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대체 무슨 속셈이지?
***
표정 괜찮네.
나는 우리를 향한 놀람과 경악의 시선들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약간의 아쉬운 점이라면······ 그 와중에 시선의 90% 이상이 그레이트 킹에게 쏠렸다는 것 정도?
그래도 뭐, 거인왕 만큼은 줄곧 나만을 응시하고 있었으니.
나는 그제까지도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던 녀석에게 찡긋 윙크해 주었다.
······.
딱히 반응은 없었다.
하긴, 당장은 내면의 놀라움을 무표정으로 가리기에도 급급한 상태일 테니.
나는 다시금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이어 불안과 초조, 호기심이 범벅이 된 눈으로 연신 그레이트 킹과 자움달을 번갈아 쳐다보는 거인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당황해하는 꼴이 마치 덩치 큰 붕어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저 눈만 끔벅끔벅 대고 있다고나 할까?
사실 이는 독자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 역시도 그레이트 킹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
물론 작가가 센스를 좀 발휘했다면 상천세계를 탈출할 당시, 요롱이를 들어 올리던 그레이트 킹의 모습을 오버랩 하듯 잡아줬겠지만······ 글쎄, 그런 걸 기대하긴 좀 힘들지 않을까.
얀의 유령이 증명의 기둥을 들 수 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자신 있게 힘의 증명에 도전한 것이기도 하고.
이유야 간단하다. 원작에 나왔으니까.
원작에서 증명의 기둥을 들어 올리는 건 얀이다.
정확히는, 얀의 그레이트 킹.
물론 얀의 그레이트 킹은 아홉 번째 기둥을 들지는 못한다.
아홉 번째 기둥이 뭐야, 여덟 번째도 가까스로 들곤 곧바로 뻗어버렸는데.
다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당시 얀의 목적은 거인왕의 인정을 받는 거였지, 그와 대적하는 게 아니었으니.
그러나,
“자, 다들 주목!”
나는 그와 다르다.
나는 이곳에 거인왕의 인정 따위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럴 거라면 일곱 번째나 여덟 번째에서 멈췄겠지.
아홉 번째 기둥까지 든 건, 당연지사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혼란.
좀 더 추가한다면, 거인들의 시선을 빼앗고 왕의 경계심을 자극하기 위하여.
왕의 자격을 갖춘 자가 또 한 명 나타났는데, 어찌 혼란이 없을 수 있을까.
거인들에겐 때 아닌 폭풍이 밀어닥친 셈이었다.
하지만 물론, 나는 당장 거인왕과 충돌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직은 일렀다.
나는 그저 현재의 긴장감이, 나를 보는 저 거인왕의 복잡 미묘한 눈길이 한동안 지속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나는 배에 힘을 가득 준 뒤, 크게 소리쳤다.
“여기 아홉 번째 기둥을 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거인 있나?”
······.
그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떠들썩하던 웅성거림도 금세 멎었다.
사방엔 어느새 적막만이 차올랐다.
다만, 모두의 눈이 대신하여 재촉하고 있었다.
“무리를 이끌 자격을 갖춘 이는 둘, 하지만 왕의 자리는 하나!”
나는 그러곤 아주 잠깐 침묵했다.
물론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어,
“······이제 어떡할까?”
소리를 죽인 채, 흘리듯 내뱉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간의 고요가 끝난 후,
“왕은······ 하나.”
어디선가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나직이 들려왔다.
그것은 내 목소리만큼이나 작은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주 선명하게 귓속을 간질였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하나둘 소리들이 더해가더니,
“겨뤄······!”
“왕은 하나!”
“힘을 겨뤄!”
“왕은 하나! 왕은 하나!”
종래엔 들불처럼 번졌다.
나는 거인들의 반응을 조용히 지켜보다, 이내 자움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거인들의 왕은 여전히 침묵한 채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에게 슬쩍 물었다.
“대답은?”
“······.”
