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192
192화 대혼란(1)
***
지침 변경 후 이튿날.
검은 산맥은 여전히 고요했다.
정복해야 하는 정상을 크노크 산 하나로 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세력은 없었다.
외려, 힘을 지닌 이들일수록 더욱 조심스레 웅크릴 뿐이었다.
사실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목표가 하나로 한정되었다는 것.
최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모험단이 단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이는 곧 먼저 싸움을 시작하는 쪽이, 전력을 소모하는 쪽이 불리하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었으니.
지독한 눈치싸움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5층 모험가협회 측 인원들을 비롯하여, 판게아 내에 서식하고 있던 수많은 도적단들, 엉망진장 잡동사니 창고의 병기제작자들, 재미있는 일을 찾아 나선 말썽쟁이 동굴의 도깨비들 등등.
계속해서 새로운 세력들이 검은 산맥으로 몰려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다툼 하나 일어나지 않고 있었던 게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물론, 이 고요가 끝날 즈음 몰려올 폭풍은 그 어느 것보다도 거센 것이겠지만.
그나마 단 하나, 특별한 움직임을 보인 녀석이 있긴 했다.
“크하하하! 네놈, 정말이었구나! 정말이었어! 균형을 맞추는 자를 처리해버리다니!”
채무불이행자, 바실리 루덴코프.
사실 녀석은 내가 ‘균형을 맞추는 자’를 쓰러뜨린 바로 그 순간, 움직였다. 나를 보며 한참을 웃어젖히더니, 곧장 뒤돌아 내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만, 녀석이 향한 곳은 크노크 산의 정상이 아니었다.
외려 루덴코프는 검은 산맥을 완전히 떠나버렸다.
“······곧 보자고, 죽음을 얻은 후 돌아올 테니. 크하하핫!”
녀석이 향한 곳이 어딘지는 쉬이 짐작이 갔다.
옛 용 드라카의 거처.
칠왕끼리의 충돌을 통제하는 존재가 사라졌으니, 이제 직접 담판을 지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무력에 의한 협박을 통해서.
물론, 용의 맹약이라는 게 당사자가 죽는다고 해서 없던 게 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맹약의 불이행으로 인해 발생된 저주가 그 맹약의 지속기간보다도 더 오래 존속되는 경우도 있고.
하여, 백날 드라카를 협박한다한들 루덴코프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애매하긴 해.’
루덴코프와 드라카의 맹약의 경우, 약간의 특이점이 존재했다.
루덴코프는 이미 드라카에게도 빌렸던 힘을 반납한 상태였다. 아직 드라카 쪽에서 이를 ‘맹약의 이행’으로 받아들여주지 않았을 뿐이지.
중요한 것은 드라카가 루덴코프에게서 본래의 힘을 받아들인 순간, 이미 둘의 맹약은 암묵적으로나마 ‘이행’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드라카 쪽에서 이를 인정하는 걸 한없이 늦출 순 있겠으나, 어찌됐건 맹약을 불이행으로 간주할 만한 근거가 적어지긴 했다는 것.
만약 이즈음 루덴코프가 드라카를 살해해버린다면?
솔직히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맹약이 이행된 것이 되어 루덴코프에게 죽음이 되돌아갈지, 아니면 루덴코프가 영영 죽음을 되찾지 못하게 될지.
물론 어떠한 경우가 됐든, 내겐 득이 될 게 전혀 없었다. 드라카와의 만남 이후, 녀석이 달려와 내게 칼을 들이댈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게 기쁨에 찬 얼굴이냐,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냐가 다를 뿐이겠지.
그저 드라카가 녀석을 맞아 잘 버티길 바라는 수밖에.
그러고 생각에 잠긴 채, 아직은 잠잠한 검은 산맥 전역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웬 고철들끼리 부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고개를 돌려보니,
“응?”
저 멀리 웬 요상하게 생긴 물체가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회색빛깔을 띤 그것은 뭐랄까······ 철로 된 거대조개를 연상케 했다.
마치 용접으로 붙여놓은 듯 부자연스럽게 찌그러진 앞부분과 하단에 달린 바퀴가 그것이 인공물이라는 걸 알려주고는 있었지만, 당최 그 정체와 용도를 짐작키 어려웠다.
다만,
‘응? 저거 어디선가······.’
생전 처음 본 것이었음에도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왠지 저것의 원형을 본 기억이 있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고 있던 내게, 그것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윽고,
철커덩-.
