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21
21화 치누아비
***
스켈레톤 하우스 보스 룸에 앉은 채 잠깐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시간이 느릿해지는가 싶더니, 문득 세상이 고요해졌다.
이어,
[모험왕 연재가 재개되었습니다]
[챕터9 – 데스톰브의 마피아들(1)]
[진행 중인 챕터의 권역에 속해 있습니다]
[수수께끼 주걱턱은 이번 챕터의 캐릭터 평가 대상입니다]
마침내 새로운 챕터가 열렸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은 채, 메시지가 전송된 홀로그램 창을 가만 응시했다.
챕터가 열리긴 했으나, 레오 일행이 현재 이 데스톰브 시내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챕터는 도시로 들어오는 길목 중간에서 첫 장면이 시작된다.
긴 에피소드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긴 하나, 그리 특별할 건 없다. 레오 일행과 이 도시 마피아 세력 중 하나인 ‘데스’의 조직원 몇몇이 맞닥뜨리는 것. 그리하여 자연스레 마피아들이 레오 일행의 등장을 알아차리는 것. 그렇게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후 진행되는 과정은 무척이나 단순하다.
하나의 조직이 레오 일행을 공격. 곧바로 깨진 뒤, 그 소식을 다음 조직에게 전파. 다음 조직이 이를 이어받아 또 공격. 다시 깨지고 그 소식을 연합에게로 전파. 이어 연합 측 1진이 공격. 또 깨지고······.
검은 그림자 측에서 바통을 이어받기 전까지, 그저 마피아 연합 전체가 돌아가며 깨지는 것의 반복일 뿐이다.
게다가 챕터의 구분 또한 명확하지 않아, 어디서 어디부터가 챕터9고 챕터10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냥 연달아 휙휙 넘어가는 수준이라고나 할까.
이것이 바로 내가 이때의 전개를 하나의 큰 에피소드로 뭉뚱그려 취급하는 이유였다.
“······재미가 없다고 이러면.”
흥미진진할 수도 있었던 전개가 약간은 긴장감 없이 흘러가게 된 까닭. 이는 무척이나 단순하다.
마피아들이 약하기 때문에.
‘일회성 소모품’ 그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레오 일행에게 긴장감을 심어줄 수 있는 적이었다면, 아마 내가 기억하는 인상 또한 달랐을 것이다. 그저 검은 그림자까지 가기 위한 발판 정도가 아니라, 마피아 그 자체로도 훌륭한 소재였다고.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이번 챕터에서의 내 목표가 되는 것이었다.
마피아들을 좀 더 가치 있는 적으로 끌어올리는 것. 그럼 그것이 곧, 마피아의 흑막이 된 나의 가치로 이어질 테니.
이를 위한 최우선 과제는 당연지사, 전력의 보존이다. 제아무리 능력치가 떨어지는 엑스트라라 해도 인원수는 힘이 되는 법이니까. 또 미리 짜둔 전략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최대한 많은 수의 마피아들이 필요했다.
즉, 무작정 레오 일행을 공격해 의미 없이 소모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경고!]
[개연성을 위반하려는 의도가 포착되었습니다]
[선행 플롯에 의해 행위가 금지됩니다]
[누적 페널티로 30초간 침묵이 강제됩니다]
그렇다고 마냥 내 마음대로 마피아 병력을 통제할 순 없다는 것.
사실 가장 먼저 시도했던 것이 바로 저 레오 일행과 첫 번째로 부닥치게 될 마피아들을 불러들이는 일이었다.
아직 도시에 진입하기도 전부터 무의미한 습격을 시행하는 것보다는, 도시로 들어온 녀석들을 단번에 둘러싸는 편이 훨씬 더 위협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날아든 경고 메시지.
작가가 미리 짜둔 플롯과 기획의도를 최소한이라도 만족시키지 않고선,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것이다.
“흐음······.”
뭐, 그렇다고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옆에 있던 ‘세븐 링’을 돌아보며 말했다.
“준비는?”
“시, 시키신 건 다······.”
“다시 한 번 확실히 주지시켜. 싸우는 거 아니고, 최대한 충돌 없이 빠져야 된다고. 유인하는 게 목적이니까.”
“네, 네.”
이 녀석 ‘세븐 링’은 뭐랄까, 아주 착실한 학생이었다. 그리 오랜 시간 교육(?)시키지 않았음에도, 금세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 이제 내 한 마디면 껌벅 죽는 시늉까지 한달까?
녀석을 데리고 스켈레톤 하우스로 와, 이곳 뚱땡이 보스에게 다시금 반지를 재착용 시킨 게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다.
“그리고 뚱땡이한테 시켜서 연합 내 조직들 오늘 중으로 다 모아놓으라고 하고.”
“네.”
