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47
47화 모험 의뢰서
***
이틀 후.
웨스트랜드 남쪽 항구도시, 브리티시.
“이야······.”
나는 눈앞에 보이는 거대 호화 여객선의 자태에 감탄했다.
순백의 ‘화이트 레인’ 호.
배에 대해선 완전히 무지한 나였음에도, 이 여객선이 무엇을 원형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영화 「타이타닉」. 바로 그 배가 모티브가 된 게 분명했다.
솔직히 조금 기묘한 느낌이긴 했다.
만화 속에서, 실제 현실에서 본 영화 장면을 떠올린다는 게.
“주걱턱 형님도 배는 처음인가 보지요?”
내 눈 속의 일렁임을 읽었는지, 치누아비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딱 봐도 굉장한 배니까.”
심지어 생김새 뿐 아니라, 이 배에 적용된 설정까지 그와 상당히 유사했다.
웨스트랜드에서 불과 열흘 만에 이스트랜드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노트의 쾌속선.
그 어떤 바다 괴물의 이빨도 뚫지 못한다는 불침(不沈)의 강철 선박.
옛 황금제국의 영화(榮華)를 그대로 재현했다는 초호화 내부선실.
마지막으로,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꿈의 배’라는 문구.
그즈음,
“주걱턱 뭐해.”
감상에 잠겨 있던 내 귀로 코코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시간 없어.”
“왜? 아직 출항까지 20분이나 남았다며.”
“표.”
“아하.”
가장 중요한 걸 깜빡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티켓 판매원을 찾아갔다.
표를 달라는 말에, 그는 몹시도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없어. 너무 늦었다고.”
“표가 없다고?”
“그럼 있을까, 출항이 코앞인데. 몰라? 저 배가 바로 그 화이트 레인이라고. 모두가 타길 원하는 배. 저걸 한 번 타보겠답시고 비행선을 타고 오는 작자까지 있을 정도인데······ 쯧쯧, 이제와 표를 달라니.”
하지만 그리 말하면서도 썩 단호한 음성은 아니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웃돈을 달라는 말이다.
이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품속을 뒤졌다.
물론 돈을 꺼내기 위함은 아니었다.
손끝에서 다소 서늘한 느낌의 플라스틱 카드가 만져졌다.
모험가 자격증.
‘흐흐······.’
유치하긴 해도, 사실 한 번쯤은 이와 같은 상황이 펼쳐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뭐랄까, 숨겨왔던 힘을 살짝 드러내는 느낌이랄까.
S등급 이상의 자격증보다야 떨어지지만, 이 A급 모험가 자격증 또한 이 세계 내에서 어마어마한 혜택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도 그럴 게 기본적으로 모험가 자체가 선택받은 이들이라는 설정인데다, A급 모험가는 그런 모험가들 중에서도 상위 5%에 드는 실력자였으니.
물론, 후반부에 가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그냥 차가운 플라스틱 카드에 불과한 게 맞다. 누구나 다 S급, SS급인데다, 모험의 탑이 숨겨진 미들랜드엔 애당초 이를 떠받들어줄 ‘보통의 사람들’이 아예 존재하질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 이야기적으로 초반부에 불과한 이 시점만이, 마음껏 ‘모험가 플렉스’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이다.
마침 판매원의 시선이 슬금슬금 내 품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자격증을 꺼내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저기 근데······ 나 이런 사람이긴 한데.”
“응?”
곧이어, 이를 확인한 판매원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옳지.
“서, 설마······ A, A급 모험가님이십니까?”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 했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주 적절히 나와 주었던 것이다.
“음······ 사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이제 갓 모험가가 된 거긴 한데······ A급이라곤 하지만 고작해야 자격시험에서 1위 한 걸로 받은 등급이라 아직은 햇병아리······.”
“허, 헉! 자, 자격시험 1위!”
턱이라도 빠진 듯, 판매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실은 모험가 협회로부터 받은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라 조금 급한 상황이긴 한데······.”
“그, 급한 상황이요!?”
