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50
50화 말괄량이 길들이기(3)
***
정체 모를 악취가 진동하는 어느 창고 안.
두 남자가 한껏 인상을 구긴 채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둘 중 몹시도 뚱뚱한 남자가 쉴 새 없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떠났군.”
“당연하지.”
“혹시나 싶었는데.”
“바보 같은 소리. 한 번 암살자가 들었는데 그 자릴 계속 지키고 있을 턱이 있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몹시도 홀쭉한 남자는 끊임없이 창고 구석구석을 살폈다.
남은 흔적을 살펴 정보를 취득하는 것. 이는 그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굳이 그것이 꼭 필요한 행위가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헌데 암살자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녀석들 아니었나?”
“그것과 왕녀가 옳은 판단을 내린 건 별개다. 오히려 수준 이하의 적을 상대한 후에도 자만심에 빠지지 않고 다음의 적을 상정해 움직였다는 것. 이는 왕녀가 꽤나 만만찮은 인물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지.”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흠, 그나저나 왕녀의 힘은 어느 정도야?”
“글쎄, 보이는 것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들지.”
홀쭉이는 그러고 잠시간 말을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적어도 어째서 우리에게까지 의뢰가 들어왔는지는 알 것 같군.”
이어, 그가 바닥 한쪽에 쌓여 있던 짚단 더미를 옆으로 치웠다.
그곳에 있던 건, 바닥 한 가운데 선명히 패인 발자국이었다.
“······휘유, 살벌하네.”
이를 본 뚱뚱이가 탄성을 내뱉었다.
단순히 강판에 흔적을 남겼다고 해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니까. 설사 그게 타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순 디딤 발의 힘만으로 그랬다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웬만큼 힘으로 이름 난 이들이라면 딱히 못할 것도 없으니까.
중요한 건, 여기 이 바닥이 단순한 판때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배의 주요 특성 중 하나인 불침(不沈).
이는 ‘설계자 코미어’가 몇 날 며칠을 공들여 이 배에 집어넣은 특성으로, 선체를 구성하는 모든 구조물 및 골조의 강도를 대폭 강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다시 말해, 이 바닥은 평범한 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흠집 하나 낼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상태라는 것이다.
“고유능력인가?”
“글쎄······ 어쩌면 단순한 힘일지도.”
홀쭉이의 말에 뚱뚱이가 놀라 외쳤다.
“아니, 이게 그냥 순수한 힘이라고!?”
“단정하진 않았어.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
“허······.”
“완전히 과장된 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마이닌 왕국 제2왕녀의 몸에 바야르 칸의 영혼이 서렸다는 거.”
바야르 칸.
그는 유구한 두골 제국의 역사 속에서도 특히 이름난 황제 중 하나로, 그 힘이 가히 장정 천 명의 힘을 합한 것에 필적한다고 전해지는 인물이었다.
“어쨌거나 슬슬 날을 잡아야겠어.”
“날을 잡는다고?”
홀쭉이의 말에 뚱뚱이가 의문을 제시한 까닭은 간단했다. 아직은 그들의 차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해가 끝나갈 즈음 나서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멍청하긴. 사냥감을 빼앗길 셈이야? 우린 일을 하러 왔지 뱃놀이를 하러 온 게 아니라고.”
“하지만 어차피 보수엔 별반 차이가 없잖아. 우리 차례가 되기 전에 사냥감이 마무리 되어도 성공보수는 약속하겠다고······.”
그러자 홀쭉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심하군. 여기 참여한 암살단이 대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응? 암살단의 수?”
“내가 짐작하기로는, 적어도 열 개가 넘는 암살단이 이 배에 승선했어.”
“그런데?”
“암살단은 열이 넘는데, 타깃은 하나지. 심지어 한 나라의 왕족이고.
보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이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가만히 보고만 있다간 웃음거리가 될 거야.”
뚱뚱이는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린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군.
“일단 잡아뒀다가 우리 차례가 됐을 때 처리해도 돼. 어떤 놈의 머리에서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단순히 왕녀를 잡느냐 못 잡느냐의 문제가 아냐. 어쩌면 암살자들 간의 싸움이 될지도 모르지.”
“알겠어. 길은?”
“이미 봐뒀어. 바로 옆이야.”
둘은 곧장 냄새나는 창고를 벗어나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텅 빈 선실로 향했다.
“여기?”
뚱뚱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물론 길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도착지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건, 그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럼에도 조금 의문이 드는 장소였다. 일단 거리도 너무 가까운데다, 좀 전의 창고에 비해 흔적이 아예 없다시피 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묵었던 놈들을 찾는 것. 바로 그게 왕녀에게로 이어지는 길이야.”
“왕녀는 이곳에 시녀 하나만을 데리고 승선한 거 아니었나? 또 다른 일행이 있었다고?”