이번 챕터의 기획의도가 레오 일행의 전투력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럴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마피아들의 능력치를 보다 높은 수준으로 설정해 놨거나, 이렇게 따로따로 습격하는 전개를 짜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그저 앞으로 있을 거대한 전투의 연출을 위해 분위기를 예열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다만 거기 소모되는 엑스트라의 수가 다소 많다는 것뿐이지.
즉, ‘전투’보다는 ‘긴장감’이 더욱 중요한 챕터라는 것.
긴장감만 유지할 수 있다면, 내용이 조금씩 달라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여, 내가 마피아들에게 내린 명령이 바로 ‘관찰’이었다.
모습은 드러내되,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 것.
지켜보되, 충돌하지 않는 것.
물론 내 주문사항이 온전히 구현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작가가 기어이 본인의 플롯을 밀어붙이겠다고 하면, 내가 어떤 명령을 내리든지 간에 싸움은 벌어질 테니까.
그러나 내가 의도한 전개가 본인이 처음 기획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효과 또한 나쁘지 않다는 걸 자각한다면, 작가 또한 내 전략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암만 그래도 멍청한 작자는 아니니······.’
그리고 내가 마피아들을 잘 굴려주는 게 작가한테도 훨씬 좋은 일이다. 아닌 말로, 이번 챕터에 대한 독자평가가 무시무시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작가는 검은 그림자로 완전히 파트가 넘어가기 전까지, 의미 없는 분량 늘리기를 한다며 독자에게 어마무시하게 욕을 먹는다.
솔직히 가능만 하다면 직접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진감 넘치게 전개 짜줄 테니까, 그냥 말 들으라고.
그즈음,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만?”
한쪽 구석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하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눈치 챘어?”
“난데없이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더니, 곧이어 명령을 재차 확인하기까지. 눈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죠.”
저 녀석······ 아닌 척 하더니 몰래 힐끔힐끔 나를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흠흠.
홀로그램을 보는 것도 조금씩 자제해야 할 듯했다.
“슬슬 도착할 것 같거든. 그 녀석들.”
“······어떻게 아는 거죠? 딱히 보고된 바가 없었는데?”
“그냥 감?”
“······.”
“그런 게 있어. 그보다, 오고는 있는 거야?”
임시동맹을 맺은 후, 내가 하카에게 요구했던 건 단 하나였다.
검은 그림자 본대를 불러라. 마피아들이 다 작살나기 전에.
“일단 지원요청은 해뒀습니다만······ 당신의 말을 다 신뢰할 순 없으니······.”
“대충 두루뭉술하게 보고한 듯한데, 당장 제대로 다시 요청해. 지금 급하니까.”
“······내게 지시하지 마시죠.”
“미안한데, 지시가 아니라 약속의 이행을 촉구하는 거야. 우리 동맹 맺기로 한 거 아니었나? 내가 하나 알려주면, 그쪽도 하나 들어줘야지. 그리고 그 녀석들은 정말로 강해. 여기 마피아들로는 어림도 없어. 어쩌면······ 검은 그림자 본진조차도 장담할 수 없을지도.”
그러자 하카가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약속을 한 게 있으니 따라는 주겠지만······ 검은 그림자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군요.”
“무시한 적 없어. 정 못 믿겠으면 직접 한 번 보고 오시든가. 그리고 대충 보지 말고, 제대로 확인하고 오라고.”
하카는 이에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갔다 오도록 하죠.”
이내 훌쩍 방을 떠났다.
“후······.”
됐다. 이제 저 녀석까지 보냈으니 작가의 플롯에 맞춰주는 건 어느 정도 끝이 났다. 원작에서도 하카가 처음 레오를 보게 되는 것이 이번 챕터였던 것이다. 물론, 대충 흘겨보는 게 다였지만.
어쨌거나 이제 남은 건, 레오를 보고 놀란 저 녀석이 검은 그림자의 본대를 불러주길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얼마쯤 걸리려나······.”
하카가 긴급 상황을 알리는 ‘붉은 전보’를 띄운다는 가정 하에, 검은 그림자 본대의 도착예상시간은 하루 내지 이틀.
그때까진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저 주기적으로 후퇴 명령이나 내리는 수밖에.
외려 챕터가 시작된 다음에야 하루쯤 시간이 난 셈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 시간이 절실한 상황이기도 했고.
나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갖췄다.
이어,
“아, 깜빡할 뻔했네. 연합원 호출할 때 엘 비에고? 그 녀석은 따로 불러놔.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엘 비에고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전 골담시티의 마피아였던 녀석이야.”
“알겠습니다.”
“잠깐 나갔다 온다. 딴 생각하면 죽어. 알지?”
“그, 그럼요.”
나는 곧장 보스 룸에서 나왔다.
이제 귀한 인물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데스톰브 시내 어느 한 호텔 스위트룸.