“누구나 원하던 배라 하니 자리가 부족한 건 알겠지만, 이게 또 너무 중요한 임무다보니······ 흠흠, 배를 안탈 수도 없고 이것 참······.”
“아, 아! 자리! 예예, 있습니다. 모험가 분들께는 저희 화이트 선박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해드리는 혜택사항이 있으니까요. 특히나 A급 이상이시라면······ 그럼 혹시 원하시는 좌석이?”
됐다.
나는 애써 웃음을 감춘 채 말을 이었다.
“흠흠, 원하는 걸 직접적으로 물으니 조금 당황스럽긴 하네. 사실 우리 임무가 배의 주요 요인들과의 잦은 만남을 전제해야 하는 거라······ 역시나 귀빈들과 자주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그런······.”
“3등칸.”
“그래, 3등칸······ 엥?”
내가 당황해 쳐다봤음에도, 코코아는 무심한 표정으로 재차 말했다.
“3등칸.”
“······꼬맹아.”
그러나 코코아는 이에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배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웬 자그마한 쪽문으로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3등칸의 입구인 듯했다.
“후······.”
코코아가 저기를 가리킨 이유야 충분히 짐작이 갔다.
뭐, 저기가 길이니까.
하지만 어차피 배 안이지 않는가. 이쯤은 솔직히 상관없지 않을까?
내가 항변하듯 물었음에도, 코코아는 그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 또한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내 길눈에는 분명, 저기 1등칸 쪽 문이 훨씬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 길눈 작용 아니야. 그냥 입구에 치장된 보석 때문이지.”
“근데 그게 다가 아니고, 저기 그 바닥이랑 계단에도 마찬가지로 빛이······.”
“아니라고.”
“······그래, 그냥 해본 말이야.”
암만 해도 3등칸을 피할 순 없을 듯했다.
3등칸 석 장을 요구하자, 판매원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
“1등칸도 드릴 수 있는데······.”
“······몸이 편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임무 때문에 타는 거니까. 그럼 이만.”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폼이나 한 번 잡은 뒤, 결국 후미진 3등실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
3등칸은 정해진 좌석이 없었다.
그저 빈 침대에다 몸을 뉘이면, 그곳이 곧 본인의 자리가 되는 구조였다.
더욱이 한 번 자리를 차지했다 해서 그것이 끝까지 유지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리를 비우면, 언제든 다른 이에게 넘어갈 수 있는 식이었다.
그 이유야 별 게 없다. 좌석보다 탑승객의 수가 월등히 많았기 때문에.
실제로 침대가 여섯 개밖에 들어 있지 않은 방에 열 명이 넘는 인원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도 자리다툼이 크게 번지지 않고 있던 까닭은 ‘이미 누가 차지한 자리는 탐내지 않는다’란 룰이 묘하게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본래 이처럼 허름하고 통제관이 없는 장소일수록 과격한 싸움이 많이 일어나는 법이다.
더군다나 이 같은 대형 여객선이나 비행선의 3등칸은 범죄자들이 종종 몸을 은닉하고 있다는 설정이 존재하는 장소였다.
즉, 소란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곳이라는 것.
당장 눈앞에도 그깟 암묵적인 룰 따위야 콧방귀를 끼며 무시할 것처럼 생긴 이들이 몇 명이나 눈에 들어올 정도였으니.
헌데 소란이 난 곳은 없었고, 선실은 비교적 조용했다.
예상컨대, 이 구역을 억제하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듯했다.
“이쪽으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와중에도, 코코아의 안내는 계속되고 있었다.
출항 5분 전.
가뜩이나 북적북적 대는 선실과 통로.
암만 봐도 빈자리가 있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코코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술이 떡이 된 주정뱅이들로 꽉찬 선실과 웬 정체모를 약품들로 채워진 창고, 먼지가 한가득 쌓인 의문의 기관실까지 지났음에도, 코코아의 속도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녀석의 능력을 알면서도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계속 가는 거······ 맞아?”
