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균형이 어그러졌네?
***
오히려 좋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칼 자이드가 지금 이 시점에 적으로서 등장한 것이 외려 내겐 행운이라고.
본디 이야기가 후반부로 치달으면 치달을수록, 캐릭터의 가치를 올려주는 건 동료가 아닌 적이다.
강력한 적이야말로 캐릭터의 분명한 목표가 되어주고, 캐릭터의 가치를 가장 잘 알아봐주며, 나아가 최고로 빛나는 순간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분량을 보장해주기까지.
배틀물 소년만화에선 특히 더 그렇다.
기본적으로 강력한 적을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캐릭터가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는 구조이니.
적을 통해 나를 완성시킨다고나 할까.
고로, 각성하여 나타난 저 칼 자이드가 내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면 불태울수록, 나의 가치가 덩달아 올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칼 자이드와 그로니얀이 저쪽 편에 합류함으로써 구도에 혼란이 생겼다.
적과 동지의 분류가 약간 애매해졌다는 것.
내가 만약 주인공이었다면, 사실 머리가 좀 아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칼 자이드와 그로니얀을 다시 나의 편으로 끌어당기고, 적과 우리 편을 확실히 구분 지어야 할 필요성이 생겼을 테니.
그러나 당장의 내겐 이 구도가 더욱 바람직했다.
정돈되지 않은 상황과 관계가 거듭될수록, 혼란은 가중되기 마련이니까.
다만,
“누구의 밑에 들어갔다라······ 그 말인즉슨, 지금 네가 대마녀의 부하가 되었다는 얘긴가? 옆의 그로니얀과 함께?”
“이미 대충 짐작하고 있었을 텐데, 너라면.”
“내가?”
“내게 코코로코에 대해 알려준 게 너이니.”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이 같은 상황을 노리고 칼 자이드에게 코코로코를 찾아가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건 분명 예상외의 상황이 맞았다.
‘코코로코가 대마녀에게 병력을 제공한다라······.’
애당초 코코로코는 캐릭터 자체로선 큰 의미가 없는 녀석이었다.
그저 레오의 성장에 필요한 공간을 제공하는, 조력자로서의 의미만을 가지는 캐릭터였지.
물론 마도공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캐릭터이기에, 본래의 캐릭터 설정에 대마녀와 엮이는 부분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그게 그리 억지스런 설정은 아니니까.
그러나 적어도 원작에서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하진 않았었다.
즉, 이는 작가가 새로 짠 전개라는 것.
“네게 미안한 마음 따윈 갖지 않겠다. 어차피 다 짐작하고 있었던 일일 테니. 물론 네 속셈까진 알 수 없지만.”
“글쎄······ 딱히 그런 것도 아닌데.”
“어쨌거나 이 이상 말은 필요 없겠지.”
그러곤 칼 자이드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로니얀와 대마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흐음.
뭐, 여하튼 이 구도 자체는 내게 썩 나쁘지 않았다.
“준비해라. 쉽지 않을 테니.”
무탈하게 이 상황을 넘길 수만 있다면 말이다.
고오오-.
나는 내 앞에 선 채 투기를 숨기지 않는 칼 자이드를 가만 응시했다.
녀석의 말 그대로였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결코 쉽지 않다.
이미 신체능력은 나를 초월해 있다는 걸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즈음,
“능력을 써라.”
녀석이 나를 보며 무심히 입을 열었다.
“능력이라니?”
“네 특기 말이다. 남을 흉내 내는 것. 능력을 쓰지 못하면 당해낼 수 없을 거다.”
“뭐······ 지금도 충분하지 않나?”
“······여전히 광오하군. 하지만 금방 생각이 바뀌게 될 거다.”
순간,
슥-.
갑작스레 녀석의 주먹이 내 눈앞에 생겨났다.
다가온다거나, 날아오는 느낌도 아니었다.
애초에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건 마치 본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었다는 양, 내 눈앞에 생겨나 있었다.
심지어는,
“휘잉-.”
뒤늦게 소음이 따라왔을 정도이니.
“보였나?”
“음······ 좀 놓치긴 했어.”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었다.”
“이야, 대단한걸?”
“다음엔 멈추지 않을 거다.”
