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희생되어야 할 존재
***
주걱턱 진영 본부.
중앙막사.
나는 막사 내 설치되어 있는 대형스크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스크린은 열여섯 개의 세부 화면으로 분할되어 있었으며, 이는 검은 산맥 곳곳에 퍼져 있는 128대의 영상드론에 의해 현재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는 화면이었다.
“몇 시간 전 코미어 씨가 설치해두고 갔습니다. 엄청 투덜거리시더라고요, 별 걸 다 한다고.”
“별 거긴. 전투현장을 직접 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저도 그렇게 말했습니다만······ 딱히 수긍하는 기색은 아니시더군요.”
“지가 뭘 알겠어. 앉은 자리에서 망치나 뚝딱뚝딱 거리는 녀석이.”
물론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내심 찔릴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전투현장을 확인하고, 보충 병력이 필요한 곳에 인원을 급파하기 위한 용도······ 로 제작을 요청한 것이긴 하나, 실제로는 보여주기식 소품이 맞았다.
무대연출용 미장센의 일부라고나 할까.
현대식 문물을 통해 용과 거인들의 전투현장을 지켜보는 그림······ 나름 괜찮지 않나?
나는 다시금 스크린 전체를 훑어보며 말했다.
“······나쁘지 않네.”
“예, 당장은 크게 나쁘지 않은 상황입니다. 총 열한 곳의 전장 중 네 곳이 우위를 점하고 있고, 일곱 곳이 비등하니까요.”
“응? 상황?”
“그것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어······ 맞아.”
이어 자세히 살펴보니, 하카의 말 그대로였다.
당장 화면에 드러난 전장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모험단 협회 인원들과 마녀들 쪽은 대체로 전세가 비등했으나, 그 외에 레오 모험단이나 도로시가 있는 쪽은 명백한 우위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헌데 안색이 별로입니다만?”
“······.”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설사 열한 곳의 전장이 모두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한들 웃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나 보죠?”
“맞아, 별로야.”
“그건······ 역시 좀 전에 다녀오셨던 일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나는 하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지금······ 완전히 x됐다고.
“아까 보니 루카스 씨가 꽤나 부상을 입은 것 같던데요?”
“······그 녀석은 괜찮을 거야. 코코아가 간호하니까.”
외려 머릿속에서 쫑알거리던 목소리들이 사라진 까닭에, 평소보다 더욱 평온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근데 혹시 누가 루카스 씨를······?”
“······루덴코프.”
이에,
“예!? 그런데 어찌······.”
하카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나나 코코아는 무사하냐고?”
루덴코프는 루카스를 데리고 가겠다는 코코아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빼앗은 루카스의 힘에 취해 연신 웃어 보일 뿐이었지.
“크하하핫, 어어, 그래. 데려가, 데려가. 그 녀석 힘은 내가 잘 쓸도록 할 테니. 가만, 그럼 이제 내게도 날개가 돋아나는 건가? 크하하핫! 어쨌거나 고놈 고거 관리 잘 하라고. 이 힘을 빨리 잃고 싶진 않으니까.”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많이 심각한 모양이죠?”
나는 그에 대답하는 대신, 당장에 내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지시를 전달했다.
“일단 전파할 수 있는 모든 녀석에게 전해. 혹여나 본인이 있는 전장에 날개 달린 흑돼지가 출현하면 이유 불문하고 도망가라고.”
“날개 달린······ 흑돼지요?”
“그래, 뿔도 두어 개 달렸을 거야.”
“······.”
하카가 나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나는 루덴코프의 진영을 빠져나오면서부터 시작되었던 비관에 다시금 사로잡혔다.
역시나······ 다 내 탓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가장 큰 원인에는 물론 여러 사안들이 겹쳐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문제가 된 건 내가 ‘균형을 맞추는 자’를 처리해 버린 일일 것이다.
역시 ‘제어장치’를 건드려선 안됐던 걸까.
원작의 내용을 어느 정도는 존중해줘야 했던 걸까.
“······다 망쳐버렸네.”
그즈음 계속해서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건, 루카스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루덴코프에게 당하게 됨으로써, 녀석의 역할이란 게 사실상 원작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허무한 퇴장.
본래 나는 루카스에게 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당사자의 마음을 확인한 건 아니지만, 나만의 그런 욕심이란 게 있었다. 타락기사를 좀 더······ 빛나게 해주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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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 루카스는 그야말로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정말로 별 것 아닌 일이었다. 심지어 칠왕과 엮였던 것도 아니니까.
이번엔 전개가 바뀌어 아예 등장하지 않았지만, 본래 미들랜드로 넘어온 직후부터 레오 모험단과 부딪히는 몇몇 빌런들이 존재했다. 칠왕 급은 아니고, 그보다 조금 아래의 모험단들.
