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73
173화 상환
***
“······정말이지요?”
에스테리아는 방금 전과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질문을 또 한 번 반복했다.
내 말이 진짜냐고.
무려 이번이 네 번째였다.
“그렇다니까.”
“······.”
그리고 예상컨대 정확히 3초 뒤, 다섯 번째 사이클을 돌릴 것이다.
3, 2, 1······.
“······아뇨, 당신 말은 믿을 수 없어요.”
이것 보라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너희가 누구 말을 믿어본 적은 있니?”
“무례하군요! 용은 믿음과 약속을 중시하는 종족입니다!”
“네네, 물론 그러시겠지요.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너는 꽤나 솔직한 편이긴 하구나? 속으론 절대로 믿지 못하면서 말로만 신뢰니, 믿음이니 떠벌리는 게 용들의 종족 특성인데 말이야. 아······ 혹시 어머니 쪽 영향인가?”
“······.”
그러고 잠시간 침묵하던 에스테리아는 이어,
“좋아요. 시간낭비라는 걸 인정하겠어요.”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방법이 있죠. 그럼 당신이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제게 맹세해 주세요.”
“맹세?”
“네.”
이 꼬맹이가 말하는 맹세라는 건 달리 말해, 맹약(盟約)이다.
약속한 사안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피할 수 없는 저주가 닥치게 되는 악독한 용들의 무기.
참······ 간교한 녀석 같으니라고.
“어디서 못 된 것만 배워가지곤······ 걸핏하면 약속이니 맹세니. 힘을 남용하다간 큰 코 다칠 거다, 꼬맹아.”
“내 코는 크지 않아요. 크다는 건 당신 턱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겠죠. 나는 그저 내 친구들이 살아있다는 걸 확신하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맹세를 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나요?”
“······.”
물론,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럼 대가는?”
“······네?”
“내가 맹세해주는 대신 얻을 수 있는 대가. 너도 뭘 걸어야 공평한 거 아니겠어? 나도 이렇게 거짓말쟁이로 의심받는 거 기분 나쁘다고.”
에스테리아는 이에 무언가를 가만 생각하는 듯 싶더니,
“······좋아요.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원하는 부탁 하나를 들어드릴게요.”
놀라운 발언을 했다.
“······진심이야? 부탁 하나를 들어준다고?”
“네. 물론, 제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요.”
이건 좀 다른 의미로 당혹스러웠다.
이런 행운이 다 있다고?
“좋지. 대신 무르기 없기.”
나는 혹여나 말을 바꿀까 싶어, 냉큼 동의했다.
이어,
스스슷-.
에스테리아에게서 피어난 푸르스름한 기운이 잠깐 동안 우리를 감쌌다가 사라졌다.
우리의 약속에 용언(龍言)이 깃든 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용은 약속을 어기지 않으니까.”
“그야 그렇지만······ 근데 암만 생각해도 네가 손해인 것 같은데.”
“아뇨, 정당한 계산이에요. 당신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나는 영영 잃은 줄 알았던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됐다는 소리니까. 그제까지의 오해와 새로운 희망에 대한 값까지 친 거죠. 다만, 반대로 그것이 지켜지지 못했을 경우엔······ 아시죠? 당신은 감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저주에······.”
“알았어, 알았다고. 꼬맹이가 벌써부터 겁주기는.”
“······.”
어쨌거나 생각지도 못한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왠지 오늘 일이 술술 잘 풀릴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때마침,
뿌우-.
신호가 들려왔다.
기다리던 녀석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왔다. 그럼 이따 보자고.”
그때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버지는 당신을 믿지 않아요. 아무리 그게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할지라도 말이에요.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그때 대전에서 당신의 얘기를 들었던 모든 용들이 다 마찬가지일 거예요. 물론, 나도 포함해서. 그러니······.”
“뭐야, 설마 나 걱정해주는 거야?”
“선택을 잘 하라는 소리예요. 이제 와서 우리를 배반하고 다시금 루덴코프의 편에 섰다간······ 그 끝이 결코 좋지 않을 거예요.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요.”
