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증명의 기둥
***
치누아비는 눈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전경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저 광활한 대지, 마치 각자의 영역을 주장하는 듯 제멋대로 꽂혀 있는 열 개의 기둥이 있었다.
색도, 재질도, 두께도, 모양도······ 그 무엇 하나 같은 게 없었지만, 단 하나 공통점이라면 실로 거대하다는 것.
이름하야 증명의 기둥.
아주 오랜 옛날, 힘에 자신이 있던 열 명의 거인들이 누구의 힘이 가장 센지를 겨루기 위해 탑 곳곳에서 가져다 꽂은 것으로, 가장 무거운 기둥을 가져온 이가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얽힌 기둥들이었다.
물론 모두의 힘이 호각을 다투었다는 전설과는 달리, 저 기둥들이 모두 비슷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세간에 알려져 있기를, 기둥의 무게는 각각이 모두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기둥마다 증명의 의미가 다르다고 했다.
첫 번째 기둥은 ‘개미를 짓누를 수 있는 자’를,
두 번째 기둥은 ‘모래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자’를,
세 번째 기둥은 ‘돌멩이를 쥐어 부술 수 있는 자’를.
첫 번째에서 세 번째 기둥까지는 모두 성인이 되기 전의 어린 거인들 용이며, 스무 살 이전에 세 번째 기둥을 뽑아내야만 진정한 거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네 번째 기둥은 ‘바위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자’를,
다섯 번째 기둥은 ‘나무를 뽑아들 수 있는 자’를 뜻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거인 무리에 소속될 자격을 입증하는 용으로, 이를 들지 못하는 거인은 무리에서 쫓겨난다고 했다.
여섯 번째 기둥은 ‘비교적 강한 힘을 가진 자’를,
일곱 번째 기둥은 ‘다른 이를 압도하는 힘을 가진 자’를,
여덟 번째 기둥은 ‘힘센 이들의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 자’를 의미했다.
여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는 보통의 거인이 증명할 수 있는 최고의 힘이며, 이다음부터는 ‘왕’의 자질이 있는 거인만이 기둥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했다.
아홉 번째 기둥은 ‘무리를 이끌 수 있을 만큼 힘이 센 자’를,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기둥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자’를.
증명의 기둥은 모든 거인들이 거쳐 가는 통과의례이자, 그들의 왕을 뽑는 선출기구이며, 또한 어느 것에도 무관심한 거인을 유일하게 끓어오르게 만드는 장난감이다.
고로 함부로 건드려서도,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는 위험한 것이었다.
자칫, 모든 거인들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으니.
헌데 지금 저 거인들의 신성한 기둥들을 향해 마치 산보라도 나온 듯,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이가 있었다.
치누아비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이건 아냐.’
이건 아니다. 지금 뭔가가 완전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
저건 거인들이 본인들의 힘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였다. 한낱 인간이 아니라.
제아무리 형님의 힘이 세다 할지라도, 거인을 따라갈 순 없지 않은가.
하물며 저 기둥들은 그들이 힘을 증명하기 위해 신성시하는 신물과도 같은 것.
장난으로 접근했다간 괜한 화를 부를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이에,
“저······ 형님?”
치누아비는 슬그머니 주걱턱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응?”
“이거······ 이게 지금 맞는 걸까요?”
“왜? 두근두근 거리지 않아?”
“······.”
역시 그때 너무 긁었던 걸까?
심해를 탐험해 보자니, 흑어구이를 해먹어봐야 하지 않겠느니······ 그때 너무 자극해버렸던 걸까?
“저기 그리고······ 분명 주걱턱 외형은 당분간 숨기신다고······.”
“에이, 여기서야 상관없겠지. 죄다 거인들인데. 여기에 루덴코프의 부하들이 올 것도 아니고, 이 녀석들이 루덴코프를 신경 쓸 것도 아닌데.”
“······.”
실수였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형님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깜박하고 말았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이야, 저기 거인들 좀 봐. 꽤 많이 모였는데?”
고민만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말마따나 인간이 증명의 기둥을 들어 올린다는 소리에, 무수히 많은 거인들이 몰려오고 있었으니.
게다가 심지어는,
“이봐, 이 덩치만 큰 허약한 약골들아! 최근엔 일곱 번째 기둥을 들어 올린 녀석도 없었다면서? 니들이 그러고도 거인이라고 할 수 있냐? 내가 들어 올리는 걸 잘 보라고!”
마치 광고라도 하듯, 고래고래 고함까지 지르는 게 아닌가.
큰일이었다.
이대론 안 된다. 멈춰야 했다.
이에 치누아비는 다급히 소리쳤다.