“저희 선실 찾아가는 거 맞겠지요?”
코코아는 귀찮다는 듯, 따라오라며 손가락만 까닥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느낌 상 거의 배의 끝까지 다 왔다고 생각될 즈음, 마침내 코코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곳엔 놀랍게도,
“······인정.”
“역시 코코아 양. 저는 처음부터 믿었답니다. 형님은 쉬지 않고 불평불만을 내뱉었지만요.”
아무도 없는, 심지어 비교적 깨끗하기까지 한 선실이 있었다.
“됐고, 짐 풀면 돼?”
“응.”
코코아는 그러고 고개를 끄덕거린 뒤, 조금은 의아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앞으로 조금 피곤해질 수 있을 거야.”
그러곤 자기가 먼저 땅바닥에 냅다 드러눕는 것이었다. 심지어 몇 초 지나지 않아 코까지 골기 시작했다.
“······많이 피곤했나 본데요?”
“그런가 보네. 말이나 좀 할 것이지.”
그간 길을 보느라 힘이 좀 부쳤던 모양이다.
나는 코코아를 들어 옆에 있던 간이침대로 옮긴 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어 모험가 협회에서 받아온 임무 의뢰서를 꺼내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모험 임무 의뢰서】
-의뢰 대상 : 주걱턱 모험단(A급)
-난이도 : A급
-내용 : 마이닌 왕국의 제2왕녀를 찾아, 이스트랜드 내 모험가 협회 지부로 데려갈 것.
-상세 내용
: 근 20년 간 휴전 상태를 지속해오던 두골 제국과 마이닌 왕국의 기류가 근래 심상치 않음. 두골 제국 제1황자의 청혼을 마이닌 왕국의 제2왕녀가 거절했기 때문. 이제껏 거절당한 역사가 없었던 제국은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 자칫 20년간의 휴전협정이 깨질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나, 이즈음 왕녀까지 실종.
한 달 내 찾지 못할 시, 전쟁 발발 가능성 높음.
※ 추가 전달사항
-이스트랜드 난마 항구에서 모험가 협회 지부를 찾아 별도의 정보를 들을 것.
-연계 임무 부여 가능성 높음.
흐음.
간단히 말해, 사람 찾기였다.
사람을 찾는 건 모험가의 수많은 임무들 중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 유적을 탐사하고, 도적을 소탕하는 것들에 비하면, 외려 몹시도 쉬운 편이었지.
다만, 나는 이 임무의뢰서를 읽으며 약간의 긴장감을 느꼈다.
이제껏 내 모든 행동들은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을 기반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이나 캐릭터의 성격, 앞으로 전개될 내용들을 미리 숙지하고 있는 상태이니, 당연히 결과도 좋을 수밖에.
헌데 지금부터는 아니다.
간단하다. 하나도 모른다.
일단 임무 의뢰서에 나온 ‘마이닌 왕국’ 자체를 처음 알았다. 왕국 자체를 모르는데, 그 뒷배경이야 알 턱이 있나.
오십여 개의 자유도시들로 구성되어 있는 웨스트랜드와는 다르게, 이스트랜드는 ‘왕이 존재하는 여러 나라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연합정부를 형성하고 있긴 하나, 그리 실속 있는 연합체는 아니다.
딱 이 정도가 현 시점의 이스트랜드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래도 다행히 두골 제국에 대해선 조금이나마 더 알았다.
이스트랜드를 배경으로 챕터가 진행됐을 무렵, 그나마 자주 언급되었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또 이 나라의 지도자가 굉장히 인기 있던 캐릭터이기도 하고.
물론 내가 아는 두골 제국이 꼭 현재와 같다고 볼 순 없겠지만, 뭐 활약할 인물들이 어디 가는 건 아닐 테니까.
어쨌거나 임무 의뢰서에 적힌 대로라면, 코코아가 우리를 이 배로 인도한 이유는 명백해보였다.
