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203
203화 최후의 순간
***
하루 전.
“뭐라?”
“다 들었으면서 못들은 척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더냐?”
“당연하지.”
“자신만만하구나, 내가 어떻게 반응할 줄 알고.”
“뭐, 처음엔 못들은 척하다가, 진심이냐고 묻고······ 다음으로 내 반응을 살살 살피다, 결국 들어주고 말겠지.”
“······.”
나는 대마녀가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진즉에 나와 레오 쪽에 승부를 걸지 않았던가. 이는 그녀 또한 본인이 가진 패를 모두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대로 루덴코프가 모험왕이 되도록 놔둔다면······ 녀석이 다른 칠왕들을 살려둘 거라 생각하긴 어려웠으니.
즉,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모든 마녀들의 힘을 내게 넘겨라’는 황당무계한 소리라 할지라도.
그리고 역시나,
“마녀들이 순순히 이를 따를 것이라 보느냐?”
대마녀는 거절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방법에 대해 물었을 뿐.
“마녀들이야 어차피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 거 아냐? 거부하는 녀석이 있으면······ 그냥 먹어버리면 되는 거고.”
“······.”
“뭘 물어. 대마녀께서 까라면 까야지.”
마녀들은 본래부터 약육강식이 바탕인 종족으로, 상위 포식자가 피식자를 관리 및 지배하고 있는 구조다. 상위 마녀가 하위 마녀를 잡아먹고 힘과 아름다움을 빼앗아 가는 게 그리 놀라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네 마녀 중 하나인 벨루카의 경우, 서열이 가장 낮은 마녀들을 일종의 ‘보조 배터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정도였으니.
“제아무리 서열이 지엄한 사회라 할지라도 생존권을 위협하는 명령은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하물며 본인의 힘을 외인인 네놈에게 바치라는 것 아니더냐. 반발이 없을 리가.”
“그러니 부탁하는 거잖아. 도와달라고.”
“······.”
“어차피 딱 하루면 돼. 그 이상은 가지고 있을 생각도 없고, 또 그게 가능하지도 않을 테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처음부터 힘의 반환을 약속한 상태였다.
달라고 하는 것도 황당한데, 돌려줄 생각조차 없다라고 하면······ 그건 뭐 말이 안 되는 거니까.
“하루라······ 진정 원상복구를 약속할 수 있겠느냐.”
“물론이지.”
어차피 약속은 지켜질 수밖에 없다. 하늘마녀의 [강탈]로 빼앗은 힘은 능력자가 죽으면, 원주인에게로 자연스레 돌아가게 되니까.
“······알겠다.”
대마녀는 그 이상 내게 확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약속을 하라느니, 만약 거짓일 경우 대가를 받을 것이라느니 등등의 이야기도 없었다.
그녀가 나를 온전히 신뢰했다 볼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 순간 나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내 눈에 담긴 초연함을 봤던 것일지도.
그러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이어,
“가져가도록 하거라.”
나직이 한숨을 내쉰 대마녀가 대뜸 그렇게 말하며,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응?”
“가져가래도.”
“······뭐를?”
“뭐라니. 지금껏 그 얘기를 한 것 아니었느냐? 마녀들의 힘을 가져가겠다고. 설마 나는 그 대상에서 제외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오.”
대마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고민이 길었던 거구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을 뺏긴 마녀의 말을 누가 듣겠어.”
“······나는 마지막이란 소리군.”
“아니. 당신 건 필요 없어.”
이에,
“뭐?”
대마녀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만?”
물론 그녀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녀들의 힘까지 끌어 모아 어떻게든 저항해 보겠다면서, 정작 가장 강력한 힘은 마다하는 꼴이었으니.
다만,
“당신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거든. 그리고 나중에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어서.”
이는 욕심에 불과했다.
나 또한 그녀의 힘이 탐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실 그것까지 가져온다고 해서 루덴코프를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대마녀는 내게 힘을 제공하는 것보다는 보다 가치 있는 역할을 맡아줘야 했다.
“해줘야 할 일?”
“일단 나서서 싸워주기도 해야하고 또······ 이따 더 말해주도록 하지. 어쨌거나······ 슬슬 시작했으면 하는데? 여유가 별로 없거든. 전장에 나가 있는 마녀들을 불러들일 시간도 필요 하니까.”