곧이어 그의 입에서 첫 번째로 튀어나온 말은,
“어떻게 아홉 번째 기둥을 들었지?”
역시나 그것이었다.
어떻게 자격을 획득했느냐.
어떻게······ ‘하나의 세계’를 들었느냐.
“그냥 뭐, 힘이 세서?”
“허튼 소리!”
“사실인데 뭘. 힘이 약한 이가 그걸 들 수 있나? 그러니까······ 하나의 세계를?”
“설마 네 녀석이······ 아니 네 녀석인지, 아니면 옆의 커다란 유령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들었다고? 그 녀석을?”
물론 그레이트 킹이 든 것과 자움달이 말한 ‘그것’은 다르다.
그레이트 킹이 들었던 건 상천세계 전체를 휘감고 있던 요롱이였으니.
“글쎄, 네가 뭘 말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는 걸?”
“······.”
속이 탈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본인만이 아는 비밀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나는 별 말 하지 않았다.
대신 그저,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냐. 네가 신경 써야 할 사실은 단 한 가지, 새롭게 아홉 번째 기둥을 든 존재가 나타났다는 거다. 너와 마찬가지로 말이야.”
녀석이 간과해선 안 되는 사실 하나만을 일깨워줬을 뿐이다.
“······건방진.”
나는 그러고 빠드득 이를 가는 자움달에게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까진 생각대로였다.
거인들을 자극하되, 왕만은 침묵 속에 몰아넣는 것.
이제 자움달을 비롯한 모든 거인들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것이다.
왕의 자격을 갖춘 이가 언제 현재의 왕에게 도전할지 궁금할 수밖에 없을 테니.
“힘을 겨뤄라!”
“왕은 하나!”
“피하지 마!”
“왕은 하나!”
사실 거인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능력만 있고 방법만 안다면 가장 간단한 축에 속했다.
그냥 기둥만 들면 되니까.
더욱이 본인들은 다른 이들의 영향 따윌 일절 받지 않지만, 다른 세력에게 미치는 영향은 굉장히 큰 게 바로 저 거인들이었다.
저토록 강대한 힘을 가진 종족이 단체로 움직이는데, 어느 세력이 눈치를 보지 않을까.
내가 여러 선택지들 중에서도 굳이 거인 쪽을 가장 먼저 찾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움직이기 쉽고, 영향력은 크고.
거인들이 어떤 이유에서건 내 뒤를 따른다는 것만으로도, 내 발언엔 힘이 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통보만으로도 모든 칠왕들을 한 자리에 집결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는 이 같은 긴장감을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실질적인 자움달과의 충돌 없이.
나는 머릿속에 계획해둔 ‘대규모 혼란’ 전까지는 거인왕과 직접적으로 맞부딪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당장 생각한 방법 한 가지.
“그 전에 잠깐! 다들 잊고 있는 듯한데······ 나는 아직 도전을 끝내지 않았는데?”
증명의 기둥 가지고 늘어지기.
“아직 기둥 하나가 남았잖아?”
물론 이게 먹힐지는 알 수 없었다.
곧이어,
······.
삽시간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이 거인 녀석들······ 생각보다 합죽이에 능한 녀석들이었다.
물론 한 녀석,
“뭐, 뭐라고!?”
자움달 만큼은 예외였다.
뭐 당연한 일이었다. 열 번째 기둥은 녀석 또한 드는 데 실패한 것이었으니.
“왜 그렇게 놀라? 아홉 번째 기둥을 들었으니, 이제 남은 걸 마저 들겠다는데.”
“네놈이 들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굉장히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근데······ 음, 맞아. 약간 피곤하기는 해. 안 그래? 그레이트 킹?”
나는 녀석을 쳐다보며 슬쩍 한 쪽 눈을 깜빡였다.
녀석이 제발 알아듣기를 바라며.
그러나,
“전. 혀. 킹은. 얼마든지. 들 수 있다. 더!”