녀석이 경고 아닌, 경고를 해왔다.
짜식이 건방지게스리.
“······그래 뭐, 명심할게.”
나는 그러곤 나가려다 말고,
“근데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슬쩍 뒤돌아선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네?”
“내가 언제 너희 편이라고 했냐?”
“······무슨?”
“아냐, 됐다. 나중에 보자고.”
그러곤 한 차례 씩 웃어 보인 뒤, 곧바로 문 밖으로 나섰다.
물론 별 뜻은 없었다. 그냥 저 건방진 어린 꼬맹이를 골려주고 싶었을 뿐.
아마 녀석은 내 말을 해석하기 위해 죽어라 머리를 굴리지 않을까.
어쨌거나······ 이제 내 비곗덩어리 두목을 맞이할 시간이었다.
*
나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드라카의 사절 둘과 함께, 용의 둥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루덴코프의 진영으로 향했다.
“오! 왔어?”
루덴코프는 나를 보자마자,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계획이 변경됐으면 말을 해줬어야지.”
“음?”
솔직히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화를 낸다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곧바로 내 저의에 관해 물을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도, 녀석은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해서도 별 문제 삼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고.
이유가 뭘까.
나는 어째선지 기분이 몹시도 좋아 보이는 루덴코프를 두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와 같은 내 행동을 본래부터 계산해두고 있어서?
아니면 그냥 단순히 화를 참는 것?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아온 문제를 마침내 해결하게 된 날이라 기분이 좋아서?
“······,”
뭐, 어차피 상관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어쨌거나 본래의 계획을 파기할 생각은 없다는 뜻일 테니.
하여,
“뭐······ 대충 잘 맞춰서 왔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녀석은 그런 나를 보고 씩 웃더니,
“근데 지금 이 상황은 뭐야? 엉? 어쩌다 이 두 도마뱀들과 함께 마중을 나온 거지? 이 두 녀석은 그냥 처리하면 되는 건가? 엉? 엉? 이놈들은 보기만 해도 역겨운데······ 어떻게 하면 돼? 얼른 말해달라고!”
나와 함께 온 사절단들을 손가락질했다.
그러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몽둥이를 빼들었는데, 정말 당장이라도 두 용의 머리통을 날려버릴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
홱-.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슬쩍 사절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유야 별 게 없다. 그냥 답변을 토스한 것뿐이었다.
사실 이들의 처사에 대해선 딱히 생각해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저, 저희는 옛 용의 사절단입니다. 맹약의 주인께서 채무불이행자를 둥지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약간 당황한 듯, 사절 중 하나가 다소 긴장된 어투로 본인의 임무를 설명했다.
“크하하핫, 모셔오라? 참나, 하여간에 이 도마뱀들도 대단하다니까? 곧 죽어도 존대라니. 이봐, 너 그러다 지옥에서 후회한다고. 엉? 엉!? 내게 욕 한 마디 해보지 못하고 머리통이 터져버렸다고. 크하하핫!”
그러곤 대뜸 몽둥이를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에효······.
“잠깐.”
나는 별 수 없이 녀석을 멈췄다.
하여간에 망나니 녀석 같으니라고.
“소란은 좋지 않아.”
헌데,
“······그래? 계획은 또 변경?”
녀석의 반응이 약간 이상했다.
음? 계획?
마치 자신의 행동이 우리의 계획을 따른 것이라는 듯한 말과 표정이었다.
이에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다,
‘아······.’
이내, 전에 루덴코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에스트리아의 납치에 성공한다면 전혀 문제될 게 없지만, 혹 그게 잘 되지 않을 경우엔 일단 부하들을 몽땅 끌고 옛 용의 둥지 앞으로 가야 된다고. 그러곤 최대한 소란을 일으키는 척, 시늉을 내야 한다고. 그러지 않는다면, 옛 용은 굳이 우리를 상대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
설사 ‘균형을 맞추는 자’를 부르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옛 용을 협상테이블에 올려놔야 한다고.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생각보다 말을 굉장히 잘 듣는 스타일이었다.