“······알겠다.
⁝
그리하여,
“네 마녀부터 앞으로 오도록! 벨루카, 너부터다.”
“빌어먹을 카밀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진짜 미친 거 아냐!?”
“말 듣거라. 반항하는 마녀는 내게 먼저 먹힐 것이니.”
“싫어! 싫다고!”
“어차피 하루면 돌아올 거다. 자, 다들 듣거라! 마나가 사라졌다고 해서 당황하지 말도록! 차례가 끝나면 곧장 다음 마녀에게 길을 터주도록 하거라!”
“비, 빌어먹을!!”
그렇게 대마녀의 보조를 받아가며, 나는 일시적으로나마 모험의 탑 내의 모든 마녀들의 힘을 ‘강탈’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
“······칫.”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산 중앙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쳐다봤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불과 10초 전만 하더라도 수많은 나무들로 채워진 자리였다.
마치 거인의 팔뚝만한 드릴로 냅다 뚫어버린 느낌이랄까.
구멍을 통해 산 뒤쪽의 풍경이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였으니, 산이 무너지지 않은 게 신기했다.
“휘유, 살벌하네. 근데 지금 내가 본 게 맞는 건가? 엉? 방금 그것도 파이어볼 맞지? 성냥에 불붙이려고 쓰는 그 마법, 맞지? 엉? 그게 그렇게 클 수가 있나?”
“······.”
이번까지 합하여, 도합 네 개의 산을 날렸다.
헌데 저 돼지 한 마리를 날리지 못하다니.
나는 근처 허공에 떠 있던 루덴코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신 놀란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어대는 녀석과는 달리, 내 얼굴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마법으로 녀석을 상대함에 있어, 벌써부터 한계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너······ 다른 마법은 없나? 파이어 볼이 다야? 그 무지막지한 크기의 얼음화살이랑?”
“······마법이야 많지만, 그냥 넘어가기에 아쉬워서 그러지. 자꾸 산만 태우고 마니까. 다른 걸 좀 불사르고 싶은데.”
“그래? 근데 그러기엔 꽤나 마법운용이 미숙해 보이던데······ 마치 아는 마법이 그게 다인 초짜마냥.”
“······.”
정곡을 찔렸다.
사실 마법의 위력엔 문제가 없었다. 몸에 축적된 마녀들의 힘에, 코코아톰의 ‘증폭’이 더해진 것이었으니.
저 녀석이 맞부딪치지 않고 피하고 있는 것부터가 그 힘을 입증하는 것 아니겠는가.
다만, 이를 원활히 활용하기엔 나의 마법적 지식이 너무나도 얕았다.
일단 쓸 줄 아는 마법이 거의 없었다. 녀석의 말마따나, 파이어 볼과 아이스 애로우 따위의 기초마법이 고작이었으니.
더욱이 응용력마저 형편없었던 탓에, 그마저도 녀석을 향해 그냥 쏴 보내는 게 전부였다.
쏘는 마나 덩어리가 불이냐 전기냐 그냥 마나 화살이냐 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첫 일격에 좀 더 이득을 봤어야 했는데······.’
생각할수록 아쉬웠다. 녀석이 방심하고 있을 때 한 방 먹였어야 했는데.
겉으론 여유만만해 보이지만, 현재 루덴코프는 바짝 경계심을 세운 상태였다.
그런 녀석을 마법으로 격추시키겠단 생각은 도둑놈 심보나 다름 없었다. 순전히 요행을 바라는 꼴이었으니.
하여,
“그나저나 이것뿐이라면 약간 시시한걸? 슬슬 불꽃놀이도 질려는 느낌인데.”
“잘됐네. 실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해볼까 생각 중이었거든.”
나는 곧바로 다음 턴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대로라면 괜히 힘만 낭비하게 될 테니.
현재 나는 고유능력을 발동 중인 상태가 아니었다.
칼 자이드의 [멈추지 않는 성장]과 마찬가지로, [강탈] 또한 능력을 통해 얻은 변화는 그대로 보존된다.
