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39
39화 도깨비들의 신
***
“······여긴?”
눈을 뜨자 순백의 세계였다.
사방에 뿌윰한 빛의 물결이 끊임없이 상하좌우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서 있는 곳도 빛의 흐름 위였다. 그것은 여타 다른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으나, 기이하게도 나는 내가 고정되어 있다고 느꼈다.
몽중계(夢中界).
도깨비들이 그들의 신과 만나 함께 산책한다는, 무의식 속의 세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내가 아는 공간이었다.
정확히는, 본 적이 있는 세계였다.
‘이게······ 되네.’
얼떨떨했다.
정말 이곳으로 들어오게 될 줄이야.
이를 시도하면서도 성공 가능성을 희박하게 잡았던 이유는 단순히 나와 치누아비의 종족이 달라서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능력의 작동구조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신.
도깨비들은 그들의 다섯 신을 통하지 않고선 결코 고유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이는 곧 도깨비들의 능력을 흉내 내려면 나 또한 도깨비들의 신을 통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솔직히 말이 되나 싶었던 것이다.
인간이 도깨비의 신과 마주한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래서 그냥 [흉내쟁이 곡예사]의 한계를 시험해 본다는 생각으로 한 번 시도해본 것뿐이었다. 근데 그게 거짓말처럼 된 거고.
심지어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다.
내가 한 건 도깨비들이 그들의 신을 부르는 의식을 흉내 낸 것인데, 의식이라 하여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론 별 게 아니었다. 일종의 기도와도 같은 행위로, 그저 그들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떠올린 뒤 ‘만나고 싶다’만 되뇌면 되는 것이었으니.
‘됐어, 여기까지.’
신기해하는 건 이쯤하면 됐다.
이제 다시 현재에 집중해야 했다.
온 주위를 흐르는 빛의 물결을 보자 슬슬 긴장감이 차올랐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정확히는, 누가 올까.
‘그가 오려나?’
만약 흉내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아마 치누아비가 내림받은 신이 나를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곤 이런저런 인사말을 나눈 뒤, 내게 본인의‘ 장난’을 허락해 줄 것이고.
하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치누아비야 이미 내림을 확정 받은 녀석이지만, 나는 이곳 몽중계에 처음 진입한 존재였다. 아직 ‘간택’이 이뤄지지 않은 도깨비에겐 어느 신이든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이 이곳 몽중계의 규칙이었다.
과연 어떻게 될까.
그즈음에 나는 도깨비들의 다섯 신에 대해 떠올렸다.
대형(大兄), 장난꾸러기 신
둘째, 거짓말쟁이 신
셋째, 변덕쟁이 신
넷째, 허풍선이 신
막둥이, 훼방꾼 신
이 중 치누아비가 내림받은 신은 첫째인 장난꾸러기 신으로, 어찌 보면 가장 무난한(?) 스타일의 신이었다.
달리 말해, 도깨비들 특유의 ‘악의’가 그나마 가장 적다고 해야 할까.
이야기 중후반부에 들어 이 도깨비란 종족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솔직히 조금 당황했었다.
이유는 간단한데, 도깨비라는 종족이 이 모험왕이란 만화에 그리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소년만화 속 악당들은 그리 나쁜 놈들이 아니다. 그 숫자가 많긴 해도, 도저히 회개가 불가능할 정도로 본성이 사악한 녀석은 찾아보기 힘들다. 외려 주인공을 돕는 역할로 바뀌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지.
이는 그와 같은 전개가 소년만화가 추구하는 취지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헌데 이 도깨비들은, 물론 이 녀석들이 죄다 악당이라는 건 아니지만, 희한하게도 본성부터 틀려먹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녀석들이 많았다.
뭐랄까, 남에게 피해 입히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고나 할까?
특히나 훼방꾼 신을 내림받은 녀석들의 경우, 아주 그냥 사고를 내는 게 일상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설정이 사건을 만들고, 눈길이 가는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효과적일지는 모르겠으나, 가끔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악질적인 행동들의 원흉이 바로 이 다섯 도깨비 신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때 레오가 이 신들과도 싸우나?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악당’이라 여겨질 때가 많아서.