“상황이 바뀌었잖아. 방금 못 들었어? 초대받았잖아. 딱히 힘들이지 않고 옛 용의 둥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상황이야. 괜히 이들의 머리를 터뜨렸다간, 도리어 상황만 이상해지겠지.”
그러자,
“아아, 그렇군. 이해했다.”
루덴코프가 얼른 몽둥이를 내렸다. 심지어 저 멀리 내던지기까지.
휘리릭-.
이어,
“얼른 가자고.”
씩 웃으며 내 옆에 탁 붙었다.
무척이나 잽싼 움직임이었다.
“주목! 모두들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가 2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곧바로 공격 시작하라고!”
“옙, 두목!”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옛 용의 둥지를 향해 이동했다.
⁝
잠시 후.
“너 이 녀석······ 이걸 노리고 잠입했던 거구나? 재주도 좋은 걸?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사절단 둘을 먼저 가게끔 앞세운 뒤, 루덴코프가 내 옆구리를 툭 찌르며 말을 걸었다.
“······어쩌다 기회가 생긴 것뿐이야. 용인의 보호자로 온 녀석이 아는 놈이더라고.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
“아······ 혹시 그건가? 너랑 같이 미들랜드로 넘어왔던 녀석들 중 하나?”
“맞아.”
“크하하핫, 그 자식들 도망칠 땐 언제고······ 이렇게 도움이 되는구먼!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일이 굉장히 잘 풀리고 있는 걸?”
“······.”
이럴 때 보면, 정말이지 단순한 녀석이었다.
기본적으로 일이 너무 잘 풀린다 싶으면 의심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더군다나 본인이 알지도 못한 사이에 변경된 계획인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장 코앞이 용의 둥지였다.
이쯤 되면 약간이라도 경계심을 품을 법 한데······.
나는 슬쩍 루덴코프를 곁눈질했다.
녀석은 적진 한복판에 들어서고 있었음에도,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외려, 신이 나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설사 같은 칠왕이라 할지라도, 감히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심지어는,
“크하하핫······ 오랜만이군 이곳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던 곳이 이토록 아름답게 보일 줄이야!”
용의 둥지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황당하게도, 루덴코프는 마치 제집에 온 것 마냥 둥지 곳곳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용족들이 만류하려 했음에도,
“루, 루덴코프님! 이, 이쪽으로······.”
“안, 안내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뭐야, 안 꺼져?”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빨리, 빨리 가자고! 이쪽이야.”
도리어 앞장 서 길을 안내하기까지.
하기사, 녀석에게 옛 용의 둥지는 익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래 전 녀석은 저주를 풀기 위해 이곳을 수백, 수천 번도 넘게 찾아왔었다고 한다.
다만, 옛 용의 거부로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고.
분한 마음에 녀석을 죽이려고 끝없이 시도해봤지만, 매번 ‘균형을 맞추는 자’가 등장해 끝장을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마 지금 묘한 기분이긴 할 것이다.
이윽고,
“여기군.”
우리는 대전 앞에 당도했다.
루덴코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발로 뻥 차버렸다.
쾅-.
고풍스런 문양이 양각되어 있던 문 한 짝이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어이, 들어가자고.”
이어 그를 따라 들어가자마자,
-오랜만입니다, 바실리 루덴코프. 지치지도 않고 또 한 번 찾아왔군요.
놀랍도록 아름답고 위용에 찬 생명체가 우릴 반겨주었다.
드라카는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한 모습이었다.
루덴코프는 그런 드라카를 잠시간 바라보더니,
“여전하구나. 역겨운 도마뱀.”
싸늘히 맞받아쳤다.
-역시나 교양 없는 행동과 말투는 그대로시군요.
“크크크······ 불만이냐? 쳐 죽일 도마뱀 같으니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대전을 슬쩍 둘러봤다.