“형님!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왜, 뭐가?”
“저희 목적에 맞는 일을 해야죠! 타미, 타미요! 기둥을 들어 올리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타미의 흔적을 찾고 거기 얽힌 문제를 푸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우리 본 목적에 집중을 해야지요!”
그러자,
“흐음······.”
갑자기 형님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자신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러곤,
“뭐야, 다 알고 아무 말 없던 거 아니었어?”
대뜸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예?”
“나는 또 일부러 거인들이 모이는 걸 기다리는 건 줄 알았지 이제 슬슬 흔적을 찾아봐. 웬만한 거인들은 다 모인 것 같으니까.”
“······아.”
이곳은 거인들의 땅.
타미의 소식을 알거나, 그 흔적과 이어져 있는 이 또한 당연지사 거인일 수밖에 없다.
고로,
“내게로 모든 시선이 끌렸을 때 찾고, 문제 해독하고, 싹 다 처리하라고. 저기서 힘 자랑하는 게 내 동료라고 말하면 뭐든 신나서 얘기하지 않겠어? 저 세상 무관심한 거인들이라 할지라도.”
흔적이 제 발로 찾아온다는 뜻이었다.
딱히 힘들이지 않고도.
흔히들 인간이 아닌 세 종족의 특성을 비교해 간단히 나타내는 말이 있다.
진지하지 않은 도깨비.
믿지 않는 용.
상관하지 않는 거인.
대부분의 거인은 남의 일에 별 관심이 없다.
이는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그들의 게으른 성격 탓도 있지만, 그냥 그들의 성향 자체가 대체로 무심한 편이었다.
다른 종족의 일은 물론이거니와 자기네 종족의 일에도 딱히 많은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고, 탑 내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에도 잠깐 흥미를 보이다 금세 까먹기 일쑤였다.
심지어 모험의 탑에 서식하는 주제에, 모험왕의 탄생에도 그냥저냥 반응할 정도이니.
본인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 않는 이상엔, 옆에서 누가 죽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게 바로 저 거인들이었다.
그래서 사실 약간은 어려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저들에게서 타미의 흔적을 찾으려면.
일단 그를 기억하고 있는 거인도 극히 드물뿐더러, 애당초 대화의 장을 열 만한 주제조차 만들기 쉽지 않을 테니.
이를 위해선 단 하나, 거인이 유일하게 관심을 쏟는 분야를 건드릴 필요가 있었다.
바로 힘 자랑.
다른 이들과 힘을 비교하고, 그것을 겨루는 행위만큼 거인들을 자극시키는 게 없었다.
고로,
“역시······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그럼 당연한 거 아냐?”
형님의 행위는 실로 정답에 가까운 것이었다.
힘자랑이야말로 저들의 경계심을 가장 쉽게 허물어뜨릴 수 있는 일임과 동시에, 타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었으니.
다만 문제는,
“저기야, 저기! 보라고, 저 쪼그만 녀석이 기둥을 들어 올리겠다잖아!”
“뭐야, 인간이야!?”
“푸하하하, 꼬맹아! 첫 번째 기둥이라도 들어 올리라고! 그러지 못한다면 사지가 찢겨 나갈 테니!”
감당이 가능하냐는 것.
이미 주위엔 몰려든 거인들로 인산인해였다.
어찌 보면 장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렇게까지 많은 거인들이 한 곳에 몰리다니.
‘상관하지 않는’이란 표현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즈음,
척-.
주걱턱 형님이 첫 번째 기둥 앞에 도착했다.
거기엔 한 거인이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그가 바로 말로만 듣던 기둥관리인인 듯했다.
“뭐냐 넌? 개미냐?”
“네가 기둥 관리인이냐?”
“맞아. 거미냐?”
“인간이다. 보면 모르냐?”
“알게 뭐야. 근데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은. 기둥 앞에 선 녀석이 할 일이야 하나뿐이지.”
그러자,
“푸흡, 뭐야······ 설마 네가 기둥을 들겠다고?”
녀석이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대놓고 무시하는 기색이었다.
이에,
“기둥 대신 뽑혀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저리 비키기나 해.”
주걱턱 형님이 팔을 걷어붙인 채 쏘아붙였다.
알려지기로, 기둥관리인이 하는 일은 별 게 없었다.
그저 ‘증명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을 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가······.
“흐음, 후회할 텐데.”
“말이 많아. 너 거인 맞아? 말 많은 도깨비가 둔갑한 게 아니고?”