“모르지. 어쩌면 또 다른 암살단 놈들일지도 모르고. 어차피 어림짐작은 아무 의미도 없어. 중요한 건 더듬어 나가는 거다. 또 다른 단서가 나올 때까지.”
놀랍게도, 홀쭉이는 그러곤 곧바로 또 하나의 단서를 찾아냈다.
“······세 명이군.”
“어떻게 알아?”
“머리카락. 서로 다른 색이 세 개야. 이 녀석들은 그렇게까지 철두철미하지 않군. 암살자들은 아닌 모양이야.”
“아아.”
“얼마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어. 아직 온기가 느껴질 정도이니. 그리고······ 꼬맹이, 혹은 난쟁이가 섞여 있군.”
뚱뚱이는 이번엔 홀쭉이의 말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선실 바닥 한 구석에 남아 있던 조막만한 신발의 흔적이.
“금방 찾을 수 있겠는걸?”
홀쭉이는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뚱뚱이는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가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긍정을 뜻했다.
그즈음 뚱뚱이는 품속에 숨겨둔 단도를 꼭 쥐었다.
이를 더 이상 사용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작업을 앞둘 때면 뚱뚱이는 늘 이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그에겐 이것이 성공을 기원하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변이 없는 한, 이틀 내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
“무슨 도와드릴 거라도? 식사 예약을 잡아드릴까요?”
“아, 괜찮습니다.”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모습이 괜히 수상쩍어 보였던 모양이다.
1등칸 승객임을 증명하는 표와 함께 팁으로 지폐 몇 장을 건네주자, 매니저가 금세 환해진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달라는 말을 남긴 채.
“흠흠.”
나는 다시금 객실 문 앞에 선 채, 고민 중이던 내 ‘납치범으로서의 컨셉’에 대하여 결단을 내렸다.
역시 바꾸는 게 맞다.
솔직히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내 외모에 맞게 ‘악당 3’이 할 것처럼 행동하면 되지 않을까? 하고 쉽게 행동했으니. 왕녀의 방심을 유도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고.
하지만 지금에 와 곰곰이 따져보니,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이었다.
왕녀의 성질머리를 동네 건달이 교육시킨다? 일단 이것부터가 심각한 설정 오류에 가까웠다. 내가 왕녀라도 내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힘으로 위협한다한들, 개무시를 때릴 것 같다고나 할까.
게다가 데려올 당시, 솔직히 약간 어벙하게 반응했다는 걸 나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다. 너무 순순히 따라오니 나도 당황해 어리버리를 탄 게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납치범 주제에 휘둘릴 가능성이 있었다.
고로, 컨셉의 전면 체인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어떻게 잡는 게 좋으려나.’
굳이 악랄하고 무자비하게 갈 것까진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왕녀에게 요구할 거라야,
1. 꼼짝 말고 여기 가만히 있어라.
2. 혹시 결혼 생각 없냐.
고작 이거 둘뿐이지 않는가. 괜히 오버했다가 역효과만 날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사실 결혼에 대한 것 역시도 내가 앞서 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의 전개를 알고 있기에 연계 의뢰가 그런 식으로 되지 않을까 추측한 것뿐이지, 실제로 현재 내 임무는 왕녀를 모험가 협회로 데려 가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여,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상황에 맞춰가며 왕녀를 구슬릴 수 있는 컨셉이 뭐가 있을까.
‘일단 무게는 좀 잡아야 되고, 약간 비밀스럽기도 해야 될 것 같고······.’
잠시간의 고민 끝에, 나는 대충 러프하게나마 컨셉을 설정할 수 있었다.
1. 한없이 냉철하고,
2. 수수께끼를 잔뜩 품고 있으며,
3. 꽤나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겸비된,
4. 스케일 큰 악당 느낌으로 간다.
“오케이.”
마침 새로 얻은 1등칸 객실이 이 같은 컨셉을 뒷받침하기에 적절했다.
물론 이는 내가 순전히 모험가 플렉스 차원에서 받아낸 것이었지만, 새로 짠 컨셉에 꽤나 잘 어울렸던 것이다. 적어도 돈이 많다는 느낌 정돈 충분히 낼 수 있을 테니.
단 하나, 걸리는 지점이 있긴 했다.
바로 내 외모.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얼굴이 고급스러움과는 약간 좀 거리가 있다는 걸. 또 스케일이 큰 악당 치고는 너무 좀······ 우악스럽다고나 할까?
‘······에이, 몰라.’
왕녀가 부디 외모에 대한 선입견이 적은 사람이길 바랄 수밖에.
그렇게 정리한 뒤, 나는 두어 차례 심호흡을 했다.
이어,
“······가자.”
나는 문을 열었다.
끼이익-.