“친절하네.”
“살아남으려면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할 거다.”
“······.”
그즈음,
‘······새삼스럽네.’
나는 마치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칼 자이드의 눈길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건 은혜를 모르는 녀석에 대한 괘씸함도, 분수를 모르는 하룻강아지에 대한 분노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특함에 가까웠다.
결국 저 녀석이 다시 또 이 자리까지 올라왔구나 싶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자의 위치로.
칼 자이드는 본래 이 시점까지 올 수 없는 캐릭터였다.
초반 임팩트가 워낙에 강렬했던 까닭에 미들랜드로 넘어가는 것까진 성공하나, 이후론 이렇다 할 활약 없이 사라져 가는 캐릭터 중 하나다.
기껏해야 단 한 번, 루덴코프의 부하들에게 홀로 대적하는 장면이 있었던 것 정도?
하지만 그조차 루덴코프를 만나자마자 무너져버리고 말았지만.
애당초 아킬레스 건이란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하는 녀석이질 않는가. 그대로 별 임팩트도 없이 스러져갈 예정이었던 것이다.
헌데 저 녀석은 본인의 의지로, 본래 내정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마치 내가 그래왔듯이.
아마 킹스로드 선별전 당시가 기점이었을 것이다. 녀석이 새로운 길로 오르지 않고, 우리가 가던 길의 꼭대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선택을 했던 바로 그 순간부터.
물론 본의 아니게(?) 내가 녀석의 약점을 숨겨준 덕도 없진 않겠지만······ 뭐, 그야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나는 현재 이 녀석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지 못한다.
어떠한 형태로 고유능력을 진화시켰는지도, 그게 얼마나 나를 위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여태 얼마만한 고통을 겪었는지도.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은 충분히 내 라이벌이 될 자격이 있다.
그 무렵,
“다시 가도록 하지. 좀 더 빠를 거다.”
휙-.
재차 칼 자이드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녀석이 경고한대로, 보다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들이 내 급소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최대한 집중한 채, 녀석의 이를 방어했다.
그러나,
퍼벅-.
“끙······.”
역시 쉽지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복부 쪽 타격을 허용하곤, 약간이지만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이 같은 충격은 루덴코프에게서 힘을 되찾은 이후론 처음이었다.
“아직 힘의 반도 내지 않았다.”
“미안한데, 마찬가지야. 딴 생각하고 있었거든.”
“······.”
라이벌이니 뭐니 하는 낭만적인 생각은 잠시 접어둘 필요가 있을 듯했다. 녀석의 말마따나, 지금의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았으니.
단순히 강력해진 칼 자이드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 외에도, 현재 내겐 두 가지 악조건이 더 붙어 있었다.
첫째, 당장 아무 고유능력이나 섣불리 흉내 낼 수 없다는 것.
어쩔 수가 없었다. 당장 이곳엔 저 녀석만이 있는 게 아니니.
그 옆엔 그로니얀도 있고, 대마녀도 있다.
뿐만 아니라, 내 뒤에 붙은 거인들도 나의 편이 아니다.
외려 거인왕의 경우, 나를 제거하기 위한 기회만 틈틈이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녀석의 입장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가 바로 나일 테니.
한 마디로, 물러날 곳 없는 적진이라는 뜻이다.
심지어 내겐 보호해야 할 일행들도 있지 않은가.
이 같은 상황에서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녀석을 제압할 요량으로 아무 능력이나 활용할 순 없었다.
둘째, 애당초 내 계획상으로 여기서 전투가 일어나선 안 된다.
여긴 그저 경유지에 불과하지, 혼란을 폭발시킬 종착지가 아니니까.
물론 기존의 내 예상과는 달리, 당장 모인 인원들의 면면이 생각보다 화려해진 건 사실이었다.
칠왕이 무려 둘에, 나와 칼 자이드, 그리고 그로니얀까지.
이미 이 정도만으로도 일정규모 이상의 혼란은 충분히 일으킬 수가 있다.
짐작하건대, 칠왕이 넷 모인 것 이상의 임팩트 정돈 되지 않을까.
다만 문제는, 혼란의 규모가 아닌 그 구성이었다.