‘설마 만나자마자 이상한 짓거리를 해대는 건 아니겠지?’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당최 종잡을 수 없는 양반들이니.
그때였다.
“응?”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빛의 물결이 한순간 출렁거렸다.
그 순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뭔가가, 뭔가가 오고 있었다.
심지어,
‘······미, 미친.’
하나가 아니었다.
곧이어,
쿠궁-.
한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
다행히 기절하진 않았다. 골이 완전히 뒤흔들린 느낌이 나긴 했지만.
이어 간신히 한 가닥 남은 이성을 부여잡곤, 제정신을 차리려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마치 천둥과도 같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여기 재미있는 게 나타났어!
‘······돌아버리겠네.’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이 누군지 모를 신 녀석이 친구들을 부르고 있었다. 자기 하나만도 벅찬데.
곧이어,
-이 녀석 뭐지?
-설마 인간?
또 다른 목소리 둘이 새로이 귓가에 들려왔다. 첫 번째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가히 천둥과도 같은 굉음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 이런······.’
이는 한 차례 경험해본 현상이었다.
전에 시험 삼아 아직 신체가 감당키 힘든 능력을 흉내 내려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겪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보다 몇 배는 더 떨림이 심했지만.
몰려든 신이 셋.
내가 기억하기로, 도깨비들 또한 ‘간택’ 과정에서 셋 이상의 신들이 몰려들면 견디기 힘들다는 설정이었다.
헌데,
-뭐가 왔다고?
-뿔 없는 도깨비?
셋이 다가 아니었다.
‘허허, 망했네.’
어느새 다섯 신이 우르르 다 몰려들었다.
머릿속에선 쉴 새 없이 경종이 울렸다. 위험하다고. 몸이 버틸 수 없다고.
-야! 너 뭐냐?
-도깨비도 아닌 녀석이 여길 어떻게 들어와?
-정체를 밝혀.
-네놈! 요괴의 첩자로구나!
-옅게나마 도깨비의 흔적이 묻어 있긴 한 것 같은데?
한 마디씩만 들었는데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별 수 없었다.
“장난꾸러기 신만 남고 다 가주세요!”
나는 갖은 힘을 짜내 소리쳤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으니까.
문제는,
-저 주걱턱이 뭐래?
-설마 나 간택 받은 거야? 저 녀석에게?
-그래, 갈게. 히히. 뻥이지롱!
-가란다고 가겠니? 가주세요 해도 올 텐데?
-하루 종일이라도 있을 수 있어!
이것들이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수였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 걸.
저 신들의 설정에 기본적으로 ‘장난’과 ‘변덕’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걸 기억했어야 했다.
뭐, 후회해도 이미 늦은 뒤였지만.
‘이,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는데?’
이미 정신은 아득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고, 심지어 마음 놓고 기절할 수도 없었다. 이후 무사할 수 있을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계직전까지 몰렸을 즈음이었다.
-어? 이 녀석 터지려고 하는데?
어느 한 신이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 챘다.
물론 일찍부터 알고 있다 이제야 말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한줄기 빛이 내려온 듯한 느낌이었다.
뒤이어 다른 도깨비 신들도 이를 인지한 듯, 따라 한 마디씩 했다.
-흐음, 허약하긴. 도깨비가 아니라서 그런가?
-정말이네. 재미없게.
-죽겠다. 나 먼저 간다.
-제! 길!
그러곤 물러나기 시작했다. 본인들의 존재가 내게 위협이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성은 있는 녀석들이어서.
-아쉽네. 다음에 좀 더 튼튼해지면 한 번 더 찾아와. 그땐 재미나게 놀아보자고.
‘······장난꾸러기 신.’
잠시 후,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기분이 개운치가 않았다. 어떻게 만난 신들인데 아무런 수확도 없었으니.
한 번 흥미가 떨어진 도깨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기회란 그렇게나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말마따나, 내가 이들들 견딜 수 있을 수준까지는 신체능력을 끌어올린 뒤 다시 와야 할 듯했다.
“그나저나······ 왜 현실로 안 돌아가지?”
이는 조금 의아한 상황이었다.