고개를 휘휘 젓더니, 대뜸 팔 근육을 내보이며 포즈를 취하는 것이었다.
“······.”
그거 아니라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간에 저도 거인이라고 힘자랑은.
그러나 다행히도,
“······뭐야, 도전하지 않겠다는 건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 자움달이 타이밍에 좋게 질문을 던져왔다.
“그건 아닌데······ 꼭 지금 당장 도전해야 되나?”
“규칙을 들었을 텐데? 10분 안에 다음 단계를 도전하지 않으면······.”
“그건 나도 알아. 근데 그게 뭐 중요한 거라고. 고작해야 시간 때문에 실격된다고? 그거에 승복할 것 같아? 별 중요하지도 않은 걸?”
“······.”
“설사 그렇게 된다한들 내일 다시 또 도전하면 되지. 아니면 모레나. 왜? 뭐? 문제 있나? 그전에 나를 공격이라도 하려고? 마지막 단계만을 앞둔 나를?”
“······대체 무슨 속셈이지?”
자움달은 내 저의를 모르겠다는 듯, 의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게다가 혼란을 겪는 건 자움달 뿐만이 아니었다.
그 무렵엔,
“왕은 하나······ 지만 아직 증명이 진행 중이라면······.”
“힘을 겨루기 전에 증명은 마무리해야 돼!”
“그러게······ 하지만 쉬었다 하면 그게······ ”
“그냥 지금 후딱 도전하면 안 되나? 되든 안 되든?”
다른 거인들 또한 혼란에 잠긴 채 웅성거리고들 있었다.
그때였다.
“왕! 보다 먼저! 나! 내가!”
웬 녀석이 갑작스레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힘! 겨룬다!”
아, 저 녀석······.
이름까진 알지 못했다.
다만 왕보다도 더 큰 덩치를 가지고 있던 거인이 하나 있었다는 건 얼핏 기억이 났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 녀석······ 자움달과 힘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아마 아홉 번째 기둥을 들지 못해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잘됐군.’
녀석만 제압한다면 왕과의 결전을 미룰 수 있을 것이다. 힘이 빠졌다는 이유로.
또한 다른 거인들이야 흥분해 난리를 치겠지만, 자움달 쪽은 그 반대일 것이다.
본인과 엇비슷한 녀석이 제압당했으니,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여,
“그레이트 킹. 저 덩치 좀 손 봐줘. 약간 세긴 하겠지만······ 별 거 아닐 거야.”
“문제. 없. 다!”
나는 그레이트 킹에게 대충 처리하라 이른 뒤, 빠르게 돌아섰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 거 아닐 거란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내 기억 속에 저 거인은 그리 만만찮은 녀석이 아니었으니.
다만,
“나는. 그레이트. 킹!”
“나! 바하롬! 힘! 세다!”
쿵-!
콰앙-!
그렇다고 그레이트 킹이 밀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 수치가 그대로 구현될지는 모르겠으나, 설정상 그레이트 킹은 나의 만 배가 넘는 힘을 가진 ‘규격 외의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칠왕 급의 신체능력을 가진 나의 ‘만 배’ 말이다.
이어,
“어디보자······.”
나는 그레이트 킹에게 뒤를 맡겨둔 채, 곧바로 치누아비를 찾아 이동했다.
녀석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른 일행과 함께 그레이트 킹과 거인의 힘겨루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나는 치누아비 곁으로 슬쩍 다가갔다.
“찾아놨어?”
“아······ 오셨군요. 대단하네요.”
“엉?”
“압도······ 하는데요? 그러니까······ 형님 쪽 유령이.”
“아, 쟤 강하거든. 순수 힘만으로는 뭐, 다 이길 거야. 그보다 타미에 관한 문제는? 찾았어? 풀었어?”
“예, 대충은······ 간신히 시간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야, 거인왕이 어느 쪽으로든 결단을 내리기 전에 빨리 여길 떠야하니까.”
그러자,
“······도전 안하십니까?”
