히 즐거운 일이겠으나 당장 그럴 여유는 없었다. 내겐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 계획의 핵심이 될 또 다른 존재와의 대화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저 녀석이 제가 일전에 말씀드린 옛 용입니다. 가능한가요? 저 용과의 맹약을 깨는 게? 아시겠지만······ 용의 힘은 약속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가 내게 전성을 보내온 건,
-재밌는 일이 있다더니······ 과연. 인정하도록 하마.
주위의 소란이 거의 다 잦아들었을 무렵이 되어서였다.
조급해진 나는 다시금 그를 재촉했다.
‘그래서 된다는 겁니까, 안 된다는 겁니까?’
곧이어,
-말해 뭣하겠느냐. 저 도마뱀이 강력한 존재라는 건 인정하지만······ 나 또한 존재한 이래로 약속이란 걸 지켜본 적이 없다.
훼방꾼 신에게서 마침내 기다리던 말이 흘러나왔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