이곳에 바로 그 ‘마이닌 왕국의 제2왕녀’나 혹은 그녀의 현 위치를 알만한 인물, 아니면 이를 표시해줄 아티팩트 따위가 실려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도 바로 이 근처에.
슬쩍 마음이 동했다.
‘한 번 찾아볼까?’
가뜩이나 ‘길눈’에 자신이 붙은 요즈음이었다.
나는 치누아비 더러 쉬고 있으라고 말한 다음, 선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첫 단계인 목표설정에 들어갔다.
‘······까다롭네.’
호기롭게 방을 나섰으나, 나는 한동안 제자리에 가만 서 있기만 했다. 구체적인 대상을 모르니, 마땅히 목표를 잡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갑자기 뇌가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흐음.
암만 고민해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여, 그냥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러프하게 접근해보자.
나는 임무 의뢰서를 손에 든 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냥 ‘임무 해결’ 자체를 목표로 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드르렁- 푸우.
드르렁- 푸우.
“응?”
갑작스레 웬 소음이 들려왔다. 그것도 바로 옆옆 창고에서.
당황스러웠다.
“이거 설마 신호?”
길의 실마리는 어떠한 형태로도 드러날 수 있다고 했다. 굳이 빛과 같은 시각적인 게 아니라, 저렇듯 난데없는 코골이 또한 그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것.
외려 너무나도 금방, 또 뚜렷하게 신호가 와서 갸웃거리게 될 정도였다.
‘타이밍이 너무 갑작스럽긴 한데······ 몰라, 가보자.’
나는 곧바로 소리가 들려온 문 앞에 섰다. 선실에서 불과 5m도 떨어지지 않은 창고였다. 심지어 문도 살짝 열려 있었다.
‘웁스······.’
내부로 얼굴을 슬쩍 들이밀자마자, 심각할 정도의 악취가 휙 풍겨왔다.
언뜻 보이는 실내 풍경은 더욱 경악스러웠다.
웬 똥물 같은 게 바닥 전체에 흘러 질퍽했고, 군데군데 오물찌꺼기와 여물, 짚, 물동이 따위가 널려 있었다.
식용으로 쓰일 동물들을 잠시간 보관했던 장소 같은데, 지금은 그냥 버려진 동물우리나 다름이 없었다.
솔직히 사람이 있을 거라 상상할 수도 없는 장소였다.
헌데,
드르렁- 푸우.
드르렁- 푸우.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으니.
나는 코를 움켜잡은 채 살금살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웬 사람 하나가 쌓아 올린 짚단 위에 대자로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미친.”
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만큼 놀랐기 때문이다.
내가 놀란 건, 당장이라도 호흡기 질환에 걸릴 것만 같은 이 지저분한 환경에서 사람이 저토록 평온히 자고 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자고 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것,
둘째, 그것도 건강미 넘치는,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것,
셋째, 정말 놀랍게도 아는 얼굴이라는 것.
내가 기억하기로, 저 여자의 이름은 아르테 칸.
대(大)두골 제국의 여황제로, ‘초원의 검은 별’과 ‘바람을 가르는 야생마’라는 두 가지 별명을 가진 여인이었다.
또한 여성임에도 타고난 용력이 어마어마해 장정 스무 명과도 거뜬히 힘을 겨룰 수 있다고 하며, 두골 제국의 특급전사 시험인 ‘전사의 길’을 여성의 몸으로는 최초로 통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좀 더 간단하게는, 이스트랜드 에피소드 당시 등장했던 선한 네임드 중 하나였다.
그즈음 나는 절로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만남의 장소가 좀 그렇긴 하지만, 아주 쉽게 ‘열쇠’를 찾은 듯했기 때문이다.
지금 저 여인이 황제의 신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몇 년 뒤 두골제국 지도자의 신분으로 레오를 만나는 사람이다.
당연지사, 현재도 두골 제국의 귀한 신분일 거라는 것.
어떤 식으로 연결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저 여인을 이용하여 이 임무를 해결해야 함은 분명했다.
‘오케이.’
열쇠의 정체를 파악했으니 됐다.