내 앞에 멈춰선 그것의 뚜껑(?)이 열렸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것은,
“······코코아?”
아주 익숙한 얼굴의 꼬맹이였다.
“안녕 주걱턱?”
“너······.”
“늦진 않았지?”
코코아가 나왔다는 것. 그건 저 정체불명의 거대조개가 바로, 코미어가 만든 기계라는 뜻이었다.
“호오······.”
나는 코코아를 다시 만났다는 반가움도 잊은 채, 재차 찬찬히 조개를 살폈다.
다시 보니, 희한하게만 보이던 외관도 뭔가 있어 보였다.
“그럼 이게?”
“응, 이거 완성시키느라 조금 늦었어.”
“······완성?”
이 또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코코아의 입에서 저 단어가 나왔다는 건, 어쨌거나 코미어가 먼저 이를 내뱉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설계자들은 무엇을 제작할 때 함부로 ‘완성’이니, ‘최종’이니 하는 단어들을 쓰지 않는다. 언제고 수리와 보완이 필요해질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헌데도 이를 썼다는 건······.’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개와 같은 외관이야 어떻든 간에, 어쨌거나 저것이 코미어가 넣고자 한 기능을 모두 갖췄다는 소리였으니.
즉, 저 조개가 바로 우리 주걱턱 모험단의 이동수단이자, 첨단 방어체계가 갖춰진 쉘터이며, 또한 코미어가 만들고 싶었던 하나의 ‘세계’라는 것이었다.
이를 깨닫는 순간, 어째 감회가 남달랐다. 원작에선 끝내 ‘회수되지 못한 떡밥’으로 출시되지 못한 녀석이 이렇듯 실제로 등장하게 되다니.
물론 뭐, 돈을 가져다준 것 외엔 딱히 내가 한 건 없었지만.
“안에 공간은 어때? 지낼만해?”
“응, 넓어. 이것저것 들은 것도 많고.”
“그 안의 시간축은?”
“음, 약간 빠른 편? 잘은 모르겠어.”
“호오······ 그래?”
확실히 구현이 되긴 한 모양이었다.
괜스레 기대가 됐다. 대체 저 안은 어떤 세상일까?
그때였다.
“······완성은 무슨. 대충 구색만 맞춘 거지. 아직 더 두드려야 돼.”
코코아에 뒤이어, 코미어가 조개 안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코미어! 잘 지냈냐?”
녀석은 나를 보며 씩 웃은 뒤,
“나야 뭐. 그보다도 네게 물어볼 게 있는데······.”
인사조차 생략하곤 곧장 용건을 꺼냈다.
“네 지식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
여전히 녀석은 내가 설계에 굉장한 지식이 있는 듯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몰라 나도. 네가 모르는 건.”
그러자,
“모른다? 흐음, 역시나 내가 뭘 물을지조차 이미 짐작하고 있었나 보군. 아마도 그건 킹스로드를 건널 때부터였겠지?”
녀석이 알아듣기 힘든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뭔 소리야?”
“그렇다는 건······ 그렇군. 이에 대해선 너 또한 정말 모른다는 뜻이겠군. 하긴, 이건 그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지식일 테니.”
그러곤,
“그럼 혹시 코코로코를 좀 만나게 해줄 수 있을까? 시간축 조정과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는데.”
대뜸 그와 같은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흐음.”
그리고 이를 듣는 순간, 나는 꽤 놀랐다. 코미어의 바람은 본래 나 또한 염두에 두고 있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코미어가 ‘세계’를 제작 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시, 코코로코와의 접촉까지 생각해두자고.
다만, 이는 당장엔 실현이 가능한 계획이라 보긴 어려웠다.
현재 코코로코가 원작에서와는 달리 대마녀의 편에 붙기도 한데다, 또 생각보다 ‘최상층 결전’이 빨리 앞당겨진 상황이 아니던가. 코코로코와 만나 교섭할 시간이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글쎄, 노력은 해볼게. 근데 아마 힘들지도. 당장은 녀석에게 지급할 마땅한 대가가 없으니까.”
“······하긴.”
그게 무엇이건 간에, 코코로코에게 요구를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러야 한다.
돈이든, 무력이든, 혹은 일신상의 자유든······ 그리 저렴하지 않은 무언가를 말이다.