사전에 말을 맞춘 대로, 드라카 외엔 아무도 없었다.
이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것이었다.
혹, 분노한 루덴코프에 의해 사상자라도 나오면 안 될 일이었으니.
그때였다.
“이봐, 내가 굳이 이 엿 같은 도마뱀과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는 없지?”
루덴코프가 내게 고함치며 물었다.
녀석의 눈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던 모습은 어디가고, 금세 과격해진 모습이었다.
드라카를 눈앞에 두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고나 할까.
“얼른, 얼른, 얼른! 시작하라고.”
“······.”
루덴코프는 아직 어떠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죽음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녀석이 아는 건, 그저 그게 가능하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만 말해줬으니까.
그러니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진정하라고. 이미 옛 용과 말은 다 끝냈으니까.”
그러자,
“뭐? 벌써? 크하하핫! 정말로?”
루덴코프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이어 흥분이 극에 달한 듯, 녀석의 온 몸에서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다만, 먼저 말할 게 있어.”
“뭐지?”
“내 힘을 먼저 돌려줘야해. 그게 조건이다.”
“······뭐?”
순간,
펑-!
······.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
“휘유, 성급하기는.”
혹시 몰라 카밀라의 힘을 끌어올려둔 게 다행이었다.
반사적으로 막아내지 못했다면, 정말로 위험했을지도.
녀석의 공격을 막아낸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다행히 감각은 있었지만,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뭐하는 짓이냐, 네놈. 대체 뭔 짓거리를······.”
“들어보라고. 30초만이라도. 금방 이해가 될 테니.”
나는 녀석의 불같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또 다시 공격을 받는 것보다야, 이쪽이 편했으니.
이윽고,
“······읊어봐.”
다행히 녀석이 대화 의지를 보였다.
물론 진정되지 않은 호흡으로 판단컨대, 간신히 이성만 붙들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네가 어떤 식으로 죽음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선 알 거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몇 번이나 설명해 줬으니.”
“······기한임의조정.”
“맞아.”
용들은 이미 발동된 저주에 관해선 따로 손을 쓰지 못한다.
저주를 소멸시킬 수도, 취하할 수도 없다. 그건 용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극히 드문 힘을 가진 용들의 경우, 완전히 똑같지는 않으나 그와 비슷한 일을 행할 수 있다.
바로 ‘약속기한 임의조정’이라는 능력을 통해서.
능력의 개념 자체는 간단하다.
말 그대로, 약속의 기한을 바꾸는 것이다.
상대의 동의만 있으면 기한을 당길 수도, 또 늘릴 수도 있다.
그렇게 늦게라도 조건을 갖춘다면, 약속을 이행한 것으로 전환날 수 있다는 것.
옛 용에게 이 같은 능력이 있다는 건, 원작에서 캐치한 내용이었다.
레오가 드라카와의 맹약훈련 도중 단 한 차례 기한을 지키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드라카가 그냥 넘어가 줬던 것이다. 저 기한을 임의로 조정하는 능력을 통하여.
당시 제대로 조명된 부분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 능력의 가능성에 대하여 당시에도 어느 정돈 깨닫고 있었다. 레오 때와 같이 기껏해야 1분 남짓을 조정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천 년이 지난 약속기한까지도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옛 용의 이 같은 능력을 떠올려내고 루덴코프에게 설명했던 것이, 내가 오늘의 계획을 꾸릴 수 있게 된 시작점이었다.
물론, 당시 이를 설득하기 위해 꽤나 애를 먹긴 했지만.
어쨌거나 기억하고 있으면 됐다.
“이건 이미 확인이 끝났다. 가능하다고 하더군. 엄청난 힘을 쓰기는 해야 하지만 말이야. 그렇지, 드라카?”
옛 용은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네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드라카에게도 너처럼 나만이 아는 귀중한 정보의 제공을 약속한 뒤, 너와의 맹약에 있어 그 능력을 발휘해 달라고 요청했어. 그리고 드라카가 이를 수락했지. 그 과정에서 얼마만한 어려움이 있었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을게.”