작중의 도깨비들은 그들의 신이 떠나자마자 곧바로 현실로 복귀했었던 것이다.
‘이거 어떻게 나가는 거지?’
내가 그러고 이리저리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나 아직 안 갔다.
신들 중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
순간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
나는 조심스레 목소리의 정체를 물었다.
“······누구신지?”
-나 훼방꾼 신.
“아······.”
당혹스러웠다.
하필 남은 게 저 신이라니.
-네게 관심이 가서 몰래 남았다. 딴 녀석들의 관심을 차지한 놈이니 뺏는 재미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훼방꾼 신은 무척이나 뻔뻔한 소리를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그게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현재의 이 ‘독대’가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그게 가능할리가······.
“그 말씀은······.”
-너, 내가 찜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알게 뭐야. 내가 하겠다는데.
“······.”
이쯤 되니, 상황은 명백해 보였다.
훼방꾼 신은 나를 ‘간택’하기로 결정했다.
말인즉슨, 내가 그의 내림을 받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는 당연하게도,
‘이건······ 이건 흉내가 아니잖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치누아비를 흉내 내려 한 것인데, 녀석의 고유능력이 아닌 생판 다른 능력을 쓰게 된다?
사실 우스갯소리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굳이 개연성을 들먹거릴 필요도 없이,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상황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이를 거론한 이가 한 종족의 신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어쩌면, 실제로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훼방꾼 신.
달리, 도깨비들의 도깨비라 불리는 신.
처음 이 존재를 등장시킬 당시, 작가는 단 두 줄의 문구로 그를 정의 내렸다.
[이 세계에서 훼방꾼 신 앞에 통용되는 규칙은 단 하나뿐이다]
[훼방꾼 신은 그 어떠한 규칙도 따르지 않는다]
그라면 정말로 내게 도깨비의 힘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단순히 흉내를 허락해주는 선이 아니라, 새로운 고유능력을 지급해주는 형태로.
그리고 이는,
“죄송한데······ 사양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
-뭐?
악질 중 악질. 도깨비의 탈을 쓴 악마.
이는 내가 붙인 표현이 아니었다. 훼방꾼 신에 대한 커뮤니티의 공식 평이었다.
다른 도깨비 신들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 신과는 엮이면 곤란했다.
그는 나를 나락으로 인도할 테니.
훼방꾼 신을 내림받은 도깨비들은 작중에서도 분명 특출난 능력을 보이곤 했다. 규칙을 무시하는 신의 힘 때문인지, 고유능력이 두 가지 이상인 경우도 있었고, 때때로 상황적 개연성을 무시하는 말도 안 되는 힘을 발휘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로는 모두가 동일했다.
모든 일에 훼방을 놓다, 모두의 공분을 사곤 쫓겨나는 것 .
신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갑작스레 헤까닥 해버릴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그의 영향 아래 놓인다?
라이벌의 지위는커녕, 여태 쌓아온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조금이라도 엮이기 전에 얼른 차단하는 게 맞다.
다만 문제는,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이 신의 간택을 거절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남 훼방 놓는 것에 가장 열심인 신.
제멋대로인 데다 막무가내인 녀석.
무턱대고 거절한다면, 결과가 좋을 수가 없다. 싫어하는 티를 내면 낼수록, 열과 성을 다해 달려들 테니.
방법은 하나였다. 의외성을 보이는 것.
불 보듯 뻔한 상황을 무너뜨리며 쾌감을 느끼는 신이기에, 짐작하지 못한 의외성을 보이는 대상에겐 꽤나 관대한 모습을 보이는 편이었다.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당신의 간택을 거절하겠습니다.”
-왜지? 나는 네게 도깨비의 능력을 줄 수 있다. 그것도 아주 귀한 것으로 말이지. 본래 가진 능력과 상충될 거라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쯤이야 내 능력으로······.
“다시 말하지만, 간택은 필요 없습니다. 능력을 주실 필요도 없고요.”
-호오······ 어째서?
그의 귀가 약간 열린 게 느껴졌다.
물론 그가 관대함을 보이는 까닭이 단순히 그 대상의 의외성에 감탄해서는 아니다.