그래서 나는 현 상황이 더욱 만족스러웠다. 만약 코미어가 ‘세계’를 만들지 못했다면 또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게 아니니까.
코미어의 입장에서야 더욱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고 싶을지 모르겠으나, 내 계획엔 그것까지는 필요가 없었다. 별도의 구분된 세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즈음,
“저도 있습니다, 주걱턱 씨.”
“오, 하카!”
코미어에 이어 하카가 거대 조개 안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헌데 녀석은 혼자가 아니었다. 하카의 곁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타락기사?”
“어쩌다 보니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구면이시죠?”
“······.”
그와 동시에, 굉장히 음울한 표정의 한 남자가 슬그머니 조개에서 나왔다.
녀석은 완전히 초상을 치른 듯한 얼굴이었는데, 정말이지 눈빛과 표정 하나하나에 염세와 비탄이 철철 흘러넘칠 정도였다.
물론 알고는 있었다. 1층을 벗어난 녀석이 지금 어떠한 기분이고, 어떠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
다만, 실제로 보니 훨씬 더 심각해 보였다. 저렇듯 태양조차 증오스럽게 쳐다보다니.
솔직히 약간 걱정이 될 정도였다. 본래의 에피소드를 잃어버린 저 녀석이 이대로 단 한 번도 빛나지 못한 채 스러질까봐.
“······.”
현재 타락기사의 정신은 반쯤 붕괴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존재의 이유를 버리고 떠나온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이니.
과거, 성녀를 지키지 못한 자괴감에 타락기사는 모험의 탑1층에다 스스로를 감금시켰다. 그녀의 무덤을 지키며 평생토록 죗값을 치르기 위하여.
당시 녀석이 스스로에게 걸었던 제약이 가히 용의 맹약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기에, 그 부작용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당장 미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하다고나 할까.
심지어,
“여기가······ 종착지인가?”
마침내 죽을 자리를 찾았다는 듯, 저러고 괴이쩍게 눈을 빛내는 모습이라니.
흡사 관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시체를 보는 것만 같았다.
이에,
“후······.”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다시 봐도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였다. 온갖 매력적인 설정들은 다 품고 있으면서, 이토록 생존기한이 짧을 수가 있다니.
물론 그 때문에 그토록 강렬히 빛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였다.
“루카스, 자꾸 그딴 소리 하면 혼날 줄 알아.”
코코아가 그를 보며 퉁명스레 한 마디를 던졌다.
“······코코아, 왜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거야. 나는, 나는······.”
“그러니까 굳이 따라와서 난리야. 거기 있으라니까.”
“내, 내가 그러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몰라. 계속 징징거릴 거면 더 따라오지도 못하게 할 거야.”
“······.”
놀랍게도, 루카스는 코코아의 한 마디에 꾹 입을 닫았다.
게다가 녀석은 코코아와 대화할 땐 희한하게도 눈빛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애원하듯 절절해지는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다행히 코코아가 어느 정도 성녀의 역할을 잘 수행해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좋아.’
아직은 괜찮은 듯했다. 어쩌면 원작에서만큼의 어이없는 최후는 피할 수 있을지도.
그즈음,
“슬슬 시작할 것 같아.”
코코아가 묘한 소리를 꺼냈다.
“······음.”
나는 그에 동의했다.
실은 코코아가 저 거대 조개 앞에서 고개를 내밀었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코코아라면 딱 맞춰서 올 것 같았으니까.
시간이 됐다.
때마침,
휘이잉-.
어디선가 웬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혼란의 전조와도 같은 바람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적막했던 검은 산맥에 첫 번째 움직임이 일었다.
그 결전의 서막을 연 건,
쿠오-.
쿠오오-.
동쪽 저 편에서 태양을 가리며 등장한, 수십 쌍의 거대한 검은 날개들이었다.
검은 용.
혼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들이 마침내 등장한 것이었다.
물론, 이 또한 예상한 바였다.
이곳에 모인 다른 세력들과는 달리, 저 녀석들은 혼란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니.
나는 찬찬히 검은 용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무리의 앞줄엔 보통의 검은 용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완전히 다른 생김새의 두 존재가 앞장서고 있었다.
검은 산맥에 피를 가져올 첫 번째 타자는 내가 아주 잘 아는 두 명의 인간이었다.
나는 키리코와 도로시를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디부터 불태우려나.”