대화는 나중에 좀 더 쾌적한 자리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진행하는 걸로.
그렇게 정리한 뒤, 얼른 짐승우리를 벗어나려 할 때였다.
“와, 왕녀님! 왕녀님!”
누군가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왔다. 또 한 명의 여인이었다.
순간,
‘이크.’
나도 모르게 어느새 옆에 있던 짚더미 안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1초도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하.’
오물 냄새가 확 올라오는데 이어, 짚단 아래 숨겨져 있던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전신의 피부를 자극해왔기 때문이다.
치가 떨릴 정도의 불쾌감을 잊으려면,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왕녀님! 어서 일어나 보세요!”
“······.”
“테르미스 왕녀님!”
응?
나는 약간 당황했다. 기억하던 이름과 달랐기 때문이다.
새로 들어온 여인은 계속해서 황제를 ‘테르미스 왕녀’라 부르며 깨워댔다.
잠시 후,
“으······ 하암!”
여인이 우렁찬 하품과 함께 일어났다.
“뭐야? 왜?”
“두, 두골 제국 사람들이······.”
“그것들이 여기까지 쫓아왔어?”
“예, 갑판에 지금······ 아직 이 장소를 들키진 않았지만······.”
“하여간에 진드기 같은 녀석들이네. 다 패 죽여 버릴까 보다.”
“그, 그러시면 안 돼요······ 지금 국왕님도 행여나 전쟁이 벌어질까 전전긍긍하고 계시는데······.”
“어후······ 빌어먹을. 그 약골 환자 녀석은 왜 자꾸 쓸데없이 나를 걸고넘어지는 거야?”
그즈음엔 처음의 당혹스러움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있었다.
테르미스 왕녀? 두골 제국 사람들? 전전긍긍해 하는 국왕과 쓸데없이 걸고넘어지는 약골 환자?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의아함에, 나는 임무 의뢰서의 내용을 다시금 되뇌어봤다.
-두골제국 제1황자의 청혼을 거절하고 도망친 마이닌 왕국의 제2왕녀를 찾아라.
혼란스러웠다.
뭔가······ 뭔가 내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었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애당초 이스트랜드에 등장하는 선한 네임드가 그리 많지 않았으니.
저 여자가 맞다. 내가 만화책에서 본 바로 그 두골제국의 황제가 틀림없었다.
10분 후.
두 여인이 이 짐승 우리를 나가고 약 5분가량이 더 지난 다음에야, 나는 마침내 현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조금 전 여인은 훗날 두골제국의 여황제로 이름을 날리게 될 아르테 칸이 맞다.
그러나 현재는 마이닌 왕국의 제2왕녀다. 결혼하기 싫어서 도망친.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싫다는 사람 억지로 잡아다 며느리로 데려놨더니, 결국 그 며느리가 집안 전체를 홀라당 삼켜버리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내게 주어진 임무는, 미래야 어찌되든 간에, 저 거친 야생마 같은 여자를 얌전히 길들여 두골 제국에다 시집보내는 것이었고.
“······이거 맞아?”
어질어질했다. 이런 건 내가 이제껏 봐온 모험의뢰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으니.
나는 당장 판단하기를 미뤘다.
일단은 지켜보는 수밖에.
*
그날 새벽.
문득 잠에서 깬 나는 어째서 코코아가 앞으로 피곤해질 거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혹시나 하긴 했지만, 역시나 왕녀의 우렁찬 코골이 때문에 한 말은 아니었다.
선실 바깥 통로에서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웬 잠을 잊은 녀석들이 왕녀가 있는 짐승우리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단순히 길을 잃고 배회하는 자들은 아니었다.
철저히 죽인 발자국 소리,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느린 호흡.
나의 발달된 청력은 녀석들의 만들어낸 옅디옅은 소음에서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하카.
녀석들에게서 초반부 하카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은밀함과 살의로 똘똘 뭉쳐 있던 그때의 그 비밀스런 하카와.
나는 어둠 속에서 고요히 눈을 빛냈다.
암살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