간단하다. 그 의외성으로 인해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고 판이 커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야 훼방을 놓을 때의 즐거움이 커질 테니.
만약 그로 하여금 더욱 커진 판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든다면, 훼방꾼 신은 선뜻 물러날 것이다. 아무렴, 상상력 하난 뛰어난 녀석이었으니.
“당신에게 능력을 받으면, 다른 도깨비 신들의 능력을 쓸 수가 없게 되니까요.”
-······뭐?
“저는 모든 도깨비들의 능력을 사용할 생각이거든요.”
-······.
먹혔나?
당장의 반응은 없었지만, 나는 내 생각이 먹혀들어갔음을 확신했다. 훼방꾼의 말을 멈추게 하는 것 또한 보통 일은 아니었으니.
이어, 나는 쐐기를 박을 겸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언제고 다시 한 번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다섯 도깨비 신들에게서 모두 간택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허······ 허헛.
훼방꾼 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진정으로 유쾌하다는 듯, 그러고 한참을 웃었다.
-너, 진심인 거지?
“예.”
실제로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신들과의 만남이 가능하다는 걸 확인한 마당에, 못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놀랍게도, 훼방꾼 신은 긴말 하지 않고 사라졌다.
-좋아, 곧 보자고. 뿔 없는 도깨비 주걱턱.
이어, 순백의 빛 무리가 나를 향해 쇄도했다.
*
깨어나 보니 예의 오두막 안이었다.
“주걱턱!”
“어르신, 정신이 드시는지요?”
몽중계에서의 시간은 현실보다 훨씬 더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제법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다. 이렇듯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던 걸 보면.
다만, 다른 한 녀석의 시선에 들어 있던 것은 그와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만, 만난 겁니까? 도깨비의 신을?”
하카는 어째 몸까지 떨고 있었다.
하기사, 오랜 기간 도깨비들 틈에서 수학했다는 배경을 가진 녀석이었으니. 그 신들과의 만남을 줄곧 염원해왔을지도.
“다, 당신의 고유능력은 대체 어떻게 된 게······ 시, 신들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무슨 말을 했죠? 혹시 어떤 신이······.”
“거기까지. 신은 무슨. 내가 도깨비도 아닌데 무슨 수로.”
“······아.”
하여, 일단은 그냥 아닌 척 하기로 했다.
괜히 자극해 좋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하카와 같이 음흉함이 내재된 캐릭터는 시기와 질투를 버티는데 그리 능숙하지 못한 법이니.
“그나저나 해독은?”
“정신을 잃고 계신 동안 다 끝냈습니다.”
치누아비가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수고했어. 그럼 이제······.”
“네. 내려가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보물을 쥐러 갈 시간이었다.
*
지하실 아래에 있던 건 커다란 공동(空洞)이었다.
그리고 거기 중앙에, 희한하게도 웬 냉장고 하나가 떡 하니 놓여 있었다. 마음껏 먹으라던 노인의 말이 어쩜 거짓이 아니었는지도.
“저기 보물이 있나 봐!”
나는 그러고 달려가려는 코코아를 가만 제지했다.
“위험.”
“응?”
“아직 하나 더 남았어.”
길을 찾고, 보안장치를 해독했다하더라도, 보물을 차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모험가가 맞닥뜨려야 하는 관문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대적(對敵).
그즈음 나는 고개를 들어 냉장고 너머의 어둠을 응시했다.
때마침 어둠이 흔들리며 ‘무언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자갈기 마냥 흩날리는 회색의 머리칼을 가진 남자였다.
이어, 뚜벅뚜벅 걸어 나온 그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늦었군, 시작하지.”
회색사자.
칼 자이드.
아주, 아주 유명한 녀석이었다.
당장 레오와 키리코가 합심하여 덤벼도 당해낼 수 없는, 명실상부 현 시점 최강의 캐릭터. 바로 원작에서 이 모험가 자격시험을 최종 1위로 통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우쭐대지 말라고. 그땐 내가 없었으니까.”
“······뭐?”
물러설 생각 따윈 없었다.
이 녀석을 잡고 1위로 올라선다.
나는 녀석의 가라앉은 두 눈을 천천히 마주해갔다.
어디 한 번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