루카스와 함께 탑 1층을 벗어난 이후 특히 그들과 부딪히는 장면이 많아졌는데, 솔직히 그때도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다. 캐릭터로 보나, 전개로 보나 등장할 이유가 없는 빌런들이 지속적으로 나왔으니.
그러던 중, 어느 한 챕터에서 또 한 번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녀석들이 다른 여러 악당들과 손을 잡고서 습격해온 내용이었다.
그즈음엔 아직 레오와 키리코의 실력이 변변찮았던 탓에, 녀석들을 쉬이 물리치지 못했다.
하여,
“······버러지들이.”
보다 못한 루카스가 마왕으로 변해선 단번에 쓸어버렸던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힘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것이야말로 독자들이 원하던 장면이었으니까.
헌데 바로 그때,
“루카스······ 이제 그만하세요.”
끝장을 보려던 그를 난데없이 시아나가 막아선 것이었다.
그러곤 ‘더 이상 망가지지 말라느니’, ‘그만하면 됐다느니’, ‘악마가 아닌 기사로 남아달라느니’ 하며 트롤짓을 하는 게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황당했는데, 심지어 그 뒤가 더 가관이었다.
시아나의 말에 따라 루카스가 변신을 해제한 순간, 뜬금없이 쓰러진 줄 알았던 악당 하나가 그녀에게 독이 발라진 단검을 던졌던 것.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장면이,
“커, 커헉······.”
“안 돼!”
“루, 루카스!”
이를 본 루카스가 그 검을 대신 몸으로 막아내는······ 그런 병신엔딩이었던 것.
하여간에 무지막지하게 욕을 먹은 전개였다. 통쾌한 사이다 장면을 기대하고 있던 독자들에게 느닷없이 목구멍이 막히도록 고구마만 처넣은 셈이었으니.
이에, 당시 허탈해진 나도 몇 달간 모험왕을 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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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차라리 그게 더 나았을지도.”
지금은 역할로만 따지자면 그보다도 못한 꼴이었다. 그때는 뭘 보여주기라도 했지, 이번엔 그냥 등장과 동시에 퇴장한 셈이질 않는가.
괜히 요상한 날개 달린 흑돼지 한 마리만 탄생시키고 말았지.
물론 루카스 개인의 행복감만 따진다면 이쪽이 나을 순 있었다. 고통도 덜고, 죽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못내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타락기사는 훨씬 더 빛나야 하는, 그런 가치 있는 캐릭터였으니까.
······.
잠시 후,
‘······아냐, 이미 벌어진 일.’
나는 고개를 젓곤, 이에 대한 생각을 털어버리기로 했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합리화라 한들 상관없었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지금 내가 생각해야 할 건, 눈앞의 이 거대한 난관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하는 것이었다.
“정신차리자.”
핵심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루덴코프가 너무나 강해져 버렸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 전에도 이미 충분히 버거운 상대였는데, 거기에 루카스의 힘까지 더해졌으니.
짐작하건대, 커뮤니티에서도 이제 더는 이견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모험왕 내 최강의 캐릭터는 바로 ‘마왕 루덴코프’라는 것에.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두 번째, 협공이 불가능하다는 것.
루덴코프를 압박할 한 가지 방법은 바로 머릿수로 누르는 것이다. 녀석의 진영에 비해 우리 쪽의 강점이라면 단연 ‘네임드 캐릭터’가 많다는 것이니까.
다만 현재로선 동원 가능한 인력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는 단순한 이유였다. 과거 녀석에게 힘을 빼앗긴 전적이 있지 않는 한, 루덴코프 앞에 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괜히 어슬렁거리다 괜히 녀석의 양식이 될 뿐이니.
레오도 안 되고, 키리코도 안 된다.
물론, 도로시도 안 된다.
그나마 대마녀를 동원할 순 있겠으나······ 그녀를 온전히 믿을 순 없는 노릇이니.
고로, 현재 녀석에게 대적이 가능한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바로 나.
물론 상대가 루덴코프만 아니었다면, 이 같은 상황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과연 내가 지금 저 루덴코프에게 10분이라도 버틸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대항할 전력을 갖추려면 내가 각성이라도 해야 하나, 단순한 만화 캐릭터도 아닌 내가 그게 가능할지도 의문인데다, 설사 각성이 된다한들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휴······.”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갑갑했다. 이렇게나 방법이 떠오르질 않다니.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니······ 말이 되냐고.”
황당함이 밀려들었다.
작가는 이걸 풀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물론 내가 아닌 레오가 기준이긴 하지만.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레오 쪽은 나보다도 더 답이 없었다. 녀석은 당장 루덴코프의 능력을 피할 수조차 없으니까.
‘뭔가······ 숨겨둔 패라도 있다는 걸까?’