약간의 부담감을 주기 위한 발언이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은 듯했다.
“계속해봐.”
“그러니 네가 드라카에게 빼앗은 힘을 먼저 돌려주면, 드라카는 잠시만 쓰고 돌려주겠다는 그 약속의 기한을 임의조정 함으로써 네게 ‘죽음’을 돌려주게 될 거야.”
“그렇지. 그것까진 나도 알아. 근데 문제는······ 그전에 왜 네가 먼저 나오냐는 말이다.”
그러곤 루덴코프가 으르렁거렸다.
“그야 간단하지. 네가 죽음을 돌려받고 난 뒤, 나와의 약속은 모른 체 할 수도 있으니까.”
“하, 그게 무슨 어이없는 소리냐. 그 또한 너와 나의 맹약으로 된······”
순간,
“······그렇군.”
루덴코프가 말을 멈추곤 인상을 굳혔다.
“이제 알아차렸나 보네. 네가 드라카에게 용의 힘을 돌려주게 되는 순간, 너는 맹약에 힘을 불어넣을 수 없게 돼. 즉, 우리의 약속에 강제된 힘이 사라진다는 거지.”
“······.”
“그러니 내가 먼저 힘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거야. 그게 순서다.”
그러나,
“웃기는 소리. 내가 네게 힘을 돌려주고, 다음에 저 도마뱀에게도 힘을 돌려준다고 쳐. 그런데 힘을 돌려받고도 만약 저 도마뱀이 그 기한을 조정해주지 않으면? 나는 그냥 힘 두 가지를 고스란히 빼앗기는 거 아닌가? 말마따나 용의 힘을 넘겨준 뒤라, 내가 죽음을 돌려받지 않으면 네가 저주를 받게 된다는, 그 약속조차 강제되지 않는데?”
녀석 또한 그렇게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았다.
“맞아, 아주 멍청하지는 않군.”
“허······.”
“그러니 네 입장에서 한 가지를 더 요구할 순 있겠지.”
“뭐?”
나는 이에 대답하는 대신, 나와 드라카를 손가락으로 번갈아 가리켰다.
그러자,
“아하, 그렇군.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
의아해하던 루덴코프가 곧이어 다시 슬그머니 웃었다.
이어, 녀석이 드라카에게 물었다.
“어이, 도마뱀. 제3자의 행위에 관련한 것도 약속의 내용으로 정할 수 있는 거지?”
드라카는 이를 순순히 인정했다.
-맞습니다.
“좋아, 그럼 문구도 내가 정해주지. 지금 내가 보는 앞에서 둘이 맹약을 맺으라고. 내게서 힘을 돌려받은 도마뱀이 기한을 임의 조정해주지 않을 시, 네놈이 그 대가를 치르겠다고.”
“좋아.”
“아참, 그 약속엔 기한을 조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확실히 박혀 있어야 돼. 크흐흐, 괜히 뒤통수를 맞기는 싫거든. 그리고 기한은 내가 힘을 넘긴 바로 그 다음으로. 이왕이면 1분 이내면 좋겠는데.”
“이야, 나름 치밀하네. 좋아.”
나는 곧바로 루덴코프가 불러준 대로 옛 용과 맹약을 맺었다.
이어,
스스슷-.
옛 용의 전신에서 피어나온 푸르스름하게 기운이 우리를 감쌌다.
그리고 이를 본 루덴코프가,
“크하하핫,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다고!”
미친 듯이 웃었다.
용언이 작동된 걸 확인한 까닭이었다.
“아, 그리고 네 놈에게 빌려줬던 힘들은 다 반납 받아야겠지? 힘을 돌려받은 네놈이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모르니.”
“아아······ 마음대로 해.”
나는 그러곤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쉽네.’
녀석의 말 대로였다. 실은 힘을 되찾은 상태로 그것들을 운용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곧이어, 녀석이 내게 빌려줬던 힘을 다 가져가버렸다.