당장엔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요소 두 개가 빠져 있는 상태였으니.
1. 레오 모험단
2. 숨겨진 탑의 최상층.
이 두 가지 요소가 갖춰지지 않은 채 일어나는 혼란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주인공과 선행플롯이 연계되지 않은 채, 조연 캐릭터간의 상호작용만으로 발생한 사건은 앞으로의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큰 혼란이라도 결국 종식될 것이고, 약간의 시간이 경과한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레오의 주도 아래 원작에서의 전개가 그대로 진행될 게 뻔했다.
외려 앞서의 혼란으로 힘을 잃은 칠왕들이 생겨나면서, 보다 빠르게 레오의 ‘모험왕으로의 길’이 열리게 될지도.
그건 곤란했다.
즉, 나는 전투상황 없이 현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칼 자이드가 적으로 돌아선 구도 자체는 나쁘지 않으나,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전투를 벌이는 건 피해야 한다는 것.
물론,
퍽-.
우당탕-.
쾅-!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이대로 계속 해보겠다고?”
“······끙.”
이번엔 좀 세게 맞았다.
녀석의 오른발이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꽂히고 말았으니.
얼얼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이쯤이면 알았을 텐데. 이대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뭐라도 능력을 써야 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그 번개 꼬맹이의 것이라든가.”
“음······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직 입이 살았군. 하지만 느끼고 있을 텐데? 내 능력으로 키운 네 신체는 나에 미치지 못한다. 뭐든 원조를 따라갈 순 없는 법이지.”
“참나······ 신났네. 근데 원조니 뭐니 말하기엔,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거 아냐? 심지어 그것도 며칠 안 된 것 같이 보이고.”
이에,
“······코코로코의 공간에 들어가 있던 기간만 3년이다.”
녀석의 미간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대답을 하면서도 약간 열이 더 받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현재의 너를 넘어선 지는······ 이미 1년이 훌쩍 넘었다!”
이어 녀석이 재차 공격을 해왔다.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녀석의 공격은 직전에 비해 훨씬 더 거세져 있었다.
“치잇······.”
이젠 정말로 별 수 없을 듯했다.
파지직-.
나는 곧바로 레오의 [재앙을 멸하는 번개]를 발동시켰다.
순식간에 온 몸에 힘이 넘쳐흘렀다.
이어,
“······느리다고.”
나는 내 안면을 노리고 온 칼 자이드의 주먹을 슥 피한 후,
파지직-.
녀석의 팔을 잡곤 감전시켰다.
그러자,
“음?”
칼 자이드가 한순간 경직된 채, 움직임을 멈췄다.
“좀 따끔하지?”
“······제법이군.”
아닌 척 해도 지금 꽤 당황한 상태일 것이다.
본인의 강인한 신체가 쉽사리 타격을 입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테니.
특히나 코코로코의 공간에서 막 나온 상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내가 수많은 능력들 중에서 굳이 레오의 것을 발동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범용성이 굉장히 좋은 능력인데다, 무엇보다도······ 세니까.
이야기가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능력 보정’이 가장 심한 게 바로 레오의 능력이다.
가장 특별해야 할 주인공의 능력이 새로운 적들이 나타날 때마다 뒤처질 순 없으니까.
지금 이 ‘번개’엔 기본적인 데미지 상승효과 외에도, 상대의 저항력을 무시하는 권능이 더해진 상태였다. 또한 현재 작가가 작심하고 레오의 업그레이드에 치중하고 있는 상태라면······ 어쩌면 더한 게 섞여있을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저 기고만장한 칼 자이드에게 한 방 먹일 용도론 안성맞춤이라는 것.
지금이 기회였다. 어떻게든 전투가 커지는 걸 막아야 했다.
나는 경직된 칼 자이드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곧장 대마녀에게 소리쳤다.
“어이! 뭐 하자는 거지? 내가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곧이어.
“그래? 그럼 무엇 때문에 여길 온 거지?”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대마녀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내게 응대했다.
“그건······ 대충은 알고 있지 않나?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많은 눈을 가지고 계신 분이?”
“글쎄, 암만 봐도 잘 모르겠어서 말이지.”