분명 뭐가 있을 것 같긴 한데, 당최 그게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여, 그러고 죽어라 머리만 쥐어뜯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거기 있나?”
막사 바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음성이었다.
이런 상황에 느닷없이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곧이어,
“할 말이 있어서 왔다.”
음성의 주인이 막사의 입구를 젖히고 들어왔다.
그로니얀이었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단 한 번, 원치 않는 부조리한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그로니얀이 들려준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녀석의 고유능력 [상황역전]은 단 한 차례, 반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다.
어느 한 대상이 만들어내는 ‘부당한 상황’을 거부하고, 그 역(逆)의 작용을 이끌어내는 것.
듣는 순간 희한하다는 생각이 드는 능력이었다.
일단 발동횟수에 제한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작동방식이나 능력의 유형 또한 이전엔 본 적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뭐랄까······ 굉장히 감정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능력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어쩌다 그런 능력을······.”
“그야 네 놈 때문이지.”
“엥? 나?”
그리고 이어진 녀석의 말은, 황당하면서도 꽤나 그럴 듯한 얘기였다.
“내가 살면서 일생일대의 무력감을 느꼈던 게 딱 두 번 있었지. 네놈에게 당했을 때와 네놈이 저 루덴코프란 놈에게 당했을 때.”
“내게 당했을 때라면······.”
“네놈이 지브란테에서 갑작스레 적색로봇을 꺼냈을 때다.”
“아하.”
“네놈의 일격에 몸의 반이 날아가면서 느꼈던 감정이 바로 무력감······ 그리고 부당함이었지. 뭔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분하더군. 그런······ 도구 따위에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는 게.”
“······.”
어째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됐다.
그로니얀은 애당초 나를 제거하기 위해 작가에 의해 창조된 캐릭터다. 그런 그가 되레 내게 제거되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분명 ‘존재의의’를 삭제당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상실감이 컸을 수밖에.
더군다나 이능장갑기병을 통해 증폭된 내 힘은 그때의 파워밸런스를 아득히 초과하는 것이었다. 부조리함을 느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나를 자극했던 게 바로 저 루덴코프 녀석이었지.”
그로니얀은 그때 처음으로 심장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런 저항도 못해보고 힘을 빼앗겨야 했던 그 상황이 너무나도 부당해서. 그리고 그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던 마음이 끝내 능력의 각성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근데······ 루덴코프 쪽은 약간 황당하네. 힘을 빼앗긴 건 난데. 왜 자기가······.’
그즈음,
“어쨌거나 너라면 눈치 챘을 거다. 이 능력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응?”
그로니얀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녀석의 눈빛은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본론이다.
“나는 루덴코프의 능력을 막아낼 수 있다. 단 한 번뿐이긴 하지만.”
그 순간,
“······.”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믿기지가 않았다.
이토록 갑작스럽게, 마치 거짓말처럼 해법이 나타날 줄이야.
흥분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아냐, 아직이야.’
아직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나는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확실해? 그는 칠왕이야. 웬만한 능력으론 그를 통제할 수 없어.”
“알고 있다. 그래서 횟수에 제약을 걸어 힘을 극도로 강화시켰지. 능력의 발동을 단 한 번으로 제한하되, 결코 저항할 수 없는 규제로 작용할 수 있도록.”
“제약에 따른 강화······.”
가능한 얘기였다.
용의 맹약이 저와 같은 식으로 저주의 강도를 조절하니.
“너라면 내가 언제 어느 때 내 능력을 활용할 수 있을지 알 거라고 생각해 찾아왔다.”
“······.”
그즈음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로니얀이 해법이라는 것을.
‘뜬금없이 그로니얀이라······.’
분명 처음엔 무척이나 놀란 게 맞다. 아직도 심장이 저릴 정도니까.
허나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사실 그리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제껏 해답을 내지 못하고 있었던 건, 기존의 등장인물들 중에서 이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당초 그들에게 답이 있을 리 만무했다. 정해진 역할과 능력이라는 게 있는데, 달라진 전개에 맞춰 대뜸 새로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리가.
해답이 될 수 있는 건 원작엔 없었던, 처음부터 작가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창조된 캐릭터뿐이었다.
바로 이 녀석, 그로니얀.
하지만 아직 문제가 다 풀린 건 아니었다.
이미 루카스의 힘을 얻은 루덴코프는 ‘더 무언가를 얻을 필요가 없을 만큼 강해진 상태’다.
즉, 루덴코프의 능력을 한 번 막을 수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째서 지금 온 거지?’
그로니얀이 보다 일찍 나를 찾아왔다면 훨씬 더 수월했을 것이다.
내가 마왕 루카스를 등장시키려 하기 전에.