*
일행은 한참을 침묵 속에서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얀이,
“그,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지 않을까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격을 박탈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니 브리다에게 공격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운이니까······.”
시아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솔직히 말해, 아리엔이 보인 아량은 하해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브리다더러 자신들을 한 입에 꿀꺽하라고 했다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오공 녀석은 브리다에서 도망치듯 내려서는 그 순간까지도, 양 손에 바나나를 꼭 쥐고 있었을 정도이니.
이렇게 순순히 보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다만,
“너는 길잡이면서 그런 말을 하니?”
타냐만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러고 쏘아붙였다.
그녀의 표정은 아까부터 줄곧 구겨진 상태였다.
“길이 안 보이기 시작했어. 완전히. 주걱턱 녀석이이 나타났을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긴 했는데······ 칠왕을 그렇게 간단히 제압하다니 그게 말이 돼? 그것도 다른 녀석도 아닌, 균형을 맞추는 자를······.”
“······.”
일이 이 지경이 된 데엔 시아나 또한 뼛속깊이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나설 리 없다는 걸 의식했어야 했는데.
자신이야말로 이 중에서 주걱턱이란 존재를 가장 오래전부터 봐온 당사자가 아니던가.
이제껏 그는 진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처음 그의 존재를 의식했던 골담시티에서부터 그랬다.
1대 5포커.
결코 이길 수 없게 설계된 게임을 승리하게 만든 건, 레오가 아닌 바로 그 주걱턱이었다.
놀이동산에서 치러진 게임에서도 그는 자신에게 패배를 선사했다. 그제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던 이 골담시티의 여왕에게. 도깨비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 또한 그가 준비한 수단이 아니었던가.
“······건방졌어.”
지지 않는다는 것.
이는 곧, 그가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한다는 뜻이었다.
그걸 간과해선 안 됐는데······.
그때였다.
“우끼-!”
별안간 오공이 소리를 빽 질렀다.
이제까지의 잠잠했던 모습은 어디가고 갑작스레 광분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 타냐가 버럭 화를 내려던 순간,
“이 원숭이 자식이! 너는 아직도 그 우끼 소리가······.”
쿠오-.
무언가가 머리 위를 빠르게 지나쳐갔다.
한순간 밤이 찾아왔다고 느꼈을 만큼, 검고 거대한 생명체였다.
타냐는 오공에 대한 비난을 이어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대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검은 용.”
그 이름만으로도 위압감을 풍기는 존재의 명칭이었다.
곧이어,
“서두르자, 빨리 가야겠어. 곧 습격이 시작될 거야.”
타냐가 긴박한 어조로 말했다.
“어, 어디로요?”
“바보! 너 길잡이 맞니?”
시아나는 처음으로 얀에 대한 타냐의 질책에 공감했다. 이는 길잡이가 아니더라도 쉬이 알 수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레오.
그의 곁이 아니라면, 현재 안전한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 레오가 이곳에 도착해 있을까요?”
“글쎄······ 아마도?”
“하, 하지만 레오는 길을 볼 줄 모르는데······.”
“괜찮아. 어차피 그 녀석은 운명에 의해 인도될 테니까.”
그러곤 타냐가 막 레오를 찾기 위해 길을 탐색하려 할 때였다.
느닷없이,
“잠깐, 거기 좀 서볼래?”
뒤쪽에서 웬 음성이 들려왔다.
굉장히 고혹적인 목소리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악의와 불길함이 가득했다.
이에 뒤를 돌아본 시아나는 곧장 얼굴을 굳히게 되었다.
음성의 주인은 마녀였다. 그것도 굉장한 고위급의.
“대마녀가 좀 데려오래서. 저 브리다에 올라탈 수 있었던 비결을 듣고 싶다나 어쩐다나?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당신은 누구죠?”
시아나의 물음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마녀가 씩 미소를 지었다.
“벨루카라고 해.”
“······.”
들어본 이름이었다.
대마녀 바로 아래, 네 마녀 중 하나의 이름이 아마 그것이었을 것이다.
감당이 가능할까.
시아나는 한 차례 마녀와 붙어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힘을 빼앗아 마녀들의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리 하위급의 마녀를 처리하는 데에도 그녀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헌데······ 눈앞의 마녀는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강자였다,
그즈음,
“시아나 님, 뒤쪽으로······ 여긴 제가.”
어느새 고요해진 얼굴의 얀이 앞으로 나섰다.