“그럼 알려주도록 하지. 나는 전투를 하러 온 게 아냐. 여기 좀 알아볼 게 있어서 온 거지. 그리고 그건 당신한테도 전혀 나쁜 일이 아냐. 저기 숨겨진 탑의 최상층으로 가는 길을 찾는 일이니까.”
“아하, 그랬니?”
나는 그 순간, 그녀가 내 말에 넘어온 줄 알았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그런데, 굳이 그걸 네가 찾아야 할까? 솔직히 내 입장에선······ 네가 감히 그 층을 탐내는 것 자체가 불쾌한걸? 고작해야 이곳에 온지 반년이 조금 넘은 애송이 따위가 말이야.”
때마침,
홱-.
“네 상대는 나다.”
다시금 멀쩡해진 칼 자이드가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약간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나와 끝장을 볼 순 없어. 어느 정도 이상으로 힘의 규모가 커지면 균형을 맞추는 자가 나타날 거니까”
“흐음, 그의 등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구나.”
물론 나는 녀석이 실제로 이곳에 출현하길 원하진 않았다.
‘균형을 맞추는 자’가 나타난 뒤엔 양측 다 한동안 소강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녀석의 균형을 맞추는 방식 자체가 ‘삭감’ 쪽이라, 어떻게든 타격을 입게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이들이 아무리 내 대척점에 서 있다 하더라도, ‘혼란’에 있어선 모두 중요한 등장인물들이 되어야만 했다.
즉, 어느 쪽의 타격이든 내겐 득 될 게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녀석의 존재 자체는 나의 안위를 도모하는 안전망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 칠왕들의 실력행사를 꾸준히도 통제해오던 녀석은 실제로 나보다도 칠왕들이 더욱 꺼려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금 대마녀에게 소리쳤다.
“정말 충돌이 필요한 시점은 지금이 아냐! 최상층부로 향하는 길이 열렸을 때······.”
그때였다.
“균형을 어그러뜨릴 생각은 없단다, 아이야.”
대마녀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내 말을 끊었다.
“오히려 정확히 맞춰볼 생각이지.”
“······뭐?”
순간,
척-.
대마녀 옆에 있던 이가 움직였다.
그로니얀.
녀석이 대마녀의 곁을 떠나, 칼 자이드 옆에 섰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디 이쯤이면 균형이 좀 맞으려나?”
“······.”
그즈음 나는 굉장히 당황하고야 말았다.
이렇게 나올 줄은······ 솔직히 예상 못했는데.
쿵-.
쿵-.
거인왕 자움달이 대마녀 곁으로 움직였다.
······.
‘균형을 맞추는 자’의 출현조건은 간단하다.
현 세계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 힘의 구도가 어그러질 경우.
쉽게 말해, 칠왕 급의 존재들이 대전을 펼치면 녀석이 나타난다. 그것이 전투결과에 따라, 힘의 균형에 크나큰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녀석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하나 있다.
바로 그와 비슷한 규모의 대전이 또 다른 곳에서 펼쳐질 때.
즉, 칠왕 대전이 두 군데서 동시에 일어날 때이다.
녀석은 한 번에 한 곳으로 밖에 가지 못하기에, 그와 같은 경우 차라리 중심을 지킨다. 어차피 양측에서 일이 발생했다면, 그것으로 균형을 이뤘다고 생각하기에.
“약간······ 곤란한 상황인가.”
안일했다.
이런 식으로 일을 꾸밀 줄이야.
대마녀와 거인왕이 함께 합을 맞춘다면, 균형을 맞추는 자의 이목을 흐리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닐 것이다.
그즈음,
척-.
척-.
대마녀의 부하, ‘네 마녀’를 필두로 마녀들이 주위를 천천히 에워싸기 시작했다.
퇴로를 차단하기 위함인 듯 보였다.
물론 거인들은 아직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하고, 거인왕의 움직임에 어리둥절해 하는 듯했지만.
‘이제 어떡한다······.’
사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
전투는 피해야 하고, 사로잡히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니까.
물론 칼 자이드와 그로니얀의 협공에 내가 당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저들이 얼마만큼의 성장을 일궈냈는지는 몰라도, 나 또한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설사 ‘네 마녀’들을 필두로, 거인왕과 대마녀의 추가적인 조치가 들어온다 하더라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다만, 문제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켜야 할 일행이 있는 한,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도주.