들어가자마자, 침대 위에 가만 앉아 있는 왕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진즉에 깨어나 있었던 모양인데, 생각 외로 얌전한 모습이었다. 딱히 금제 같은 건 해두지도 않았는데.
그즈음,
“오셨는지요.”
나를 본 치누아비가 점잖게 물었다.
좋아.
새로 정한 컨셉에 아주 알맞은 부하 느낌이었다.
나는 고개를 까닥거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왔어?”
“······.”
얘는 좀 다른 방에 넣어두거나 해야 될 것 같았다.
나는 치누아비더러 코코아를 데리고 옆방으로 이동해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싫어. 여기 있을 거야.”
코코아가 떼를 썼다.
“······.”
대충 옷깃을 잡고 안쪽으로 직접 던져놓고 싶었으나, 애써 참았다. 새로 잡은 컨셉을 3초 만에 폭파시킬 순 없으니.
하여 치누아비에게 눈치를 주자,
“······코코아 양, 잠시 안으로 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일단 안으로 좀······.”
다행히 치누아비가 대충 어떻게 알아듣곤 억지로 코코아를 데려갔다.
‘휴······.’
나는 곧장 왕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헛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때마침 나를 의식한 그녀의 두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좋아.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깐 채, 천천히 물었다.
“일어났나?”
“······당신은 누구지?”
“그건 알 것 없다.”
거기까지 한 뒤, 나는 조심스레 왕녀의 눈치를 살폈다.
과연 어떤 반응일까.
그녀에게선 이렇다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웬 개폼을 잡느냐는 말이 나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역시나 납치 당시의 기억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인지, 내 급변한 컨셉을 눈치 채지 못한 듯 보였다.
나는 편하게 말을 시작했다.
“내 요구사항은 하나다. 얌전히 두골 제국으로 갈 것.”
“······싫다면?”
“간단하지. 여기서 죽는 수밖에.”
“······.”
잠시 후,
“그럼······ 당신은 나를 죽이려 습격한 이들과는 다른 쪽인 건가?”
왕녀가 조금은 낮아진 음성으로 물었다.
“어떤 녀석들에게 공격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쪽 요구는 수상쩍은데······ 1황자 측이 아니라면 굳이 나를 제국으로 넘길 이유가······.”
“이번 혼담에 관심을 가지는 게 비단 두골 제국과 마이닌 왕국만은 아니지. 시야를 좀 넓게 두는 게 어떨까.”
내 말에 왕녀가 침묵했다.
나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는 무척이나 다행스런 반응이었다. 사실 이 이상 준비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알아서 생각하고 저 알아서 결론 내리기를 바랄 뿐.
곧이어,
“설마······ 아자르 연방? 두골 제국이 나를 빌미삼아 우리 왕국을 삼키려는 걸 방지하려는 계획인가?”
왕녀가 스스로 답을 냈다.
아자르?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좋은 이유인 듯했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은 없다.”
그러고 의미심장하게 웃어주자, 왕녀는 더없이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어 재차 고개를 숙인 뒤, 저만의 생각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그러고 있던 왕녀가 갑작스레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다.
“하······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매한가지인데, 당신의 정체가 뭐 그리 중요할까.”
음?
약간은 의외의 발언이었다.
“왜지? 혼담이 성사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여기까지 암살자들을 보내는 놈들인데, 설마하니 제 앞마당에서 나를 노리지 않겠어? 설사 내가 혼담을 받아들인다 해도, 실제 예식에 들어가기 전까진 끊임없이 암살시도가 이어질 걸?”
그도 그렇군.
나는 왕녀의 말에 동의했다. 왕녀를 죽인 후 그녀가 도망쳤다는 소문만 퍼뜨리면, 결국 결과는 같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쟁.
그때였다.
‘어? 잠깐.’
불현듯 머릿속에 어떠한 예감 하나가 떠올랐다.
이 여자는 후에 두골 제국의 황제가 된다. 그것이 예정된 전개다.
‘이거 설마······ 내 의뢰가 거기까지 연결되어 있는 건가? 이 여자를 무사히 결혼시키는 것까지? 그리고 황제가 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는 것까지?’
갑작스레 황당함이 밀려들었다.
‘아니, A급 의뢰라며. 사람 찾기에서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사건의 볼륨이 커지면 자연스레 이곳에서 머물러야 하는 기간도 길어진다.
그리고 이건 꼭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내겐 정해진 기한이 있었으니까.
“흠······.”
다만, 이는 눈앞의 왕녀에게는 더없이 행운인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글쎄······ 죽지 않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새로운 기회가 펼쳐질지도.”
그러나 왕녀에겐 내 말이 곧이곧대로 전달되진 않은 듯했다.
“물론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어. 그들에게도 또······.”
순간, 왕녀가 대뜸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곤,
“당신에게도 말이야.”