전투에 임할 때의 얀은 키리코나 레오에 못지않게 듬직했지만, 솔직히 이번만큼은 안심할 수 없었다.
“그쪽은 그 꼬맹이가 상대하는 거야? 그럼 나는 누가 맡고?”
상대가 비단 벨루카 하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서, 벨루카에 필적할 만한 미모의 여인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난 키르케야. 벨루카와 함께 네 마녀로 불리고 있지. 뭐, 내가 좀 더 예쁘긴 하지만?”
당혹스러웠다. 네 마녀 중 둘이 잡으러 오다니.
아니,
“그리고 나는 스테이시. 마찬가지야.”
······셋.
시아나는 마지막으로 등장한 마녀를 보곤 침을 삼켰다.
무리다.
하나도 버겁고, 둘도 위태로울 텐데, 무려 셋이라니.
돌아보니 타냐 또한 어느새 창백해진 얼굴이었다.
오공 또한 장난스럽던 얼굴은 어디가고, 잔뜩 긴장한 채 이미 전투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내가 하나는 맡아야 돼.’
시아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당장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자신과 오공이 한 명씩 맡고 버티면서, 얀이 먼저 하나를 처리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리고 혹 방법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팅커벨 곁에 있어?
-응.
-그 애에게 주걱턱에게로 돌아가라고 전해줘. 그리고 가능하다면······ 지금 우리 상황도 전달해달라고 해주고. 위급하다고.
-알았어.
-그리고 얼른 와.
뻔뻔하다 욕할 수도 있겠지만, 별 수 없으니.
이어 시아나는 곧장 타냐에게 일렀다.
“여긴 우리가 맡고 있을 테니, 어서 빨리 레오를 찾으러 가요.”
“······알겠어.”
타냐는 두 말 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이 외엔 방법이 없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테니.
그러고 막 타냐가 조심스레 뒤로 몸을 빼려 할 즈음,
“뭐야, 혼자 내빼려고?”
갑작스레 등장한 또 한 명의 여인이 뒤를 막아섰다.
“우리 대마녀 님이 겁이 좀 나셨나봐. 이런 애들 잡아오는 데 넷이나 필요하다고?”
“검은 용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뭐든 처리했으면 했나보지. 뭐, 이미 용들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긴 하지만.”
······.
틀렸다.
암담함에 시야가 까맣게 물드는 느낌이었다.
암만 그래도 넷은 무리였다. 네 마녀가 힘을 합하면, 대마녀조차 당해낼 수 없다는 게 정설이었으니.
‘······생각해.’
그러나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최선의 수를 강구해야 했다.
모두가 빠져나가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라도 몸을 뺄 수 있는 방법을.
곧이어,
“······얀.”
시아나는 조심스레 얀을 불렀다.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건 하나 뿐이다. 얀의 유령.
“레오나 키리코가 없는 이상 대적은 불가예요. 빠져나갈 수 있는 건 얀의 유령 뿐. 무슨 말인지 알겠죠?”
“하, 하지만······.”
“어서. 투항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고 말 거예요. 그전에 하나라도 유령을 빼돌려야 해요.”
그러나,
“······.”
시간이 없었음에도, 얀은 주저했다. 걸음을 떼려하지 않았다.
물론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 도망치라는 건, 저 어린 소년에겐 감당키 힘든 짐일 수밖에 없을 테니.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은가.
답답한 마음에, 시아나가 다시금 그를 재촉하려 할 때였다.
바로 그 순간,
“······살았다.”
긴박한 분위기에 맞지 않은, 안도에 찬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응?”
타냐였다.
그녀가 저렇게나 밝게 웃음 지은 건, 레오가 떠난 이후 처음이었다.
“오고 있어.”
“······설마?”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번쩍-.
저 멀리, 타냐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한줄기 번개였다.
세상을 밝히고, 어둠을 태우는······ 빛.
이어 한 차례 더 눈을 깜박인 순간,
번쩍-.
어느새 레오가 눈앞에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함박웃음을 지은 채로.
“다들 잘 지냈어?”
“······레오.”
“우끼!”
“레, 레오!”
“······늦었잖아.”
이어,
“늦어서 미안, 그럼 갈까?”
레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당장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다소 생뚱맞은 것이었다. 마치 주위를 둘러싼 네 마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야말로 태평한 것이었으니.
“타냐, 주걱턱은 지금 어디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