“드는 건 좋은데, 조건이 하나 있다. 증명에 참가하는 이상, 무조건 첫 번째 기둥은 뽑아내야 돼. 그러지 못할 경우, 내가 너의 사지를 찢어버릴 거다. 벌레를 조각내는 취미는 없지만······ 그게 최소한의 제한사항이거든.”
형(刑)을 집행하는 것.
거인들의 신성한 의식에 재미 삼아 참가하고자 하는 무뢰한을 응징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알았으니까, 나오라고.”
“아냐, 아냐. 다시 생각해 봐. 너 찢긴다니까?”
“······참나.”
바로 그때였다.
말없이 기둥관리인을 쳐다보던 형님이 대뜸 첫 번째 기둥 앞으로 다가가더니,
“흡!”
불쑥-.
순식간에 땅에 박혀 있던 기둥을 뽑아 들었다.
자기 몸의 수십 배가 넘는 크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풀을 뽑듯 별 힘도 들이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실로 경악스런 광경이었다.
“나오라고 이걸로 두들겨 맞기 싫으면.”
······.
곧이어,
“우와!!”
“한 손으로 뽑아 들었어!”
“저 녀석 제법이잖아!”
지켜보던 거인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들려왔다.
흥미 반, 무시 반으로 보던 거인들의 눈빛이 달라졌고, 자세를 고쳐 앉는 이들까지 나왔다.
또한,
“호오, 힘이 상당하군. 솔직히 놀라울 정도야. 너 이름이 뭐냐?”
기둥관리인의 눈빛 또한 대번에 바뀌었다.
그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주걱턱 모험단의 히로다.”
“좋다, 그럼 지금부터 증명을 시작하도록 하지. 잘 들어, 기둥은 두 번에 걸쳐 나눠 뽑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번에 뽑아내는 걸 권장해. 두 번째엔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거든. 그리고 하나의 기둥을 뽑은 뒤, 가질 수 있는 휴식시간은 최대 10분이야. 최대한 이때를 잘 활용하라고.”
“그래, 알았다고.”
“그럼······.”
이어, 기둥관리인이 포효하듯 내질렀다.
“도전자여, 힘의 증명을 시작하라!”
⁝
구구와 네로, 에스트리아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우와, 또 들었어!”
“흠, 제법이군.”
“저, 저렇게 힘이 세신 분이셨나요?”
치누아비는 말없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형님의 힘이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기둥 들기는 굉장히 순조로웠다.
두 번째 기둥도, 세 번째 기둥도 형님은 별 어렵지 않게 들었다.
솔직히 이 정도만 해도 대성공이었다.
일개 인간이 성인식을 치르는 거인만큼이나 든 것이 아닌가.
거인들의 반응도 좋고. 누구 하나 무시하는 이가 없었다.
지금부터는 축제에 가까웠다. 이만한 구경거리가 다시 나타나기도 힘들 테니.
그리고 이는 곧,
‘좋아, 그럼 이제······.’
타미의 흔적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거인들이 형님께 호의를 가진 지금이 적기였다.
지금이야말로 저들은 자신의 대화요청을 거부하지 않을 테니.
이어 치누아비가 막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갑작스레,
쿵-.
쿵-.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뭔가 심상찮은 울림이었다.
“저, 저기!”
돌아보니,
“······허.”
다른 거인들보다 족히 세 배는 될 듯한 엄청난 덩치의 거인이 멀찍이서 걸어오고 있었다.
대단히 흉악하고, 또한 멍청해 보이는 외모의 거인이었다.
심지어,
“바, 바하롬이다!”
“다들 비켜! 자리를 내줘!”
“저 괴물 녀석 왜 안 나타나 했다!”
다른 거인들이 놀라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
치누아비는 녀석을 본 순간, 오싹한 예감이 들었다.
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얼굴의 거인에게서,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의 포악함과 위압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위험할지도 몰라.
그런 직감이 들었다.
‘빨리, 빨리 찾아야 돼.’
늦장 부릴 때가 아니었다.
형님이 기둥 들기를 끝마친 후 곧장 자리를 뜰 수 있도록, 흔적을 찾고 문제를 해독해둬야 했다.
자칫, 저 거인에게 시비가 걸리기 전에.
그러고 치누아비가 굳게 마음먹었을 때였다.
“저, 저기!”
“다들 피해!”
“오, 온다!”
또 한 번 치누아비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일이 벌어졌다.
갑작스레 저 멀리서,
부웅-.
거대한 무언가가 날아왔던 것이다.
전광석화처럼 날아온 그것은 또 한 명의 거인이었다.
그 누구보다 크고, 강인해 보이는 육체를 가진 거인.
이를 본 치누아비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왕이다!”
“자움달이다!”
“이야, 거인왕까지 왔어!”