그럼 그로 하여금 루덴코프를 막을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녀석은 지금 찾아왔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운이 없어 엇갈린 게 절대 아니다.
작가의 의도가 백 퍼센트 개입되어 있다고 봐야했다.
“······.”
그리고 또 하나.
어째서 그로니얀이 레오가 아닌 내게로 왔을까.
어째서······ 내게 선택권이 쥐어졌을까.
나는 의식도 못하는 사이, 깊숙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설마.
하나의 결론이 마치 숙명처럼 떠올랐다.
“······하, 하하.”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모든 전개에 전제된 작가의 의도를.
내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이 이야기의 절대적인 흐름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게 그 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건 그저 수긍과 결단뿐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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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로니얀은 어느새 사라진 다음이었다.
나는 서둘러 하카를 불렀다.
“하카! 하카!”
곧이어,
스윽-.
내 발 밑에 있던 그림자가 봉긋이 솟아올랐다.
“부르셨습니까?”
“여기로 대마녀랑 바하롬을 좀 불러줘. 그리고 대마녀에겐 내가 따로 말할 테니까, 지금 당장 전장에 나가 있는 모든 마녀들을 소환해줘.”
“······모든 마녀들을요?”
“그래, 하나도 빠짐없이 몽땅. 아참, 코코아는 루카스와 같이 있나?”
“예, 그럴 겁니다.”
“그럼 대마녀와 바하롬은 바로 부르지 말고, 30분 뒤에 이 중앙막사로 좀 오라고 해줘. 마녀들은 곧장 불러들이고. 서둘러줘.”
“예.”
내 계획은 모두 어그러졌고, 이미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진행 중이었다.
처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내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는 걸.
다만,
“······그리 쉽게는 안 될 거다.”
나도 그리 호락호락한 인간은 아니라서.
나는 마지막 변수를 만들기 위해, 서둘러 코코아에게로 향했다.
*
다섯 시간 뒤.
나는 내 앞에 선 더벅머리 소년을 조금은 복잡한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솔직히 나도 잘 알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그것이 분노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레오는 나를 보자마다 대뜸 소리쳤다.
“주걱턱! 뭐야!”
“뭐가.”
“뭐긴! 내 차례는 대체 언제야? 다들 싸우러 나간 상황에······.”
“너 바보냐?”
“뭐?”
“차례가 왔으니 불렀지.”
“아하!”
그러곤 레오는 자신만만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몸이 근질근질 거리는 모양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너 그러다 죽는다.”
“뭐?”
“지금 그 정도로는 택도 없어. 넌 더 강해져야 돼.”
“그건······ 그래도 다 같이 힘을 합치면······.”
“······.”
루덴코프는 강하다.
여태 등장했던 캐릭터들 중 가장 강한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그들 모두가 한꺼번에 덤빈다 하더라도 녀석 하나를 당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녀석을 상대할 강자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현재로선.
이 같은 경우, 답은 간단하다.
없으면 새로 만들어야지.
현재 그만큼의 성장이 가능한 존재는 이 세계에 단 하나뿐이다.
바로 레오.
처음부터 최종승리자로 정해져 있던, 이 이야기의 주인공.
나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응? 왜?”
“준비해.”
“준비?”
그 어떤 캐릭터도 단 한 번의 각성으로 루덴코프 만큼의 힘을 취득할 수 없다. 그런 건 개연성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단 한 명, 이 녀석만은 예외다. ‘주인공 보정’이라는 특수장치가 상대와의 갭을 메워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이를 위해선 몇 가지의 필수조건들이 필요하다.
일단 이 녀석을 각성시켜야 하고, 그에 앞서 ‘주인공 보정’이 최대한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루덴코프의 모든 힘을 끌어낸 상태여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희생.
레오에게 의미가 깊은 누군가가, 마왕 루덴코프에게 처치 당하는 것.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되는 존재가, 그 누구보다도 레오에게 의미가 깊은 존재가, 저 마왕 루덴코프와의 승부에서 끝내 쓰러지는 것.
그 순간, 아마 레오는 최강의 존재로 각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소년만화의 규칙이니까.
“그럼 슬슬 가자.”
“응? 어딜?”
“루덴코프 잡으러.”
“어······ 지금? 둘이서?”
“뭐냐, 겁먹었냐? 재촉할 땐 언제고.”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됐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대마녀랑 바하롬이랑······ 다른 이들도.”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존재는 딱 한 명 있었다.
“아참, 너 알아둬라.”
그러곤 나는 다시금 녀석을 바라봤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현재의 내 감정을 이 녀석이 알아주기를 바라며.
“네가 이 전투를 끝낼 주인공이라는 거.”
“······뭐?”
작가가 의도한, 이 녀석을 각성시키기 위해 희생되어야 할 존재.
그건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