느닷없이 킹사이즈의 침대를 번쩍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황당하리만치 갑작스런 행동이었다.
“지금 무슨······?”
“여기서 난동을 부리면 금방 사람이 오겠지? 그럼 곤란해지는 거 아닌가?”
나는 급히 그녀를 제압하려다가 문득, 그녀의 잠잠한 눈빛을 보곤 생각을 바꿨다.
“그거 내려놔. 괜히 소란피우지 말고.”
“어렵지 않지. 대신 조건이 있어.”
역시나.
갑작스런 행동이긴 했으나, 뭔가 광분해 날뛰는 느낌은 아니었던 것이다.
“뭐지?”
“한 번 더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것만 확인되면 말썽 피우지 않고 네 말을 따를게.”
“확인하고 싶은 거?”
“네 힘. 내가 나보다 힘 센 사람 말은 또 잘 듣거든. 뭐, 거의 만나본 적 없긴 하지만.”
그러곤 슬쩍 한 팔을 내미는 것이었다.
“팔씨름 한 번 하지?”
“······.”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간단하기도 하고.
‘설마하니 가까이서 습격하려는 속셈은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일단 들고 있는 것부터 내려놓도록.”
그러자 왕녀가 그제까지 한 팔로 들어 지탱하고 있던 침대를 사뿐히 내려놨다.
뭔가를 보여주고자 한 퍼포먼스 같았으나 코웃음도 나지 않았다.
이윽고,
“봐주는 것 없이 제대로 하라고.”
나와 왕녀는 한 테이블을 놓고 서로 마주앉았다.
“그건 무리다. 네 힘은 내게 미치지 못하니. 세 손가락으로 상대해주지. 너는 두 손을 사용해도 좋다.”
약간 자극을 좀 줘볼 겸, 도발하듯 말했다.
“좋아, 어디 한 번 해보자고.”
“······.”
실수였다. 까불지 말고 정정당당히 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곧이어, 우리는 서로 맞붙었다.
“흡-!”
나는 처음부터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힘에 당황했다.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손가락이 꺾여나갈 뻔 했다.
당황스러웠다. 어째 힘이 더 세진 듯했다. 아니면 그전에 미처 다 드러내지 않았다거나.
“왜 그래? 주춤거리는데? 이거 맞아?”
“······넘겨도 되나 싶어서 참은 것뿐이다. 아직 두 손을 쓰지 않길래.”
곧 죽어도 컨셉은 포기할 수 없었다.
“좋아, 쓴다 그럼?”
그러곤 왕녀가 곧바로 한 쪽 손을 더해, 내 세 손가락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쓰-읍!
밀려드는 힘에 놀란 나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 했다. 이거 자칫 잘못하다간 지게 생겼으니.
생각할수록 놀라운 여자였다. 아직 챕터에 등장조차 하지 않은 여자가 이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다니.
“후······.”
가만 버티려니 버틸 순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론 부족했다. 이겨야 했으니까.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젖 먹던 힘까지 몽땅 끌어냈다.
“으라차!”
이즈음엔 컨셉이고 뭐고 없었다.
“히이얍!”
“으, 으윽······.”
“흐어어어!”
“이익!”
그리고 마침내,
“크으으으읍!”
나는 왕녀의 두 손을, 아니 그 몸 전체를 통째로 넘길 수 있었다.
콰당!
“······.”
“······.”
그렇게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나는 황급히 컨셉을 복구할 방안에 대해 강구했다.
왕녀는 고꾸라진 채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쪽팔리다는 생각이 온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다시금 컨셉을 잡을 수 있는 타이밍은 지금이 유일했다.
“흠흠, 부끄러워하지 말도록. 이는 당연한 결과니······.”
그때였다.
부르르-.
왕녀의 몸이 갑작스레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응?”
처음엔 팔이, 다음엔 다리가, 그 다음엔 전신이 떨렸다.
게다가 점차 심해진다 싶더니, 이어 경련수준으로까지 번졌다.
부르르-.
부르르-.
“······무슨?”
당혹스러웠다. 딱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이거 혹시 쪽팔려서 정신 줄을 놓은 건가?
그러다 갑자기,
“아악! 뭔 짓이야 이 늙은이가! 저리 안 꺼져!?”
혼잣말을 시작했다.
······?
놀라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흐흐, 잠시만 좀 쓰잔 말이다.”
왕녀의 입에서 대뜸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뭔데?’
“언제는 내가 죽든 말든 관심도 없다면서!”
“네 까짓 계집이 죽는 거야 내게 흥미로운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저 주걱턱 녀석은 꽤나 재밌어 보이는구나.”
그러곤 왕녀가 나를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어이, 애송아. 나하고도 한 번 겨뤄보겠느냐?”
그녀의 두 눈이 붉게 번들거리고 있었다.