즉,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
“호오, 본격적이라······ 기대해도 되는 건가?”
나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본 루덴코프가 뭐든 해보라는 듯, 손을 까닥거렸다.
사실 이 녀석의 전력을 끌어내야 한다는 역할을 수긍하고, 목표를 세우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줄곧, 나는 이를 위해 어떤 능력을 써야할까에 대해 깊이 고민했었다.
내가 아는 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아니면, 평소에도 많이 활용해 몸에 익은 것?
혹은 코코아톰의 성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마법과 병행하기에 적합한 능력으로?
어떤 능력을 흉내 내야 현재 내가 가진 무기들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을까.
어떤 능력을 써야 저 루덴코프에게서 최후의 전력을 끌어낼 수 있을까.
몇몇 능력들이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내가 선택한 건 이것이었다.
이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일단 몸에 익은 능력이고, 내가 준비한 여러 힘들을 활용하기에도 안성맞춤이며, 무엇보다도 내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전혀 부족할 것 없는, 화려한 연출이 가능한 능력이었으니.
그리고 또 하나.
이제껏 이 능력을 통해 만들어낸 명장면만 여럿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얀에게 미안함이 들 정도였다. 내가 너무 이 능력을 애용한 탓에, 상대적으로 녀석에게 갔어야 할 스포트라이트가 줄어든 게 사실이었으니까.
매번 내 쪽에서 먼저 업그레이드 된 능력을 선공개 해버리는데 이어, 심지어 미들랜드에서 단 하나 있는 얀의 ‘증명의 기둥’ 파트까지 빼앗아버렸으니.
사실 그래서 더 녀석의 능력으로 마무리를 짓는 게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레오나 키리코의 능력이야 앞으로 몇 번 더 나올 테지만, 얀의 능력은 이제 더는 출연의 기회가 없을 테니.
그리하여,
“다 튀어나와!”
나는 최후의 능력으로 [유령살수]를 발동시켰던 것이다.
곧이어,
“아니, 이게 대체 얼마만이야!”
“두 번째라네, 오늘은 내가 두 번째라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나 유령! 너 주인!”
“어차피 그레이트 킹이 주인공일 거야······ 우린 그저 스쳐지나가는 소모품에 불과해······.”
“뭐야! 또 뭘 시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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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들이 쏟아져 나왔다.
열, 스물, 서른······.
사방이 금방 주걱턱 유령들로 우글우글 채워졌음에도, 나는 소환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멀었다. 이번엔 끝까지 갈 생각이었으니까.
“호오, 유령이라······ 뭔가 했더니 네놈이 자주 사용하던 그것이로군?”
내가 준비한 게 유령이라는 걸 알게 되자, 루덴코프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 전에 몇 번 본적이 있어서일 것이다.
“걱정 마. 이번엔 좀 더 신경을 썼으니까.”
그러곤 나는 계속해서 유령을 뽑아냈다.
사실 유령을 최대 몇이나 소환할 수 있을까 시험해 본 적은 없었다. 그에 대한 한계치가 원작에서도 제시된 적은 없었고.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령살수]의 핵심은 그레이트 킹이고, 녀석을 등장시키고 나선 굳이 일반 유령을 활용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의미가 없으니까. 기껏해야 위치 바꾸기를 위해 사방에 퍼뜨려놓는 정도?
다만, 내 경우는 그와는 조금 달랐다.
저 녀석들 하나하나가 모두, 칠왕에 못지않은 힘을 낼 테니까.
이윽고,
“끝! 내가 이제 마지막 더는 없어.”
마지막으로 나온 녀석이 내게 그러고 소리쳤다.
녀석까지 더해 총 천.
딱 천 명이었다.
그즈음,
“아니, 기껏 떠올린 게 쪽수로 밀어붙이는 거냐? 엉? 엉!? 설마 이까짓 유령들이 모인다고해서 뭐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엉? 엉!?”
루덴코프가 나를 보며 성을 내더니,
“저저 더러운 면상들 좀 보라지! 죄다 없애주마!”
대뜸 공격을 가하려는 게 아닌가.
나와 똑같이 생긴 녀석들이 주변을 뒤덮자 심히도 불쾌했던 모양이다.