거인왕······ 칠왕의 등장이었다.
상황이 심각해졌다.
*
자움달은 어쩌면 오늘이 근 수백 년 이래 가장 놀라운 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네 번째 기둥, ‘바위를 들어 올리는 자’의 증명.
눈앞의 조막만한 인간이 뽑아 올리고 있는 게 바로 그 네 번째 기둥이었다.
그것도 그리 힘들어 하는 기색 하나 없이.
정녕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기둥은 그리 가벼운 게 아니다. 많은 수는 아니나, 이를 들어 올리지 못해 무리를 떠나게 되는 거인들도 있을 정도이니.
이걸 한낱 인간이 들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즈음,
힐끔-.
자움달이 슬쩍 옆쪽을 바라봤다.
바하롬이 헤벌쭉 웃으며 주걱턱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녀석,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슬슬 경계가 되기 시작했다.
물론 바하롬이 당장 힘의 증명을 방해하진 않을 것이다.
암만 멍청한 녀석이라지만, 그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 이후였다.
저 주걱턱이 증명을 끝내는 바로 그 순간, 그때를 저 멍청한 녀석이 참을 리가 없다.
좋다고, 놀자고, 한 번 겨뤄보자고 달려들겠지.
그걸 방비하지 못하면, 저 주걱턱이 찢겨나가는 건 한순간일 것이다.
자칫 저 놀라운 녀석과 한 마디 대화조차 나눠보지 못하게 될지도.
‘그건 안 된다고, 저 빌어먹을 녀석!’
슬슬 긴장하고 있어야 했다.
주걱턱이 들 수 있는 기둥도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이어 자움달은 조금쯤 떨어진 곳에 있는, 유달리 짤막한 기둥을 응시했다.
다섯 번째 기둥. ‘나무를 뽑아들 수 있는 자’의 증명.
저것이 바로 주걱턱이 들 수 있는 마지막 기둥이었다.
저게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는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무게.
저 짤막해 보이는 기둥은 실제론 다른 어떠한 기둥들보다도 길다. 유달리 깊게 박혀 있을 뿐이지.
더군다나 저건 그 전의 네 기둥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더욱 무거운 녀석이었다.
즉, 결코 들기가 만만찮다는 것.
괜히 무리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거인의 기준이 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단순히 이를 이유로 주걱턱의 실패를 예측한 건 아니었다.
설사 힘이 충분하다해도, 저것이 마지막이다.
녀석이 거인이 아닌 이상엔.
둘째, 자격.
애당초 여섯 번째 기둥부터는 거인이 아니면 들지 못한다.
오직 거인이어야만 한다.
‘검은 용의 수호자’가 힘이 부족하지 않았음에도, 다섯 번째에서 멈추게 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자격에 부합되는 존재가 아니기에.
누가 어째서 그와 같은 제약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는 자움달로서도 약간은 아쉬운 지점이라 생각했다.
애당초 거인이 다른 종족에게 힘으로 뒤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거니까.
즉, 저와 같은 제약은 괜한 핑계거리로서만 작용할 뿐, 하등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 때문에 외려 잇신 녀석이 얼토당토 않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 것 아닌가.
제약조건만 아니었어도 기둥 열 개를 다 들었을 거라고.
‘물론, 저 녀석이 잇신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 무렵,
“이야! 벌써 다섯 번째야!”
“쉬지도 않았어!”
“저 녀석 설마 저것까지 든다고?”
주걱턱이 쉬지 않고 다섯 번째 기둥을 잡았다.
녀석 또한 이번은 조금 다르다는 걸 느꼈던 모양이다.
이번엔 제대로 힘을 쓰려는 듯 확실히 자세를 잡는 모습이었다.
이어,
“읏-차!”
녀석이 쑥 기둥을 뽑았다.
조금의 멈칫거림도 없이, 땅에 파묻혀 있던 기둥의 끝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음?’
인간이 다섯 번째 기둥을 저렇게나 쉽게 뽑을 수가 있나?
당혹스러웠다.
‘······이, 잇신 정도는 되나?’
그러나 놀라고 있을 새도 없었다.
녀석이 곧바로 다음 기둥을 향해 다가갔던 것이다.
이에,
“키킥······.”
“풉······.”
“말해줘야 되는 거 아냐?”
“일단 지켜보자고, 킥킥.”
여기저기서 낄낄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
자움달은 이 광경을 묘하게 지켜봤다.
거인들은 ‘자격’에 대해 알려주는 대신, 흥미로다는 듯 낄낄거리고만 있었다.
‘못난 놈들 같으니라고.’