치누아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형님 말마따나 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 마지막 기둥? 저것만 들면······ 여기 있는 모든 거인들이 형님을 따르게 되는 거 아닌······.”
“못 들어 저거.”
“예?”
“아직은 누구도. 힘만으로 드는 게 아니거든. 자격을 갖춰야지.”
“······.”
“그리고 지금 거인들의 대장이 되는 것도 의미가 없어. 괜히 다른 칠왕들만 뭉치게 만들 테니까.”
“······그런가요.”
완벽히 이해한 표정은 아니었으나, 치누아비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일단 알아낸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다리던 정보를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타미는 없습니다.”
“그래? 아쉽네.”
“더욱이 중요한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녀석을 기억하는 거인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기껏해야 타미가 남겨놓은 낙서가 다입니다.”
“흐음, 그래?”
치누아비는 나의 반응이 마땅찮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지어 남은 선택지조차 그대로입니다.”
“다섯 개?”
“아뇨, 여섯 개요.”
“······응? 여기 왔으니까 하나는 줄었을 거 아냐.”
“동시에 하나가 더 늘었거든요. 타미가 낙서하듯 다음 행선지에 대한 정보를 남겨놓는 바람에.”
“아하.”
“즉, 허탕을 쳤다는 얘깁니다. 완전히 시간낭비를 했다고나 할까······ 결국 여전히 다른 곳들을 가야하는 상황이니.”
이에,
“이야, 그것 참······.”
나는 아주 만족스레 웃어주었다.
“잘됐네.”
치누아비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고개를 휘휘 내젓다,
“······그때는 제가 실수했습니다. 괜히 형님의 말에 발끈하는 바람에. 제가 판단하기에, 제시된 선택지들 중엔 확실한 정답이 존재합니다.”
분명한 의지가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말썽쟁이의 동굴······ 그러니까 도깨비들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제가 그들을 보고 싶어 가는 건 절대 아니고요.”
“도깨비?”
“예.”
“그래, 가.”
“······예?”
이어,
“정말로요?”
치누아비가 외려 당황해 되물었다. 내가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일까.
“근데 너무 좋아하지는 마.”
“예?”
“어차피 다른 곳도 다 들렸다 갈 거니까. 가는 길이거든.”
“······.”
“그럼 준비하자고. 저 녀석들 힘겨루기가 끝나면 대충 이동할 거니까.”
그러자 잠시간 침묵하던 치누아비가,
“근데······ 힘의 증명을 마무리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러고 슬쩍 물어왔다.
“갔다 와서 하지 뭐.”
“······거인들이 순순히 보내줄까요?”
“뭐, 지들이 쫓아오기라도 하겠어?”
그러곤 나는 씩 웃은 채 뒤를 돌아봤다.
때마침, 그레이트 킹에게 두 발이 들린 거인이 빙글빙글 풍차 마냥 돌아가고 있었다.
“크와! 아! 그! 만! 어지럽! 다아아!”
물론, 제발 그래줬으면 좋겠지만.
*
모험의 탑 77층.
대마녀의 마나수련장 인근.
“미안, 여기도 아닌 것 같아. 전혀 안 보여.”
한동안 생각에 골몰에 있던 타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물론, 기다리던 대답은 아니었다.
곧이어,
“저도 죄송해요······ 길이 보이지 않아요.”
얀 또한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타냐와 얀이 미안할 이유는 없죠.”
“우끼!”
“아냐, 정말 미안. 고생해서 마녀들의 영역으로까지 길을 열어줬는데······.”
“죄, 죄송해요, 일단 돌아가서 상처 치료부터······.”
“제 상처는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어서 새로운 길을······.”
물론 그리 괜찮지만은 않았다.
상대한 마녀가 그리 약한 존재가 아니었으니.
시아나는 1대1 상황을 만들어 마녀의 능력을 빼앗는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현재 타냐가 [대도의 안목]을 통해 찾아낸 약초들로 상처가 악화되는 걸 막고는 있으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가롭게 쉬고 있을 순 없으니까.’