이에,
“아니, 잠깐, 잠깐!”
나는 얼른 루덴코프를 제지했다.
“아직 준비 다 안 끝났어. 잠시 기다려보라고. 본래 악당들은 상대가 변신 중엔 안 건드리는 거 알지?”
그러곤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코코아!”
이윽고,
툴툴툴-.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퀴달린 조개가 기다렸다는 듯, 달그락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이어 도착한 그것의 입이 벌어지더니,
툭-.
툭둑-.
툭-.
뭔가를 하나씩 하나씩 내뱉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유령들에게 소리쳤다.
“뭐해! 가서 하나씩 주워 다 착용해!”
이에,
“뭐야?”
“저게 뭔데?”
“좋은 거야?”
“장난감인 것 같은데?”
유령들이 신나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장난감이라······.”
뭐, 대충 비슷한 것이긴 했다.
저 장난감(?)들은 엉망진창 잡동사니 창고에서 코코아가 털어온 걸 재차 코미어가 손 본 것으로, 마나를 동력으로 하는 에너지포였다.
이름하야 마공포.
각각에 모두 ‘증폭’이 붙은 것들이었다.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무기이니만큼, 하나하나가 다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했지만 동력은 충분했다.
내 몸에 한 가득 쌓인 마나들이 에너지 공급원이 되어줄 테니.
이어 나는 유령들을 하나하나 돌아봤다.
필살 아이템을 찬, 나와 엇비슷한 신체능력을 가진 천 명의 유령들.
이 유령 병대가 바로, 현재의 내가 갖출 수 있는 최강의 전력이었다.
이제 남은 건,
“그럼······ 슬슬 돼지몰이를 시작해 볼까?”
전투뿐이었다.
“모두 공격!”
나의 외침과 동시에, 천 명의 유령들이 폭주하듯 루덴코프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와!”
“돼지를 잡자!”
“죽여 버려!”
“죽이자!”
“쏴!”
실로 장대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퍼-엉!
퍼벙!
펑펑펑!
“하핫, 이놈 보게, 하다하다 이젠 병정놀이냐?”
유령들의 수가 워낙에 많고 또 녀석들이 진지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까닭에, 처음엔 루덴코프도 이들의 공격을 얕잡아보고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뭐, 뭐냐 이건!?”
녀석의 표정이 변화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날아든 수많은 빛줄기들을 웃으며 지켜보던 루덴코프는 이내, 그것에 담긴 마력을 느끼곤 기겁해 피했다.
“이, 이 빌어먹을 주걱턱 놈들이! 뭐냐고 대체 이건!”
“천하의 루덴코프가 도망을 쳐? 너 칠왕 맞냐?”
“이, 이건······ 이건 일개 유령 따위가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닌······.”
그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웃긴 녀석이었다.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냐?”
나는 코웃음을 치며, 유령들을 독려했다.
“죽여버려!”
“이, 이것들이······!”
그리고 바로 그때,
‘······기회!’
노리고 있던 순간이 도래했다.
나는 마침 녀석이 피신한 곳 부근에 있던 유령과 잽싸게 위치를 바꿨다.
그러곤,
“이봐, 방심하지 말았어야지.”
“······엉?”
“나는 노냐?”
준비하고 있던 파이어 볼을 녀석의 명치에다 꽂았다.
퍼-엉!
그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대규모의 폭발이 일었다.
마침내 제대로 먹인 한 방이었다.
······.
“이야······ 보기 좋네. 꽤 따끔하지?”
흙먼지가 잦아든 후 시야에 들어온 건,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루덴코프였다.
‘통했나?’
솔직히 그 모습을 보곤 나도 약간 놀라긴 했다.
설마하니 잡은 건가 싶어서.
허나,
“너······ 역시 봐주면 안 되겠네.”
이내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여는 녀석을 보곤 다시금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이어, 웬 검은 물질들이 녀석의 가슴 속 구멍을 메우기 시작하더니, 종래엔 녀석의 전신을 새까맣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예의 루카스 때와 같은 변화였다. 흑화(黑化).
‘이제······ 진짜 시작인가.’
검게 물든 몸, 돋아난 날개와 뿔, 그리고 동시에 느껴지는 엄청난 기운.