저건 진정한 흥미나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었다.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었다. 자신들조차도 그리 쉽게는 들지 못했던 기둥을 번쩍 뽑아낸 저 인간의 힘에.
녀석들은 저 힘 센 녀석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려고.
때마침,
“크-흡!”
주걱턱이 기둥을 잡고 힘을 썼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기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푸하하하!”
“안 된다고, 안 돼!”
“요 녀석아, 고건 감히 인간이 들 수 없는 거라고!”
여기저기서 동시에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쯧, 안심하는 꼬락서니들이라니.’
자움달은 한 차례 고개를 젓곤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이제 자신이 나설 차례였다.
수고했다고 말하고, 정식적으로 칭호를 부여해줄 시간이었다.
헌데 바로 그때,
“아, 여기서부터 인간은 안 되는 거였나? 이봐, 나 아직 기회 남았지? 힘을 줄 수 있는 건 두 번이니까.”
녀석이 그러곤 기둥관리인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으, 으응? 그건 그런데······ 이봐, 그냥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그건 거인이 아니면 들지 못하는······.”
그 순간,
뿅-.
뿅-.
갑작스레 녀석이 본인과 똑같이 생긴 허여멀건 유령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이 유령들은 내 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녀석들이야. 인간의 자격으로 안 되니까, 거인을 만들어내려고. 인정해 줄 거지?”
“······뭐?”
황당한 상황이었다.
본인을 대신하여 거인을 만들어내겠다고?
기둥관리인 또한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했던 모양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잠깐 고민하다,
“자격은 기둥이 알아서 심사할 거다. 되면 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도전 자체를 막진 않으마.”
고개를 끄덕이곤 한 발 물러났다.
‘그래도 저 녀석은 좀 낫군.’
자움달 또한 고개를 끄덕인 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좀 더 지켜볼 여지는 있을 듯했다. 인간이 뭐를 준비한 게 있는 듯 보였으니.
이윽고,
“오, 오오······!”
“저, 저 유령 좀 봐!”
“뭐지? 거의 바하롬 정도의 덩치인 걸?”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인유령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조그마한 유령들을 먹고 몸을 키운 듯 보였는데, 말마따나 바하롬만한 덩치였다. 자신보다도 큰 듯 보였으니.
곧이어,
“그레이트 킹, 들어.”
그 거대한 유령이 주걱턱에 명령을 듣곤 기둥을 들기 시작했다.
쑤-욱.
무척이나 손쉽게.
“······좀 하는 걸?”
자움달의 인상이 묘하게 구겨졌다.
⁝
잠시 후.
바하롬 따위는 어느 순간부터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자움달에 눈에 들어오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주걱턱, 그리고 녀석의 커다란 유령.
자움달은 여덟 번째 기둥에 손을 댄 채 자세를 잡고 있는 거인유령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건 대체 정체가 뭐냐.
여덟 번째 기둥을 들어 올린 거인은 현재 단 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자신과 바하롬.
헌데 저 허여멀건 유령 따위가 든다는 게······.
쑤욱-.
······.
더 이상 어떠한 환호성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른 녀석들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뭔가······ 뭔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이어,
“자, 이제 남은 기둥은 두 개인가?”
거인유령이 쉬지 않고 다음 기둥을 향해 스르르 이동했다.
녀석의 힘이 빠졌는지 어떤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허나,
‘하지만 다음 기둥은 안 돼. 그것만큼은 절대로 들 수가 없지.’
다음은 없다. 이제 끝이다.
자움달은 애써 불안감을 가라앉혔다.
아홉 번째 기둥, ‘무리를 이끌 수 있을 만큼 힘이 센 자’의 증명.
저것에도 다섯 번째와 동일하게, 하나의 자격요건이 존재했다.
바로 ‘하나의 세계’를 든 적이 있는 거인일 것.
여기서 세계라는 건, 단순히 산이나 땅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대륙 전체를 들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바하롬은 ‘판게아’ 내의 대륙 하나를 들어 올린 적이 있음에도, 저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으니까.
이 세상에 들어 올릴 수 있는 ‘세계’는 정해져 있다.
자신은 그걸 알았고, 바하롬은 알지 못했기에 ‘왕’의 칭호가 갈린 것이다.
지난 수백 년 간, 이 기둥을 들었던 자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러니 절대로, 절대로 저것만은 들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때,
“영-차! 옳지!”
무언가가 드넓은 하늘 위로 불쑥 치솟았다.
······.
자움달은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봤다.
자신이 들었다 다시금 메다꽂은 이후, 지난 수백 년 간 줄곧 땅 속에 잠들어 있던 아홉 번째 기둥이, 허공 한 편을 훨훨 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