레오와 키리코, 두 사람이 수련을 위해 떠나자마자 모험단의 활동반경이 극도로 축소되었다. 심지어 움직임에 제한이 생긴 것뿐만이 아니라, 탑 내에서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거의 사라질 정도였다.
얼마나 두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었는지 쉬이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얀과 오공이 둘의 역할을 조금씩이나마 대체하지 못했다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은신처에만 박혀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설사 모험의 탑 최상층으로 향하는 길이 한순간 보였다 할지라도 말이다.
어느 날 문득, 얀과 타냐의 눈에 동시에 ‘숨겨진 계단’이 보인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달여 전쯤, 키리코에 이어, 레오마저 떠난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마치 계기처럼 나타난 그것에, 일행은 그 계단이 모험단이 나아가야 할 미래임을 곧장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곧바로 그 ‘계단’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던 것이다.
일행은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모험단으로서의 제 몫을 다 하려면, 어떻게든 그것을 찾아야만 했으니.
하지만 ‘계단’은 그때 이후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마치 신기루 마냥.
모험의 탑 곳곳을 뒤졌지만 여태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금기시 하던 칠왕의 영역까지도 탐문을 시작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즈음,
“이대로는 안 돼. 여기가 우리끼리 도달할 수 있는 최종지점이야. 칠왕의 턱밑. 하지만 여기마저도 허탕이야.”
타냐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단호히 내뱉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매순간 길이 홱홱 바뀌고 있어. 이건 내 눈을······ 아니 우리 모험단 전체의 힘을 벗어나는 의지가 이 세계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대로는 못 따라가. 길을 잃을 수밖에 없어. 그러니······ 이제 방법은 하나 뿐이야.”
“방법?”
“전에 그 녀석에게 받은 게 있어. 주걱턱.”
그러곤 타냐가 품속에서 자그마한 함 하나를 꺼냈다.
“그건······.”
“전대 모험왕이 남긴 함이야. 무엇이든,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들어있다고 했지. 아마 길을 알려줄 무언가가 들어 있을 거야. 본래는 레오가 있을 때 열려고 했지만······ 더는 별 수 없으니.”
이어, 타냐가 지체 없이 함을 열었다.
거기 들어 있던 건,
“······편지?”
하나의 편지였다.
서둘러 확인해봤으나, 황당하게도 편지엔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수신인 란에 적힌 글씨뿐이었다.
그러나 일행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그들 중엔 물건의 내력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타냐가 천천히 편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읽고, 만지고, 냄새를 맡기까지.
이윽고,
“······물건의 격이 높아서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어.”
놀란 듯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타냐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도 몇 가지는 알아냈지만.”
“어떤?”
“얼른 말해봐요!”
“우끼!”
타냐는 숨을 한 차례 고른 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주걱턱 녀석이랑 같이 다니는 녀석 있지.”
“주걱턱이면······ 혹시 그 용인소녀?”
요즈음 미들랜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루덴코프를 물 먹인 주걱턱 이야기.
미들랜드 어디를 가든, 모험의 탑 몇 층을 가든 그 얘기들이 오고 가고 있었다.
채무불이행자가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주걱턱과 그 용인의 위치를 제보하는 자에게, 하나의 세계를 주겠다고.
“이 편지는 그 녀석과 관련이 있는 거야. 에스트리아란 소녀. 주걱턱과 함께 다닌다는 용인.”
“옛 용의 딸 말이죠? 레오와 함께 있는?”
“맞아.”
“그럼 그녀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 건가요? 아니면 위치?”
“그건 아냐. 정확히는······.”
타냐는 한 차례 침을 삼킨 후, 한층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거야. 옛 용의 인간 아내.”
“어머니요?”
“응. 그녀의 이름은 아리엔.”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은 다소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녀가 바로 전대 모험왕의 딸이야. 편지엔 현재 그녀의 위치가 나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