“······놀랍긴 하네. 인정하도록 하지. 언제 거인왕과 말까지 맞췄대?”
“칠왕들은 모두 오랜 세월을 함께 존재해온 이들이지. 그 정도 소통의 방법조차 없었겠느냐. 너무 상황을 쉽게 보려하는 게 네 패착이었단다, 아가야. 젊은 모험가에게 뭔들 쉬워 보이지 않겠냐만은······ 칠왕의 이름마저 가벼이 여겨선 안 되는 게 아니었을까?”
“글쎄, 그렇게 가볍게 보진 않았는데? 댁들이 그렇게 가벼웠다면, 이미 훨훨 날아 탑의 정상을 찍고도 남았겠지. 그렇게 탑 중간에 무거운 엉덩일 붙이고 앉아선, 세월아 네월아 보냈을 게 아니라.”
“······여전히 입은 살았구나.”
그렇게 말로 모두의 이목을 끔과 동시에, 나는 은밀히 치누아비 쪽으로 미리 맞춰둔 수신호를 날렸다.
-퇴각 준비.
치누아비 또한 이미 상황을 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신호를 보자마자, 치누아비가 기다렸다는 듯 은밀하게 은막으로 나머지 일행을 덮었다.
하지만 물론, 저것만으로 대마녀의 눈을 벗어날 순 없다.
나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몸을 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마침,
“머리를 굴리는 게 눈에 들어오는구나. 마녀들은 탐지마법을 펼치도록 해라. 이곳에 온 저 녀석의 일행을 한 놈도 놓쳐선 안 된다.”
대마녀 또한 이를 감지했던 모양이다.
“놓쳐선 안 된다니······ 그렇게 어려운 걸 시키면 어떡해? 본인도 하지 못할 걸.”
“훗, 방법이 있느냐?”
물론 허세였다.
솔직히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좋은 방법이라는 게.
어떻게 해야 일행을 데리고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정말 눈앞의 녀석들을 모조리 쓰러뜨리는 것 외엔 없나?
잠시 후, 나는 각오를 다졌다.
최대한 뚫어보는 수밖에.
‘······오늘 하루 좀 길겠네.’
바로 그때였다.
갑작스레,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왠지 모르게 예감이 거지같더라니. 이 따위 상황일 줄 알았어, 내가 알았다고!”
어디선가 마치 쇠를 긁는 듯 거슬리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이나 익숙한 음성이었다.
무려 반년을 넘게,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던 목소리였으니.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제기랄,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게 무슨 거지같은 경우야! 저 씹어먹을 자식······.”
몹시도 비대한 체구의, 대머리 뚱땡이가 씩씩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녀석의 발걸음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 순간,
‘잠깐, 저 녀석 저거······ 설마?’
나는 느닷없이 나타난 최악의 악당을 보며, 대단히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설마 내가 저 녀석의 등장을 반기게 되는 순간이 올 줄이야.
때마침,
“······채무불이행자도 초대된 손님인가? 대마녀?”
“글쎄요, 저 이는······.”
당황해 하는 두 칠왕의 앞으로 루덴코프가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어 누군가에게는 대단히 황당하게 들릴법한, 그러나 내겐 그저 유쾌할 뿐인 대사를 내뱉었다.
“거기 마녀랑 거인. 뒈지기 싫으면 가만히 있으라고. 엉? 지금 저 녀석 건드리는 놈은······ 나한테 먼저 뒈질 테니까. 알겠냐? 엉? 엉!?”
전에 혹시나 싶어 들어뒀던 보험이 이렇게 작동을 하다니.
나는 생전 처음으로, 녀석을 보며 활짝 웃었다.
“여, 반갑고.”
“네놈, 네놈, 네놈······ 이 빌어먹을 주걱턱 자식! 죽여 버릴 테다!”
“그래, 그래. 이따 해 이따. 그럼 이제······.”
이어, 나는 몹시도 얼굴이 구겨진 대마녀 쪽을 보며 씩 웃었다.
“다시 균형이 어그러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