나는 문 앞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옛날 황개초비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바가 있지요. 새로운 이를 알아보고 싶다면, 그와 대화하기 이전에 세상의 세 가지를 먼저 하라고. 세상의 세 가지.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세상의 세 가지?”
“예.”
“그게 뭐야?”
“세상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또한, 놀이의 일종이기도 하지요.”
코코아의 얼굴에 짙은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아마 뭔 개소리지? 하는 마음일 것이다.
옛날에 내가 그랬으니.
도깨비들이 하는 말 중엔 몹시도 현학적인 것들이 많아, 작가 역시도 뜻 모르고 사용한단 소리가 돌 정도였다.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대충 고개만 끄덕거리는 게 나았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당신을 한 번 세 가지로 표현해 보도록 하죠. 음······ 슬금슬금, 쫑긋, 번지르르. 어떤가요?”
“그게 뭐야. 나는 그 따위 세 개랑은 관련이 없어. 나는 귀엽고 상냥하고 예쁜 여자애야.”
“그것도 물론 맞습니다. 그 세 가지는 당신의 해석. 그리고 저의 세 가지는 저만의 해석이지요.”
“네 해석은 틀렸어.”
“세상의 세 가지에 옳고 그름은 끼어들기 힘듭니다. 대개 모호함으로 얼렁뚱땅 덮는 식이거든요.”
“······.”
대충 이쯤에서 끼어들 타이밍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걔는 말해도 몰라.”
“주걱턱! 얘 이상해!”
“아직 다름을 이해하기는 어린 나이지요. 후훗.”
나는 나를 보며 차분히 미소 짓는, 만만찮게 어린 도깨비를 쳐다봤다.
이 녀석의 이름은 치누아비. 도깨비 소굴에서도 점잖기로 유명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도깨비들 사이에서 ‘점잖다’는 표현은 굉장한 ‘별종’을 뜻했다.
“제게 용건이 있으신 분이시군요.”
“응? 내가? 너 쟤가 꼬셔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 아냐?”
“저기 있는 꼬마 숙녀 분께서 제게 티타임을 제안한 건 사실이지만, 제가 그녀의 매력에 혹해 따라온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이야. 내 다리를 엉큼한 눈으로 훑는 걸 봤어.”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됐고, 그럼 왜 따라온 거지?”
“이유를 물으셔서 당황스럽네요. 저로선 따라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꼬마 숙녀 분께서 저를 찾고, 또 불렀으니까요. 게다가 상황을 보아하니, 정작 제게 용무가 있는 분은 또 다른 분이시고. 사실 이게 저로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지라······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지요.”
치누아비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 선명히 빛나는 녹색의 눈을 내게 마주해왔다. 의중을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사실 녀석의 말과 행동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일단 코코아가 자신을 찾고, 불렀다. 이것부터가 황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게 평범한 인간으로선 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나조차도 코코아가 녀석을 이렇게나 금방 데려올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막상 코코아와 대화를 해보니, 누군가가 시켜서 자신에게 접촉했다는 게 아닌가. 이는 더욱더 기이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자신의 ‘다름’을 알아차렸다는 소리와 같았으니. 그것도 이 범상치 않은 꼬맹이를 부리는 누군가가.
녀석으로선 어쩌면 내가 본인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유를 불문하고 따라올 수밖에.
“제 호기심을 풀어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야 뭐. 어려울 것 없지.”
도깨비는 내 말에 꽤나 놀란 기색이었다.
“앗? 정말이십니까? 그럼 사양 않고······.”
“잠깐, 잠깐만. 에이, 그래도 공짜는 안 되지.”
나는 얼른 녀석의 말을 끊었다. 저 탐욕스러운 도깨비 같으니라고.
“······그럼?”
“뭐, 잘 됐네. 나도 네게 바라는 게 있었으니까.”
“······바라는 거라 하시면?”
“들어보면 알아. 그럼 서로 원하는 거 걸고 내기나 한 번 할까?”
그리고 내가 막 그 단어를 내뱉은 순간,
“내기라······ 어떤 내기 말씀이신지요?”
치누아비의 눈이 돌아갔다.
갑작스레 시뻘겋게 변해버린 눈동자. 그야말로 내기에 환장한 도박사의 눈이었다.
‘여기까진 됐는데······ 이길 수 있으려나.’
도깨비가 작중에 등장했을 당시, 작가는 이 같은 표현을 썼다.
내기에 미친 종족. 뭐라도 하나 걸렸다 싶으면, 일주일 밤낮을 새면서까지 승부하려 드는 녀석들. 내기 앞에선 그 누구보다 잔인해지는 천진난만한 악동들.
인간을 상대론 그 누구에게도, 어떤 승부에서도 지지 않는 시아나조차 감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들이라고.
나는 그즈음 떨려오는 호흡을 가만 잠재운 채 마음을 다졌다.
해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