마침내 마왕 루덴코프의 출현이었다.
지금부터 진짜 싸움이었다.
이길 수 없는, 고통만이 예정된 전투.
다만, 나는 어떻게든 버티고 또 버텨 루덴코프를 자극해야 했다. 녀석이 내게 온 힘을 다 쓸 수 있도록.
그래야만 최종병기 뇌신이 이 세상에 강림할 테니.
“좋아, 가보자고.”
*
얼마나 지났을까.
한 시간? 두 시간?
어쩌면 며칠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내겐 그만큼이나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전장에 남은 유령은 이제 열도 채 되지 않았다.
코코아톰은 걸레짝이 된지 오래였다.
무엇보다도, 내가 지쳤다.
“······헉, 헉헉.”
마왕의 힘엔 저항이 불가능했다.
마치 블랙홀에 힘을 들이붓는 것만 같았다. 타격감이 전혀 없었다. 외려 모든 게 다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었지.
에전 커뮤니티 내에 올라왔던 누군가의 짐작이 맞았다.
루카스의 또 다른 인격 ‘마왕’은 미들랜드의 심해에서 기어 올라온 게 틀림없다고.
그건 해석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라고.
최후까지 어떻게 좀 멋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으나 무리였다.
녀석에게 대항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유령과 위치를 교환해 녀석의 공격을 피하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이야······ 너 정말 오래도 버틴다, 오래도.”
그즈음 루덴코프가 나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녀석은 언젠가 봤던 것처럼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할까? 이렇게까지 나를 귀찮게 할 수 있는 녀석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건 정말이야.”
“······.”
“경의를 표하지. 내가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건 네가 처음이야. 영광스럽게 생각하라고.”
그러곤 녀석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의 접근이었다.
“······.”
그 순간, 이젠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는 듯했으니.
그건 단순히 유령과 위치를 바꾼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렇군······ 정말 끝인가 보네. 그럼 마중이라도 나가볼까······.”
이어,
철커덩-.
나는 반파된 코코아톰을 완전히 벗어던졌다.
그러곤 코앞까지 다가온 루덴코프와 마주섰다.
“······후.”
공기가 달았다.
“고생했다. 이제 끝내주마.”
“······.”
나는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실은 그즈음 다른 이와 대화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부탁합니다.’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네놈은 완벽한 도깨비가 아니니까. 물론 일말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장담은 할 수 없다.
‘안 되면 뭐······ 그냥 죽는 거겠죠.’
-빌어먹을 놈. 아니, 그냥 미친 놈!
‘훼방꾼 신에게 미친놈이라니······ 어마어마한 칭찬이군요.’
-그래, 칭찬 맞다! 이 빌어먹을 놈! 하나만 말해두마. 네놈과 함께 해서······ 무척 재미있었다.
‘······놀랍네요. 저도 그렇거든요. 역시 저는 훼방꾼 체질이 맞나 봅니다.’
이렇듯,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전개를 흐트러뜨리려 하는 걸 보면.
때마침,
‘······왔다.’
나는 내 몸에 깃드는 훼방꾼 신의 힘을 느꼈다. 내 마지막 승부수가 될 힘이.
나는 곧바로 이를 운용했다.
······.
이제 내가 할 건 다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글쎄,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대로 그냥 죽어 사라질지도 모른다.
혹은······ 마치 이제까지의 일이 모두 꿈인 것 마냥 현실세계로 돌아갈지도 모르지.
‘그건 너무 허무한가?’
바로 눈앞에 손을 치켜 든 루덴코프를 두고서도 어째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생에 베푼 적 없는 아량이다. 네놈에게만 특별히 선사하지.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고맙기도 하네. 마지막 말이라.”
그즈음 나는 레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가 좋을까.
잠시간 생각하다, 나는 이내 하나의 단어를 정했다.
뭐 별 게 있을까. 이 정도만 해도 저 녀석이 부담을 느끼기엔 충분할 것이다.
나는 내게로 떨어지는 루덴코프의 손날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뒤를 부탁한다.”
그리고 그 순간,
팟-.
목이 저릿해져 오는 느낌과 함께,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나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