이제 내겐 녀석의 공격을 방어할 최후의 수단조차 사라진 셈이었다.
만약 이즈음 녀석이 위화감을 느끼고 나를 습격한다면······ 꼼짝없이 죽는 수밖에.
그러나 다행히도, 루덴코프의 얼굴에서 의심의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녀석은 그저 앞으로 다가올 일이 마냥 기대된다는 듯, 눈을 번뜩인 채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깝긴 하지만······ 기꺼이 주도록 하지. 아무렴, 죽음보다 소중하진 않으니까. 그래, 지난 6개월간 잘 썼다고.”
팟-.
녀석이 내게 힘을 돌려주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던, 상천세계에서의 바로 그 힘을.
······.
나는 전신에 차오르는 충만함에 감격했다.
이게 얼마만이지······.
놀라웠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가만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당장 눈앞의 두 칠왕을 때려눕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크하하핫, 감격스럽나보군. 하여간에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녀석이군. 내가 누군가에게 힘을 돌려준 건 네놈이 최초다. 마음껏 즐기라고.”
그 말 그대로였다. 감격스러울 수밖에.
심지어 나는 루덴코프를 만났을 무렵보다도 훨씬 더 강해진 상태였다.
이유야 간단한데, 지금 루덴코프에게서 돌려받은 이 힘은 ‘파워밸런스 조정’에 의해 깎여나가지 않은, 그 당시 그대로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힘을 빼앗겼던 게, 도리어 복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호오, 힘을 얻더니 모습까지도 변했군. 꽤 괜찮은데?”
“그냥 뭐······ 약간 업그레이드 한 느낌이지.”
루덴코프는 그러고 한층 강해진 나를 잠시간 감상하더니,
“그건 그렇고······ 그럼 계속 정산해야겠지?”
이어 드라카에게도 오래 전 빌려갔던 용의 힘을 되돌려주었다.
팟-.
드라카는 힘을 돌려받은 뒤에도 크게 감흥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나와는 달리, 녀석에겐 그 힘의 유무가 딱히 그렇게까지 의미가 있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럼 이제······ 내가 받을 차례인가?”
루덴코프가 씩 웃으며 드라카를 쳐다본 순간, 여느 때완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장난스럽게 웃었을 뿐이다.
-이야, 정말로 줄 줄이야······ 주걱턱 씨, 실로 감명 깊게 봤습니다. 대단하군요. 확실히 그대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재미있네요, 이 같은 즐거움은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본 것 같습니다.
이에,
“별말씀을.”
나 또한 웃으며 화답했다.
“······뭐지?”
그쯤 되니, 루덴코프로서도 약간의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리라.
녀석이 의문에 찬 눈으로 나와 드라카를 번갈아 쳐다봤다.
“뭐긴 뭐야. 보면 몰라?”
“응?”
“안 해주겠다는 거잖아, 기한 조정.”
“······.”
그러나 루덴코프는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
“나 원, 장난도······.”
픽 웃을 뿐이었다.
“1분이야, 1분. 1분 안에 내게 죽음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 녀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이에,
-그런가요? 어떻게 되죠? 사실 이건 저도 정말 궁금한 것인지라······.
“그럼 우리 다 같이 한 번 지켜보자고. 1분 뒤에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
그리고 실제로 1분이 지났음에도,
“······네 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즈음 완전히 돌아버린 듯, 죽일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루덴코프에게 말했다.
“뭐가 그리 억울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어? 원래 내 걸 되찾아왔을 뿐인데. 누가 보면 도둑맞은 줄?”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야겠다. 말해라.”
“말해주세요, 해봐.”
“사지가 잡아 뜯기면서도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보자꾸나.”
“뭐······ 해보던가.”
그러곤 나는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사실 나도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 지금은 그냥 원금만 받은 거잖아? 무려 6개월간이나 빌려줬는데. 내가 무이자란 말은 안했지 아마?”
이어 내게 쇄도하는 녀석을 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자도 좀 받아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